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12목을 중심으로-
1)홍 영 의*
목 차
1. 머리말 4. 12목의 역사 지리적 조건과
2. 12목의 지방 지배영역 형성 원인 문화권
3. 12목의 지방영역 공간과 지역성 5. 맺음말
1. 머리말
고려는 다원사회를 기반하고 있다. 그 특징 중 하나가 고려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문화의 다양성(불교․유교․도교․풍수지리․민간신앙)과 사
상의 통일성(팔관회)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고려는 문벌귀족의 세련되고
화려한 중앙문화와 지방의 투박하지만 역동감 넘치는 다양한 지방문화(거
대 석불)가 상존하였다. 이는 지방 세력에게 근거지를 본관으로 삼도록
하고, 본관 지역의 중요성(행정․교통․전략․생산)에 따라 그곳을 다시
군현제(주현과 속현)로 편제하며, 국가가 필요로 한 물품 생산을 위해 부
* 국민대 국사학과 조교수
최근의 논문으로는 2012「개성 고려궁성 출토 명문기와의 유형과 요장(窯場)」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 보고서』‘2013’「한국 중세 고고학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과정 - 한국 중세 역사학의 고고학 자료 이용 활성화 -」『한
국중세사연구』36 : 2013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과 남겨진 유물」『북한의 문화
유산 연구』양사재 등이 있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44 … 한국학논총 (41)
곡제(향․소․부곡)와 같은 특수 행정을 설정했기 때문이다.1)
이 글은 고려시대 12목 중심의 지방 영역 관점에서 지역의식이 어떻게
발현하였는지를 살피는데 있다. 즉, 오늘날 지방제도의 근간인 고려시대
지방영역을 통해 지역성과 지역의식의2) 존재를 추적하고자 한 것이다. 현
재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한 지방의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신라의 국가 영역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유
민들은 끊임없이 신라의 통치권에 맞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경주 중심
의 차별정책에 맞섰다. 후삼국 시대도 이를 기반으로 성립하였고, 고려 무
인집권기간에는 농민항쟁과 함께 ‘삼국부흥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먼저 대도읍인 12목을 중심으로 지방 영역이 어떻게 설정되었
고, 지배영역(공간)이 시기에 따라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거점으로
유지되었는지를 찾고자 한다. 이는 고려사회에서 발현되는 지역성을 역사
지리적 조건에서 찾아 문화권의 형성과정과 범주를 규정할 수 있는지를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1) 박종기는 이를 ‘군현체체’라 하였다. 고려시대 군현의 내부구조는 군현제 영역과
부곡제 영역의 복합적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군현체제는 바로 이러한
영역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단순한 지방제도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였다(박종기, 2002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
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178쪽 참조).
2) 지역성(locality)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성을 말한다. 여기에는 여러 관습이나
문화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행정구역처럼 선을 그어 나눌 수 없다. 전통사회에서
개인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 강한 귀속감을 지니게 된다. 개인은 혈연집단인 가족
과 친족, 일부 인척까지 아우르고, 지연집단인 동향인 및 같은 지방 사람들에게
강한 애착심을 갖는다. 이러한 귀속감과 애착심은 자기정체성의 토대를 이룰 뿐
아니라 타 집단에 대한 강한 배타심과 편견을 가지도록 한다. 또한 지역주의
(regionalism)는 문화적 일체감을 공유한 지역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이기도 하지
만,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배타적 거리감을 특징으로 한다. 지역주의는 긍정적으
로 전개될 때에는 지역의 주체성 및 자율성을 지향하는 의미를 가지지만, 부정적
일 때는 지역집단별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만다. 종래의 지역주의를 오늘날에는‘지
방색(地方色, local color)’이라고 한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45
2. 12목의 지방 지배영역 형성 원인
고려의 지방통치 체제는 태조대에 일단의 정비를 맞았다가 성종대의
대폭적인 개편을 거쳐 현종대에 대체적으로 완성되었다.3) 태조대의 지방
제도 개편은 군현의 신설, 승격과 강격(降格), 주현 관계의 형성, 개명(改
名)이라는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4) 이 결과로 새로운 주가 생겨났으며,
군․현의‘내속(來屬)’관계가 발생하였다. 즉, 태조는 자신에게 귀부․협조
했거나 딸을 납비(納妃)한 지방 유력자의 출신지를 주(州)․부(府)로 승격
시켜준5) 반면 불복한 지역의 중심지에는 직속 군현이나 외관을 주둔시켜
통제하였다.6) 이때 생겨난 큰 고을은 광주(廣州)․충주․원주․청주․공
주․금주(金州)․양주․창녕군․상주․경산부(京山府)․전주․남원부․광
주(光州)․춘주(春州)․명주(溟州)․경주 등 16개 지역이었다.7) 강주(진주)
를 제외한 13개가 모두 9주 5소경 지역이었다. 9주는 고려시기에 목․방
3)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序文 “惟我海東 三面阻海 一隅連陸 輻員之廣 幾於萬
里 高麗太祖 興於高句麗之地 降羅滅濟 定都開京 三韓之地 歸于一統 然東方初定
未遑經理 至二十三年 始改諸州府郡縣名 成宗 又改州府郡縣及關驛江浦之號 遂分境
內爲十道 就十二州 各置節度使 其十道 一曰關內 二曰中原 三曰河南 四曰江南 五
曰嶺南 六曰嶺東 七曰山南 八曰海陽 九曰朔方 十曰浿西 其所管州郡 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 極於此矣 顯宗初 廢節度使 置五都護․七十五道安撫使 尋罷安撫使
置四都護․八牧 自是以後 定爲五道․兩界 曰楊廣 曰慶尙 曰全羅 曰交州 曰西海
曰東界 曰北界 惣京四 牧八 府十五 郡一百二十九 縣三百三十五 鎭二十九 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
之 今略據沿革之見於史策者 作地理志”
4) 박종기, 1987「≪高麗史≫ 地理志의 高麗初 年期實證」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
念韓國史學論叢 일조각 및 1988「高麗 太祖 23년 郡縣改編에 관한 연구」한국사
론 19 : 2002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97~129쪽 소수.
5) 김갑동, 1986「‘고려초’의 주에 대한 고찰」고려사의 제문제, 삼영사 ; 1990 나
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연구 고대민족문화연구소, 93~110쪽 ; 旗田巍, 1960
「高麗王朝成立期の府と豪族」法制史硏究 10 ; 1972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6) 김갑동, 1988 「고려 태조대 군․현의 내속관계형성」한국학보 52, 일지사 ; 위
의 책, 128~48쪽.
7) 박종기, 2002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120쪽 참조. 이
가운데 9주 5소경에 포함되어 있던 강주(진주)와 이외의 경주, 창녕군, 경산부는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 진주는 경덕왕 때 강주, 혜공왕 때 菁州, 고려 태조 때 강
주로 고쳐졌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46 … 한국학논총 (41)
어군․지사군․현령관 등 모두 주현으로 재편되었고, 5소경 역시 모두
목․지사부․지사군 등 주현이 되었다.8)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
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격(본관)
을 정했다. 이에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되었다.9)
이와 같은 군현제의 개편은 삼한공신의 책정,10) 역분전(役分田)의 제
정,11) 토성분정(土姓分定)12)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말년에는
8) 9주가 고려시기에 변동된 군현단위로는 목(4) 尙州牧․康州(晉州牧)․漢州(廣州
牧)․全州(全州牧) 방어군(1) 溟州, 지사군(3) 梁州․公州․朔州(春州), 현령관(1)
武州(海陽縣)과 5소경이 변동된 것은 목(2) 西原京(淸州牧)․中原京(忠州牧), 지사
부(1) 南原小京(南原府), 지사군(2) 金海小京(金州), 北原京(原州)이다. 통일신라의
군 가운데 경과 목, 도호부와 지사부, 방어군과 지사군, 현령관 등 주현이 된 군
은 36개로 전체 군의 30%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속군이나 속현이 되었다(박종기,
2002 앞의 책, 86~87쪽 참조).
9) 蔡雄錫, 1986「高麗前期 社會構造와 本貫制」高麗史의 諸問題 삼영사 : 2000 고
려시대의 국가와 지방사회 서울대 출판부 소수.
10) 삼한공신이 제정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936년(태조 19) 고려가 후삼국을 통
일한 뒤 940년 新興寺를 중수하면서 이곳에 功臣堂을 두고 동쪽과 서쪽 벽에 삼
한공신을 그려 넣었다(高麗史 권2 世家2 태조 23년 12월)고 하였으므로 936년
에서 940년 사이에 제정되었을 것이나, 삼한공신과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
신 사이에는 위계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신당에 오른 공
신이 삼한공신에 한정되었고 공신당 설치 이후 태조의 재위기간이 3년에 불과하
므로, 삼한공신은 태조공신이나 개국공신 등 태조대의 공신을 총괄하는 것이라
고도 볼 수 있다. 이때 책봉된 사람들은 통일전쟁에 직접 참여한 태조의 막료뿐
만 아니라, 태조에게 협력한 각 지방의 유력자와 그의 막료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개국공신은 태조 즉위 후 2달 뒤에 3등급으로 나누어 포
상하였는데, 1등에 洪儒․裴玄慶․申崇謙․卜智謙 등 4명, 2등에 堅權․能寔․權
愼․廉湘․金樂․連珠․麻煖 등 7명, 3등에 2천명에 이른다(高麗史節要 권1
태조 원년 8월).
11) 高麗史 권78, 志32 食貨1 태조 23년 “初定役分田, 統合時朝臣軍士 勿論官階 視
人性行善惡 功勞大小 給之有差”.
12) 고려는 분권적인 지방사회를 국가 지배질서 속에 편제해 중앙 권력을 공고히 하
고 원활한 국가 통치와 세금 수취를 위해 태조 23년(940) 토성분정 정책을 시행
하여 그 지역의 유력한 세력에게 성씨를 부여하였다. 이를 토대로 점차 사람들
이 성과 본관을 갖게 되었다. 본관은 후대에는 姓貫의 기능만 남으면서 父系 성
씨혈연을 확인하고 문벌을 가리는 수단이 되었지만, 고려 초기 성립할 당시에는
사회편제방식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본관제의 기능과 변화되는
모습에 대해서는 채웅석, 1991「본관제의 성립과 성격」역사비평 13, 역사비평
사 참고.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47
군․현 단위의 작은 고을과 큰 고을이 섞여 있었고 이들 지역에는 외관
이 파견되지 않아 대체로 지방 유력자가 이를 통치하였다. 태조는 서경
(西京)을 중심으로 왕실세력의 기반을 보완하거나 군사상 목적에 진(鎭)
과 도독부(都督府)․도호부(都護府) 등에 외관을 파견하여 특정지역을 경
영하였을 뿐이었다.13)
이러한 군현제의 혼란상은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성종대에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 중 지방제도에 관한
건의를 받아 들여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했다.14) 이때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였다.
