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올린 '자유좌담회'는 '요약'이 아니라 원문 그대로 올린거구요,
앞으로도 계속 올릴 예정입니다.
도움이 된다니 정말 기쁩니다.
--------------------- [원본 메세지] ---------------------
이번에 출발좌담회때 닛켄에 대해 발표를 해야되서 자료를 찾다보니 여기에 자유좌담회 내용이 시리즈로 실려 있더라구여...
그런데 이 내용이 '자유좌담회' 라는 책에서 요약을 하신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계속 시리즈로 글을 올리실 계획인지 궁금해서여...
닛켄에 자료가 필요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아직 여자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 준비를 하시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구여.... '자유좌담회' 라는 책이 좀 어렵다고 하셔서....
부탁드릴께여...^^
센자키 ; 지난 회는 제1차 종문사건 때 야마자키가 얼마나 사악하고 음험한 마음으로 종문에 깊이 파고 들어가 있었는가. 그 한가지로 1979년 6월 닛타쓰 법주를 보트놀이에 끌어낸 사건을 소개했습니다.
이즈미 ; 그렇지요. 게다가 보트사건뿐만이 아닙니다. 야마자키는 1978년 5월 닛타쓰 법주를 사사카와 료이치 씨(고인. 일본 선박진흥협회회장)와의 관계로 잘 알고 있는 동경의 세이로카 병원에 1주일 간이나 입원시켰습니다.
쓰지 ; 그 때, 너무나 당돌한 이야기로 중들도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본산에 가까운 병원으로 하면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다.”고.
아키야 ; 그렇군요. 야마자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즈미 ; 그랬어요. 그 무렵부터 야마자키는 자주 “옥은 내 손아귀에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옥’이란 무엇인가? 라고 당시의 야마자키의 부하가 묻자 야마자키는 ‘하하’ 웃으며 그 비열한 얼굴을 더욱 추하게 찌푸리며 ‘옥이란 법주다. 예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히쭉히쭉 웃으며 떠들어 댔습니다.
아키야 ; 당시 부하의 이야기에 따르면 야마자키는 자주 이렇게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에 어떻게 하여 ‘옥’을 손에 넣었는가. 우선 법주를 내가 알고 있는 병원에 입원시켜 다른 정보로부터 일체 차단했다. 그 동안은 나와 비서인 마쓰히다 다이켄밖에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해놓고 여러 가지를 공작해 놓았다.”고.
쓰지 ; 그래요. 나도 들었어요. 여하튼 야마자키라는 놈은 닛타쓰 법주와의 관계를 늘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닛타쓰 법주는 전부 내가 말하는 대로 한다.’는 태도였습니다.
이즈미 ; 그랬었지요. 완전히 축생근성입니다!
아키야 ; 그러고 보니 야마자키는 그 보트 사건 이후에도 ‘법주와 함께 보트 놀이를 즐겼다.’고 여기저기에 말하고 다녔습니다.
쓰지 ; 도대체 법주란 어떤 존재인가. 법주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야마자키는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즈미 ; 그러나 야마자키는 보트 위에서 법주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만은 비밀로 한 것 같습니다.
쓰지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것을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것은 ‘옥’을 수중에 넣은 도깨비, 마물 그 자체입니다.
아키야 ; 하지만 아무리 감추어도 도중에 법주가 몸을 해쳤다는 것은 다방면의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야마자키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작전은 누구도 모른다고 자신만만하게 계속하여 어리석은 소동을 피웠습니다. 언제나 똑똑한 척 하지만 그 놈은 정말로 바보입니다. 거물인양 행세하는 바보 얼간이가 야마자키라는 놈입니다.
다니가와 ; 그렇다면 그 어리석은 놈 야마자키가 떠들어 온 거짓 중의 하나가 ‘학회는 선거 때마다 대량으로 주민등록을 이동하고 있다.’는 유언비어입니다.
사토 ; 거짓말만 하는 인간이라면 이쪽은 정반대로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야마자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하튼 하나에서 열까지 무엇인가 거짓말을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일으킨 공갈 사건의 재판에서 재판장으로부터 “공판에서 수많은 허구의 변명을 늘어놓고 허위의 증거를 제출하는 등 전혀 반성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 1985년 6월 29일 동경지방법원 판결문에서”라고 엄하게 질책받을 정도입니다.
아키야 ; 참으로 어이없군요. 대부분 직장도 있고 가정생활도 있는 일반시민이 선거 때마다 주소를 자꾸 이동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웃음). 이사 한 번 하려 해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큰 웃음).
