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2강-2 (2012.06.29)
10-3 無事人(무사인)
10-5 돌아가 쉬는 곳
그것 보십시오. 석굴암 불상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불상이거든요.
그런데 그 불상 1000개 줘도 나하고 안 바꾸는 겁니다. 어림도 없어요.
무슨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어디서 꺼내느냐고 사실 이런 입장이잖아요.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세상에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자빠졌느냐고, 말이나 될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석굴암 불상 10000개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내하고 어찌 그것이 바꾸느니 자시느니 그런 가치를 왜 따지고 그러느냐고 돈 사람 아니냐고 사실,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런 상황입니다. 맞다고요. 그 생각이 맞는 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진짜 조사ㆍ진짜 부처는 뭐냐?
지금 내 말 소리 듣는 그 사실ㆍ그 자신ㆍ그 당체. 그 겁니다. 그것이 그렇게 위대한 겁니다. 廳法底人. 이것 줄그어야 됩니다. 넉자... 이 스님 법문은 보통 넉자면 끝납니다. 不受人惑ㆍ廳法底人ㆍ眞正見解ㆍ隨處作主ㆍ立處皆眞. 이런 것 전부 줄그어야 됩니다. 간단하잖아요. 카~~ 조사스님들 법문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설법은, 활로 비유를 하면, 활이 이렇게 둥글잖아요. 부처님의 말씀은 이렇게 둥근 활 몸체와 같고, 조사스님의 말씀은 활줄과 같다. 활줄은 직선입니다. 팽팽~~ 하잖아요. 팽팽 해야 그 활줄이 살아있는 겁니다.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은 활줄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은 활과 같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참 아주 근사한 비유지요?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그냥 넉자. 不受人惑ㆍ眞正見解ㆍ廳法底人.
법문 듣는 그 사람. 廳法底人. 혹은 청법저시 그래요. 법문 듣는 그 사람.
아~ 간단하잖아요. 우리는 그저 죽으나 사나 “부처님ㆍ부처님” 하는데, 이렇게 쉽습니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곁에 있습니다. 아니, 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지요.
學人信不及(학인신불급)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學人이라는 것은 우리 불자들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아요. 그것을 믿질 않고
便向外에 馳求(변향외치구)하며, 곧 밖을 향해서 내달리고 있다ㆍ밖을 향해서 내달리고 있다. 나 밖을, 나는 제쳐놓고, 진짜 나는 제쳐놓고 나 아닌 다른 밖을 향해서 부처를 찾으려고 내달리고 있다. 이 말입니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가 많지요.
마조스님 밑에 대주화상이 어느 날 왔어요. 와가지고 인사를 드리니까
“네가 어디서 여기까지 뭐 하러 왔느냐?” 옛날에 교통도 불편한데...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그래? 불법은 나한테 없다. 여기는 불법 없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신 말씀이
自家寶藏不顧(자가보장불고)하고, 자기 보물창고는 버려버리고
棄家散走作甚麽(기가산주작삼마)오? 집을 버리고, 보배창고를 버려버리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뭐하려고 하는 짓이냐? 자기 보물창고 버려버리고 뭐하는 짓이냐? 그러니까 “무엇이 저의 보물창고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내 보물창고입니까?
“그래 네가 나에게 묻는 그 당체ㆍ그 사실이 너의 보물창고다.” 그랬습니다.
그 말에 그만 확 깨달아버렸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 보물창고ㆍ부처자리ㆍ마음자리 찾으러 이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데, 결국 그것은 나는 이미 여기 오기 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었고, 오고 나서도 가지고 있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내 부처자리는 누가 뺏어가지도 못하고 훔쳐가지도 못하고 하는 바로 이 자리구나!’
그래 눈을 확 떠버린 겁니다. 사실 우리도요? 이 사실에 눈 뜨면 정말 자유자재 합니다. 아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정말 걸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밖을 향해서 열심히 구한다. 밖을 향해서 열심히 구하는 겁니다.