성종 2년에 12목이 설치된 지역은 양주․광주(廣州)․충주․청주․공
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昇州)․해주․황주(黃州) 등이었다. 이
렇듯 전국을 대읍 중심의 12개 영역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동시에 지역의 핵심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15)
국경지대인 동북계와 서북계에는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주․진에 방어사
(防禦使)․진사(鎭使)․진장(鎭將)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고려초기의 지방
행정은 민정적(행정)인 12목과 군정적인 제주진사(諸州鎭使)의 이원체제
로 성립되었다.
12목은 통일신라기 9주 5소경에 해당하는 지방행정상 주요한 곳이었다.
다만, 통일신라 때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이 지방행정 구역으로 편입되
13) 태조대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최승로는 上書文에서 “우리 聖
祖(太祖)께서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초창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습니다”(高麗史 권93, 列傳6, 崔承老)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고려 태조의 왕권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지방은 여전
히 지방의 유력자들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고, 중앙정부에서는 각 지방에 지
방관을 직접 파견하여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4) 성종은 원년(982) 6월에 京官 5품 이상에게 각각 封事를 올려, 時務의 득실을 논
하게 하였는데(高麗史 권3, 世家3, 성종 원년 하6월 갑신), 이때 崔承老가 올린
시무 28조 중 지방제도에 관한 건의를 받아 들여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15) 성종 2년의 12목 파견은 고려 초기까지 유지되던 9주의 관념과 대비하여 천하가
확대되었다는 의식을 담고 있으며, 한편으로 왕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운영
체계의 수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윤경진, 2005「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 9州․12牧과의 연결성을 중심으로-」한국
문화 36.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48 … 한국학논총 (41)
고, 황해도 지역이 빠졌지만, 12목 설치 때에는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황
해도 지역이 북방상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강원도가 빠진 것은 전국을
체계적으로 통할하지는 못하였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16)
이후 고려 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12목을 보완하였다. 12목 설치 초기
에는 외관만을 부임케 하였지만, 점차 처자들을 거느리고 부임토록 하
여17) 안정된 생활기반 위에서 지방행정에 전념토록 하였다. 또한 경제적
기반조성에도 힘써 성종 2년 주․부․군․현․관(館)․역(驛)에 전지(田
地)를 지급하였다.18) 성종 6년(987) 8월에는 12목마다 경학박사(經學博士)
와 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씩을 보내 지방 교육을 담당케 하고 지방의
유교적 소양이 뛰어난 자나 의술이 있는 인재는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
다.19) 성종 12년(993)에는 양경(兩京)과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
여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도록 했다.20) 이러한 중앙의 12목에 대한 관심
은 일반 주군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성종 14년(995) 12목에 절도사를 두는 한편 전국을 10도로 나누는 개편
을 단행하였다. 이 때 설치된 10도는 관내도(關內道, 서울․경기 일대)․
중원도(中原道, 충북 청주․충주 일대)․하남도(河南道, 충남)․강남도(江
南道, 전북 남원 일대)․영남도(嶺南道, 경상도 일대)․영동도(嶺東道, 경
주․울산․김해지역 일대)․산남도(山南道, 경남 진주․합천일대)․해양도
(海陽道, 전남 일대)․삭방도(朔方道, 강원도․함남 일대)․패서도(浿西道,
서해․황해도 일대) 등으로 128주․449현․7진이 소속되어 있었다.21)
16) 기존의 연구에서 12목은 楊州, 廣州, 淸州, 忠州, 公州, 晉州, 尙州, 全州, 羅州,
昇州, 海州, 黃州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서 12목의
하나로 설명된 것은 廣州, 淸州, 忠州, 公州, 晉州, 尙州, 海州, 黃州 등 8개이다.
나머지 4개는 뒤에 12州 節度使가 설치되는 지역에서 역으로 추정한 것이다. 12
목으로 확인되는 8개 주가 모두 12주 절도사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
은 별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윤경진은 楊州와 昇州 대신 慶州와 金州
를 12목에 포함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윤경진, 2005, 앞 논문, 74~75쪽 참조).
17) 高麗史節要 권2, 성종 6년 8월.
18) 이에 더하여 12년에 州․府․郡․縣․驛路에 公廨田柴를 지급하였다(高麗史
권78, 志32, 食貨1, 田制 田柴科).
19) 高麗史節要 권2, 성종 6년 8월. 김아네스, 2002「고려 성종대 유교 정치사상의
채택과 12州牧」震檀學報 93.
20) 高麗史節要 권2, 성종 12년 춘2월.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49
10도제는 종래 12목의 주(州) 중심에서 이를 포함하는 광역의 지방제도
로 전환한 것이다.22) 그런데 이 조치는 실제 행정면에서는 큰 성과를 거
두지 못하였다. 10년 후인 목종 8년(1005)에 12절도사(節度使)와 4도호부
(都護府), 동서북계(東西北界)․방어진사(防禦鎭使)․현령(縣令)․진장(鎭
將)만을 두고, 나머지 관찰사(觀察使)․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練
使)․자사(刺史) 등이 모두 혁파되었다.23)
현종 9년(1018)에 지방제도가 대폭적으로 개편되었다. 지방 영역을 4도
호 8목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56개의
주․군, 28개의 진, 20개의 현으로 편성되었다. 8목은 광주․충주․청주․
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이었다.24)
그리고 현종 9년의 외관제 개편으로 전국에 파견된 외관의 숫자는 성
종 14년 80명에서 116명으로 증가되어 집권적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이
와 함께 지방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책이 단행되었다.25) 이후 지방제
도와 지방세력 통제책은 덕종․정종을 거쳐 문종대에 이르면 제도적으로
21)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序文.
22) 이에 대한 연구는 윤경진, 2006 「고려초기 10道制의 시행과 운영체계」震檀學
報 101.
23) 高麗史節要 권2, 목종 8년 3월 汰外官 唯置十二節度四都護東西北界防禦鎭使縣
令鎭將 其餘觀察使都團練團練刺史悉罷之.
24)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序文.
25) 첫째는 州府郡縣의 丁의 대소에 따라, 戶長․副戶長 등 향리의 인원수를 규정하
였다(高麗史 권75 志29 選擧3 銓注 鄕職. 현종 9년). 둘째는 이직의 公服 제정
이다. 즉 호장 이하 「史」급에 이르기까지 공복을 그 직의 고하에 따라 구분하
였던 것이다(高麗史 권72, 志26, 輿服 冠服). 셋째는 지방관의 임무로서 이직
에 대한 감찰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현종 9년 2월에 州府의 관원이 봉행해야
할 6조를 새로 제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2조목이 이직에 대한 감찰로 되어 있다.
즉 제2조는 黑綬長吏의 能否를 살피는 것이고, 제6조는 향리의 鎭穀散失을 살피
는 것이다(高麗史 권75, 志29, 選擧3, 選用守令 현종 9년 2월). 그리고 각 지방
에 파견된 지방관은 그 지방의 호장을 직접 擧望하여 給貼하게까지 되었다(高
麗史 권75, 志29, 選擧3, 鄕職 현종 9년판). 이렇게 됨으로써 지방세력은 제도적
으로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는 향리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주현의 長吏가 병으
로 100일 동안 이직에 종사하지 못하면, 경관의 예에 따라 그 지방관이 해당 장
리를 파직하고, 지급한 토지를 환수하는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高麗史 권75,
志29, 選擧3, 鄕職 현종 16년 2월). 吏職의 임면도 지방관이 결정할 수 있을 정
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50 … 한국학논총 (41)
더욱 보강되었다.26) 예종대의 속현(屬縣)에 대한 감무 파견을 통해 중앙
집권화의 진전 내지 제도 정비를 되었다. 당시 국가의 입장에서 유민안집
(流民安集)과 더불어 소(所)의 장악 및 수조권자에 대한 통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7) 이에 고려정부는 유망과 항쟁의 대책으로 12세기 초에 감
무와28) 안찰사를 파견하였다.29) 당시 가장 크게 대두된 사회문제는 수령
들의 사리(私利)로 생민(生民)들이 유망한다는 데 있었다.30) 이를 막기 위
해 감찰관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안찰사는 기존의 외관 체제를 유지하는
선상에서 외관의 관리, 감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감무는 인종․명종․공양
왕 때까지 계속해서 파견되었다. 이후 군현제와 부곡제의 복합적이고 계
서적인 고려 특유의 군현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전체 500여 개 군현
과 900여 개의 부곡제 지역이 조선 초기에 330여 개로 그 수가 크게 줄
어들었으며, 이는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왕조 교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
다.31)
26) 高麗史 권75, 志29, 選擧3, 鄕職 문종 5년 10월․동 16년 3월․동 23년 3월.
27) 李仁在, 1990「고려 중․후기 지방에 개혁과 감무」外大史學 3.
28) 高麗史 권12, 世家12 睿宗 元年 4월. 예종 때 처음으로 儒州․安岳․長淵 등에
감무를 두었다가, 이후에 牛峯 등 24개 현으로 지역이 확대되었다. 감무파견은
고려 중기 이후 陳田개발, 山田개발, 新種子의 보급, 수리시설의 확대 등과 같은
농업기술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받아 屬縣이 성장하게 되면서 종래의 속현과는
달리 하나의 군, 현 단위로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군현이 다수 존재하
게 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金秉仁, 1994
「高麗 睿宗代 監務의 設置背景」全南史學 8 : 元昌愛, 1984 「高麗 中․後期
監務增置와 地方制度의 變遷」淸溪史學 1 : 金東洙, 1989 「고려중․후기의
監務 파견」전남사학 3 : 朴宗基, 2008 「고려 말 왜구와 지방사회」한국중
세사연구 24 : 김병인, 2010 「고려 명종대 監務 파견의 정치적 성격」한국중
세사연구 29.
29)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박종진, 2003「고려시기 안찰사의 기
능과 위상」東方學志 122 : 윤경진, 2013 「고려 按察使의 연원과 ‘五道按察使’
의 성립」한국문화 61.
30) 高麗史節要 권12, 숙종 10년(예종 즉위년) 12월.
31) 박종기, 2002, 앞의 책 483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51
<표 1> 고려시대 각 도별 군현 현황
왕경개성부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 서해도 동계 북계
목 3 2 2 1 8
도호부 1 1 2 2 1 2 9
주현 10 10 13 3 7 27 70
속군 1 22 25 13 5 3 43 112
속현 12 75 89 74 20 14 17 4 305
14 111 128 104 28 25 45 49 504
* 동계는 안변도호부(등주) 예하에 속현 7, 防禦郡 9, 鎭使 3, 鎭將 7, 현령관 8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계에는 서경유수관(평양부) 예하에 속현 4, 안변대도호부(녕주) 예하에 防禦郡
25, 鎭 12, 현령관 6개로 되어 있다.