사토 ;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근래 4년간을 보아도 1996년에 중의원 선거, 1997년에 도쿄도지사 선거, 작년에는 참의원 선거, 올해는 전국지방자치단체 선거로 선거는 매년 있습니다. 이 불경기에 선거 때마다 이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큰 웃음)
아키야 ; 아무리 보아도 조금 머리가 어떻게 되었지요. 책략에 또 책략, 거짓에 또 거짓을 늘어놓는다. 인격이 이상하고 두뇌도 이상하여 거짓말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토 ;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았는가. 얼마나 학회가 속았는가. 만약 대량으로 주민등록 이동이 있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언제, 어디서, 누가 주민등록을 옮겼는가.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근거 없는 ‘날조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니가와 ; 그런 수법의 유언비어가 얼마나 사실무근인가. 후세를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83년 12월의 중의원 선거 투표일 직전에 자민당의 시마무라 요시노부 의원이 선거활동 중 ‘주민등록’ 운운하며 학회를 중상모략했습니다. 곧바로 공명당이 엄중 항의를 하자 시마무라 의원은 ‘무책임한 언동이었다.’고 사과했습니다.
사토 ; 게다가 이 날조에 대해 이전에 신문사도 철저히 취재하여 최종적으로 ‘날조된 유언비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쓰지 ; 그랬었지요. 명확한 결론이었지요.
사토 ; 1993년 7월 20일 자의 아사히신문도 도쿠시마 판에서 ‘도쿠시마 현내의 창가학회의 주민등록이 도쿄도의원선거 때문에 대량으로 이동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학회가 즉시 엄중 항의했습니다. 그래서 아사히신문은 면밀한 증거 취재를 한 결과 새빨간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7월 21일 자에서 ‘소문과 같은 사실은 없었습니다. 충분한 근거가 있는 취재를 하지 않고 게재하여 관계자 및 독자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고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아키야 ;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일본 제일의 신문이 조사한 것이므로 이 이상의 증거는 없지 않는가.
쓰지 ; 아니, 이 건에 대해서는 아사히신문에 대한 고소도 행각했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의 사장을 참고인으로 국회에 불러 진실을 분명히 하려고 생각한 공명당 의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이 사죄를 했기에 그것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즈미 ; 그러나 당시 학회의 존재를 이해하고 호의적으로 보아 온 2, 3명의 기자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니가와 ; 이 낡은 수법도 원조는 야마자키였다고 합니다. 그 놈은 1993년 4월에 교도소를 나온 뒤에도 변함없이 정치인의 연구모임에서 지껄였다. “주민등록 이동은 지금도 하고 있다. 지방에서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쓰지 ; 그 때의 회합에 대해서는 이전에 나도 의원이었기에 그 연구모임의 이야기를 들은 자민당의 우인이 말해주었습니다. ‘도대체 야마자키라는 놈은 어떤 놈인가. 그 놈은 수 없이 공명당, 창가학회에 관해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머리가 좀 돈 녀석처럼 떠들었다.’고.
이즈미 ; 아 역시, 이것도 그 놈이(웃음). 나한테도 ‘야마자키란 놈은 학회원입니까. 그 놈은 머리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혹시 어디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의원이 말을 걸어 왔습니다.(웃음)
센자키 ; 본래 야마자키는 공갈범이었군요.
쓰지 ; 그렇습니다. 내가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말하자 우인은 “그렇겠지요. ‘창가학회의 일이라면 나한테 물어봐’라는 식이었으나 어쩐지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내가 “그 놈은 교도소를 막 나왔지요. 여하튼 거짓말쟁이로 바로 누구누구에게 여자가 있다는 등, 누구에게도 여자가 있다는 식으로 더러운 거짓말을 내뱉고 다닌다. 대게 거짓 패턴이 정해진 놈이다.”고 하자 “그렇겠지요. 그렇겠지요. 정말 교활한 놈이군요.”라고 납득하고 있었습니다.
이즈미 ; 여하튼 이렇게 많은 주간지를 비롯한 비난 중상의 불씨는 두말 할 것 없이 야마자키입니다. 그런 거짓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닙니다. 무언가 학회에 대한 비판이나 날조된 소동이 있는 곳의 배후에는 반드시 놈이 있습니다. 지금은 학회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이것도 야마자키일 것이다.’고 예리하게 보고 있습니다. 학회원 이외의 사람들까지도 ‘또 야마자키인가.’락 생각하는 모양입니다(웃음).
