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신라 국학과 인재양성』 국학설립배경 中 화랑도에 대한 설명파트를 추려서 정리한 글이다.
「신라에서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본격적으로 요구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접어들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추어가면서였다. 이때부터 행정업무를 여러 분야로 나누어서 전담하는 관부(官府)가 두어지고 거기에 여러 관직이 배치되면서 감당할 만한 능력을 보여한 새로운 인재가 절실해졌다. 정치는 물론 일반 행정, 군사, 재정이 분리되어 이제는 비교적 세분화된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껏 국가적 차원에서는 인재를 기를만한 만반의 준비가 채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관료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선발되었다.
사실 4세기 전반 사로국으로부터 신라로 전환하면서부터 영토나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능력을 구비한 인재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새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 선발의 방법으로 널리 통용된 것이 이른바 천거제(薦擧制)였다. 물론 전처제와 비슷하지만 강제성의 여하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징소(徵召)와 같은 방식도 특수하게 존재하였다.......」
◎천거제:천거의 사례로는 삼국사기 실성이사금 14년 기사 및 같은책 삼국사기 눌지마립간 19년 기록을 참고하면 된다.
◎징소:군주가 재야인사를 초청하는 일.
실제로 위와 같은 부분으로 천거 및 징소로 구한 인물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제상’이다.
「...........소요되는 인재를 국가가 직접 나서서 양성하지 않고 이미 육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선발하는 천거제는 오래도록 지속되던 관행이었다. 그것은 요구되는 기능이 비교적 단순하고, 소요되는 수치도 별로 많지 않으며, 특별히 새로운 재능이 아닐 경우에는 그런대로 통용될 만한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국가의 규모가 급속히 커져 수요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사회구조적 상황이 크게 달라지면서 그에 어울리게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의 기능이 한층 세분화되고, 인적 수요는 엄청난 수준으로 늘어나며, 게다가 새로운 재능까지 요구될 때에는 기존의 방법으로는 그를 감당해내기가 힘들어졌을터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필요한 인재를 직접 길러내고 선발하는 역할을 모두 함께 감당해야 하였다. 그런 사정 아래 나온 것이 화랑도였다. 」
정리하자면 화랑도는 세분화된 재능을 요구할 때 기존의 천거제로 얻은 인재로는 그 능력이 감당이 안되기에 국가차원에서 양성된 인재라는 뜻.
「화랑도는 진흥왕대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정식으로 창안되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 낙동강 유역권의 가야 영역 전체까지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까지 북상하였으므로 영토와 주민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런 변동 양상을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능력을 제대로 갖춘 관료가 갑자기 많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진흥왕은 한편으로는 불교식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표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식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으므로 그에 걸맞는 특별한 재능과 인식을 보유한 관료가 필요하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화랑도가 나온 것이다. 」
진흥왕 대에 생겨난 화랑도. 영토가 늘어남에 따라 늘어난 영토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관료가 보다 많이 필요하고 유지하기 위해 유교식 관료가 필요했고 그래서 나온게 화랑도였다.
「그런데 화랑도는 평지돌출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잠깐이기는 하나 원화제라는 중간 과정을 거쳤다. 원화제의 내용이나 목적, 실패의 요인 등에 대한 실상은 어떻든 그와 같이 중간 과정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국가가 인재를 직접 양성하는 제도화의 첫 문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화랑도가 시행되었다고 해서 곧장 인재를 직접양성하는 체제로 완전히 전환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국가는 부분적으로만 간여할 뿐 화랑도 전반의 운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매우 제한적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화랑제는 어디까지나 국가 주도로 인재를 양성·선발하는 제도가 제대로 자리잡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였을 따름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화랑도는 아직 성년에 이르기 직전의 일정 연령에 속하는 미성난자로 구성된 조직이다. 하나의 화랑도 조직은 크게 1인의 화랑과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생략) 」
화랑제도도는 중간에 원화제라는 과정을 겪은 후 만들어진 체제. 단 이 체제는 인재양성,선발하는 체제가 자리접기 이전의 과도기적 단계.
화랑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해당 PPT는 다른 책을 인용했지만 더 세부적이게 인용하기 위해 주보돈 교수의 내용을 다시 인용하면 이렇다.
「,,,승려는 미성년인 화랑과 낭도를 대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춘 인재로 길러지도록 지도하고 교육하는 교사敎師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승려는 장기간에 걸치는 화랑과 낭도 대상의 교육과정을 통하여 그들이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함양된 능력 여하를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성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조직을 떠나게 될 때 국가에다가 관료로 천거하는 책임과 의무를 졌다. 국가에서는 승려가 추천한 인사 가운데 적절한 인재를 가려서 관료나 혹은 군관軍官으로 채용하였다. 여하튼 화랑도 교육에 승려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국가는 승려를 각 와랑도 조직에다가 파견하였을 뿐 아니라 약간의 재정적 지원을 비롯한 행정적 후원을 해주면서 관리하였다. 그렇다고 운영에 지나치게 깊이 개입하고 간여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 조직이 동시에 여럿 존재하였던 만큼 이들 각각이 나름의 특성을 갖도록 가능한 한 자율에 맡겨두려는 입장이었다. 운영을 전반적으로 조율하고 관리할 목적에서 국가에서는 화주라는 직책을 두었지만 화랑도를 직접 취급하는 관부를 따로 설치한 흔적은 보이지가 않는다. 」
즉 승려는 화랑들의 교사+국가 채용담당 공무원인 셈이다.
다만 이 형태를 보면 인재양성이면서 천거제의 느낌이 섞여있다.
양성된 인재를 승려의 안목을 통해서 채용되는 형식이 더욱 그리 보인다. 실제 화랑이라고 다 채용되거나 관료나 군관이 되는게 아니기도 하기에 전쟁이 일어날 시 활약하는 용도 이외에 국가운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별개의 제도가 필요하였고
그것이 김춘추세력이 당의 제도에서 주목한 국학제도였다는 것이다.
물론 당에서 국학을 수용한 내용은 너무 길어서 다음 글에서 이어 쓸것이다. 물론 다음 내용을 쓰고 싶을때 그리 할 예정이다.
해당 책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