3. 12목의 지방영역 공간과 지역성
통일신라시기 군현제는32) 기본단위인 ‘주(州)’는 광역 행정단위로서의
의미와 치소가 위치한 고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33) 광역 행정구
획으로서의 주는 관내 민의 충성심을 진작시키는 이념교육적인 사안 등
을 주로 다루었으며,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은 관내의 성곽 등 군사시설
을 점검하거나 유사시 관내의 병권을 장악하여 군사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34) 통일신라 9주의 주치(州治)가 위치한 고을은 한주(漢州), 삭주
(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상주(尙州), 전주(全州), 청주(菁州), 양주
(良州), 무주(武州) 등으로 광역단위의 지역중심지로 기능하였던 곳이었다.
신라 각 방면의 주요 거점이자 지역중심지였던 5경(5소경)은 중원경(中
原京), 북원경(北原京), 서원경(西原京), 남원경(南原京), 김해경(金海京) 등
이었는데, 통일신라기에 이르러 5경은 정치적․행정적 비중보다는 지역
거점과 지방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의미가 강해지면서 그 위상은 하위 행
32) 신라의 군현제는 7세기 말 신문왕대(681~692)의 9주 5소경제에서 비롯한다. 이
를 바탕으로 경덕왕대(742~765) 군현 개편, 애장왕대(800~809)의 郡邑彊境의
개편과 이후 鎭의 설치와 府制의 실시 등과 같은 일련의 군현 정비가 있었다(박
종기, 2002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94쪽 참조).
33) 金在弘, 1991 「新羅 中古期의 村制와 地方社會 구조」한국사연구 72.
34) 姜鳳龍, 19991「統一新羅 州郡縣制의 構造」白山學報 52, 563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52 … 한국학논총 (41)
정단위인 ‘군(郡)’과 동격으로 간주되고 주의 예속 하에 놓이게 되었다.35)
5경은 지방 행정단위의 중심지이자 피정복 지배층에 대한 견제 및 회유
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9주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각 3주
씩 배정되었으며, 5소경은 고구려․백제․가야의 옛 땅에 설치되었다. 9주
의 치소와도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자연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독자적인 영역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5경은 통일신라시기에도 여전히
지역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9주와 5소경은 고려의 후삼국통일 직후에도 모두 ‘주’와 ‘부’
의 읍격으로 호칭되었는데, 부 역시 주와 동급으로서 중심지적 성격을 강
하게 가지고 있는 행정단위였다.36)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태조
23년(940)의 군현개편을 기준으로 한주는 광주(廣州)로, 삭주는 광해주(光
海州)로 바뀌었다가 춘주(春州)로, 웅주는 공주(公州)로, 청주는 강주(康
州)로, 양주(良州)는 양주(梁州)로,37) 무주는 광주(光州)로 각각 개칭되었
고, 상주․전주․명주는 신라 때의 명칭 그대로 사용하였다. 5경의 경우,
중원경은 충주(忠州)로, 서원경은 청주(淸州)로, 북원경은 원주(原州)로,
김해경은 김해부(金海府)로, 남원경은 남원부(南原府)로 개칭되었으며, 신
라의 왕경은 경주(慶州)가 되었다. 즉, 통일신라의 전통적인 지역중심지들
은 후삼국통일 직후인 태조 23년의 군현개편 이후에도 여전히 주와 부의
칭호로 불리면서 중심지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에 태조 23년 개명되었다고 알려진 통일신라의
9주나 5소경 중 고려의 판도 내에 포함되었던 지역의 명칭은 이미 후삼
국시기부터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춘주․광주(廣州)․원주․명
주․충주․청주․공주 등은 그 명칭의 존재가 이미 후삼국시기부터 확인
되므로,38) 실질적인 개명은 후삼국시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지역들
35) 강봉룡,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5~206쪽
참조.
36) 행정단위로서 ‘府’가 지니는 제도적 연원에 대해서는 윤경진, 2000 앞의 박사학
위 논문, 54~63쪽 참조.
37) 良州의 경우 慶尙道地理志의 기록과 함께 검토하면, 태조 23년 이전 어느 시
기 中興府가 되었다가, 태조 23년에 梁州가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38) 과거 북원경이었던 원주만이 태조 23년에 처음 확인되지만, 다른 지역의 사례를
통해서 볼 때 원주의 개명 역시 후삼국통일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53
현재 지역(고려) 9주 5소경 12목 비고
경기도(양광도) 한주
광주
신설
양주
황해도(서해도) -
황주
신설
해주
충청도(양광도) 중원경 충주
의 개정 읍호 역시 모두 주였기 때문에, 후삼국시기에 들어서도 이들은 모
두 각 방면의 주요 지역거점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39)
12목으로 확인되는 광주․공주․진주․상주․전주 등 5개는 기존의 9
주와 일치한다. 나머지는 후삼국 통일과 북방 개척에 따른 영역의 확대와
광역권 분할의 중심이 되는 경주에서 개경으로 왕경(王京)의 위치가 바뀌
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경주는 신라 왕경이 지방 도시로 개편되는데 이는 그 위상을 확
보하는 조치였으며, 해주와 황주는 9주 설정 당시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신개척지이다. 이들은 영역 확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머지 네 곳은 왕
경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개경을 기준으로 볼 때 경상도 동남부 지역
은 내륙 쪽인 양주(良州, 梁州)보다는 해상 교통로와 연결되는 금주(金州)
가 중심지로 인식되었다. 나주는 앞서 무주를 대신하는 광역권의 중심지
로 설정된 적이 있지만, 이 때 다시 무주를 대신해서 12목이 되는 것은
역시 해상 교통로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명주와 삭주(朔州)는 경주에서 출발하는 남북 방향의 종적인 교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보면 동서 방향의
횡단로 상에 있게 되어 왕경과 지방을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의미가 반감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충주와 청주는 신라의 소경(小京) 지역으로 과거
경주에서 소백산맥을 넘어선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개경에서 내려
오는 교통로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어 12목으로 선택된 것으로
이해된다.40)
<표 2> 신라 9주 5소경과 고려 12목 지역
39) 정요근, 2008「後三國時期 高麗의 남방진출로 분석」한국문화 44.
40) 윤경진, 2005, 앞 논문 75~76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54 … 한국학논총 (41)
현재 지역(고려) 9주 5소경 12목 비고
서원경 청주
웅주 공주
경상도
상주 상주
강주 진주
良州- 소멸(梁州)
금관경 - 소멸(금주)
전라도
전주 전주
- 나주 신설
무주 - 소멸(광주)
- 승주 신설
남원경 - 소멸(남원부)
강원도(교주도)
삭주 - 소멸(춘주)
명주 - 소멸(명주)
북원경 - 소멸(원주)
* 진한 표시 지명은 현종 때의 8목임
이렇게 통일신라 때 설치된 9주 5소경의 대부분 12목으로 편제되어 중
시되었다. 9주 5소경 가운데 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
등은 그대로 대읍으로 유지되었고, 양주․나주․승주․해주․황주 등은
새로운 대읍으로 주목되었다. 이들이 대읍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광주의 경우는 태봉이 한강 이남방면으로 진출할 때에 최우선으로 확
보하였던 곳이며, 궁예(弓裔)가 양길(梁吉)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비뇌
성(非惱城)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였다.41) 충주는 고려의 낙동강 유역 방
면으로의 진출을 위한 배후기지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고려와 후백제 사
이에 치열한 대결이 벌어졌던 공주와 청주․상주․강주 등은 양국 모두
에게 주요한 거점으로 간주되었다.42) 한편 후백제의 영역에 포함된 주
치․소경이었던 곳들의 경우에도,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이었고, 견훤(甄
萱)의 최초 근거지였던 무주는 전주 천도 후에 견훤의 사위인 지훤(池萱)
이 주둔할 정도로43) 후백제에 의해 중시되었다.
41) 정요근, 2008「後三國時期 高麗의 남방진출로 분석」한국문화 44, 5~6쪽 참조.
42) 정요근, 2008 앞의 논문, 6~8쪽, 11~18쪽 참조.
43) 高麗史 권57, 志11 地理2 海陽縣.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55
또한 고려와 후백제 간 직접적인 대결지역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였
던 명주․원주․춘주․양주․김해부 등도 역시 지역거점으로 중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명주는 궁예가 한때 휘하병력을 이끌고 머물렀던 곳이었으
며, 궁예가 떠난 이후에는 순식(順式)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고
려의 통일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원주는 한때 대세력을 형성한 바 있는
양길(梁吉)의 근거지였다. 광해주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태조 4년(921)
달고적(達姑狄)의 신라 침입을 중간에서 패퇴시킨 견권(堅權)이 진수(鎭
戍)하던 곳이었다.44) 양주(良州)는 김인훈(金忍訓)이 토착세력으로 웅거하
고 있었던 곳이었으며,45) 태조대 고려의 판도 내에 들어온 다음에도 중흥
부(中興府)로 개명되어46) 낙동강 하류일대의 통제와 장악을 위한 거점으
로 기능하였다. 김해부 역시 일찍부터 김인광(金仁匡) 및 소충자(蘇忠
子)․소율희(蘇律熙) 형제 등의 유력자가 독자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47)
그러므로 나말 여초기에 전통적인 지역중심지라 할 수 있는 9주의 주
치는 고려나 후백제의 주요 거점이거나 양국 간의 격전지역, 혹은 반독립
적인 유력자들이 독자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다. 남원부의 경우
는 후백제의 판도 안에 포함되어 있어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로부터 신라
왕경 및 강주 방면으로 동진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9주와 5소경과 같은 전통적인 지방 중심지들은 후삼국시기에도
여전히 지역거점으로 중시되었기 때문에, 각 지방의 유력세력들은 타 지
역에서 발흥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갖춘 후에 이들 지역으로 이동하여 자
신의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궁예는 독자적인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
에서 명주에 머무른 바 있으며, 견훤은 무주를 도읍으로 삼았다가 전주로
옮겼다. 굳이 궁예나 견훤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금관성(金官城)을 공
취(攻取)하고 성주장군이 되었던 충지잡간(忠至匝干, 소충자와 동일인물)
44) 高麗史 권1, 世家1 태조 4년 2월 임신 ; 三國史記 권12, 新羅本紀 景明王 5
년 2월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6, 春川都護府 名宦.