設求得者(설구득자)라도, 설사 밖을 향해서 구했다 손치더라도, 석굴암 불상 같은 것 한 10000개를 설사 구했다 하더라도, 또는 아주 뛰어난 이론으로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납득이 갔다 하더라도 뭐라고요?
皆是文字勝相(개시문자승상)이요, 모두가 文字상에 있는 수승한 모습.
설명으로, 하~ 그 법사가 부처님에 대해서 아주 근사하게 설명한 것. 또 부처님의 법신불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한 것. 설명한 그 설명문에 불과한 것이다.
文字勝相이다. 文字로써 아주 수승한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무슨 살아있는 부처냐? 절대 살아있는 부처가 아니다.
終不得他活祖意(종부득타활조의)니라.
마침내 저 살아 있는 조사가 아니다 말입니다.
살아 있는 조사가 아니다.
莫錯(막착)하라. 그르치지 말라. 잘못 알지 말라.
諸禪德(제선덕)아 此時不遇(차시불우)하면,
모든 공부 하는 여러분이 이때를 놓친다면, 이때를 만나지 못한다면
萬劫千生(만겁천생)을 輪廻三界(윤회삼계)하야
만겁천생동안 삼계에 윤회해서,
徇好境掇去(순호경철거)하야, 좋은 경계.
좋다고 하는 데는 다 따라다니면서 쫓아다녀요. 다 따라다녀서
驢牛肚裏生(여우두리생)이로다.
마치 나귀나 소의 뱃속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사람이 소가 되고 당나귀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그 자성자리ㆍ주인공 자리 잃어버리고 밖을 향해서 쫓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삼계에 윤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말입니다. 법화경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但念水草(단념수초)요, 다만 생각하는 것은 물과 풀이다.
餘無所知(여무소지)라.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우리가 자성자리 제대로 아는 것ㆍ내 참 주인공 하나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은 곧 부처요 조사인데, 그것을 도외시 하고 그 외의 다른 일 하는 것은, 그 외의 다른 일 하는 것은 마치 기껏해야 뭐 하는 겁니까?
衣食住를 위하는 일이 잖느냐? 의식주를 위하는 일.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것, 그것 밖에 더 있나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도 다 합니다. 저~ 집에 있는 고양이도 밥 안 줘도 지가 어디 가서 다 구해서 먹습니다. 새도 내가 모이를 한번 안 줘도 어디 가서 뭘 주워서 그렇게 생명을 유지하면서ㆍ새끼까지 낳아가면서ㆍ집도 아주 정교하게 잘 지어가면서 저렇게 사는지, 다른 동물들도 다 잘만 삽니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但念水草요, 餘無所知라. 다만 생각하느니 물과 풀만 생각한다. 먹을 것 입을 것만 생각한다. 餘無所知라. 나머지에 대해선 생각이 전혀 없다.
사람이 동물처럼, 동물처럼 사는 것. 동물처럼 산다면 결국은 그런 삶이지 않느냐? 동물하고 뭐가 다를 것이 있느냐? 그래서 바로 이 한 위대한, 바로 부처자리의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하는 그런 아주... 불경 같은 데서도 참 점잖은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사스님들이야 그냥 막 내키는 대로 막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불경 같은 데는 그렇게 함부로 표현을 잘 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道流야,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인댄, 山僧의 견해에 의지한다면,
山僧 견해에 입각해서 보자면
與釋迦不別(여석가불별)이라. 야~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에는(임제스님말씀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여러분 모두가 석가모니하고 하나도 안 다르다. 똑 같다. 여러분 그대로 석가모니다.
釋迦不別이라.
今日多般用處(금일다반용처)가 欠少什麽(흠소심마)오?
