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3강-1 (2012.06.30.)
13-7 실다운 법은 아무 것도 없다. (밑 부분)
13-8 찾을수록 멀어진다.
벌써 마지막 시간입니다.
임제록을 한 1년은 해야 되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공부를 마치다 보니까 좀 미미한 감이 많습니다. 그 대신에 어제 나눠드린 염화실이라고 하는 다음 카페광고지를 보셨을 겁니다. 여기에 가서는 임제록에 대한 강의가 아주 자세하게, 매 회마다 아주 친절하게 강의가 되어 있고, 그 다음에 강의한 것을 기록을 해서 글로 적은 것이 있습니다. 녹취가 그 안에 다 올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임제록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음 카페 염화실에 들어가셔서 임제록을 청취하시면 되고, 그래도 안 되는 분들을 위해서는 또 오늘, 임제록 대 강좌라고 해서 전번에 문수경전 연구회에서 스님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C D를 휴대용 책 하고 하나씩 나눠 드렸습니다. 차에다 꽂고, 또 집에서 듣기도 하고 그러면... 이것이 더 자세하게 강의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강의가 너무 짧은 시간이 돼서 저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많이 아마 부족함을 느끼실 겁니다. 그래서 이 C D를 통해서 보충하시기 바라는 뜻에서 하나씩 나눠 드리게 됐습니다. 꼭 챙겨 가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가져왔으니까요.
오늘은 또 핵심적인 그런 부분들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되는 부분들 몇 곳을 살펴보겠습니다. 33페이지
13-7 밑 부분
唯有聽法無依道人이 是諸佛之母라
所以佛從無依生이요 若悟無依하면 佛亦無得이니
若如是見得하면 是眞正見解니라
唯有聽法無依道人(유유청법무의도인)그랬습니다.
임제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법문 중에 無位眞人.(1-4) 차별 없는 참 사람. 첫 시간에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 다음에 또 그에 못지않게 無依道人. 이런 말도 잘 씁니다.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 그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무엇엔가 의지해서 살고, 무엇을 근거로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생명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상적인ㆍ이런 역사적인 차원의 사람은 모두 의지해서 삽니다. 여기에 의지하고 저기에 의지하고, 그런데 궁극적 차원의 참 사람은, 우리 모두가 無依道人입니다.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디 있느냐?
바로 聽法. 내 말을 지금 듣고 있는 이 사람입니다. 딴 사람 아닙니다.
이 사람은 귀도 아니고ㆍ눈도 아니고ㆍ코도 아니고ㆍ남자도 아니고ㆍ여자도 아닌, 남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이 말 듣는 것 아닙니다. 여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이 말소리 듣는 것 아닙니다. 스님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이 말소리 듣는 것 아닙니다. 일반 소임이라고 하는 조건가지고 이 말소리 듣는 것 아닙니다. 이 말 듣는 그 당체는 아무 조건 없습니다. 정말 평등합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존재이지요. 이것이 바로 聽法. 지금 법문 듣고 있는 그 사실 = 그 당체 = 그 사람. 그 사람은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聽法하는 無依道人.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은 뭐라고요?
是諸佛之母(시제불지모)라. 그랬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그럼 우리들 개개인이 사실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佛母 할 때, 부처님 조성하고, 부처님 그리는 사람을 불모라고 그런 표현을 씁니다만, 우리들 眞面目(진면목)이야말로ㆍ우리들 참 생명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佛母입니다. 佛母. 한 부처님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諸佛之母라.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이랬습니다.
所以로 佛從無依生(소이불종무의생)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는 것은 無依生이라. 의지함이 없는 그 당체자리로부터 탄생한다. 의지함이 없는 그러면서도, 온 천하에 가득 차 있고, 아무런 차별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고 그러면서 너무나도 당당한 우리들 진정 복이고요. 그렇습니다.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그것이 곧 “내 진실생명.” 이렇게 표현 하는 것이지요.
若悟無依(약오무의)하면, 만약 無依. 의지함이 없는 도인.