45)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즉위전 天復 3년. 김인훈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종봉, 2003「羅末麗初 梁州의 動向과 金忍訓」지역과 역사 13, 89~99쪽 참조.
46) 慶尙道地理志 慶州道 梁山郡.
47) 崔柄憲, 1978「新羅末 金海地方의 豪族勢力과 禪宗」韓國史論 4, 403~408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56 … 한국학논총 (41)
의 사례도48) 그가 금관성 외부에서 성장하여 세력을 확대한 다음 금관성
을 공격․장악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성장하는 지방 유력자의 지역
중심지 장악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확대할 수 있는 필수적인 방책이
었을 것이므로, 후삼국시기에 이르면 각 지역의 전통적인 대읍들은 지역
유력세력의 공략목표가 되었다.49)
고려의 입장에서도 남방경략의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읍을 확보하여 거
점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해당 지방의 유력세
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청주나 공주․상주 등 접경
지역의 대읍을 확보하고자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던 모습은50) 후삼국시기
고려와 후백제 양국이 모두 전통적인 지역중심지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어 영역확대의 거점으로 삼고자 경쟁하였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하
지만 청주와 같이 이질적인 성격을 지닌 복수의 지방세력이 존재하는 곳
에서는 양국 간 대결상황의 변동에 따라 모반이나 지방세력의 이탈 가능
성이 상존하고 있었다.51)
또한 상주와 같은 곳은 뚜렷한 토착세력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상주가 지니는 요충지적 장점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고려와 후백제는 상
주를 확보하고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52) 고려와 후백제 간의 최종
대결이 상주 인근의 일선군(一善郡) 일리천(一利川)에서 벌어졌던 사실도
마지막까지 전개되었던 상주 일대에 대한 양국 간의 영향력 확보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상주의 지방세력이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삼국통일 이후에도 상주는 여전히
48) 三國遺事 권2, 紀異2 駕洛國記. “新羅季末 有忠至干者 攻取金官高城 而爲城主
將軍”
49) 정요근, 2008「後三國時期 高麗의 남방진출로 분석」한국문화 44.
50) 정요근, 2008 앞의 논문, 7~8쪽, 11~16쪽 참조.
51) 청주지역 호족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할 것. 安永根, 1992
「羅末麗初 淸州勢力의 동향」朴永錫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上, 탐구당 ; 金周
成, 1988 「高麗初 淸州地方의 豪族」韓國史硏究 61․62합집 ; 김갑동, 1990
앞의 책 ; 鄭淸柱, 1996 新羅末․高麗初 豪族硏究, 일조각 ; 申虎澈, 2002 後
三國時代 豪族硏究 충북대 출판부.
52) 상주를 둘러싼 고려(태봉)와 후백제 간의 대립에 대해서는 정요근, 2008 앞의 논
문, 7~8쪽, 20~21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57
지역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53)
한편 강주의 경우는 지방유력자가 고려에 귀부했다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고 다시 후백제에 복속하였지만,54) 강주는 후백제의 통치 하에서는 물
론 후삼국통일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역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
다.55)
결국 9주와 5소경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지역 중심
지들은 신라의 지방 지배력이 와해된 후삼국시기에도 고려나 후백제, 혹
은 독자적인 지방세력들에 의해 여전히 주요 대읍으로 간주되어 모두 주
나 부의 칭호로 불리면서 중시되었다. 고려와 후백제 간 접경지대에 위치
한 곳들은 양국이 각각 거점으로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상쟁을 벌였던
접전지역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해당지역 근방에서 발흥한 유력
세력 역시 9주의 주치나 5경과 같은 통일신라 이래로의 전통적인 대읍을
장악한 후 인근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을 정도로, 신라 지방통
제력의 작동 여부와는 상관없이 후삼국시기에도 전통 대읍들은 여전히
지역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4. 12목의 역사 지리적 조건과 문화권
고려의 12목 가운데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름이 살아 있는 경
우는 경상도의 상주, 전라도의 전주와 나주, 충청도의 충주와 청주 등이
다. 이들은 현재 각각의 도청 소재지였거나, 지역 거점이다. 쇠퇴의 길을
걸었어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은 양광도(경기도)의 양주와
광주이며, 교주도(강원도)의 삭주는 춘천으로 존재하고 있다. 한편 북원주
였던 원주나 명주인 강릉은 조선시대 이후 다시 강원도의 중심 소재지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럼 당대인들은 이 지역을 어떻게 보았을까? 이 12
53) 정요근, 2008「後三國時期 高麗의 남방진출로 분석」한국문화 44.
54)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3년 정월 ; 태조 11년 5월 경신.
55) 康州는 후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때에도 神劒의 동생인 良劒이 都督으로 임명되
었을 정도로(三國史記 권50, 列傳10 甄萱) 후백제에 의해 중시되었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58 … 한국학논총 (41)
목에 대한 역사지리적 조건과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A-양광도 1 : 광주(廣州)․양주(楊州)
광주(廣州)는 한강과 인접한 곳으로 ‘광주 형세를 보니 3면은 높은 산
이요, 북쪽은 비록 틔여서 넓으나 지세가 낮아서’,56) ‘한수(漢水)의 남쪽으
로 토양이 기름지다’,57) ‘광주는 중부지방의 거진(巨鎭)이기 때문에… 남
로 요해처에 해당하여’,58) ‘광주는 삼한의 여러 목(牧) 중에서도 으뜸을
차지하는 곳이다’59)라고 하였다. 때문에 이중환은 ‘여주 서쪽은 광주로,
석성산(石城山)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溫
祚王)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刃)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
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인조가 성에서 내
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江華)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60)라고
하여, 광주의 ‘중부지방의 거진(巨鎭)’과 ‘남로 요해처’로서의 전략적 요충
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광주는 신라 때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 지역으로 궁예의 태봉
에 속하였다가 왕건의 고려에 귀속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정치 군사적으
로 중시되어 온 곳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광주는 개경에서 동경(경주)
를 잇는 교통망 가운데 제2로에 속해 있었다. 즉 개경→청교역→남경(한
양)→광주→이천→충주→계립령→문경→상주→해평→대구→동경이었다.
특히 광진을 통과해 강동구 지역을 거쳐 덕풍역이나 경안역 방향으로 내
려가는 제2로가 중요시되었다. 이처럼 광주는 고려시대에 한강을 건너 남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주로 거쳐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때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광주 이씨로 추정되는 왕규(王規)였다.
왕규는 궁예 휘하의 왕건이 899년에 이곳을 정벌할 때 협조하면서 처음
5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6, 京畿 廣州牧 樓亭.
5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6, 京畿 廣州牧 形勝.
58) 김용선, 2007 高麗墓誌銘集成 일조각, 187. 李世華墓誌銘.
59) 稼亭集 권3 記 大元高麗國 廣州神福禪寺重建記文.
60) 擇里志 팔도총론 경기도.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59
정계에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서
왕씨는 확인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왕씨가 아니라 태조 왕건
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두 딸은 태조의 제15비
(妃)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과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은 제16비 소광주
원부인(小廣州院夫人)이 되어 왕실의 외척으로서, 광주를 기반으로 막강
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61) 왕규는 태조 때에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자기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몇 차례 혜종을 죽
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규와 함께 처단된 무리가 300명이란 사실
은 그가 당시 정계의 유력자였고, 그 바탕에는 한강의 수운(水運)을 장악
해 축적한 그의 정치․경제 기반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광주는 거란과의 전쟁기에 주목을 받았다. 1011년(현종 2) 1월에
현종이 거란의 침공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개경을 버리고 몽진하는 도
중에 온갖 신변의 위협을 당한 현종이 행방불명되었던 두 왕후를 요탄역
(饒呑驛)에서 찾은 직후에 머문 곳이었다. 현종이 광주에서 3일이나 머물
렀다는 사실은 현종 입장에서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62) 또한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이
위험해지자 복주(안동)로 피난할 때도 거쳐 간 곳이었다. 공민왕은 10년
(1361) 11월에 임진강을 넘고 양주의 영서역을 거쳐 광주 경내에 이르렀
다. 왕은 사평원에서 개경 감무로부터 말 100여필을 받고 광주에 도착했
다. 왕의 행렬은 광주 관내의 경안역과 이천현을 거쳐 음죽현, 충주를 경
유해 안동에 도착한다.63)
이는 몽고의 2차 침입 당시 광주부사 이세화(李世華, ?~1238)가 일장
성(日長城, 남한산성)에서 군민들과 함께 살리타이의 몽고군을 맞아 성을
굳게 지켜 승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1235년에 고종이 광주
민들에게 1231년과 1232년 전투의 공으로 세금을 집단적으로 면제해주는
61) 심재석, 2005「高麗 惠宗代 王規의 廣州院君 옹립모의와 定宗의 卽位」역사문
화연구 특별호.
62) 홍영의, 2010「고려 현종의 나주 南幸시 공주 경유의 배경과 의의」한국중세사
연구 29.
63) 홍영의, 2004「공민왕의 반원개혁과 안동몽진의 추이」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시․안동대 민속학연구소.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60 … 한국학논총 (41)
조치를 취한 것도64) 광주민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몽골
군은 광주를 함락시키지 못한 채 용인으로 남하하고 말았다.
또한 최우 무신정권기인 1222년(고종 9)에 진위현 사람인 영동정 이장
대(李將大)와 직장동정 이당필(李唐必)이 같은 현 사람 별장동정 김례(金
禮)와 함께 봉기하였다. 그들은 많은 무리를 불러 모아 현청을 습격하여
현령의 신표(信標)를 겁탈하였으며, 창고를 열어 구휼하니 촌락의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호응하였다 한다. 그들은 인접한 고을에 통문을 보내 스스
로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 자신의 무리를 ‘의병(義兵)’이라 칭하였다. 그
들이 장차 광주를 침입하려 하자, 고종은 낭장 권득방(權得才), 산원 김광
계(金光啓) 등을 보내 안찰사 최박(崔博)과 함께 광주와 수주(수원)의 군
사를 보내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중앙정부는 충주, 청주, 양주 방면의
군사까지 동원하고서야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공민왕의 후원을 받아 집권한 신돈이 재상과 함께 광주 천왕사의
사리를 개경의 왕륜사에서 맞이한 적이 있었으며, 우왕 14년(1388)에 임
견미․염흥방의 세력이 최영과 이성계에게 제거될 때, 임견미․염흥방 당
의 아내와 딸들은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광주를 경유하였다. 풍양현 출
신으로 광주의 몽촌 고탄성에 우거하고 있던 조운흘(趙云仡)이 그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광주의 토성으로 이(李)․안(安)․김(金) 등과 가속성(加屬姓)으로 박
(朴)․노(盧)․장(張) 등이 있지만,65) 왕규의 몰락으로 광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2목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전략과 교통의 요충지였음에
도 불구하고 뚜렷한 행적을 남긴 광주 출신 인물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
받침한다. 광주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이곳 출신 인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의 토성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고려
말로 가면서 사회변동의 폭이 넓어지자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고
려 말 정치 개혁에 참여한 광주 이씨인 이집(李集)이나66) 조선 건국에 반
64) 高麗史 권80, 지34, 식화3 진휼.
