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마포 근처의 언덕배기 높은 곳에 살 때, 김혜수가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살고 있던 빌라의 빈 집에 촬영을 하러 그녀가 온 적이 있다. 주말 드라마였다.
대기업에서 유럽형 주거개념으로 지은 그 빌라는 너무 독창적인 설계로 되어 있어서 오히려 일반 분양이 잘 안되고 있었다. 그래서 홍보 차, 드라마나 영화 촬영 섭외에 적극적으로 응했었고 김민종 주연, 이경영 감독의 [귀천도]를 비롯해서 많은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있었다. 주민들은 출입에 통제가 심하고 야간 촬영을 할 때는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많아서 당연히 불만을 표시했지만, 톱스타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극심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화 [분홍신]의 시사회가 끝난 후 극장 무대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기자회견이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그녀의 긴 연기 인생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전 작품인 김인식 감독의 [얼굴 없는 미녀]에서도 괜찮은 연기를 보여 주었지만, 그녀의 연기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는 극중 인물 지수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프란체스카의 안성댁 박희진이 자신의 헤어스타일 컨셉을 정할 때 적극 참고했다고 밝힌, 풀어서 부풀린 머리를 하고 등장했다. 하이 톤의 목소리와 선명한 붉은 색 의상 등이, 김혜수의 연기를 더욱 날선 모서리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분홍신]은 다르다. 공포 영화지만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것은 백전노장의 김혜수였다. 대개 공포 영화에 톱스타들이 출연하지 않는 이유는, 장르적 성격이 워낙 강해서 연기자들이 빛을 못 보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 피를 흘리고 신체가 절단되는 등 배우로서, 특히 여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홍신]은 김혜수가 있기 때문에 [분홍신]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와 그녀의 딸로 출연하는 박연아가 등장할 때, 영화는 생기를 띄기 시작한다. 전작인 [얼굴 없는 미녀]도 독특한 캐릭터였고 좀 센 이미지였기 때문에 김혜수가 다음 작품으로 공포 영화 [분홍신]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다.
안드르센의 동화 [분홍신]은 [성냥팔이 소녀]와 함께 가장 슬픈 동화에 속한다. 소녀가 숲 속에서 주은 분홍신을 신자, 쉬지 않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소녀가 멈추고 싶어도 그 분홍신은 멈추지 않고 춤을 춘다. 견디다 못한 소녀는 울부짖는다. 제발 춤을 멈추게 해 달라고. 그래서 발목을 자른 뒤에야 소녀는 춤을 멈출 수 있었다는 [분홍신]은 동화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동화였다.
[와니와 준하]를 만든 김용균 감독은 이 동화를 모티브로 해서 새로운 공포 이야기를 만들었다.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가서, 분홍신을 신었던 어느 무용수의 한 맺힌 삶이 분홍신을 통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이야기는, 비록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매끄럽지 못하지만, 김혜수의 연기를 통해 훨씬 빛나게 표현되어 있다.
김혜수의 얼굴은 관상학적으로 공포영화에 매우 잘 어울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녀의 큰 두 눈은 관객들로 하여금 극중 배역이 느끼는 공포를 훨씬 더 확대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분홍신]이 그렇다고 잔혹 공포영화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지하철 플랫폼에 단정하게 벗어놓은 분홍신을 어느 여고생이 탐욕스럽게 신자, 발목이 절단되는 끔찍한 장면의 도입부부터 공포는 시작되지만, 영화의 중심을 튼튼하게 잡고 있는 것은, 심리적 공포이며 그것을 극대화한 김혜수다.