이즈미 ; 그대로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놈에 대해 몇 번 말했지만, 어쩐지 무서운 미생원(未生怨), 제바달ㄷ, 제육천의 마왕입니다. 즉 지옥의 심부름꾼입니다. 그 놈을 쫓아내어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뭐라고 하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 신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쓰지 ; 신용하는 것은, 서로 견제하고 사실은 신용하지 않으면서 신용하고 있는 닛켄 뿐입니다.(큰 웃음)
사토 ; 정말 그렇군요. 야마자키의 보트놀이에 말려든 자들도 그 후 모두 불행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즈미 ;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분명히 보트주인이었던 N도 최근 화제가 되었지요.
사토 ; 그렇습니다. N은 야마자키가 변호사였을 때 고객이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9월 N이 경영하는 영화제작회사가 48억 엔의 부채를 안고 도산, 12월에는 N 자신이 마약소지로 다음해 2월에는 총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쓰지 ; 아, 그렇군요.
다니가와 ; 또 있습니다. 야마자키에게 질리도록 당한 후지노미야의 토목업자도 비참합니다. 작년 8월 125억 엔이라는 거액의 부채를 안고 도산, 집까지 경매로 넘어갔습니다.
이즈미 ; 전에도 말했지만,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사코 ; 더욱이 야마자키가 거물인양 사무소를 두었던 도쿄 아카사카의 초일류 호텔 ‘호텔 뉴 저팬’도 그렇습니다. 1982년 3월에 대형 화재를 일으켜 그 후 도산한 것은 유명합니다.
쓰지 ; 참으로 야마자키와 관련되면 끝장이군요. 인간도 어떤 것도 모두 다 비참한 운명을 걷고 마는군요. ‘목숨을 빼앗는 자’ 그 자체의 인간입니다.
아키야 ; 참으로 그렇습니다. ‘특별히 사람이 불행해진 것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가사의한 인연이 있다.’ - 야마자키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즈미 ; 전적으로 역병신(疫病神), 가난뱅이 신입니다. 그 야마자키에 매료된 닛켄이 앞으로 어떤 말로를 걷게 될 것인가. 참으로 기대됩니다.
아키야 ; 아니 이미 야마자키의 독이 골수까지 돌고 있습니다. 이전에 야마자키는 ‘지구상에서 창가학회원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없애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권력, 주간지, 중들을 이용하여 온갖 모략을 사용하여 총공격을 해 왔습니다.
닛켄과 야마자키의 악의 결탁
이즈미 ; 그대로입니다. “학회를 잘라버려라.”고 온갖 책략, 말을 조작하여 종문을 선동하고 조종해 왔습니다. 그리고 종문과 결탁하여 ‘학회원을 소멸시켜 신도를 전부 본산에 붙여라.’하는 책략이었습니다.
쓰지 ; 그렇습니다. 지금 그 놈의 음모와 책략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즈미 ; 학회파괴를 위하여 종문과 야마자키가 결탁하여 대공격과 중상모략을 해 올 때 홀로 엄연하게 간파하고 우리들을 지켜주신 분이 이케다 선생님입니다.
아키야 ; 온갖 중상, 책략을 한 몸으로 받으며서 엄연하게 전학회원을 지켜 주었습니다. 아니, 세계에서 칭찬받는 불멸의 학회를, 영광의 학회를, 무한한 세계를 열어 가는 학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즈미 ; 야마자키와 닛켄의 책략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두 사람은 얼마나 분해할까. 두 사람 모두 질투에 미친 마물입니다. 불쌍한 인간입니다.
아키야 ; 학회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혼자 엄연하게 지휘를 잡아주시어 오늘의 학회를 대흥륭시켰습니다. 야마자키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생각했지만, 전부 대실패하고 공갈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분하고 분해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지옥에 떨어질 최후의 악랄한 수법으로 모략을 획책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토 ; 그 야마자키에 놀아난 끝에 닛켄의 학회파괴의 야망, 음모도 대실패. 해외 단도 만들기도 대실패. 그뿐만 아니라 자신도 저 ‘시애틀 사건’ 재판에서 완전히 궁지에 몰려있다. 말사도 이탈, 법화강도 속속 탈강.
다니가와 ; 야마자키가 사탕발림으로 아첨했던 닛타쓰 법주의 몸에 이상이 생겨 본산에서 가까운 후지노미야의 ‘후지야마 병원’에 긴급 입원한 것은 1979년 7월 19일이었습니다.
쓰지 ; 그리고 3일 후 22일 오전 5시 5분 서거하게 됩니다. 향년 77세였습니다. 분명히 닛타쓰 법주를 ‘옥’이라고 부르며 ‘옥은 내 수중에 있다.’고 득의 양양했다. 이것으로 종문은 내 뜻 대로라고. 참으로 증상만이며 건방진 놈이지요.