65) 世宗實錄地理志 京畿道 광주목 토성조.
66) 이집은 공민왕 때 성격이 강직하여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다가 해를 입히려 하자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61
대하여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광산(光山) 김씨의 김약시(金若時), 평양(平
壤) 조씨인 조견(趙絹), 경주(慶州) 김씨인 김자수(金自粹)와 광주 안씨인
안성(安省)은 이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다.
진흥왕 14년(553) 신주(新州)였던 하남시 춘궁동, 교산동, 하사창동 일
대는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지(治所址)로 주목되었다. 때문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현재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대형 사찰(3층 및 5층
석탑)과 상사창리의 천왕사(天王寺, 춘궁리철조석가여래좌상)는67) 고려 초
기의 지방세력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신복선사
(神福禪寺), 약정사(藥井寺), 자화사(慈化寺), 동사(桐寺), 봉수사(奉水寺),
선법사(禪法寺, 태평 2년명 마애약사불좌상)가 있었다.68)
개경과 광주 사이를 잇는 양주(楊州)는 ‘농업과 누에치는 일을 주업으
로 하며 1년 내내 열심히 일한다.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한 까닭
에 장사와 수공업에도 즐겨 종사한다’라고69) 하였다. 한편 목은 이색은
‘깎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라고70) 하였다.
부친을 업고 경상도 영천에 도망해 숨어 지내다가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경사
(개경)로 돌아왔다. 봉순대부 판전교시사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여주의 천
녕현에 퇴거하여 躬耕讀書하였다. 학문이 고매하여 이색, 정몽주, 이숭인과 교유
하였는데 모두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한다. 섭기에 해당하는 이당의 대 무렵부
터 중앙으로 서서히 진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67)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天王寺址는 목탑지가 남아 있는 대형 평지절터이다. 문
헌상으로는 고려 태조 대부터 조선 세종 대까지의 기록이 남아있고, 2차례 실시
한 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사찰터로 알려졌지
만, 창건연대를 알려줄 만한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유적에서는 용도미상의 소성
유구와 수혈유구, 폐와시설 등 사찰과 관련된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내․
외면에 격자 타날된 ‘天王’명 壺와 이외에도 卍, 又且, 官, 千 등의 명문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의
내용으로 원종국사(869~958)가 ‘廣州 天王寺’에 머물렀다는 단편적인 기록이다.
이 외 高麗史․高麗史節要 에는 신돈이 천왕사 탑에 모셔져 있던 불사리를
개경의 왕륜사로 옮긴 기록이 나타나고, 世宗實錄에는 불사리를 궁으로 옮긴
사실 등 고려시대 이후 불사리를 중심으로 한 기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노윤
상, 2012「河南 天王寺址 出土 二重蓮瓣 막새의 제작시기 檢討」신라문화 39).
68) 황보경, 2000「河南地域 佛敎遺蹟에 대한 硏究」고문화 56.
69) 輿地圖書 양주목 풍속.
70)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1, 京畿 楊州牧.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62 … 한국학논총 (41)
양주는 898년 궁예가 송악(松嶽)의 성을 수리하고 왕건을 정기대감(精
騎大監)으로 삼아71) 양주와 견주를 점령하여 자신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
킨 지역이다.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은 항복한 견훤에게 상보(尙父)라 하고
남궁(南宮)을 관사(館舍)로 주었으며, 지위를 백관(百官) 이상으로 올리고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였다.72) 1010년(현종 1)에는 거란의 침입
에 개경을 버리고 나주까지 몽진할 때, 양주에 며칠간 머문 일도 있다.73)
또 당시 남진하던 거란군이 장단(長湍)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서북단 천
험의 요새지 감악산(紺嶽山) 신사(神祠)에 군대의 정기(旌旗)와 군마가 있
는 것 같이 보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한 사실도 감악산
사당(祠堂)에 전해온다.74) 1067년(문종 21)에 이르러 양주는 중요성이 더
욱 부각되면서 서경․동경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되었
고,75) 인근의 군민을 옮겨 채우기도 했다.76)
양주 지역은 충청도와 강원도를 개경과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하였
다. 비옥한 평야에서 많은 곡물이 산출되어 경제력도 크게 향상되었을 뿐
만 아니라 군사 방어 시설과 관련한 봉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양주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무역항의 배후 도시로 송과의 무역로 및
일본과의 교역에 있어서도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77) 또 풍수도참상으로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명당으로 양주 지역이 간주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71) 三國史記 권50, 열전10, 궁예.
72) 高麗史 권2, 세가2, 태조 18년 6월.
73) 홍영의, 2010「고려 현종의 나주 南幸시 공주 경유의 배경과 의의」한국중세사
연구 29.
74) 高麗史 권63, 지17, 禮5, 길례소사 현종 2년 2월.
75) 高麗史 권8. 세가8, 문종 22년 12월. 남경에 대한 연구는 權純馨, 1990 「高麗
中期 南京에 對한 一考察; 文宗-仁宗代를 中心으로」향토서울 49 : 나각순,
1997「고려시대 남경의 도시시설」成大史林 12․13 : 金甲童, 2002「고려시대
의 南京」서울학연구 18 : 박종기, 2003「고려시대 남경지역의 개발과 京畿
制」연구논문집 1, 서울역사박물관 ; 2006 「고려중기 남경 건설의 배경과 경
영」鄕土서울 68 : 최혜숙, 2004 고려시대 남경연구 경인문화사 : 이익주,
2005 「고려시대 남경 연구의 현황과 과제」도시역사문화 3, 서울역사박물관 :
윤경진, 2010「고려 문종 21년 南京 설치에 대한 재검토 : 공양왕 2년 한양 천
도의 합리화」한국문화 49이 참고된다.
76)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남경유수관 양주.
77) 權純馨, 1990「高麗中期 南京에 대한 一考察」, 향토서울 49, 1990, 27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63
고려 중기 양주 지역은 남경으로 승격되었고, 1068년(문종 22)에는 신궁
(新宮)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숙종 대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으로 옮
겨야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78) 1099년(숙종 4) 가을에 숙종은 직접
양주에 가서 궁궐 터를 정하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
(知主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 건설 공사를 감독케 하였다. 공사는
5년 만에 끝났고, 숙종은 현장을 직접 확인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은 행정 제도 개편 때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격하 개편하였는데,
이는 고려 삼경제(三京制, 개경․서경․남경)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공민왕과 우왕대에 이르러 남경 천도가 다시 추진되면서 대대적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1390년(공양왕 2) 9월 공양왕은 정식 천도를 단행
하였다. 이때 한양부를 포함한 지역은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경기를 확장
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각각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설치하였
다. 좌도에는 장단․임강․귀산․임진․송림․마전․적성․파평 등의 8현,
우도에는 개성․강음․해풍․덕수․우봉 등 5현이 속하게 되었다. 특히
좌도에는 교하․양주 등이 내속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대의 남경 천도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천재지변
등을 빌미로 천명(天命)을 따르고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간하는 상소가
잇따르면서 남경 천도가 그 해법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개경으로의 환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경 천도 계획은 일시적이
지만 실제 천도를 단행할 정도로 양주는 도읍지로서의 자연환경과 군사
방어적 의미, 풍수도참적 의의와 교통 편의 등이 모두 갖추어진 곳으로서
주목되고 있었다.
양주의 대표적인 사찰은 1328년(충숙왕 15)에 창건된 회암사(檜巖寺)이
다. 1174년(명종 4)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다는 기록과 보우
(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출가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회암
사는 늦어도 12세기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
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
78)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양광도 및 권122, 列傳35, 方技 金謂磾: 高麗史 권
11, 世家11, 肅宗 6년 9월: 高麗史 권11, 世家11, 肅宗 6년 9월: 高麗史 권12,
세가12, 肅宗 9년 5월 및 肅宗 9년 7월 戊戌.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64 … 한국학논총 (41)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
하였다.79)
양주의 토착 성씨는 여말 선초의 사회 상황을 전하는세종실록지리지
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타난다. 양주(本府)의 토성(土姓)은 한
(韓)․조(趙)․민(閔)․신(申) 등 4개의 성씨와 견주(見州)의 토성인 이
(李)․김(金)․송(宋)․신(申)․백(白)․윤(尹)․피(皮) 등 7개의 성씨가 있
다고 하였다.80) 인물로는 견주(見州) 출신의 송저(宋詝)․풍양(豐壤) 조씨
의 조운흘(趙云仡)․조인옥(趙仁沃) 등이 알려져 있다.
A-양광도 2 : 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
충주는 남한강에 위치해 ‘남쪽 방면의 요해처에 자리 잡고 있는 땅’,81)
‘충주는 남방의 요충지를 질러 막은 곳에 자리 잡았다. 지역이 넓고 호구
가 많으며, (중략) 이 고을이 세워진 지 가장 오래되어 삼한(三韓)이 반드
시 다투는 땅이 되었고’,82) ‘중원(中原)은 남북의 요충(要衝)이다. 서울에
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물에 뜨고 육지로 달려 중원에 모여 길이
갈라져 두 고개(조령과 죽령)를 넘어 이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남쪽에서
부터 북쪽으로 가는 자도 또한 각각 두 고개를 경유하여 중원에 모여서
다시 물과 육지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달하는데’,83)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민간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라고,84) 할 정도로, 군
사적 요충지뿐만 아니라 교통로로서 중시되었다.85)
이중환은 ‘국도(國都)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79) 牧隱文藁 권2, 記, 天寶山檜巖寺修造記.
80) 世宗實錄地理志 京畿道 양주목 토성조 및 輿地圖書 성씨조에는 견주의 토
착 성씨로 풍양 조씨․한양 조씨 등 2개 성씨만 있다.
8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청도 충주목 형승.
8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청도 충주목 누정 慶迎樓 客館.
8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청도 충주목 누정 拱宸樓.
84) 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 충주목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 충주목 풍속.