우리들의 궁극적 차원의 참 생명을 깨닫게 된다면
佛亦無得(불역무득)이다. 거기에 따로 어디 가서 부처를 얻을 것도 없습니다. 뭐 부처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요.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우리의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것이야말로
是眞正見解(시진정견해)니라. 임제록에서 眞正見解라는 말씀 자주 하십니다.
또 眞正見解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불법을 배우는데 있어서, 또 인생을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眞正見解 = 참 되고 바른 소견,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임제스님은 뭐라고 하느냐? 천하의 임제스님. “임제 앞에 임제 없고 임제 뒤에 임제 없다.” 제가 첫 시간에 그랬습니다. 참으로 임제야말로 우리 불교 역사상에서 전무후무한 사람이다. 임제스님은 참으로 전무후무한 사람입니다. 그동안 우리 어제하고 그저께하고 보아왔던 40년 가지고도 ‘야~ 세상에 이런 설법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정말 청천 벽력같은 그런... 그 날 나눠드린 그 유인물에 보면 그 종풍이 청천벽력이다. 밑에 臨濟家風(임제가풍)을 이야기해놓은 데가 있지요? 임제가풍에 보면 청천벽력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벽력 치는 그런 가풍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지요. 법문마다 다 그 사람의 어떤 소견과 타고난 성격과 이런데 따라서 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임제스님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그런 법문입니다. 과연 獅子吼지요. 우리 ??입니다. 그래서 전무후무한 임제입니다. 첫 시간에도 “임제 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 이후에 임제 없다.” 임제스님을 우리가 알고 보면 정말 그럴듯한 표현입니다. 그동안 보아 온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이 그러한 스님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입니까? 無依道人. 그것을 따져서 애매모호하게 그렇게 차별하는 것 아닙니다. 임제스님은 바로, 뭐냐? 無依道人이 뭐냐? 참 사람이 도대체 뭐냐? 無位眞人이 도대체 뭐냐? 바로 지금 이 말소리를 듣고 있는 그 당체다. 말소리를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말입니다.
聽法無依道人. 그랬잖아요.
이렇게 확실한 가르침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완전히 밑바닥까지 다 드러낸 설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두 선 도리를 이야기하고 선법을 이야기하지만 애매모호하게 잡힐 듯 말 듯하고 그런 것 아닙니다. 도대체가 말하는 사람도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고, 그야말로 암중모색으로 캄캄한 밤중에 코끼리 만지는 것 같고, 듣는 사람은 더 말할 것 없고요. 그런데 임제스님 법문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물건을 잡아서 손에 착 얹어주는 것과 같이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聽法. 지금 말 듣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이 無依道人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마침 우리는 임제스님 법문을 듣는 이 자리에 무슨 승속도 분별하지 않고ㆍ남녀도 분별하지 않고ㆍ종파도 분별하지 않고ㆍ색깔도 분별하지 않고, 아무 조건 없이 듣고 싶은 사람은 와서 다 들어라. 사실 임제스님 정신에 딱 맞는 법회입니다. 간혹 임제스님 법문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기도 하고, 스님들을 상대로 하면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야, 이 머리 깎은 눈먼 놈들아” 이런 표현을 합니다. 머리 깎은 눈먼 놈들아. 그것이 뒤에도 나오는데요. 참~ 이 두 구절만 해도 정말 임제스님 법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고, 바로 이 내용을 가지고 전편에 다 펼쳐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唯有 = 오직 無依聽法道人이 있을 뿐이다 말입니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조건 없는 聽法道人. 법문 듣고 있는 의지함이 없는 道人.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無依 = 의지함이 없는 우리 자성자리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해야 이것이 眞正見解다. 正見이다 이 말입니다. 正見. 空한 줄 아는 것이 正見이 아닙니다. 연기로 생겼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正見이 아닙니다. 간혹 그렇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하다ㆍ연기다. 모든 존재는 공한 줄 알아라. 그것이 바른 견해다. 그 소린 손에 안 잡힙니다. 이와 같이, 여기 딱 해놨잖아요. 이것이 眞正見解다. 是眞正見解니라.
그 다음 이어서 보겠습니다.
13-8 찾을수록 멀어진다.