쓰지 ; 그렇습니다. 당시 야마자키는 닛타쓰 법주에게 빌붙어 본산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이용하여 최종 목적인 학회탈취의 무시무시한 모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1979년 5월 14일에는 약삭빠르게 ‘법화강대강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모두가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야마자키도 야마자키지만, 그 야마자키에 놀아난 본산도 본산이라고.
이즈미 ; 그 일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산에서 닛타쓰 법주가 참석하여 대강두의 임명이 있었습니다. 그 때 취임한 것은 호조 회장, 모리타 이사장, 아키야 회장, 쓰지 씨, 나 그리고 야마자키가 들어 있었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쓰지 ; ‘이건 뭐야. 이런 신심도 없고 근행도 하지 않고, 어서도 읽지 않는 땅딸보가 으스대는 얼굴을 하고서.’라고 모두 놀라 아연실색하였습니다.(웃음)
이즈미 ; 뒤에 이케다 선생님에게도 “야마자키가 대강두로 되는 것을 선생님은 닛타쓰 법주로부터 들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쓰지 ; 선생님은 “아니, 전혀 모릅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상한 시대에 들어섰군. 이상한 종문이 되어 벼렸군.”하고 말했습니다.
아키야 ; 야마자키는 우선 닛타쓰 법주의 사위 스가노 지운 주변을 구워삶아 법화강 대강두가 된 것 같습니다. 동시에 1979년 4월 학회수뇌에게 “나를 부회장으로 앉혀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종문과의 관계도 잘 풀리니까.”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검은 덫이었습니다. 종문에서는 대강두가 되었다. 이번에는 학회에서 부회장이 되어 양쪽을 장악하려고 획책한 것을 명료하게 알았습니다.
쓰지 ; 야마자키는 이케다 선생님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뇌들은 ‘근행도 하지 않는 인간을 부회장으로 할 수 있는가. 진지하게 신심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데 부회장이 될 수는 없다.’고 야마자키에 대해 엄했습니다.
아키야 ;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반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야마자키는 결국 공작이 잘 되지 않는 것을 알자 이번에는 자신의 하수인인 하라지마를 부회장에 앉히라고 학회 수뇌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경입니다.
이즈미 ; 분명히 그랬지요. 당시 술과 여자에 빠진 하라지마는 야마자키의 돈에 물들고 유흥에 물들어 완전히 야마자키의 로봇이 되어 있었으니까(웃음).
쓰지 ; 그렇지요. 1979년 당시 하라지마는 야마자키한테서 매달 20만 엔 정도의 용돈을 비열하게도 졸라대고 있었지요.
아키야 ;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외에도 야마자키는 몇 십만 엔 단위의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해 12월에는 1천만 엔의 돈이 건네졌습니다. 모든 것이 야마자키의 공갈사건 재판 기록에 명확히 남아있는 사실입니다.
이즈미 ; 그대로이지요. 야마자키와 종문이 결탁하는 한 편 당시의 호조 회자에게 접근하여 매일 밤 집에 찾아갔습니다. 종문도 학회도 자신의 손안에 넣어 마음대로 농락하려는 공작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쓰지 ;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호조 회장을 만나고 왔다.”든가, 이번에는 “보고가 있다.”든가 여러 구실을 붙여 이케다 선생님한테 자주 면담하러 다녔지요.
이즈미 ; 그 당시 야마자키는 “하라지마를 부회장으로 올려 주십시오.”라고 몇 번이나 집요하게 말해 왔다고 합니다.
아키야 ;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란해진 하라지마의 생활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고 야마자키와의 더러운 연결도 모두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도 “절대로 이것은 지금의 인사위원회에 회부해도 통과 되지 못한다. 인사는 나 한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고 명확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이즈미 ; 야마자키는 어떻게든 하라지마를 부회장에 앉혀 자신이 하라지마에게 지시하는 입장이 되어 종문과 학회를 제 마음대로 돈벌이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다. 일석이조라고. 지금 생각하면 명확히 줄거리를 알 수 있지요.
쓰지 ; 그렇습니다.
아키야 ;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 때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 그의 무시무시한 검은 속셈을 간파하지 못하고 포용했다면 지금의 학회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총명함, 현명함, 끈기로 지금의 학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즈미 ; 그렇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쓰지 ; 이케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학회를 지켜주셨는가. 도움을 주셨는가. 그렇기에 변변치 못한 우리 제자들은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사의 치료방법까지 말참견
아키야 ; 닛타쓰 법주가 돌아가신 1979년 7월경이라면 야마자키는 염원하던 대강두 자리도 손에 넣어 득의양양했었지요. 저 똘마니가!