85) 허목은 풍속은 “儉嗇하며 富人들이 많았고, 산협의 습속은 火田을 일구어 조를
심었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바탕이 거개가 좋다”고 하였고 “上黨에서는 호걸 준
재들이 나왔고” 하였다(眉叟記言 권35 원집 외편 東事 地乘).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65
족하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서울 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竹嶺)을 지
나 이 읍에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鳥嶺)을 지나 이 읍과 통한다. 두 고
개의 길이 모두 이 읍에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읍이 경
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
로 점령하려는 곳이 될 것이다. 실제로 온 나라의 한복판으로 중국의 형
주(荊州)․예주(豫州)와 같다’고 하였다.86)
충주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 전국의 군․현
을 개편하고 주․부․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중원부(中原府)를 고쳐 부
를 때 처음 나타났다. 이 지역의 유력 세력인 유긍달(劉兢達)의 딸이 918
년(태조 1) 태조 왕건의 제3왕비(신명순성태후)가 됨으로써 강력한 지방
세력으로 중앙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실의 외척 세력으로 등장한
때문이다.
당시 충주 유씨 가문은 남한강을 이용하여 철장(鐵場)과87) 막강한 재력
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주는 덕흥창(德興倉)이 설치된 내
륙 수운의 출발지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충주유씨 가문은 왕건
의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여 충주란 주호(州號)를 얻
게 되었다. 태조가 사망한 후 왕자들 사이에 정권 쟁탈전이 전개되는 과
정에서 충주 유씨 가문이 외가였던 정종이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광주의 왕규(王規) 세력을 제거하고, 광종의 왕권강화에도 일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주 유씨 가문 출신의 유권열(劉權說)을 비롯하여 염상․유신
성․유징필․유진 등이 고려 조정에 진출하였다. 그 결과 충주는 정종과
광종 이후 ‘풍패지지(豊沛之地)’로 인식되어 고려 왕실이 중시하는 지역이
되었다.88)
특히 광종이 모후(母后)를 위해 숭선사(崇善寺)가 창건되었다.89) 광종이
86) 擇里志 八道總論 忠淸道.
87) 다인철소는 규모와 생산량, 철 가공 기술과 품질 면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철소
였고, 이는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의 것으로 알려진 이류면 일대 야철 유적을 통
해서도 확인된다. 충주 철에 대하여는 충렬왕 3년(1277) 4월에 元에서의 還刀 1
천 자루를 요구하자, 고려에서는 이것을 충주에서 주조케 한 사실이 있다.
88) 金壽泰, 1989「高麗初 忠州地方의 豪族; 忠州劉氏를 중심으로」충청문화연구 1
; 김혜완, 2008「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
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9.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66 … 한국학논총 (41)
모후를 위해 지은 원찰에 대한 정성과 충주를 중시한 점을 짐작할 수 있
다. 1009년(목종 12)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할 때, 목종
이 천추태후가 탄 말고삐를 스스로 잡고 충주를 향해 낙향하기를 희망한
것도 이러한 충주의 역사적 연원과 무관하지 않다. 또 성종대에는 대원
(大原)이라는 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는 충주가 태조 이래 고려 왕실의
중요 기반이 된 대표적인 도시라는 점과 함께 광종과 정종의 외가가 있
는 곳이라는 점에서 내린 호칭이었다.
충주는 11세기 거란과의 싸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종은 거
란 퇴치를 기원하기 위해 월악산 송계 계곡 내에 사자빈신사탑(獅子頻迅
寺址塔)을 세웠다.90) 또한 충주는 몽골군을 격퇴한 곳이었다. 1253년(고종
40) 9월 금당협(金堂峽) 지역에 침입한 몽고군을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
(崔守)가 매복하였다가 격퇴하였고, 이 해 10월부터 12월까지 충주산성에
서 방호별감 김윤후(金允侯)가 충주민이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254년 9월 차라대(車羅大)가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충주를 공격하
자, 유학산성(遊鶴山城)에 입보한 다인철소의 향리였던 지씨(池氏)와 어씨
(魚氏)의 지휘 하에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1254년(고종 41)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이 되었다.
충주는 충주 유씨의 대표격인 유권열(劉權說)이 지원한 개천사(開天寺)
로 알려진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기도 했다. 고려 태조가 국사로 모셨던
89) 高麗史 권2, 세가2, 光宗 5년 “春 創崇善寺 追福先妣” 문숭리 숭선마을 절터
부근에서 ‘崇善寺’라고 씌어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고 발굴된
기왓조각의 명문에 의하여 1479년(성종 10), 1551년(명종 6), 1579년(선조 12)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된 것으로 짐작된다. 3차에 걸친 발굴조사(2000 <금당지,
강당지>, 2001 <금당지 동․서 건물지 하부유구, 남․북 석축>, 2002 <대형건
물지, 동문지와 석축, 서쪽 담장 등 중심사역, 동편 석축남단>)결과, 금당지와
영당지(추정), 회랑지4, 남문지, 금당지 서쪽 건물지, 동문지(추정), 배수로2, 담장
지2, 석축2, 당간지주 등이 확인됨에 따라 숭선사의 중심사역이 삼국시대의 가
람배치를 따르고 있음이 밝혀졌으며, 한강이남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려시대 창
건사찰로 그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金顯吉, 1989「崇善寺址와 忠州劉
氏」斗山金宅圭博士華甲記念 文化人類學論叢).
90) 獅子頻迅寺址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사역 내에 남아 있는 제천 사자빈신
사지 4사자 9층석탑의 하층 기단 남쪽 면석에 새겨진 명문 내용을 통해 석탑이
1022년(현종 13)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67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가 주지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
다가 941년(태조 24)에 입적한 곳이다.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弘法大
師)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던 대찰이었다. 또한 고려실록을 봉안한 사고
(史庫)를 두었던 사찰이었다.
고려 시기 충주는 지덕(地德)이 왕성한 곳으로 인식되어 삼소(三蘇)의
하나로 정해진 후 역대 왕들이 와서 머문 곳이었다. 충주가 삼소의 하나
로 정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공민왕이 흥국사와 법왕사에 행차하여
내린 교서에는 “옛날 우리 태조께서 매양 사중(四仲)의 해를 당하면, 삼소
에 순주(巡駐)했으니 나도 장차 평양에 거동하여 금강산을 돌아서 충주에
거가를 멈추리라”고91) 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충주는 평
양과 금강산보다 먼저 삼소의 하나로 정해져 국왕이 순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충주의 토성은 서(徐)․석(石)․최(崔)․유(劉)․강(康)․양(梁)․진(秦)
․안(安)․박(朴)이며, 내성(來姓)으로 견(堅)․정(鄭)이 있다.92) 이 가운데
충주 석씨는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
장군 동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진 석린(石鄰)이다. 최
씨는 고려 때 최율(崔律)․최유(崔儒)․최충나(崔忠奈)․최정나(崔貞奈)․
최양경(崔讓卿) 등이 “법경대사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충주 최씨는
충주 유씨에 버금가는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양씨는 삼중삼
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 예성군(蘂城君) 양능길(梁能吉)이 대표적인 인
물이다.
청주는 ‘청주 고을이 토지가 비옥하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으므로’,93)
‘청주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다’,94) ‘실로 동남쪽의 집합지
로서, 그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사업이 번잡하다’,95) ‘서원(西原)은 전
도(全道)의 본영(本營)이요, 땅이 넓고 인구가 조밀하다’,96) ‘구역이 넓고
91) 高麗史 권41, 세가41, 恭愍王 18년 7월 갑진.
92) 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 충주목 토성조.
93) 高麗史節要 권1, 태조 원년.
9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충청도 청주목 풍속.
95) 陶隱集 권5, 文, 送李慕之赴清州牧詩序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충청도
청주목 형승.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68 … 한국학논총 (41)
인재가 많아 실로 다른 고을에 비교할 곳이 아니다’,97) ‘땅이 기름지고 메
마른 것이 반반씩이며, 기후가 차고 더운 것이 알맞다’98)라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색은 ‘청주는 양광도(楊廣道)에 있는 목관(牧官)의 고을로,
충주 및 공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그곳은 토호(土豪)가 많기는 하였으
나, 아전들은 법을 받들어 준수하고 백성들도 조금은 유순한 편이었다’99)
라고 하여 청주민의 인심을 말하고 있다.
청주는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 娘臂城․娘子谷)으로 신라 신문왕
5년(685) 처음으로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경덕왕 16년(757) 서원
경으로 승격하다.100) 신라 때 서원경성은 상당산성101)․당산토성․청주읍
성․와우산성 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또한 김
유신의 아들 원정(元貞)이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고, 혜공왕이 770년에
서원경을 다녀가기도 했다.
청주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은 전라도를 장악한 견훤이 한강 일대의 평
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나 교통상으로 아주 중요한 요
충지라 할 수 있다. 청주인들은 일찍부터 궁예를 지지하며, 궁예 정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
해 가던 과정에서 청주인들 간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아지태(阿志泰) 사건’이다.102) 이 사건은 아지태를 비롯한 청주인들 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관청에서 조차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왕
건이 나서서 아지태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다. 이를
9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충청도 청주목 형승.
9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충청도 청주목 형승.
98) 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 청주목 토성조.
99) 牧隱文藁 권6, 記, 淸州牧濟用財記文.
100) 1933년 일본 正倉院에서 발견된「신라촌락문서」는 서원경과 그 주변의 촌락
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101) 하지만 상당산성과 牛岩山(338m) 주변에서 沙梁部와 啄部란 글자가 있는 기와
가 발견되어 서원경도 왕경처럼 6부가 존재하는 행정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를 반영하듯 청주에서는 흥덕구 운천동 사적비
와 동종, 용암사 불상․농촌동 금동불․탑동 석탑, 명암동․용담동․금천동 통
일신라무덤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유적과 기록은 청주문화가 신라
문화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102)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총서.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69
계기로 청주의 지방세력들은 크게 분열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궁예를 지지한 청주세력들 중에는 점차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나
게 되어, 궁예정권 말기에는 친궁예파와 친왕건파로 분열․대립하여 갔던
것이다.
특히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사건’이 그러한 예이다. 임
춘길은 태조 즉위 3개월 후인 9월에 모반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반란을
주동한 임춘길과 배총규((裵悤規)는 청주 출신이고, 경종(景琮)은 매곡인
(昧谷人, 보은군 회북면)이었다.103) 이러한 일련의 청주인들에 의한 모반
사건은 궁예 집권 시인 904년 청주인 1,000여 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킨 데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된다. 이후 청주수(淸州帥) 진선(陳瑄)
과 선장(宣長) 형제의 반란,104) 마군장군 환선길(桓宣吉)의 반란사건․종
간(宗偘)과 내군장군 적철(狄鐵)이 반란․마군대장군 이흔암(伊昕巖)이 모
반사건이 일어났다.105)
모반 사건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
선 왕건 즉위 직후에 연이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들의 출신지가 청주를
비롯 중부지방이었다. 임춘길과 진선 형제는 청주인이고, 환선길은 음죽
(陰竹, 음성일대), 이흔암은 충주 혹는 공주출신으로 짐작된다. 모두 일찍
부터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던 곳이다.
