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신라 국학과 인재양성』 국학 설치와 운영파트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사실 642년 백제의 신라 공격이 시작되고서부터 삼국은 전면전의 상태로 돌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 신라는....새로운 체제의 지향과 구질서 유지가 서로 맞물려 대립·갈등하던 중이었다. 비담의 난을 거쳐 드디어 명실상부한 실세로 부상한 김춘추 일파는 그런 사정을 너무도 잘 간파하고서 관료조직의 근간을 바꾸고자 하였다. 신라국가의 새로운 지향을 유교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구현으로 설정하고 그에 걸맞는 관료를 양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김춘추는 국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당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귀국 후 국학의 설치를 추진한다는 방향을 설정하고서도 당장 전면적 실행으로 옮기지를 않았다....당을 글어들여 백제와의 전면전을 치를 준비를 해가는 마당에 관료양성의 근간을 바꾸겠다는 것은 당장에 그들의 직접적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김춘추는 국학의 전면 수용 계획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일단 대사大舍와 사史 등의 말단 관료들만 배치하는 적당한 선에서 유보해 둘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구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갈등은 ‘비담의 난’이라는 내란으로 표출되긴 했다.
다만 당에서 유학관료채용 시스템을 바로 적용하지 못한 이유는 주변국과 대치중인 상황에서 내부반발을 최소화하고 말단 관리에게나 배치를 시킨 것.
실제로 백제와의 전쟁기나 나당전쟁기에서 기존의 화랑이 꽤나 활약을 했으니 바로 당나라식 관료채용으로 바꾸어 구식군대와 구식제도를 신식군대와 신식관료로 교체할 경우에는 ‘비담의 난’ 이상의 재양이 찾아올 것이다.
다만 이러한 체제정비는 당과의 전쟁까지 마무리된 이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문무왕은 고구려와 전쟁이 마무리된 668년 무렵부터 전후처리 문제에 무척이나 고심하여 왔다. 그래서 당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게 되제 그에 철저하게 대비하면서 다른 한편 내부적으로 지배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당과의 전쟁이 마무리된 676년 이후만 하더라도 관부를 신설하거나 정비하고 소경小京을 설치하며,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東宮을 창조하며, 내외문의 액호를 정하였다....(생략)
문무왕은 임종을 앞두고서 태자로 하여금 조금의 틈도 두지 말고 곧장 즉위하도록 유언하였다. 문무왕은 자신의 사후 커다란 위기 상황이 벌어지리란 사실을 사전에 미리 포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신문왕이 즉위하자마자 김흠돌과 흥원의 모반사건이 발생하였다. 통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여러 차례에 걸친 반란사건이 일어난 데에서 유추되듯이 중대 중권의 등장 자체와 지향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뿌리 깊게 잔존하였고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들은 아직껏 완전하게 소탕되지 않은 상태였음을 보여 준다.
....(생략)
신문왕은 즉위 이듬해인 682년 선거지사, 즉 관료의 선발을 전적으로 담당한 관부인 위화부位和府에다가 진평왕 3년(581) 설치 이후에도 두지 않았던 장관을 2인씩이나 배치하였다. 바로 그 해에는 국학까지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국학은 전면적으로 실시될 만한 기반을 갖추었다. 행정 조직과 함께 박사와 조교를 두어 교육 체계까지 완비한 것이었다. 이때 국학 설치에 실무적인 책임을 지고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수强首와 한창의 나이에 유교 경전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가진 설총薛聰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즉 정리하면 관료제의 정비는 전후 문무왕 사후 차차 진행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에 따른 반발도 있었지만 문무왕이나 신문왕 등 중대의 군주들은 이에 굴하지 않는 태도로 체제를 차차 정비해가고 있었다.
당시 국학설치에 주도적인 인물로 강수, 설총이 거론되는건 당연한 일인 듯 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군주의 자문역할을 맡은 유교관리인 것을 보면 이들이 당나라식 인재양성 방식을 따르고자 했던건 당연한 일..
다만 신라는 당과 교육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어보인다.