하~ 이것도 줄그어야 됩니다. 多般用處 欠少什麽. 여러 가지로 = 多般.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그것이,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欠少什麽오? =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 오늘 지금 이 순간 = 今日. 지금 이 순간에서 여러 가지로 작용하고 있는 거기에서 欠少什麽오? 무엇이 부족하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 欠少什麽, 넉자입니다. 欠少什麽만 해도 됩니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지금 이렇게 말하는 소리 듣고, 시간 내서 용케도 이 교실까지 찾아올 줄 알고, 또 말하는 소리 하나도 안 놓치고 척~ 척 듣고, 중요한 것은 필사하고요. 다 받아 적고 말입니다. 야~ 이것 신통 아닙니까? 정말 신통 아닙니까? 欠少什麽오? 여러분 부족한 것이 뭐 있습니까?
본래 가지고 있는 것. 이것 불교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불교하고 아무 관계없이 저~ 기 다른 종교 믿는 사람도 옳고,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도 옳고, 저~ 길거리에 그냥 살아가는 모든 사람도 똑같습니다.
이 교실에 있는 사람만 무슨 특권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다.
누구나 똑같습니다. 사실은 똑같아야 되고요. 뭐가 부족합니까? 추우면 추운 줄 알지요ㆍ더우면 더운 줄 알지요ㆍ그냥 함부로 남의 발 밟으면 화 낼 줄 알지요ㆍ내 것 뺏으려면 아주 눈을 부라릴 줄 알지요ㆍ상대가 욕하면 나도 욕할 줄 알지요ㆍ상대가 주먹질 하면 나도 주먹질 할 줄 알지요ㆍ하~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혹하고 사랑에 빠질 줄도 알지요. 야~~ 기가 막히잖아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합니까? 欠少什麽오?
완전무결한 존재 아닙니까? 무슨 부처가 있어서 이 보다 더 뛰어난 부처가 있단 말입니까? 석굴암부처님? 당신 앞의 돈 훔쳐가 보세요. 내 돈 훔쳐간다고 꿈쩍이라도 할 줄 압니까? 천만에요. 멍청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부처는ㆍ우리부처는 단돈 1000원만 누가 내 것 손해 내보세요. 그냥 눈을 부라리면서 내 것 왜 뺏어가냐고 하면서 주먹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야~~ 신기한 부처 아닙니까? 아~~ 근사합니다. 여기 바로 있네요. 신통이라고...
六道神光(육도신광)이 未曾休歇(미증휴헐)이니,
六道神光 未曾休歇. 전부 넉자니까 얼마나 간단합니까? 법문도 이렇게 간단해요. 제대로 깨달은 사람ㆍ제대로 꿰뚫어 보는 사람ㆍ진리를 아는 사람은 말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서론이 어떻고, 본론이 어떻고, 결론이 어떻고, 논리가 어쩌니, 온갖 주워서 갖다 대고 설명 이중삼중으로 하고, 그래놓고 자기도 무슨 소리 했는지도 모르고... 소위 학자들의 불교이론이라는 것이 전부 그렇잖아요. 학자들 불교논문 써 놓은 것 보십시오. 아무도 안 읽어요. 아무리 읽어봐야 하나 감동도 없어요. 欠少什麽오? 이 한 구절만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넉자 보다 더 뛰어난 논문이 이 세상에 한 편도 없습니다. 그 많고 많은 이론ㆍ그 많고 많은 글ㆍ수 천만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은 그 논문, 欠少什麽라고 하는 이 구절보다 더 나은 논문 없습니다. 끝내주잖아요. 欠少什麽오?
六道神光이 未曾休歇이라.
六道神光. 뭐지요? 여섯 가지 길.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 눈 귀 코 혀 입. 하~ 좋잖아요. 이 여섯 가지 길에서 신통방광을 막 하는 겁니다. 神光.
