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72)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⑧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Daum카페 http://cafe.daum.net/yangsanpoetsociety/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 정일근
⑧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유행가는 배호의 노래였다.
제목은 ‘누가 울어’. 그때 나는 아버지가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 비 오는 오후,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그 슬픈 노래가 어린 나를 울렸다.
어머니 몰래 연습장에 노래가사를 적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노래 1절은 다음과 같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조용조용 불러보았다.
그리고 정말 ‘피가 맺히게’ 울었다. 어렸지만 노래에 담긴 홀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배호의 노래가 슬픔이 어떤 가락이며 어떤 색깔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어머니의 술집에는 유행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유행가 교실은 그 술자리였다. 막걸리 술 주전자를 나르며 나는 손님들의 유행가를 배웠다.
가게에서 일하던 형들의 유행가 책을 훔쳐 가사를 외웠고 장난감 아코디언으로 서툴게 멜로디를 쳐보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같은 영화를 보며 주제가를 배웠고,
쇼 공연에서 늘 제일 마지막에 출연하는 이미자의 노래를 힘껏 불렀다.
나는 세상의 슬픈 유행가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를 흉내 낸 시를 적어 담임 선생님을 걱정시켜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읽었다.
아버지는 달필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고급노트에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셨던 유행가 가사를
볼펜 글씨로 빽빽이 적어 놓으셨다. 나는 유품과 같은 아버지의 유행가 가사를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지우지 않았다.
30대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노래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유행가였다.
아버지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축음기를 통해 노래를 듣기도 했고,
진공관 전축을 사서 노래를 자주 들으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십 분 전에도
잠시 들른 아버지 친척 댁에서 전축을 틀어 놓고 누군가의 유행가를 열심히 들으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행가는 ‘갈대의 순정’뿐이었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은 아버지의 지독한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행가 만들어주는 60년대식 슬픔이 나에게 서정시를 쓰게 만들었고, 유행가는 내 서정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 배호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과 부르지 못하는 시인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행가를 딴따라라 한다.
나는 그 딴따라가 좋다.
흔히 대중적, 통속적이라는 감상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자양분이 된다.
한국 시단에는 3배호가 있다.
대구의 서지월 시인이 서배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이 최배호, 울산의 나는 정배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한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현재 우리 시단의 좋은 시인인 그들의 시가 유행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음치고 박치인 나는 폼만 배호다. 서배호, 최배호의 노래 뒤에는 앙코르가 있지만 내 노래는 앙코르가 없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유행가를 부르고 듣는다.
유행가에서 시를 배웠기 때문이다.
< ‘나를 바꾸는 시 쓰기, 시 창작 강의 노트(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 1. 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72)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⑧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