學人不了하야 爲執名句하야 被他凡聖名礙일새
所以障其道眼하야 不得分明이니라
祇如十二分敎는 皆是表顯之說이라
學者不會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하나니
皆是依倚라 落在因果하야 未免三界生死하나니라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인댄 卽今識取聽法底人하라
無形無相하며 無根無本無住處하야 活鱍鱍地라
應是萬種施設하야 用處祗是無處일새
所以覓著轉遠이요 求之轉乖니 號之爲祕密이니라
찾을수록 멀어진다. ←이것은 자의적으로 제가, 잘라서 이해할 수 있도록 단락을 나누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學人不了(학인불료)하야,
공부하는 사람은 그러한 이치를 몰라 가지고, 그런 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는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이치를 몰라서
爲執名句(위집명구)하야, 명구를 집착해서,
名句 = 이름과 글 구절, 이런 것들을 집착해서
被他凡聖名礙(피타범성명애)일새.
범부다ㆍ성인이다. 부처다ㆍ중생이다. 승려다ㆍ속인이다 하는 그런 이름의 장애를 입고 있다. 이름을 갖다 붙이면 벌써 거기에 그만 빠져버려요. 거기 집착해버려요. 거기 넘어가 버려요. “관세음보살” 하면 ‘아이고 관세음보살’ 에 그만 빠져버리고요.
所以로 障其道眼(소이장기도안)하야,
그래서 그 道眼 = 도의 눈. 본래 우리가 道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도안을 장애해서
不得分明(부득분명)이니라. 분명하지가 못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불교공부를 무수히 해왔고, 절에 갖다 바친 돈만해도 어마어마한데, 뭐가 분명하게 떠오르지가 않는 겁니다. 不得分明입니다.
도대체 분명하지가 않아요.
祇如十二分敎(지여십이분교)는, 다만 저 十二分敎. 8만 대장경은
皆是表顯之說(개시표현지설)이라. 모두 표현하는 이야기다ㆍ표현하는 설명에 불과하다. 설명서다 이 말입니다. 설명서. 설명서지 그것은 진짜는 아닙니다. 8만 대장경은 모두 설명하는 것이고, 그것을
學者不會(학자불회)하고, 학자가 알지 못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도리를 알지 못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변향표현명구상생해)하나니,
그 표현한 설명서를 가지고 이런 저런 알음알이를 내는 겁니다.
이런 소리 내고 저런 소리 내고, 이것은 무슨 사상이다. 저것은 무슨 사상이다. 이것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이다 해대고 수많은 논문과 저서가 그냥 쏟아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表顯名句上을 향해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다.
숱한 명구ㆍ숱한 저서. 이것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皆是依倚(개시의의)라. 이것은 전부 의지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落在因果(낙재인과)하야 未免三界生死(미면삼계생사)하나니라.
모두 인과에 떨어져, 인과 차원에 떨어진다 이 말입니다. 인과 차원에 떨어져요. 그래서 三界에서 生死하는 것을 면치 못한다. 우리 마음자리는 인과 없습니다. 역사적인 현실만 인과가 있지, 궁극적 우리 마음자리 입장에서 살펴보면 인과 없습니다. 인과를 초월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측면과 궁극적 차원.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보자기 입장과 내면의 입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보자기 입장에는 지금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각각 달라요. 그러나 내용물에 있어서는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자기 입장은 외형상으로는 인과가 다 먹혀듭니다.
자기 살아온 대로 얼굴 갖고, 스님은 계 받았으니까, 스님이 됐으니까 승복입고 머리 깎고, 이것이 다 因果아닙니까? 계를 안 받은 사람들은 그냥 일반인으로 또 그렇게 그 모습으로, 이것이 다 因果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임제스님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無位眞人이나 無依道人이나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현재 법문 듣고 있는 이 당체다. 그 당체. 그것은 말하자면 인과하고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大乘學人은 不落因果(대승학인불락인과)다.