김혜수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통정하는 것을 목격하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나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산부인과 의사 선재 역을 맡았다. 그녀는 화려한 구두를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 우연히 발견한 분홍신을 집에 가져온 뒤부터 그녀 주변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시사회가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많이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나니까 긴장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봤는지 이야기 해 달라. 나는 객관적인 시각을 잃은 상태다. 영화 속에 이미 빠져 있으니까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포 영화인데 스토리가 재미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영화를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혜수의 상대역은 봉만대 감독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김서형과 함께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했던 배우 김성수다. 그는 [애프터를 기약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배우였다]고 김혜수를 평가했다. 김혜수 역시 [영화 찍는 동안 김성수와 편했다. 연기 경험이 많은 배우는 아니지만 작품이나 캐릭터에 접근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자유롭고 영화 속 캐릭터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욕심과 열정이 많은 배우다. 그런 것들이 좋은 에너지로 발산한다. 자칫하면 오버할 수 있는데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이 영화 이후에 더 많은 가능성과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라고 확신한다.]고 상대 배우에 대한 단순한 덕담 수준이 아닌, 선배 배우다운 관록을 가지고 평가를 했다.
김용균 감독 역시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덕을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든다. 시나리오보다, 편집 단계에서 슬픈 정서가 강조되었다]며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공을 배우, 특히 김혜수에게 돌렸다..
[공포영화를 찾는 여름 관객들은 재미있으면서도 무섭고 시원한 느낌을 즐기기 위해 온다. 나는 이 영화가 관객들이 원하는 기대치에 근접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예민한 관객들은, 무엇인가 얻고 느끼는 것을 원하는 관객들이라면, 인간의 본능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에 대해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런 감독의 의도를 몰라도 영화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포영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충실한 재미를 줄 것이고, 그 이상을 원하는 관객들이라면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수의 이런 발언은 기자회견장을 압도했다. 그녀는 감독보다 훨씬 더 작품 자체에 대해서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대개 기자회견장에 나온 배우들이 촬영 에피소드 위주로 단순 발언하는 것에 비해서 김혜수는 훨씬 더 복합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고 깊이 있게, 영화의 핵심을 짚어나갔다. 오랜 연륜을 가진 배우로서의 관록이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감독으로서, 일차적인 관객으로서, 현장에서 제일 먼저 배우들의 연기를 예민하게 지켜보았다. 김혜수씨의 연기를 보면, 오랜 연기 경력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근육 쓰는 게 다르다. 얼굴 근육을 쓰는 게 장난이 아니다,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그녀의 얼굴 표정 연기에는) 그냥 연기하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디테일이 있다.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일 수 있는 얼굴 근육을 써야 하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줘야 한다. 김혜수씨의 연기는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김용균 감독의 위와 같은 말은, 단순히 자신의 영화 여주인공을 띄우는 덕담 수준이 아니다. 처음 [분홍신]에 대한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김혜수는 [정직하게 이야기해서 [와니와 준하] 한 편밖에 만들지 않은 감독이지만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이야기가 진전되었다. 김용균 감독은 남자 감독이지만 여자들에 관한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데 호감이 갔다.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배우로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대해주려는 소통에의 의지였다. (배우가) 어떤 작품을 만나서 갑자기 연기를 잘 할 수는 없다. 김용균 감독은 정해진 한도 내에서 많은 변주를 가능케 한다. 나한테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해주었다. 감독과 배우라기보다는, 동지 혹은 파트너 같은 생각으로 촬영을 했다. 그런 식의 소통방식은 그동안 다른 감독들과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좋은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김용균 감독은 여성의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이다. 그래서 순정 영화하려던 감독이 공포 영화한다고 우려도 있었다. 그 파트너가 김혜수라는 데 우려가 더 컸다. 그러나 배짱도 있고, 작업 내내 상당히 좋았다. 앞으로 어떤 장르 어떤 영화를 해도 잘 만들 수 있는 감독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게 평가하는 것은, 대개 감독들이 배우 이상으로 개성이 강한데, 김용균 감독은 현실에 기초한, 보편적인 데 기초한 것을 원했다.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정직하고 덧붙여지지 않은, 부풀려지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과장된 것을 견제한다. 그것은 큰 장점이다.]
[얼굴 없는 미녀] 개봉하던 날, 나는 그녀를 청담동에 있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운영하는 카페 A.O.C에서 김인식 감독과 함께 만났었다. 그녀는 잘 차려 입은 의상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개봉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만족한다고 했다. 그런데 [분홍신]은 촬영하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는 것이다.