누가 차라고 하면서 주는데, 덥석 마시니까 어떻게나 뜨거운지 확 불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뜨거운 것을 말도 안 하고 갖다 준다고 욕을 막 퍼부어 버렸네요. 뭐라고요? 六道神光이 신통방광을 그 자리에서 막 하는 겁니다. 입이 그냥 신통방광을 하고, 욕이 나가고 그냥 얼굴을 부라리고 막하잖아요. 이것이 六道神光입니다. 未曾休歇입니다. 한 순간도 쉰 적이 없어요. 한 순간도 안 쉬어요. 자는 사람 꾹 찔러 보세요. 발딱하고 놀라가지고 막 고함을 치는 겁니다. 未曾間歇이라. 한 순간도 일찍이 쉰 적이 없다. 야~~ 좋잖아요. 우리 이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라고요
참, 이제라도 여러분 이 임제록 잘 만났습니다. 이것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 했잖아요. 우리들 자신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和盤托出(화반탁출). 확 드러내 가지고 우리에게 이렇게 이해시켜주는ㆍ깨우쳐주는 이것이 눈에 선하잖아요. 多般用處 欠少什麽오? 하~~ 좋은 말입니다. 구절구절이 그냥 다이아몬드가 꽉 꽉 박혀있습니다. 이 임제록은요? 우리가 비록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막 넘어가지만, 구절구절에 그냥 다이아몬드가 꽉 꽉 박혀있습니다.
多般用處 欠少什麽오? 多般用處가 뭡니까?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로 작용 하는 것을 말 하는 것이잖습니까? 여러 방면으로, 여러 가지로 작용 하는 것. 혀도 작용하고ㆍ입도 작용하고ㆍ눈도 코도 귀도 다 작용하고ㆍ손 발 다 작용하고요. 거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六道神光이 未曾間歇이라.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만약 능히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아 얻는다면, 뭐라고요?
祇是一生無事人(지시일생무사인)이니라.
다만 일생에 無事人이라. 일 없는 사람이라. 우리가 일이 많은 것은 내가 부족하다 생각하고 뭘 ‘보충해야 되겠다ㆍ구해야 되겠다ㆍ여기 뭘 채워 넣어야 되겠다.’ 이 생각만 하고 그냥 쫓아다니는 겁니다. 돈도 벌고ㆍ명예도 얻으려고 하고ㆍ주지도 하려고 하고ㆍ뭣도 하려고 하고ㆍ배우기도 해야 되고, 내 자신 기존의 것. 이미 가지고 있는 완전무결한 그 존재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자꾸 열심히 쫓아다니는 겁니다. 열심히 쫓아다닌다. 이것만 알면 뭐라고요?
若能如是見得하면, 이렇게만 본다면
祇是一生無事人이니라. 일생에 있어서 아무 일 없는 사람이다.
그 때는 열심히 일해도 일에 끄달리지 아니합니다.
他避不得處(타피부득처).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상사. 우리가 일어나서 세수하고ㆍ옷 입고ㆍ밥 먹고ㆍ화장하고ㆍ청소하고ㆍ출근하고ㆍ할 일도하고, 이것은 누구든지, 석가모니나 달마나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그런 일. 그런 일은 다 하는 겁니다. 하되 이미 우리는 더 이상 마음에 쫓기는 것이 없습니다. 바쁜 것도 없습니다. 無事人입니다.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無事人이 된 상태에서 돈을 벌어야하면 돈을 벌고, 장사를 해야 하면 장사하고, 직장에서 자기해야할 일 있으면 하고, 이런 상황이 돼가지고 하면 그 때는 정말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정말 자유롭고 편안해요.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眞正見解입니다. 우리가 “정견ㆍ정견” 불교에서 “정견을 세워야 한다.”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正見. 바른 소견을 세워야 된다. 바른 소견이 뭐겠습니까? 바로 나 자신의 이 소중한 존재. 여기서 임제스님이 말씀하신 나 자신의 이 소중한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 이것이 正見입니다. 바른 견해예요.