대승학인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大乘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궁극적 차원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궁극적 차원을 두고 하는 소리. 인과에 안 떨어지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전부 인과에 다 떨어집니다. 외형상으로는ㆍ현실적으로는 인과에 안 떨어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불교의 인과설이 얼마나 잘 먹혀드는데... 절에 들어가면 인과이야기 아주 재미있잖아요. 또 사실이고요. 현상만가지고 설명하는 데는 因果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자면 因緣果報(인연과보). 또는 緣起說(연기설). 이런 표현을 하는데요. 현상을 설명하는데 因果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는 현상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과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자리가 분명히 있거든요.
뭐 똑 같이 그 외형적인 보자기. 표면상으로 위대하기만 하려면, 석가모니부처님이 그렇게 6년 고행해서 깨달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둬도 세상은 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니까요. 모든 도인들이 그렇게 고생하면서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상대로 그냥 그대로 보이는 대로 살아가면 그 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잊어버리는 동물이니까ㆍ망각하는 동물이니까,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우리들 참 생명이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이약욕득생사거주탈착자유)인댄,
그대가 만약에 生死, 그리고 가고 오고 머물고 하는 것을 벗어나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생사에 자유롭고자 한다면
卽今에 識取聽法底人(즉금식취청법저인)하라. 그랬습니다.
또 聽法底人, 나왔네요. 법문 듣고 있는 현재 이 사람. 물론 입도 눈도 귀도 코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聽法底人이 너무나도 생생한 그 사람입니다. 법문 듣고 있는 그 사람은 뭐라고 꼬집어낼 수는 없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존재. 歷歷孤明(력력고명)이라고 그러지요. 분명하고 분명한 바로 그 당체. 그 사람이다. 그것을 識取하라. 저번에도 설명했지요?
알아서 取하라. 분명히 알라ㆍ확실하게 알아라. 이 말입니다.
聽法底人을 확실하게 알아라.
우리가 묵묵히 있을 때는 언제나 聽法底人에 초점을 맞춰놓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또 현상에 이끌려 다니더라도 聽法底人 = 내 주인공 = 無位眞人, 이것을 놓치지 말고, 현상은 현상대로 우리가 생활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隨處作主 그러지요. 수처작주. 허나 그 聽法底人은
無形無相(무형무상)하며, 형상이 없어요.
無根無本無住處(무근무본무주처)하야,
근본뿌리도 없고 本도 없고 그 다음에 住處. 어디 한곳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 있는 곳도 없다. 그러면서
活鱍鱍地(활발발지)라. 活鱍鱍. 이것은 고기 헤엄칠 鱍자인데요. 고기가 아주 힘차게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습. 그와 같이 우리들의 참 생명은 형상이 없습니다. 근본도 없습니다. 어디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너무너무 활발해요. 이 소리하면 이 소리 듣고, 저 소리하면 저 소리 듣고, 지금 이렇게 임제록 이야기하면서 저보고 듣고 있지만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소리하면 금방 당장에 박차고 욕을 하면서 나갈 수도 있어요. 제가 웃길 줄 몰라서 그렇지 웃기면 하하하 하고 당장에 웃을 수도 있어요. 얼마나 활발발한지 몰라요. 活鱍鱍이라고 하는 이것은 선문용어입니다. 禪門用語. 禪家에서 우리의 참 생명의 활동상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활발발 하잖아요. 얼마나 활발발합니까? 그래서 시간되면 집에서 척~ 시간 맞춰서 여기 와서 공부할 줄 알고, 이것이 전부 活鱍鱍한 현상들입니다.
無依道人 = 無位眞人 = 우리의 참 생명. 그것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 그대로입니다. 그것을 부처라고 한다고요.
應是萬種施設(응시만종시설)하야,
그것은 萬種施設에 應해요. 맞춰요. 온갖 것이 施設.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착착착착착착 세수도하고ㆍ용변보고ㆍ밥 먹고ㆍ옷 차려입고ㆍ화장하고 커피 타먹고ㆍ출근하는 사람 보내고ㆍ학교 가는 애들 보내고, 뭐 하고 얼마나 착착착착 잘 돌아가는지 몰라요. 應是萬種施設이라.
萬種施設에 전부 착착 응해준다ㆍ맞춰준다 말입니다. 잘 맞춰줘요.