「신라가 『논어』와 『효경』을 공통 과목으로 하고서 크게 세 개의 업으로 나눈 것은 당제에서 대, 중, 수로 구분한 것과 비슷한 면모인데 아마도 이로부터의 변용일 듯싶다. 다만 경전을 묶는 방식에서는 뚜렷하게 차이가 났다. 신라는 당에서 전혀 교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문선』을 특이하게도 교과목 속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수해야 할 경전의 수가 당에 비해 현저히 적은 반면 수학 기간이 오히려 긴 점을 고려하면 신라에서는 어쩌면 선택이라기보다도 선정된 과목 모두를 수강 대상으로 삼았을 공산도 엿보인다.
(생략)교육의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직 및 구조면에서 신라와 당의 국학은 크게 차이가 난다.
첫째, 당은 6학으로 구분되었지만 신라에서는 유학을 위한 교육과 산학의 2학으로 구분한 점이다. 그나마 산학박사도 성덕왕 16년에 이르러서야 둔 것으로 보면 처음에는 국학이 오직 유학교육만 담당한 것이다.
........(생략)
둘째, 당에서는 신분에 근거한 음서를 활용하여 입학 당초부터 국학생들을 6학으로 편제하였지만 신라에서는 그와 비슷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신라에서는 골품제란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하였음에도 국학 조직이나 운영에다가 그를 전혀 넣지 않았음은 대단히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
당과 달리 과목이 다르고 교육의 구분도 다르고 학생들의 입학 조건도 다른 듯 보인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일부 국학이 6두품에만 매력있다는 주장에 대해 이리 반박하고 있다.
「흔히 국학은 6두품에게만 특별히 매력적이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기록만 세밀히 들여다보더라도 골품 전반과 관련해서 운용한 흔적이 약간씩 찾아지므로 잠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대사 이하의 관등으로부터 작위가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15세에서 30세 된 자들이 모두 학생이 되었다. 학업은 9년을 한도로 하되 만일 재질이 노둔하여 인재가 될 가능성이 없는 자는 퇴학시켰다. 재주와 도량은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한 자는 비록 9년을 초과하더라도 국학에 있게 하였고, 작위가 대나마와 나마에 이른 뒤에는 국학에서 나가게 되었다.
凡學生 位自大舍已下至無位 年自十五至三十 皆充之 限九年 若朴魯不化者罷之 若才器可成 而未熟者 雖踰九年 許在學 位至大奈麻奈麻而後 出學
삼국사기 제38권 잡지 제7(三國史記 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일단 이 기사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된다. 국학생의 자격은 이미 대사 관등을 보유한 자로부터 아무런 관등이 없는 사람까지이며, 재학 연령은 15세에서 30세까지로서 수학의 최대 연한은 9년으로 한정되었다. 다만 만약 재능이 아둔하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이전에라도 쫓아내고, 재능이 감지되나 현재로서는 미숙하면 예외적으로 9년을 넘겨서라도 재학을 허용하였다. 관등이 대사마·나마에 이른 뒤에 졸업시켰다. 」
요약하면
①재학연령은 15~30세까지로 매우 큼
②기본적인 재학 기간을 9년으로 설정
③최대 수학기간 9년+특별한 경우에 한해 그 이상까지도 재학가능.
④무위자(관직이 없는 이) 뿐만 아니라 이미 관등을 소지한 사람에게까지 입학을 허용.
계속 인용을 하자면...
「바로 앞의 예외적인 규정인 ‘재기가 이루어질 수 있음에도 현재로서는 미숙하여’ 9년 이상 재학을 허용 받은 경우로 한정하게 된다면 국학의 입학 신분과 관련된 이해는 전혀 달라진다. 특정한 신분적 제약이 거의 없어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9년이나 그 이상 재학하더라도 대나마·나마를 상한으로 관등을 부여하였다는 정도로 한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그 자체를 일반적인 졸업 규정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 여겨진다. 」
당과의 차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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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와 유사한 과거시험 방식이 도입되는건 원성왕 4년의 일이지만 중국식 제도가 정착되는데는 신라 이후 고려또한 고생을 한 관계로
꽤나 어려운 과정이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