이미 서두에 요컨대 정견이 있어야 된다. 바른 眞正見解가 있어야 된다. 그랬잖아요. 眞正見解. 아~ 중요합니다. 그 밑의 제목도 밖에서 찾지 말라. 그랬습니다. 밖에서 찾지 말라. 그것은 넘어가고,
10-5 돌아가 쉬는 곳
大德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하라 是諸佛之本源이요
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
是儞四大色身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脾胃肝膽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虛空도 不解說法聽法하나니 是什麽가 解說法聽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한 是這箇가 解說法聽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便與祖佛不別이니라 ←2강-2
↓2강-3
但一切時中에 更莫間斷하야 觸目皆是언마는 祇爲情生智隔하고
想變體殊로다 所以輪廻三界하야 受種種苦하나니
若約山僧見處하면 無不甚深하며 無不解脫이니라
이 단락은 불교에서 49재를 지낼 때, 대개 49재 법문을 합니다.
49재 법문할 때, 법문깨나 할 줄 아는 사람은 으레, 이 단락 이 법문을 합니다. 49재 법문은 이것을 해야 됩니다. 이 법문을 해야 진짜 49재 법문이 되는 겁니다. 그래 우리 신도님들도 이 단락만 잘 공부하면 49재 법요. 법문하는 법사 청할 것 없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이제 100만원 하나는 벌었어요. 하하하하하하 잘 들으십시오.
大德(대덕)아, 아~ 여기는 또 더 근사한,
道流못지 않는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大德. 큰 大ㆍ큰 德. 덕이 많다. 여러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딴 사람보고 하는 소리 아닙니다.
大德이여, 儞且識取弄光影底人(이차식취농광영저인)하라.
光影底人. 이것도 밑줄 쫙~~입니다.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識取하라. 알아서 취하라. 확실하게 알아라. 識取. 알 識자에다 취할 取자를 이렇게 붙여놓은 것은 확실하게 알아라ㆍ똑바로 알아라. 그 말입니다.
그림자. 光影을 그냥 그림자로 보십시오.
그림자를 희롱 = 그림자를 조종하는 = 弄. 弄光影底人, ←다섯 字지요?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識取하라. 분명하게 알아라.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얼른 잘 모르지요. 그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은 다 있습니다.
그냥 다 짐작은 하지요? 지금쯤은 짐작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런데 얼른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거려니 하고는 있습니다. 저 부터도 여러분도 다 같이 그거려니... 그림자는 뭐며,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은 뭐다. 하는 것을 구차하게 설명 아니 해도 여러분이 충분히 짐작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래 믿고, 이것은 뭐라고요?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라. 그랬습니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모든 부처의 근본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은 사실 여러분입니다. 지금 그림자를 조종하니까 그 그림자가 글씨도 쓰고, 귀도 쫑긋하고 옆에도 보고 그러잖아요. 무슨 조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서 조종하니까 지금 글씨도 쓰고, 고개도 들기도 하고 말도 듣고 그러는 겁니다. 마치 인형놀이 있잖아요. 인형놀이 뒤에서 줄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사람이 조종하는데 따라서 인형이 움직이잖아요. 뒤에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래 그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
이도인 이라고 그래요. 뒤에 있는 사람. 지금도 우리는, -사실은 앞에 있는 사람은 전부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뭐가 있습니다. 무슨 주인공이 있어서 그림자를 조종하니까 글씨도 쓰고, 듣기도 하고 말도 하고 목마르면 물도 마시자고 하고... 이런 불교도 있습니다. 재미있지요?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根本이다ㆍ本源이다. 그렇게 되면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니라.
모든 곳이 여러분, 道流 = 도 닦는 여러 벗들이 돌아갈 집이다ㆍ돌아갈 집이다. 그래놓고,
是儞四大色身(시이사대색신)도, 여기서부터 49재 법문 때 써먹는 내용입니다. 그대의 四大色身. 지ㆍ수ㆍ화ㆍ풍으로 된 이 色身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설법할 줄도 모르고, 청법할 줄도 몰라. 이 육신덩어리, 고기 덩어리는 그 말입니다. 또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하며,
비장ㆍ위장ㆍ간장ㆍ담.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그것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듣거나 할 줄을 알지를 못해. 그것 그 능력 없습니다. 그럼 허공이 하느냐?