이처럼 청주를 비롯하여 중부일대 지방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왕건
은 이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 왕건이 즉위 후에
처음으로 행차한 곳이 청주였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왕건은 청주
에 내려와 이곳 지방 세력들을 위무하고 이곳에 성을 쌓도록 했다. 하지
만 그 후에도 청주의 지방세력들은 왕건과 견훤사이에서 반부(返附)를 거
듭하였다. 따라서 왕건의 청주에 대한 회유와 견제는 계속되었다. 이는
왕건의 혼인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왕건은 전국의 유력한 지방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29명의 지방 유력세력의 딸들과 정책적으로 혼인하였지
만 청주지방의 유력가문과는 단 한명과도 혼인하지 않았다. 반면에 청주
103) 高麗史節要 권1, 태조 원년 9월.
104)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원년 10월 및 高麗史節要 권1, 태조 원년 10월.
105)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원년 6월.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70 … 한국학논총 (41)
와 가까운 진주(진천)와 충주지방의 유력 가문과는 혼인하였다. 이는 왕
건의 청주세력에 대한 견제정책의 결과였다. 진주(鎭州)라는 지명도 고려
초 청주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왕건은 청주를 진압하기 위해 왕식
렴․유금필 등 핵심 측근세력을 보내 이곳에 진주시킨 데서 그 이름이
연유한다.
또한 고려개국 1․2등 공신 중에는 청주출신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건국 초기에 대대적인 관직임명 기사에도 청주인들은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청주세력은 점차 고려 중앙정부에 흡수되거나 토착 향리층
으로 변화하여 더 이상 고려의 중앙정부에 적대적인 지방세력으로 존재
할 수 없었다.106)
청주의 토성은 한(韓)․이(李)․김(金)․곽(郭)․손(孫)․경(慶)․송(宋)․
고(高)․준(俊)․양(楊)․동방(東方)․정(鄭)과, 내성(來姓)으로 개경에서
내려온 황보(皇甫)가 있다.107) 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청주 한씨인 한란
(韓蘭, ?~?)을 둘 수 있다. 한란은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기 위
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이 있으므로 개국벽상
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청주 곽씨인 곽원(郭元,
?~1029)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를 거쳐 참지정사를
지냈으며, 곽상(郭尙)은 추밀원 좌승선을 거쳐 호부상서․참지정사에 오
르고 두 아들로 문충공 탄(坦)과 진정공 여(輿)를 두었다. 곽예(郭預, 123
2~1286)는 문한학사와 지밀직사사를 지내고, 두 아들로 운용(雲龍)과 운
진(雲鎭)을 두었다. 곽연준(郭延俊)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개성부사․전법
판사에 이르고 충정왕 2년(1350)에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이외에도
청주 경씨로 경대승(慶大升)을 비롯하여 경유, 경사만, 경복흥(慶復興, ?~
1380), 경보(慶補), 경의(慶儀) 등이 있으며, 청주 정씨에는 의종 때 활약
106) 청주에는 고려 초기부터 12개의 성씨집단이 유력한 토착세력으로 존재하고 있
었다. 이들 청주의 토착 성씨집단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龍頭寺鐵幢竿의 명문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명문에는 철당간을 건립하는데 주도
적인 역할을 했던 10여 명의 인물들이 보인다. 10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金․
孫․慶․韓이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성씨들은 토성으로 기재된 성씨임
을 알 수 있다.
107) 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 충주목 토성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71
했던 정극경(鄭克卿), 공민왕 때 활약했던 정공권(鄭公權), 정총(鄭摠)․정
탁(鄭擢) 형제가 대표적 인물이다.
공주는 ‘남자는 쟁(箏)과 적(笛)을 좋아하고, 여자는 노래 부르기와 춤
추기를 좋아한다(男好箏笛女好歌舞)’,108) ‘차현(車峴) 이남에서 산천의 맑
은 기운이 충만하고 쌓여서 큰 고을을 이룬 것에는 오직 공주(公州)가 제
일이 된다. (중략) 좌우와 전후에 강과 산이 두루 비치니, 아래 위 수백
리 사이에 저 들판의 광활함이며, 여염집의 즐비함이며, 나루터와 다리에
의 다니기 고생하는 모습과, 역원(驛院)에 드나드는 나그네의 힘든 형편
과, 밭가는 자․누에 치는 자ㆍ나무하는 자․소 말 먹이는 자․고기잡는
어부ㆍ물건파는 장수들ㆍ사람들이 생활하며 오가는 것들이 한이 없다’,109)
‘지금 공주는 옛날의 절도사(節度使)가 있던 부(府)이다. 계룡산은 동남간
에서 일어났고 웅진강(熊津江)은 서남간으로 둘러 있다. 땅이 신령하고
수려한 정기를 배태하여 여러 세대가 바뀌면서 점점 커져 옛날부터 지금
에 이르도록 큰 주(州)ㆍ부(府)를 이루었다. (중략) 이 주의 치소는 전라
ㆍ충청 두 도의 요충(要衝)에 처해 있어 실로 한 방면의 번화한 도회지이
니’,110)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111)라고 하여 전라ㆍ
충청 두 도의 요충지에 있는 번화한 도회지로 평가하고 있다.
공주지역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중심산인 동남쪽의 계룡산을 중심으
로 금강을 끼고 있어 입지상 방어의 거점지로서, 또한 인근의 백마강․강
경강․진강은 서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수운에 편리한 지리상의 이점
을 가지고 있다. 전라도와 충청도 서쪽 사람들은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
차령을 넘고, 천안․직산을 거쳐 경기도 양성과 진위․수원․과천을 지나
서울을 오가는112) 교통상의 요지였다.
10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충청도 공주목 풍속. 許穆은 “熊州(公州牧)에서는 옛
풍속으로 남자는 箏과 피리를 연주하고 여자는 노래하며 북을 쳤는데, 백제의
유풍으로 부강하였던 餘俗들이다. 대체로 강하고 날랜 것을 숭상하여 싸움을
잘하였다”고 평하였다(眉叟記言 권35 원집 외편 東事 地乘).
109) 四佳集 권1, 記, 公州聚遠樓記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충청도 공주목
누정.
110) 東文選 권65, 記, 公州東亭記(釋息影庵)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충청도
공주목 역원.
111) 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 공주목.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72 … 한국학논총 (41)
이때 공주의 실제적 지배자는 ‘공주장군’으로 지칭된 홍기(弘奇)였다.
처음에는 견훤에 가까웠으나 중부 지역에서 궁예가 흥기하여 경상도 상
주 등지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궁예의 휘하에 있던 이흔암(伊昕巖)이 공
주를 습격하자 905년에 공주는 궁예에 귀부하였다.
또한 왕건과 견훤의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공주가 그 점거의 제1목표
가 되기도 하였다. 즉 915년을 전후하여 태봉국 궁예의 심복 이흔암(伊昕
巖)은 공주를 공략하여 이곳에 웅거하고 있다가 왕건이 즉위하자 철원으
로 돌아가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단되었다. 이후 공주는
홍성 등 충청도의 10여 군현과 함께 후백제에 호응하였다.113) 왕건은 이
러한 공주지역을 재점령하고자 934년 후백제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이 때
웅진 이북 3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어,114) 당시 공주지역
도 고려의 예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기 공주는 개경으로부터 나주에 이르는 충청주도․전공주도․승
라주도로 연결되는 교통로상의 거점으로의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다. 때문
에 고려 초기에 요의 침입을 맞아 나주로 피난하던 현종이 일시 머물기
도 하였으며, 무신정권기인 명종 6년(1176)에는 ‘명학소(鳴鶴所)의 난’이
일어나 망이․망소이의 무리들이 제일 먼저 공략한 곳도 이곳이었다. 또
한 고종 23년(1236) 몽골침입 때에는 야별초 박인걸(朴仁傑) 등이 공주
효가동(孝加洞)에서 몽고군과 싸워 16명이나 전사하기도 했다.115)
공주가 12목의 하나가 된 것은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위한 것을 구실
로 시작된 요의 침입으로 막 즉위한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는 과정에서
유숙(留宿)하였기 때문이다.116) 이때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 김은부(金殷
112) 擇里誌 충청도 공주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충청도 공주목 고적조에
보이는 주 동쪽 10리에 있는 孝家里의 向德에게 내린 口分田 기사는 고대 토
지제 연구 사료로 자주 인용되고 있으며, 역원조의 주 동쪽 3리에 있는 普通院
(迎春亭) 기사는 고려 때 지방관의 임기와 교대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13)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원년 6월 기사, 高麗史 권127, 열전40 이흔암.
114) 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17년 9월 정사, 高麗史節要 권1, 태조 17년 9월 정사.
115) 高麗史 권23, 세가23, 고종 23년 12월 무자.
116) 현종이 경상도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주를 거쳐야 하는 충주는 정
종, 광종의 어머니가 충주 유씨이므로 경종․목종의 외가였다. 경종의 어머니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73
傅)가 공주 사람들을 데리고 곰나루까지 영접을 나가는 등 극진한 접대를
하였다. 현종은 공주에서 6일 동안 머물렀다.117) 이때 김은부는 현종에게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현종은 그녀를 왕비(원
성왕후)로 맞아들였다.118) 이를 계기로 김은부는 현종의 장인이 되어 시
중의 자리에 올랐으며, 다시 두 딸이 현종의 왕비(원혜․원평왕후)가 되
었다.
공주목의 토성은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
(任)이 있다.119) 그러나 고려시대 크게 활약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공주지역 불교유적을 살펴보면, 사찰은 마곡사, 갑사, 신원사, 동학사,
영은사가 있다. 사지로는 대통사지, 수원사지, 주미사지, 금학동사지, 구룡
사지, 청량사지, 동원리사지, 두만리사지 안영리사지, 청림사지, 정치리사
지, 봉곡리사지, 신영리사지, 서혈사지, 동혈사지, 남혈사지 등이 있다. 이
들은 모두 분지인 공주를 둘러싸고 있다. 고려초기에 공주에 창건된 사찰
로 볼 수 있는 것은 동혈사지, 남혈사지, 수원사지, 동원리사지, 두만리사
지, 안영리사지, 청림사지 등 7개로 추정되며 나머지는 백제나 신라 통일
기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고려 이전에 창건되었다 하더라도 태조는 이를
재정비하여 지방세력을 견제하는데 이용했을 것이다. 태조는 후백제 지역
의 사찰을 특별 관리하였다. 가장 관심을 둔 곳은 성주산문의 성주사와
개태사였다. 그리고 공주지역 큰 사찰 중 마곡사․신원사․동학사를 도선
이 중건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어떤 형태로든 태조와 연계되어 있었
으리라 생각된다.120)
는 황주 황보씨이지만 광종의 외가였으므로, 아들 경종과 손자 목종도 충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목종비 선정왕후 유씨는 종실 흥덕원
군 왕규의 딸이며 어머니는 충주 유씨였다. 따라서 당시 가장 세력이 강한 가
문은 황주 황보씨와 더불어 충주 유씨였다. 그러므로 충주 유씨 집안에서 목종
을 살해한 현종 정권에 반감을 가지고 危害를 가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
현종은 충주를 거쳐야만 하는 경상도로 갈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117) 이때 현종이 공주에 들렀을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충청도 공주목. “일찍이 남쪽에 공주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仙境의 영롱함
이 길이길이 그치지 않도다. 이처럼 마음 즐거운 곳에서, 群臣이 함께 모여 온
갖 시름 놓아 본다”라고 하였다.