사토 ; 그렇습니다. 실은 야마자키는 닛타쓰 법주가 서거하기 직전인 7월 1일부터 13일까지 긴자의 호스테스를 데리고 미국, 브라질로 호화판 여행을 다닌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물론 야마자키는 당시 아내와 자식이 있었는데도......야마자키의 밑도 끝도 없는 교활한 일면을 여기서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쓰지 ; 정말이지 비열한 놈. 우쭐대며 ‘내 인생의 봄’이라고 주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0일도 지나지 않아 야마자키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서양의 잠언에 “악(惡)은 작은 승리는 거두어도 결코 최후에 승리할 수는 없다.”는 말 그대로이군요(웃음).
이즈키 ; 실은 닛타쓰 법주의 죽음 직전에도 야마자키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센자키 ; 그렇다면?
이즈미 ;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후지야마 병원에 긴급 입원한 것은 19일, 다음날인 20일에 의사가 “현 상태로 보아 어쨌든 개복수술을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야마자키가 “주치의를 부를테니 다음날까지 기다려 달라.”고 의사들에게 잘라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히라노 요시카즈 씨가 닛타쓰 법주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후지야마 병원에 인사차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키야 ; 그렇지요. 나도 들었습니다. 친족도 아니며 의학지식 등 아무 것도 모르는 야마자키가! 비열한 장사로 회사를 망친 세상물정도 모르는 놈이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찰나에 어리석은 진단인가. “정말 무서운 속셈을 가진 놈이다.”고 당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질려 소곤거리고 있었다.
이즈미 ; 그렇군요.
쓰지 ; 그대로입니다. 잘 기억하고 있어요.
다니가와 ; 과연 야마자키는 닛타쓰 법주의 죽음에 떳떳치 못한 것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러기에 1980년 11월 20일 호의 <주간문춘>에서 “닛타쓰 법주긔 갑작스런 죽음에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의사의 행동.” 등 마치 후지야마 병원측의 치료에 과실이 있는 것처럼 씌어 있습니다.
사토 ; 이것이 그 놈의 수법입니다. 지금도 전부 똑같은 방정식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악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대로입니다. 전적으로 농락하는 이야기입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야마자키의 ‘비전문가 진단’이 아닌가.
다니가와 ; 그렇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아키야 ; 야마자키는 그런 놈입니다. 뭔가에 구실을 붙여 바로 ‘내가 내가’라고 자기과시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떠들고 다닌 주제에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전부 타인에게 전가합니다.
쓰지 ; 그렇게 말하니 서양의 격언에 “무덤을 파서 누군가를 집어 넣으려고 하던 인간이 그 무덤에 자신의 머리부터 들어간다.”는 명언이 있습니다(웃음). 그대로입니다.
다니가와 ; 후지야마 병원 일만 해도 사건의 성격으로는 고소(告訴)할 일입니다. 닛타쓰 법주는 최후까지 죽음의 귀신이 따라다녔던 것이다.
쓰지 ; 종문의 양식 있는 인간은 모두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즈미 ; 참으로 그대로이군요. 닛타쓰 법주의 장례가 끝난 다음 하야세 니치지(전 총감)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한 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전부 야마자키가 말한 대로 되고 말았다.”고.
쓰지 ; 잘 알고 있습니다. 호조 씨도 자주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좋았던 닛타쓰 법주도 저 야마자키의 감언이설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즈미 ; 그렇게 말하니 닛타쓰 법주가 돌아가시기 전날, 이케다 선생님의 부인이 후지야마 병원에 위문 갔었지요.
쓰지 ; 그렇습니다. 실은 그 전에 야마자키가 이케다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법주와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도 만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가와 ; 교활한 놈! 학회와 종문을 이간질하고 자신이 양쪽을 마음대로 농락한다. 이것이 당시의 야마자키의 책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놈은 거짓말을 하여 선생님과 법주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이즈미 ; 이케다 선생님도 병문안을 가고 싶어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못 가게 막은 것이 야마자키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법주 부인에게라도 성의를 다하고 싶다, 위문을 하고 싶다고 하여 사모님을 보내셨습니다.
아키야 ; 그렇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날 오후 6시 넘어 사모님은 법주 부인을 위문하셨습니다. 법주 부인은 “덕분에 좋아졌습니다.”고. 사모님은 “그것은 잘 되었군요. 부디 몸을 소중히.”라고 인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들은 이케다 선생님은 “참으로 다행이다. 모두 평유를 진지하게 기원합시다.”고 옆에 있던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센자키 ; 닛타쓰 법주가 돌아가셨을 때 이케다 선생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즈미 ; 가자가와문화회관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가나가와 회관에서 20일에 간부간담회, 21일에 잠비아 대사와 회견하셨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님에게 닛타쓰 법주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것은 7월 22일 오전 5시 5분이었습니다.
