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6년 생이다. 그러니 해방 이후에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격동기의
인생사를 지나온 사람이다 .그러니 4살에 6.25가 일어나고 전국은 초토화
되어 같은 민족끼리 북한에서 남한으로 밀고 내려와 한강은 끊어지고 남으로
밀려 내려와 피난을 고행의 삶을 살아어야 했다. 이리 미.소의 신탁통치의 배후에는
강대국의 힘싸움이 겨루고 있었다.
어렵고 가난한 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민족의 비극, 부모님은 1902년생 ,고스란히
일제강점기의 삶으로 45세까지 일제의 식민지의 삶에 부디껴야 했다. 6.25 의 피해의
잔재 미국의 지원과 자유민주 국가의 지원으로 복구에 만전을 기하여 오늘날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위대한 민족이다. 일명 미국의 지원으로 우유를 먹으며 양키문화가
한참 한국에 판을 치고 있었다. 동두천.의정부,오산.평택지역의 미국군인들에게 몸을 파는
양공주아가씨들이 생계를 위하여 삶을 살아야 했다. 약소 민족의 비극....
나는 나주의 가난한 산골의 촌놈이 서울로 대학을 가고 공부를 하겠다고 올라갔으나
옷같은 복장한벌이 없었다. 잠자리는 작은 누나집에서 얻어서 살았고, 식사는 작은 누나
집에서 가족들이 많고 어려운 매형네 집에서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대학을 다닐때 돈이 없어 남대문시장에 가서 '검정색으로 염색을 한 미군북'을 한 벌을
사서 겨울이고 여름이고 입고 다니었다. 돈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나에게 편하고 값도
싸고 부담도 없고 공부하는 학생이 복장이 화려하면 뭐 할것인가?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자아를 위하여 목표를 갖고 부단히 학문의 세계로 삶을 살아야지
그깟짓 복장정도는 아에 나의 삶에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러니 그 검정색으로 염색를 한
미군복이 나의 의복의 전부였다. 그래도 내가 서울에 올라가 대학을 다닌다는게 행복하였고
무한한 학문의 세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을 하였다. 세계의 석학 중국의 '임어당'박사의
강의를 들을수 있었으며, 안병욱 철학교수의 '곡학아세'하는 사람이 되지를 말아라 하는
명강의가 나에게 평생 삶의 좌우명이 되었다. 돈도 없으니 여자하고 데이트는 아에 생각도
못하였다.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기위하여 인쇄소에 출근도 하며 인생의
어려움도 걲으며 부모님을 부양을 하기 위하여 고생도 하였으며 .항상 주경야독으로 책속에 살았던
나의 삶은 비툴어진 길은 한 번도 걸어본적이 없다. 여기서 내 젊은 인생의 길은 갖은 시련속에 삶의
목표와 꿈을 향하여 무한히 도전을 하였다. 인천교육대 합격, 연이어 공무원 시험준비로 서울시 합격
서울생활의 30여년을 서울시에 몸담았던 나의 삶,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책으로는 부자
였다.
계속애서 고향으로 낙향하여 부족한 나의 문학과 학문의 길은 계속 가고 있다. 지역사회에 문화창달을
기하고 낙후된 고향의 정신적인 도움을 주기위하여 줄기차게 글을 쓰고 있다.
첫댓글 당시 검정색으로 염색한 군복과 청바지에 워커는 최고의 페션이었습니다.
켐퍼스의 낭만, 술에 취해 아침이슬을 부르는 학창시절 멋을 운선학생은 알랑가 뭘라 ?
압니다 나도 해보고 싶어 남몰래 흘린 눈물과 한숨이 돌처럼 가슴에 뭉쳐서 병이 되었으니 그 시절 운동권 학생들도 얼마나 멋지게 영웅처럼 보이던지 그냥 책만 읽었더랬지요 책 마저 없었다면 어찌 살았을지
아이구 심해 지기님 .....
일직 기상하시어 격려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가난을 헤쳐나오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군사문화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지대한 공과가 있을것입니다 . 민주주의의 열망 , 서울시민에게 평생 함께 하였던
옛추억이 아련합니다 심해지기님 왜 운선작가님이 들어감니까?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예전엔 그렇게 미군 군복을 염색해서 많이들 입었다고 하대요.
만장봉님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군요.
어렵던 그 시절을 불굴의 의지로 통과하시고 글쓰기에 열정을 불태우고 계시는 만장봉님의 멋진 노년을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달항아리님
오늘이 출석부담당이신데 여기까지 .........
저는 내일이 담당입니다
군복 물들인 옷
그거는 그 당시 대학생들의 낭만이 깃든 옷 이었습니다
값도 싸고 쉽게 헤지지도 않는 옷이었죠
나는 그옷을 대학 생활 내내 두고 두고 입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 하면서 그 옷을 못 잊어서
나 군대에서 사비로 사 입은 장교용 군복을 제대할때 가지고 나와서 물들여서 입었습니다
그러다가 엄청나게 불어나는 살 때문에 그옷 입기를 그만 중지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당
나의 과거가 기억나게 하는군요
충성 우하하하하하
아이구 반갑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지금은 즐거운 추억이 되었군요
같은 삶의 애환을 보내신 '태평성대'님 감사합니다
옛시절 고생 하시며
성실 하게 공부하시고
서울 시청 근무,퇴직
하셨네요!!👍👍♥️♥️
존경 드려요...
저도 옛날 사지쓰봉?
바지 천으로
교복 바지 만든적이 있어요. ㅎ
밑에 몸배바지(오타수정)
스타일인데
줄로묶고 복도에서
다들
줄 스라 하셨 는데
줄 만지다 나팔 바지라고
걸린적 있어요 ㅎㅎㅎ
문제아 아니고
알뜰 살림에
보탬 했을뿐인데요.ㅎ
나주 촌놈이 서울로 올라가서 고생좀 했습니다
가난하고 곤곤한 삶에 공부를 한다고 ,지금가지도 책을 잡고 있으니 .....
감사합니다
어렷을때
중고등 시절
미군 전투복 염색한바지 늘 인기엿죠
참 말만 대학생이지 이거 돈이 있나 챙은 청개천 헌책방에 구입
여름에도 그 군복의 옷을 입고 다니고 ....
미군복과 낙하산 천으로 만든 거친 재질 즈봉도 아구 징해라~ 어린 여린 살이 벌겋게 시달리려 걸음도 맘놓고 못뛰고 어기적 걷던 기억 징한 세월이었지요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셔요~
이거 염색한 미군복으로 여름이고 겨울이고 사시사철 나의 옷
작은 누나가 하두 보기싫다고 을지로 입구에 가서 콤비 상의를 사주시어 입고 보니
너무 멋이 있던 추억이 있습니다 건강조심하시고 운선작가님 ....
선배님
고생하셨습니다.
대신 성취하신것도
많으시리라
믿습니다.
늘 건강하시옵소서.
신미주 후배님 감사합니다
참 말이 그렇지
지나고 보니 다 아련한 추억입니다 진정으로 이해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만장봉님 ~ 오늘 27일 출석부 담당 아시죠? 수고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글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