칼 가는 남자 (외 1편)
김 선 호
칼자루를 손에 들고 있다
무쇠 날을 만지자
햇살이 짧게 번쩍인다
반사되는 빛을 모아
마음을 정리하고
숫돌을 간다
두 손으로 양면을 비비기도하고
물을 뿌리고 문지르며
무뎌진 칼날을 가늠하기도 한다
서 있는 자리는
쇠붙이처럼
계절이 변해도 바뀌질 않는다
가끔 빈 하늘을 향해 칼을 휘두른 후
종이를 슬쩍 베며
이만하면 됐다고 흡족해 하면
햇빛도 그 앞에서
휘청거리며 공손히 눕는다
세상에 있는 칼 조각들은 모두
빛을 내고야 말겠다고
길 한 귀퉁이에 앉아
종일 칼을 가는 남자
밤이면 징기스칸처럼 칼날을 휘두르며
세상을 호령하는 꿈을 꾼다
점자책을 읽다
그믐달처럼 살아간다
현란한 세상에는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
눈동자를 닫은 후
손끝에 잡히는 것들만 읽으면서 산다
길을 찾느라 더듬거리면
뒷면에 비치는 사물들이
뿌옇게 길을 열어준다
손으로 글을 읽을 때
끝점에서 피어나는 근시안적인 촉감이
희미한 빛 번짐 사이를 가늘게 이어준다
감겨진 눈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늘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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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 2001년 [시문학] 등단. 200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2008년 푸른시학상 수상. 2010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활성화 기금 수혜.
2012년 제3회 김춘수 문학상 수상.
시집: 『몸 속에 시계를 달다』 『햇살 마름질』
ㅡ 「시인정신」 2015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