보고를 들은 선생님은 즉시 전광석화처럼 지시를 내렸습니다. “바로 차를 대기 시킬 것. 학회의 모든 수뇌에게 연락을 취할 것. 학회의 임원회의를 열어 사태에 대처할 것. 주먹밥을 많이 만들 것.” 등 4가지였습니다.
아키야 ; 선생님은 오전 7시 10분에 가나가와문화회관을 출발. 오전 8시 40분 후지노미야의 후소센터에 도착하여 그대로 본산으로 향했습니다. 8시 55분에 본산에 도착. 바로 닛타쓰 법주가 안치되어 있는 ‘내실’로 안내되어 분향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법주 부인이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쓰지 ; 선생님이 최대한의 예의를 다한 것을 잘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당시 선생님을 동행했던 히라노 부회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향 후 이케다 선생님은 오전 10시에 일단 후소 센타에 돌아오셨습니다. 이윽고 그 곳에 야마자키가 소리 없이 들어왔습니다. 나도 그 곳에 있었기에 그 모습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야마자키는 그대로 2, 3시간 선생님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변명에 가까운 달콤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단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즈미 ; 과연. 야마자키로서는 ‘옥’이라고 믿었던 닛타쓰 법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책략의 ‘다음 수’를 깔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렇다고 하여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놈의 초조함과 동요를 잘 알 수 있습니다(웃음). 어둠 속에 있던 시궁쥐가 갑자기 어둠에서 내쫓겨 크게 놀란 것입니다(큰 웃음).
아키야 ; “옥은 내가 쥐고 있다.”고 득의양양했던 야마자키도 이 닛타쓰 법주의 죽음을 경계로 그 검은 야망이 일거에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황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큰 웃음).
쓰지 ; 놈은 분하게도 학회를 탈취하려는 음모도 실패, 사업도 45억엔의 부채를 안고 도산.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공갈사건, 체포, 징역의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이즈미 ; 드디어 사기꾼에게 어울리는 말로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큰 웃음).
(18) 언론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
쓰지 ; 1979년 7월에 ‘최후의 희망’ 닛타쓰 법주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야마자키의 전락한 모습, 자멸한 모습은 아주 볼만했습니다(웃음).
이즈미 ; 그렇습니다. 보기 좋게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졌습니다(웃음). 누구 못지않은 사업가인양 손을 댄 사업도 실패, 1980년 4월에 45억 엔이라는 거액의 부채를 안고 도산. 자금 조달에 혈안이 된 나머지 악랄하기 짝이 없는 3억 엔 공갈 사건을 일으키고 1981년 1월에 체포당하게 됩니다.
아키야 ; 그 해의 4월에는 사기꾼이 ‘장사도구’로 해 온 변호사 자격마저도 박탈당하게 됩니다. 전부 자업자득입니다(웃음).
사토 ; 전적으로 악당에게 어울리는 말로이군요. 게다가 공갈사건으로 그 놈의 거짓말쟁이의 가면이 너덜너덜하게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쓰지 ; 그렇습니다. 야마자키의 나쁜 짓을 잘 알고 있는 야히로 변호사가 지금 진상을 폭로하고 있지만 저 공갈 사건의 재판에서도 야마자키의 독특한 거짓, 유언비어, 조작된 이야기가 나옵니다(웃음).
다니가와 ; 그랬었지요. 그 중에는 이런 거짓도 있습니다. ‘나는 학회를 공갈하지 않았다. 3억 엔은 학회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 증거로 3억 엔을 받기로 합의한 날에 호조회장과 도쿄의 호텔에서 만나 맥주로 건배까지 했을 정도다.’
이즈미 ; 그렇지요. 1980년 4월 22일 오후, 호조 회장이 야마자키와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이것은 야마자키에게 학회에 대한 악랄한 유언비어 공격을 중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마자키는 그것을 슬쩍 바꿔쳐 “호조 회장이 룸서비스로 맥주를 시켜 건배했다.”고 했습니다. “공갈은커녕 그만큼 온화한 분위기였다.”고.
아키야 ; 이것이 야마자키의 천재적인 악랄한 수법입니다. 야마자키라고 하는 놈은 반드시 이렇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 ‘맥주건배’ 운운의 이야기도 수사당국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호텔의 계산서를 조사했습니다. 그러자 야마자키가 호조 회장과 마신 것은 맥주가 아니고 커피였습니다(폭소).