그야말로 이것은 자동입니다. 自動. 그 물건은, 그 活鱍鱍한 내 참 생명이 있어서 자동으로 척척척척 돌아갑니다. 우리 참 생명 같이 진정 자동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자동차도 다 스위치 넣어야 되고, 사람이 밟아야 되고 운전해야 되고, 그것은 진짜 자동 아닙니다. 그것은 반자동입니다. 반자동. 사람이 만든 것은 전부 반자동인데, 진짜 자동ㆍ완전자동ㆍ퍼펙트한 자동은 이 물건하나 뿐입니다. 이 물건하나 뿐이라고요. 웃음소리도 나오고 하는 것 보니까 벌써 움직이네요. 그러니까 活鱍鱍한 것을 잘 보이고 있잖아요.
야~ 신기하잖아요.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최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고,
여러분 이것하나 가지고 석굴암불상 10000개하고 안 바꾼다고 어제 그랬잖아요. 석굴암불상이 아무리 잘 생겼다한들 웃을 줄 알고ㆍ울 줄 알고ㆍ하~~ 미워할 줄 알고ㆍ사랑할 줄 아는 이 고매한 내 자체 = 내 당체하고 그까짓 석굴암부처님 만 개아니라 억 만개라도 어찌,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가치 있는 겁니다.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공히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이해해줘야 됩니다. 사실은 결과는 그겁니다. 내 자신이 그러한 위대한 존재인 줄 알고, ‘다른 사람도 같이 그러한 위대한 존재다.’ 이것 이해하면 남의 것을 훔치고, 세상에 전쟁이 없습니다. 부처님 것을 왜 훔쳐요? 또 설사, 내 것을 좀 훔쳐갔다 한들 부처님이 훔쳐갔는데 그것을 또 봐주면 안 됩니까?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제(2-4) 뭐라고요?
隨緣消舊業이라. 인연 따라서 묵은 업이 사라진다. 묵은 업이 저절로 녹아간다. 이 이치 알면 그 업장 소멸하려고 그 뼈 빠지게 그냥 108참회하고 자시고 3000배하고 100만 배했다고 떠들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봤자 이 도리 모르면 업장 안 녹아요. 이 도리를 모르면 업장 안 녹는다고요.
이 도리 알면 저절로 봄날에 눈 녹듯이, 시간이 가면 저절로 착착 녹아져요.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어록 중에 왕” 이라고 하는 겁니다.
用處祗是無處(용처지시무처)라. 작용하는 그 곳이 다만 작용하는 곳이 없는 그 자리다. 아무리 작용을 해도 작용함이 없어요.
所以로 覓著轉遠(소이멱착전원)이요. 찾으려고 하면 더욱 멀어져,
마치 그림자 밟는 것하고 똑 같습니다. 그림자 아무리 밟으려고 해도 자기 그림자 밟히지가 않습니다. 여기는 찾으려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고 그랬습니다. 분명히 눈앞에 있습니다. 아니 눈앞에가 아니라 곳곳에 손끝에 있고 발끝에 있고 내 창자 속에도 있고 온갖 곳에 꽉~~ 변만 해있는데 覓著轉遠이라. 찾으려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여기에 主客(주객)이 나눠지지 않는 거예요. 主와 客이 없다고요. 평소에는 主와 客이 있는 것 같아요. 철학서적 같은 데서도 보면 “즉자대자” 이래요. “나는 나다.” 이런 식으로 표현 하는 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인 나를 나눠놓고 이야기해요.
나눠놓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求之轉乖(구지전괴)니, 구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號之爲祕密(호지위비밀)이니라. 그래서 이것은 비밀이다.
하~~ 좋은 표현입니다. 이것을 일러서 비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 그 자리. 세상에 마음자리 만치 비밀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뭐 누구에게 속이는 것이 비밀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당체 자리야말로 진짜비밀이다. 號之爲祕密이니라. 참 좋은 표현이지요. 비밀이다. 우리는 모두 어마어마한 비밀을 하나 씩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몰라요. 부처님도 모르는 겁니다. 비밀을 자신만이 알아요. 비밀을 자신만이 알지 남은 도대체 모르는 것이지요.
|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삼보에 귀의합니다
벗님들이여 행복하소서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