[핏물 뒤집어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정확한 싸인을 받고 정확하게 움직여야 되는 중요한 씬이다, 천정에 설치된 커다란 양동이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카메라 3대가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싸인 하기도 전에 통이 열려서 피가 쏟아졌다. 진짜 피가 아닌 줄은 물론 알지만 피의 색깔, 차가운 느낌, 그런 게 나를 힘들게 했다. 더구나 피가 쏟아질 때의 나의 표정을 카메라가 못 잡았다는 것이다. 나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도 다시 씻고, 스텝들도 공사 다시 하고, 그리고 또 찍었다. 엔딩 씬도 4박 5일 낮밤으로 촬영했는데 추웠고, 공기가 아주 안 좋았다. 초긴장상태에서 촬영했다, 롱테이크가 많기 때문에 엄청난 체력이 소모가 된다. 그때 아팠다.]
영화 [분홍신]에는 모두 40여개의 분홍신이 소품으로 사용되었는데, 분홍신을 탐하면 끔찍한 결과를 빚는다는 영화 속의 내용과는 다르게 그 분홍신을 탐내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몇 개는 스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몇 개는 극장 입구의 영화 제작 소품 전시에 보냈고, 몇 개는 홍보 차원에서 경매를 진행했다. 너무나 핏물을 많이 뒤집어써서 버려진 것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김혜수는 분홍신을 한 컬레도 받지 못했다. 이렇게 고생해서 찍은 [분홍신]은 첫 주 개봉 성적이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에 이어 2위를 했다. [배트맨 비긴스]를 3위로 따돌린 괜찮은 성적이다.
김혜수는 언제나 당당하다. 자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내면에서는, 그 당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흘리는 피의 양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수의 플러스 유]같은 토크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에 대해 자신 있게 밝힌 적이 있다.
1986년에 개봉된 이황림 감독의 [깜보]는 두 가지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 작품은 한국 영화의 남녀 대들보, 박중훈과 김혜수의 영화 데뷔작이다. 그후 김혜수는 지난 20년동안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1993년에는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으로, 그리고 1995년에는 이광훈 감독의 [닥터 봉]으로 두 번이나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TV쪽 수상경력은 이보다 훨씬 많다. KBS에서는 1987년 신인상을 받고 2003년에는 연기자들의 최고의 영예인 연기대상을 받았다. MBC에서는 1995년과 2004년 최우수상을 받았고, 1996년에 연기대상을 받았다. 백상예술대상에서는 1991년과 1995년에 인기상을, 1996년에 여자연기상을 받았고 2004년에는 [얼굴 없는 미녀]로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배우로서는 거의 최고의 영예를 다 누렸다고 볼 수 있는 김혜수지만, 저자거리에서의 일반 관객들은 그녀를 연기파 배우로 평가하지 않는다. 김혜수, 하면 머리 속에 먼저 노출 많은 의상을 걸친 여배우라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녀가 배드씬을 자주 찍은 것도 아니다. [얼굴 없는 미녀]의 베드씬이 거의 유일하다. 그런데도 김혜수의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과 영화제 시상식장에 참가할 때의 대담하고 노출이 많은 의상이, 그녀를 어떤 특정의 이미지로 굳게 만들었다.
1990년대, 김혜수는 배우로서의 정체성 찾기를 시도한다. 그 이전 십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의 어린시절, 어르신들이 권하는 배역을 기계처럼 했었다. 극중 캐릭터에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 과정을 거쳐 90년대에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근본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지금의 자신 있고 당당한 여배우로서의 자아 찾기에 성공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가 지속되는 현 단계 한국사회에서, 그녀의 이런 노력이 쉽게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거쳐 김혜수는 30대 중반의 나이를 넘어서서 이제 진짜 배우로 우리 앞에 우뚝 섰다. [분홍신]은 그 결과물이다. 나는 이 작품이 그녀 인생의 하나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부터 훨씬 더 좋은 작품들을 우리 앞에 보여주기를 바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20대 초반의 감성에 집중되어 있는 현재의 영화제작 풍토가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