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14 03:05 | 수정 : 2014.06.14 03:20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도입한 '콘셉트 빌딩' 종로 '그랑 서울']
- 피맛골 콘셉트 살리기
식객촌 바닥은 울퉁불퉁하게… '청진상점가' 복고풍 현판 내걸어
공사 중 발굴된 유물들 전시해 고풍스러운 분위기 강조
올해 초 서울 종로구 청진동 종각역 부근에 문을 연 지상 24층, 지하 7층 건물 그랑서울. GS건설과 국민연금 등이 컨소시엄으로 만든 임대 사무용 빌딩으로 GS건설 본사와 하나은행 본점, 컨벤션센터 등이 들어가 있다. 외관만 보면 광화문과 종각 일대 고층 건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느낌이 다르다. 1층 한편에 위아래로 '淸進商店街(청진상점가)' '食客村(식객촌)'이라고 나란히 적어 놓은 현판 아래로 들어가면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두 건물 사이 공간을 틔워서 가운데를 개방하고, 그 사이에 과거 이 건물 자리에 있었던 뒷골목 식당가 피맛골 분위기를 재현했다. 양옆엔 '전주밥차' '오두산 메밀가' '부산포어묵' 등 이름만으로도 서민적 향취가 풍기는 식당이 줄줄이 들어서 있다. 식당 바깥까지 나와 있는 테이블에서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이 식당들은 임차료를 많이 낸다고 받아준 건 아니다. 그 나름대로 기준을 마련해 엄선해서 골라 받았다.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품 '식객'에 등장한 맛집 중 9곳을 삼고초려로 모셔온 것이다. '식객촌'이란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건물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했던 건축가 양진석(공학박사) 와이그룹 대표는 "'어디에나 있는'이 아니라, '거기에만 있는'으로 주제를 잡고 건물 콘셉트를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 ▲ 서울 종로구 청진동 그랑서울 빌딩. ‘ 식객촌’ 등 독특한 콘셉트로 주목받고 있는 이곳은 상업용 빌딩임에도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콘셉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오종찬 기자
상업용 빌딩도 '콘셉트' 시대
양 대표는 피맛골의 서민적 느낌을 살리고, '어디에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입점 업체 선정에 공을 들였다. 허영만 화백 도움을 받아 '식객'에 등장하는 음식점을 하나둘 불러모았다. 허 화백은 곰탕집 '수하동'(식당 '하동관' 주인 아들이 경영) 유치를 위해 직접 발로 뛰기도 했다. 남들과 똑같은 건물을 만들고 '임차인 구함'이라고 써 붙이면 그만인 시대는 지났다. 건물도 이젠 콘셉트가 중요한 시대다. 그랑서울의 탄생은 확고한 콘셉트와 그것을 관철하려는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입점 식당 선정이었다.
빌딩 내부로 들어가면 지하에도 강남과 홍대 앞 일대에서 이름난, 색깔 있는 음식점이 모여 있다. 매운맛으로 유명한 중국 쓰촨(四川) 요리 전문점 '시추안 하우스', 한우 숙성 등심 전문점 '투뿔등심', 일본식 집밥 전문점 '매스테이블', 깻잎 맛 아이스크림으로 유명세를 탄 아이스크림 전문점 '펠엔콜' 등이 그것이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회사 세빌스 한국 지사인 세빌스코리아 전경돈 대표이사는 "부동산은 살아 숨쉬는 콘텐츠다. 새로운 콘텐츠가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인다"고 강조했다. 확고한 콘셉트를 정한 뒤엔 건물 배치나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일관되게 그 콘셉트를 구현해야 한다. 그래야 각이 살아난다.
그랑서울 식객촌 바닥돌 높낮이를 균일하지 않게 해 울퉁불퉁하게 한 것, '청진상점가'라는 옛날식 이름 현판을 걸고 다소 촌스러운 서체를 쓴 것 모두 옛 피맛골 분위기를 살린다는 콘셉트를 강조하는 요소였다. 1층 중앙 광장에는 바닥을 유리로 덮고 그 지하에 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했다. 조선시대 화약 무기인 총통이나 금동사자향로, 기와 등이다. 양 대표는 "대개 이런 유물을 잘 안 보이게 숨겨두곤 하는데 고풍스러운 콘셉트에 맞게 유적을 당당하게 드러내 보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콘셉트의 초지일관이 중요아무리 확고한 콘셉트가 있더라도 설계, 건물 디자인, 점포 입점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에서 초지일관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물을 얻기 어렵다. 그랑서울은 건물주이자 시공사인 GS건설이 양진석 대표에게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맡기고 지휘에 따랐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시공, 설계, 디자인, 조경 등을 총괄하는 일종의 컨트롤 타워라고 볼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이다.
건물주나 시공사와는 별개인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제삼자가 있을 경우, 우선 업체 시각에서 벗어나 사용자 시각으로 전체 작업 과정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테면 시공사가 바닥재 업체 선정을 할 때 으레 계열사를 고르는 것이 관례다. 대기업이 지은 아파트의 빌트인(붙박이) 가전제품은 하나같이 계열사 제품 일색이다. 그랑서울 역시 처음엔 시공사 계열사의 바닥재로 마감하려 했지만, 양 대표가 "건축 의도를 구현하려면 다른 제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 계획을 바꿨다.
처음 그랑서울의 이름은 'GS종로타워'였다. 하지만 양 대표는 "이 건물엔 GS건설 말고 절반이 다른 상업 시설일 텐데 누가 'GS'라는 이름 붙은 건물 안에서 더부살이하고 싶겠나. 게다가 그렇게 되면 피맛골 분위기를 살린 독특한 문화 공간이라는 의미가 퇴색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원래 콘셉트에 어긋나거나 전체적인 조화에서 벗어난 선택일 경우엔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가 있었지요. 결국엔 그것이 고객을 위한 결정이기도 하니까요."
빌딩 앞에 조형물을 설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건물 입구에 두면 눈에 잘 띄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작 중요한 건물 경관을 해치고 상업 시설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면서 건물주를 설득, 자리를 옮겼다.
사용자의 시각으로 보는 프로젝트 매니저건축 초기 단계에 콘셉트를 확실히 잡을 경우 나중에 우왕좌왕하며 뜯어고칠 일이 없어진다. 빌딩 안에 고기 굽는 식당을 들여놓으려면 불판 설치용 내부 설계를 해야 한다. 만약 공사가 다 끝나고 나서 뒤늦게 고깃집을 입주시키려 한다면, 배기 설비를 다시 공사해야 한다. 그랑서울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처음부터 '주말과 평일 오후에도 고객이 찾을 수 있는 식당 입점'이라는 계획을 세웠기에 그럴 일이 없었다.
광화문과 종각 일대 대형 빌딩에 입점한 식당은 평일 점심때는 인근 직장인들로 붐비지만, 밤이나 주말까지 매출이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양 대표는 평일 저녁과 주말에도 손님들이 찾는 식당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굽고, 술을 곁들일 수 있는 식당이 들어와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세빌스 코리아 홍석원 상무는 "복합 오피스 건물에 유명 식당이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치가 좋고 집객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인 동시에 대외 홍보 효과가 있어서 오피스를 유치하는 데도 직간접적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랑서울은 이런 콘셉트 입점을 통해 사무실이나 상가 임대료가 주변 건물보다 10% 이상 오르는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