센자키 ; 너무나도 유치한 잔꾀에 조사하는 쪽도 기가 막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엉터리 같은 짓을 계속 하는군요(웃음).
아키야 ;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야마자키의 공갈재판의 판결문(도쿄지방법원, 1985년 3월 26일)에는 ‘신용할 수 없다.’는 문구가 무려 40여 차례나 나옵니다. 야마자키는 몇 십만, 몇 백만의 사람 중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쓰지 ; 그렇습니다. 야히로 변호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도 엄한 판결문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도쿄지방법원의 요시마루 재판장이 약 4년 간 75회에 걸친 공판에서 야마자키의 언동을 빈틈없이 관찰한 결론입니다. 야마자키라는 자가 얼마나 비열하고 추악한가. 이 판결문은 야마자키의 범죄뿐만이 아닙니다. 삐뚤어지고 삐뚤어진 야마자키의 ‘인격’ 그 자체를 단죄하고 있다.”고.
이즈미 ; 과연 그렇군요. 잘 알만합니다. 분명히 밑도 끝도 없는 인격이상, 성격이상입니다. 게다가 야마자키의 계속되는 거짓의 악의 몸부림은 이 공갈 사건의 재판만이 아닙니다. 그 놈은 그밖에도 공갈사건과 병행하여 온갖 ‘거짓연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키야 ; 그렇습니다. 그 하나가 <월간 펜> 사건의 재판입니다. <월간 펜>이라는 잡지는 이미 망한 회사로 폭력단과 연결되어 있다고 소문이 있던 ‘평판이 좋지 않은’ 잡지였습니다. <월간 펜>은 1976년 3, 4월 호에서 이케다 선생님에 대한 사실무근의 날조된 기사를 연재하였습니다.
이즈미 ; 그것은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지였지요. ‘이번에 이런 기사가 나오는데.’라고 협박받은 재계인도 상당히 있었다고 합니다.
쓰지 ; 그랬었지요. 실은 그 기사가 나오기 전에 어느 남자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여러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학회에서 사용해 주기 바란다.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해 주지 않겠는가.”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학회는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얼마 후 그 자가 <월간 펜>의 기사 제공자라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아키야 ; 게다가 기사를 쓴 편집장 구마베 다이조라는 놈도 일찍이 검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모 종교단체의 최고간부라고도 하고 여하튼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었습니다.
쓰지 ; 그렇습니다. 구마베에 대해서는 <펜 재판>이 이루어진 1979년 도쿄 메구로 구의 전직 공명당구의원에게 돈으로 재판의 ‘위증’을 부탁한 일도 알고 있습니다. 1981년 7월 28일 자의 <마이니치신문>에서도 “피고가 위증 의뢰” “증언하면 사례금을 준다는 이야기도 있어 동 피고가 ‘촌지’라고 기록하여 15만 엔을 넣은 봉투를 넣고 갔다.” 등 이라고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구마베라는 자가 얼마나 재판에서 궁지에 몰렸는가. 또 얼마나 비열한 인간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웃음)
아키야 ; 결국은 <월간 펜>의 기사는 변변치 못한 잡지로 삼류 편집자가 날조하여 갈겨 쓴 유언비어 기사입니다. 당시 학회수뇌 사이에도 상대도 하지 않고 놔두면 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마베의 날조 기사는 너무나도 심한 것이었습니다.
이즈미 ; 그랬었지요. 재판의 판결문에도 “표현방법도 부당하고 모욕적, 조소적이며 문제 내용도 불확실한 거짓, 유언비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 도쿄고등법원 1979년 12월 12일”이라고 엄하게 지적한 악질적인 기사였습니다. 이런 언론 폭력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다. 또 장래에 화근을 남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장래를 생각할 때 역시 고소해야 한다.”는 변호사의 의견도 있어 본부로서도 굳이 형사 고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키야 ; 그대로입니다. 그 결과 구마베는 1976년 5월 21일 명예훼손혐의로 체포되어 25일 간 경찰에 구류되었습니다. 재판도 1심 2심 모두 구마베에게 유죄. 대법원에서는 일단 되돌려졌으나 그 후 1심(1983. 6. 10), 2심(1984. 7. 18) 모두 구마베에게 벌금 20만 엔의 유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즈미 ; 무뢰한 잡지가 사실무근의 유언비어로 과장했기 때문에 명예훼손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월간 펜> 사건의 재판 그 자체는 누가 보아도 대단히 단순 명쾌한 재판이었습니다. 복잡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쓰지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을 고의로 복잡하고 괴상하게 만들어 떠들썩하게 만들려고 획책한 것이 거짓말쟁이 야마자키입니다.
