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사(世界戰史)의 수수께끼
-살수대첩과 안시성싸움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薩水大捷)612년(高영양왕 23년)
중국 수(隋)나라의 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만3,800명, 군량운반자의 수는
정규군의 배(200만명)나 되었으며,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에도 45일이 소요되었다.
그때까지 세계전사상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다.
중국역사에서 보기힘든 100만이 넘는 수(隋)나라 대군이 출병해서 고구려정복을 위해
침략을 가는데 대군이 출발하는데만 45일이 걸릴정도로 시작부터 난관이었는데
또 식량을 병사들이 등에 지고가는등, 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버리는자가 많아졌다.
그런상황에서
고구려의 요동성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수(隋)양제(煬帝)는 우중문·우문술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오골성(지금의 봉황성)을 경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으로 직공(直攻)하게 하였다.
*을지문덕의 거짓 유인술에 작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5천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을지문덕의 전략은 군량이 떨어져 지친 수나라군을 유인, 더욱 지치게 만들려는
것이었고 그렇게 수나라군은 평양성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을지문덕은 다시 한 번 ‘군대를 물리고 영양왕과 함께 조회하겠다’라는
거짓 항복서를 적진에 보내 더욱 적들을 혼란케 만들었다.
이때 고구려는 패하는척하면서 유인하다가.. 적들이 청천강유역에서 철군하며
도강(渡江)하는 틈을 기습하여 30만5천명의 대군을 거의 전멸시켜버린다.
수나라의 군사들 중 살아남아 돌아간 군사는 겨우 2천7백명이었다.(살수대첩)
100만 대군이라던 수나라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이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강국이었고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였는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것이다.
수나라는 그 이후에도 이를 설욕하기 위하여 613년 1월에 1차 2차, 614년에
3차 출병을 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는데 이는 거듭된 원정으로 이반된 민심이
반란으로 이어지고 고구려에 대한 중국인의 공포와 국력의 피폐가 겹쳐서
본국 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데다가 고구려의 반격으로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났으며 617년에 4차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618년에 수의 장군이었던 이연(李淵)이 세운 당(唐)나라에게 건국 28년만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당태종과(唐太宗)안시성(安市城)전투 (645년.高보장왕 4년)
수(隋)를 멸하고 대신 들어선 나라가 당(唐)나라인데 당나라가 수나라의 원수를
갚아주겠다며 고구려에 쳐들어온다.
살수 대첩이 있은지 32년 뒤인 645년, 이번에는 당나라 태종(이세민)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황제가 직접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쳐들어왔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태종은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는 전쟁영웅이고, 당군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한 군대였다.
*30만 대군 3만도 못되는 고구려군에 패퇴
서기 645년(보장왕4년)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싸움으로 패해 기진맥진 할때 아버지
이연과 함께 당나라건국을 주도한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의 가장 위협적인 고구려를 칠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30만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온 것이다.
당태종은 요하 일대의 고구려의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당 태종은 신공성무기를 활용하여 3개월가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물리쳤고 이에 당황한 당이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흙을 쌓아 공격하였으나 기어히 실패하고 말았다.
당군은 최종적으로 철수전 3일에 걸쳐 안시성을 맹공격했으나 사기충천한 고구려의
안시성군은 외부와의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당군을 막아내고
끄떡도 하지 않았고 당 군은 더 이상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에 당나라 태종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당나라는 이 조그만 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채 20만명 이상의 전사자만 내고
고구려 정벌을 크게 후회하며 포기하고 되돌아간다.
마침내 88일 만에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안시성은 성둘레가 2.5키로 밖에 안되는 작은토성에 불과하였고 안시성주 이름은
양만춘이며 방어군은 2~3만명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당 군은 뒤이어 쫓아온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퇴하고, 태종은 결국 고구려 침공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고 만다.
*당태종은 눈에 화살까지 맞아
당군이 곧바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기후가 고구려를 도왔고
그해 9월 예년에 비해 추위가 일찍 찾아와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兵馬)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 것도 한 이유였는데
당태종이 퇴각할 때 안시성주인 양만춘이 성에 올라 절을 하자 황제가
안시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감복하여 비단 100필을 보냈다고 삼국사기에도 적혀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만주 토착민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당 태종이 철군을 명하자 안시성주 양만춘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는 바람에
당군이 큰 혼란에 빠져 인마가 서로 밟혔는데,
그 와중에 당 태종의 말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급기야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사로잡힐 위기에 몰렸다. 당의 장수 설인귀가 달려와
겨우 그를 구출했다’ 라고....
그뒤 몆달후 당태종은 병사하고 말았는데 눈의 상처가 골수에 침입해 죽었다는설이
유력하며 죽을때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 고 하며 죽었다고 한다.
*세계전사의 수수께끼
위 두 대첩은 세계전사상 수수께끼이다.
이렇게 두 개의 거대제국이 대군으로 두 번이나 대대적으로 소국인 우리땅을 넘봤으나
개망신만 당하고 돌아간것이다.
고구려는 연합군도 없이 단독으로 두번이나 싸워 이긴것이다.
이런 자랑스런 우리역사를 중국이 고구려역사를 자기네들 역사라고 왜곡하며
‘고구려는 자기네들 지방정권이다’ 라고 주장하는 헛된 망언을 일삼고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챙피해서 그럴까..)
역사의식을 정립하고 자랑스런 우리 조상들의 호국정신을 이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