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8년에 선생이 남한산성에 갔다가 든 느낌과 생각을 적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한강 남쪽 벌판이 위례성이고, 처음에는 백제가 여기에 도읍했지만, 삼국이 싸우다 결국 신라가 차지한 이 지역의 역사를 생각하고, 그런 곳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그날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비각에 적힌 강화체결 문서에 눈물 흘린다. 이제 한갓 나들이 장소로 변해버린 남한산성에서 정조임금의 열병식을 생각하며 또 눈물짓는다.
- 지금의 이 시절 때문에, 남한산성의 이 시가 그냥 지난 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가까이 중국 일본, 멀리 미국과 러시아까지 이해관계가 다른 강대국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주어진 현실, 국적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 이상 영토적으로 한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서로 미워해도 일정한 범위에서 운명공동체라는 엄연한 사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용으로 광풍이 지나간 자리, <남한산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냥 이 땅에서 지금처럼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좀 더 노력하고 또 겸허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남한산성에서의 감회를 쓴 시 여섯 수를 송옹에게 부치다
북문 언덕 아래 푸르고 무성한 들판이,
저것이 바로 하남의 위례성이로다!
성책을 세워 멀리 추흘군과 이어졌는데,
배를 불태우고 낙랑군을 막 피했다지.
궁궐터 풀 속에 관리들 자취 묻히고,
농부들 땅 가니, 깨진 기와들 봄에 번득이네.
제원루(濟源樓 (1))위를 향해서는 묻지를 말게,
웅진(공주)은 여기서 가는 길이 분명하다네.
삼국이 서로 다툰 것이 바둑 두는 것 같아,
삼국지 형주 고사가 또 이리로 옮겨 왔었네.
항상 북한산 의지하여 남한산성 엿보니,
적기를 뽑고 아군 깃발 꽂기를 여러 번.
고구려군의 함성은 자취를 거두고,
계림의 패기가 국경을 넓혀가서,
남한산성의 형세가 높이 치솟았는데,
그 남은 외로운 성이 지금 이렇게 있네.
나라의 운이 기구했던 병자년 겨울,
월왕 구천이 이 높은 봉에 머물렀네.
조선군이 달리는 땅은 강물이 끊어버리고,
청군의 위세는 하늘에 닿아 돌구멍까지 막았네.
잡혀간 세 신하는 부질없이 접견하고,
왕의 장군들은 싸워보지도 못했는지라,
다만 지금 안개비 속, 삼전도에는,
화려한 누각 속 높은 비석이 글자마다 붉구나.
청태종의 군대는 모두가 정예병이라,
서북의 음산한 바람이 작은 성을 덮었네.
한 고개에 얽힌 구름은 용호의 기운이요,
한강에 진동하는 우레는 말과 낙타소리라.
명나라 남긴 은택이 마음에 맺혀 있었으니,
갑작스런 항복은 만인의 눈을 놀라게 했지.
은거하고 자결한 이들 어찌 작다 하랴,
주고받은 문서만 봐도 눈물이 갓끈을 적시네.
붉은 도포의 임금이 천천히 산성에서 내려올 때,
호종하던 백관들 같이 눈물 흘렸네.
강화성 무너짐에 천지가 깜깜해지고,
청군의 포가 터짐에 화염이 붉었네.
한쪽에서 유근(柔謹, (2))한 이들 끝내 한을 남겼고,
세상의 충현(忠賢)들 혹 그 충정에 동감했네.
싸우던 성루에 지금은 향기로운 풀 푸른데,
봄놀이 풍악소리가 행궁을 둘러싸네.
효종승하하신 기해년 가을, 수많은 큰 배와,
임금님 수레가 슬픔 속에 여주로 향하고,
풍년 맞은 벼와 기장이 가마를 헤매게 하고,
숙위하는 깃발은 임금님 배 가까이 있네.
길가의 유생들은 단정한 차림으로 따르고,
두 영릉의 붉게 물든 나무 명루를 비추네.
갑자기 50년 전의 일(3)들이 날듯이 스쳐가,
백발로 난간에 기대니 눈물이 절로 흐르네.
(1)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출처: 한국고전DB)
(2) 유근(柔謹)은 사전적인 의미는 온유하고 삼간다는 뜻이다. 고전DB에서는 이를 ‘자결한 이들’로 번역하였는데, 납득이 안 되고 , 달리 통하는 뜻도 찾을 수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3) 50년 전의 일 : 이때로부터 50년 전은 1778년이고 나이는 열일곱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779년 8월 3일, 정조가 여주 영릉에 갔다가 돌아오다 남한산성에 들러 군대를 열병했던 사실이 있고, 선생이 이를 구경한뒤, <대가가 영릉에 거둥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한성에 이르러 군대를 사열하면서 화전과 화포를 쏘았는데 삼가 구경했던 소감을 기술하다[大駕幸英陵 還至南漢城 閱武放火箭火砲 恭述所覩] (8월이었다)>라는 시를 남겼으니, 정조임금에 대한 그리움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南城志感六首,簡寄淞翁
北門坡下綠蕪平,這是河南慰禮城。
樹柵遠連雛忽郡,焚舟新避樂浪兵。
遺宮草沒從官跡,破瓦春翻野老耕。
莫向濟源樓上問,熊津此去路分明。
三國交爭似奕碁,荊州古事又東移。
常憑北漢窺南漢,屢拔靑旗樹赤旗。
鴨水軍聲收簿帳,鷄林霸氣決藩籬。
晝長山色岧嶢起,一抹孤城在此時。
天步崎嶇丙子冬,會稽栖甲此高峯。
靑駹蹴地河流斷,黃屋凌霄石竇封。
出塞三臣空把袂,勤王諸將未交鋒。
只今煙雨麻田渡,畫閣穹碑字字彤。
覺羅貝勒盡精兵,西北陰風著片城。
一嶺雲纏龍虎氣,五江雷動馬駝聲。
天朝遺澤中心結,草次新儀萬目驚。
蹈海經溝那可少?往來書契尙沾纓。
絳袍徐下五雲中,扈從千官涕泗同。
穴口城崩天地黑,拂郞砲坼火炎紅。
一隅柔謹終遺恨,四海忠賢或恕衷。
戰壘卽今芳草綠,嬉春歌管繞行宮。
千舳龍驤己亥秋,翠華悽愴向驪州。
豐年禾黍迷行輦,宿衛旌旄近御舟。
一路靑衿隨委佩,二陵紅樹照名樓。
飛騰五十年前事,皓首凭欄涕自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