아키야 ; 대게 그 재판에서 구마베는 처음에는 날조기사의 ‘증인’이 되는 사람을 날조하는 것조차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야마자키가 공갈사건으로 체포 기소된 1981년 이후가 되자 갑자기 ‘증인’이 계속 나왔습니다(웃음).
이즈미 ; 그랬지요(웃음). 당연히 금방이라도 거짓이라고 밝혀질 증언으로 재판에서도 처음부터 간파되고 말았지만(큰 웃음).
쓰지 ; 그 중에도 우스운 것은 사이마타 현의 탈회자인 오자와모와 이이노 모의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이었지요(웃음).
이즈미 ; 이 두 사람은 탈회자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허세를 피우고 원질, 거짓말쟁이의 삼박자를 갖추어 미움받고 있던 자들입니다. 지역에서는 ‘원질 제조기’라고 몹시 싫어하는 자들입니다(웃음).
센자키 ; 참으로 반역자 탈회자들은 너무나 닮았군요(웃음). 모두 청정한 학회의 세계에 ‘없기를 바라는 사람’ 뿐입니다(웃음).
쓰지 ; ‘나가 주어서 홀가분한 무리들’의 어중이떠중이 속에서도 특히 악질이었던 것이 1954년 가을 무렵 이케다 선생님이 사이타마 현 오미야 시의 학회원 댁에서 운운......이라는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다니가와 ;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무엇이 ‘1954년 가을 무렵’인가. 그런 엉터리 ‘증언’이 어디 있는가. 가을이라면 9, 10, 11얼입니다. 도대체 그 어느 때쯤인가. 몇 월, 몇 일, 몇 시인가. 또 그곳에 누가 있었는가.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면 전부 한 곳에 모아서 제출해 보라!
이즈미 ;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자와 등이 ‘증언’한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이 점을 엄하게 추궁 받고 횡설수설하고 말았습니다(웃음).
쓰지 ; 그렇습니다. 놈들의 ‘증언’이란 전부 극히 하찮은 것뿐이었지만.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오자와 이이노는 1954년 가을 무렵에 SGI회장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 그 때에 바로 SGI회장이라고 알았는가하고 재판장이 추궁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이노는 “우리 집에는 SGI회장의 큰 사진을 걸어 두었기에 바로 알았다. 그 사진은 <대백련화>나 <세이쿄그래프>에서 자른 것이다.”고 답했습니다(웃음).
이즈미 ; 그렇습니다. 그런데 재판장한테서 “도다 회장 시대의 1954년에 어떻게 하여 당시 참모실장이었던 이케다 SGI회장의 사진을 걸어 두었는가.”라는 날카로운 추궁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큰 웃음)
아키야 ; 당시 <세이쿄그래프>는 아직 발간되지 않았습니다(웃음). 당시의 <대백련화>에도 ‘이케다 선생님의 큰 사진’이 실린 사실이 없습니다. 그런 오자와의 ‘허위증언’은 재판기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웃음).
다니가와 ; 참으로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저명한 법률가가 말했습니다. “몇 년, 멸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서, 누가. 이것은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철칙입니다. 이것이 없는 것은 모두 근거 없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고.
이즈미 ;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많은 주간지의 중상 비방도 이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어디서, 누가”가 전혀 없는 만들어낸 이이기가 됩니다.
쓰지 ;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조작된 이야기로 돈벌이를 해 왔습니다. 더욱이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음험한 글쟁이들의 책략인 것은 명확합니다.
이즈미 ; 조사해 보면 명확한 날짜가 없습니다.
아키야 ; 본래 이케다 선생님이 1954년 가을에 오미야에 갔던 사실이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고 재판에도 명확히 남아 있습니다. 즉 오자와 등의 ‘증언’에 대해서도 “오자와 및 이이노의 증언이 분명한 증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해를 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진실된 증명이 있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 - 1983. 6.10 도쿄지방법원 - 등 모든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즈미 ; 그렇다고 해도 이런 오자와 등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저 공갈 마왕 야마자키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지요. “탈회자의 갑작스런 등장도, 서로가 맞추어 짠 ‘증언’의 내용도 너무나도 말이 지나치다. 반드시 뒤에서 조종하는 ‘배후의 검은 손’이 있을 것이다.”고.
쓰지 ; 그렇습니다. 공갈범 야마자키인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간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오자와의 증언이 재판소에서 산산조각나자 이번에는 야마자키 본인이 구마베의 ‘증인’으로 슬슬 기어 나왔던 것입니다(웃음).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지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