사실은 텅 빈 허공은 더 못하지요.
虛空(허공)도 不解說法聽法하나니,
허공도 설법하고 청법할 줄 알지를 못해. 그럼
是什麽(시심마)가?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청법 하는가?
解說法聽法고? 설법할 줄 알고 청법할 줄 아는가? 말소리 들을 줄 아는가? 뭐가 들어서 말소리 들을 줄 아는가?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한
是儞目前, 눈앞에 지금 歷歷해. 그런데 그것은 形段이 있는 것이 아니야ㆍ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야. 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입니다. 하나의 어떤 형체도 없어요. 아무런 형체도 없는 겁니다. 勿은 一箇形段. 그러면서 孤明해요. 그것만이 환히 밝아요. 사실은 그것뿐입니다.
孤明이라고 하는 말은요? 이 교실 안에 그것이 꽉 차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어서 꽉 차 있다고요? 아닙니다. 저는 저것으로 꽉 차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꽉 차 있습니다. 100명이 있으면 100명 그대로 꽉 차 있고, 200명이면 200명 그대로 꽉 차 있습니다. 개개인이 꽉 차 있습니다.
이 교실만 꽉 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공간 전체에 내가 꽉 차 있습니다ㆍ이 우주 공간 전체에 내가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이 孤明입니다.
외로울 孤ㆍ밝을 明. 이것만이 밝다ㆍ이것만이 꽉 차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형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양새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 무슨 사대육신하고도 관계없고, 脾胃肝膽하고도 관계없고, 虛空하고도 관계없는데, 그런데 눈앞에 歷歷孤明해요. 너무 분명하게 있습니다. 지금 우리 目前에 바로ㆍ바로 눈앞에... 지금 여기서 뭔가 잡힐 듯 잡힐 듯하지요? 사실은 너무나도 확실하니까요. 그 있다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도 확실하니까 잡힐 듯 잡힐 듯 하는 것입니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해요. 그러면서 잡히지 않아요. 形段이 없으니까요ㆍ모양도 없으니까요ㆍ물체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目前에 歷歷해요. 그리고 勿一箇形段입니다.
一箇形段도 없습니다. 모양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孤明해요. 환하게 밝아요. 孤明 = 이것만이 밝다 이 말입니다.
是這箇(시자개)가, 이것이
解說法聽法이니라. 설법할 줄도 알고 청법할 줄도 안다.
말을 할 줄 알고 말을 들을 줄도 안다. 이것이 말을 할 줄을 알고 말을 들을 줄을 알아요. 그러니까 죽어 자빠진 사대육신하고는 관계없다 이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대육신은 말하는 것 못 듣거든요.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다. 그러잖아요. 귀로 듣는다 = 귀를 통해서 듣는다.
눈으로 본다 = 눈을 통해서 본다 이 말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 아닙니다. 안경은 안경이 보는 것 아닙니다. 안경으로 보는 것 =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요.
어지간하면 오늘 거의 견성 다 하겠네요.
이렇게 아주 분명하게 밝혀내면, 우리가 거의 견성ㆍ손에 잡힐 듯하지요?
이왕이면 우리 다 합시다. 견성한다고 세금 내는 것 아니니까요.
이 물건이 = 是這箇가 비로소 설법하고 청법할 줄도 안다.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만약 이와 같이만 이해한다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곧 조사와 부처로 더불어 다르지 않다. 그대로 조사이고 부처지요. 다 자기 주인공으로 사는데... 우리는 주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못하고 살고, 부처와 조사는 주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하고요.
그래서 수처작주 하는 것이지요. 어디가든지 수처작주 한다.
|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삼보에 귀의합니다
벗님들이여 행복하소서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