118) 高麗史節要 권3, 현종 2년 1월 무인.
119) 世宗實錄地理志 忠淸道 公州牧 토성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74 … 한국학논총 (41)
B-경상도 : 상주(尙州)․진주(晋州)
상주는 ‘습속(習俗)이 간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백성의 풍기가
순고하고 질박하다’,121) ‘동남방 일백 고을 중 첫째다, 팔방으로 통한 거리
이다, 신라 때부터 큰 부(府)가 되었다’,122) ‘이 고을이 팔방으로 통한 거
리에 있어서 역마를 타고 사명을 받든 자가 빈 날이 없는데’,123) ‘상주(尙
州)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신라에 속하여 큰 부(府)가 된 지 천여 년
이 되었다. 산천의 수려한 것과 인물의 번성함이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으뜸이 되었다’,124) ‘상주가 낙수(洛水)의 상류에 있어서 감사(監司)의 본
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큰 도회이다. 사명을 받고 정사를 반
포하는 손님과 조공을 바치는 일본 사신이 오고 가는 것이 줄처럼 연속
하여, 죽령을 경유하는 것은 3분의 1도 못 되고 대개는 관현(冠縣)을 경
유하는데 상주가 그 폭주하는 중심지에 있으니’,125) ‘상주는 도(道)의 으뜸
이므로 옥 송사가 더욱 빈번하였는데’,126) ‘동남(東南)의 주ㆍ군에서 경주
가 제일 크고, 상주가 그 다음이다. 그 도의 명칭을 경상도라 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을 받든 자는 반드시 먼저 상주를 거쳐서 경
주로 가게 되므로 풍화(風化)의 유행이 상주로 말미암아 남으로 가고, 언
제나 경주로 말미암아 북으로 오지는 않았다’127) 라고 했다.
이중환은 ‘남쪽은 함창(咸昌) 들이고 함창 남쪽은 상주다. 상주의 다른
이름은 낙양(洛陽)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서 산이 웅장
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 충청도․경기도와 통하고, 동쪽
으로는 낙동강에 임해서 김해․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 실은 배
120) 이정신, 2011「고려성립기 공주 지방세력의 동향」한국중세사연구 30. 참조.
12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경상도 상주목 풍속.
12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경상도 상주목 형승 및 누정. 최자
12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경상도 상주목 궁실.
124) 續東文選 권80, 記, 尙州風詠樓記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경상도 상주
목 누정.
125) 續東文選 권14, 記, 風詠樓重營記(金宗直)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경상
도 상주목 누정.
12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경상도 상주목 명환.
127) 東文選 권85, 序 送謹齋安大夫赴尙州牧序 및 益齋亂稿 권5, 序 送謹齋安大
夫赴尙州牧序.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75
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
하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는 부유한 자가 많고 또 이름난 선비와 높은 벼
슬을 지낸 사람도 많다’128)고 하였다.
상주는 신라 이래 진흥왕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주가 된 이래, 대
백제․고구려의 요충지로 중요한 지역이었고, 신라말 후삼국의 하나인 백
제를 세운 견훤의 출자지이기도 하였다. 889년(신라 진성여왕 3) 원종(元
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 상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한때 내마(柰麻) 영기(令奇)의 군대를 물리치고 성주(城主) 우운(祐運)을
전사시키는 등 세력을 떨쳤다. 효공왕 8년(904년)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
예가 상주를 침입하여 30여 성(城)을 취했으며, 경명왕 2년(918년) 병풍산
성에 웅거하던 견훤의 아버지이자, 상주의 유력한 세력인 아자개(阿慈蓋)
가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은 크게 두 방면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영천,
대구, 선산, 상주, 점촌, 문경을 거쳐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충주로 향하
는 서쪽과 영천, 의성, 안동, 풍기를 지나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으로 이
르는 동쪽 길이다. 이 중 상주는 서쪽의 요지에 위치한다. 이 길을 통하
여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충돌을 빚어왔고, 백제와도 잦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때문에 1254년(고종 41) 10월에 차라대가 이끈 몽골군이 침입
하자, 백화산성(白華山城, 상주산성)에 입보한 주민들이 황령사(黃嶺寺)의
승려 홍지(洪之)와 함께 격퇴하기도 하였다.
또한 낙동강 하류 지방의 각 조세 창고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나
르던 뱃길의 최상류 종착 지점이기도 하였다. ‘낙동강 칠백 리’라는 말이
생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의 문물의 유통
은 수로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하여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를 이용하여 점촌, 문경을 지나고 조
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서 다시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하였다.
이곳은 고대 불교문화의 유입지로서 부석사보다 앞서 진평왕 때에 건
립된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와 의상이 창건한 미면사(米麵寺)가 있는 곳
128) 擇里志 八道總論 경상도 상주.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76 … 한국학논총 (41)
이다. 남장사는 신라 흥덕왕 5년(830년)에 진감국사가 창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범패(梵唄)를 보급한 곳이다. 철불좌상(보물 990호)과 목각후불탱
화(보물 922호) 등 불교 예술의 걸작품을 보존하고 있어 ‘불교예술의 보
고’라 불린다. 북장사, 갑장사, 승장사(현재는 없음)와 함께 ‘상주 4장사(四
長寺)’ 가운데 하나다.129) 이는 상주지역의 교통 거점을 반영한 것이었
다.130)
고려 때 ‘상주목 영역’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상북도의 북쪽과
서남쪽 지역이 중심이고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동남쪽 지역이 일부 포
함된 영역으로 신라 후기 9주 중의 하나인 상주와 대체로 일치하며, 고려
성종 14년에 정해진 10도의 하나인 영해도(嶺南道)와도 대체로 같다. 상
주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변동 속에서 성종 14년 10도 중의 하나인 영남
도로 편성되었다가 현종 9년 이후에는 계수관인 상주와 영군인 안동부와
경산부를 주현으로 하는 ‘주현 속현 단위’로 재편되었다.
상주목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살펴보면 산줄기 등 지형에 의해서 이웃
‘주현 속현 단위’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 방면도 있다. 이것은 고려 현종
때 주현 속현 단위를 설정하면서 계수관 영역 안에서 주현(主縣)을 먼저
정한 후 영역 안의 군현을 속현으로 재배치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고 생각한다. 즉, 고려 현종 때 지역단위의 역사성과 지리적 요인을 고려
하여 주현 속현 단위를 정했지만 상주목 지역처럼 딸린 속현이 많고 넓
은 지역에는 하나의 생활권이 되기 어려운 군현도 상주목의 속현이 되기
도 하였다.131)
상주의 토성(土姓)은 김(金)․박(朴)․주(周)․황(黃)이고, 내성(來姓)은
고(高)․이(李)․형(荊)․나(羅)이며, 사성(賜姓)은 이(李)이다.132) 상주 김
씨의 대표적 인물은 인종 때 이자겸의 난에 국사(國史) 를 지킨 김수자
(金守雌), 공민왕 때 활동했던 김득배(金得培)와 그의 아우 김선치(金先
致)․김득제(金得齊)이다.
129) 한기문, 2004「尙州의 行政區域 變遷과 文化圈」尙州文化硏究 13.
130) 한기문, 1993「고려후기 상주 功德山 東白蓮社의 성립」尙州文化硏究 3.
131) 박종진, 2010「고려시기 ‘상주목 지역’의 구조와 지리적 특징」한국중세사연구
29.
132) 世宗實錄地理志 慶常道 尙州牧 토성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77
진주는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133)
‘여염의 상마(桑麻)와 누대의 화목(花木)이 그 사이로 은은히 비치며, 푸
른 바위, 붉은 벼랑, 긴 개울, 비옥한 땅이 그 곁에 이어져 있다. 인기(人
氣)는 맑고 풍속은 후하며 노인들은 편안하고 젊은 자는 순종하며, 농사
짓는 농부나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 임무에 부지런하고, 효성스러운 자식
과 사랑스러운 손자는 제 힘을 다하여 봉양하고, 방아타령은 마을을 연하
고 뱃노래는 어촌을 누비며, 온갖 새는 무성한 숲속에서 우짖고 고기떼는
그물에 걸릴 위험이 없으니, 한 구역의 물건들이 모두 제 자리를 얻은 것
을 볼 수 있다’,134)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135)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
는 영남에서 제일이다’,136)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진양은 동방의 육해이
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
다’,137) ‘강의 물은 지리산에서 근원하고 또 지리산 동북의 여러 산골 물
이 합쳐서 하나가 되니, 산이 길고 물이 깊어 그 기운이 그 가운데 뭉치
어 사람도 많고 물상도 풍부하며, 왕왕 기이한 인재가 나왔으니, 예로부터
거읍(巨邑)이라 칭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중략) 주는 땅이 아주
남쪽이어서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하다’,138) ‘진주 고을은 지리산의 영기와
남해의 정기가 빚고 화합한 것으로서, 토지의 비옥함과 인물의 번화함이
딴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다’139)라고 하여, 진주의 자연과 교육환경, 영남
일대의 수산물과 토산물이 풍부한 곳으로 보았다.140)
13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 풍속.
134) 浩亭集 권2, 記, 矗石樓記(河崙) 및 동문선 권81, 記, 晋州矗石樓記.
135)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 풍속.
13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 형승.
13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 형승.
138) 浩亭集 권2, 記, 鳳鳴樓記, 東文選 권81, 記, 鳳鳴樓記,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 누정.
139) 敬齋先生文集 권2, 記, 晉州鄕校四敎堂記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
도 진주목 학교.
140) 허목은 “晉陽은 사치와 부를 숭상하였고 京山은 女工이 우수하였으며 寧海는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78 … 한국학논총 (41)
진주에는 왕봉규(王逢規) 세력이 있었다. 왕봉규는 처음 강양군(江陽郡)
의상현(宜桑縣 : 泉州縣, 宜寧)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뒤에 강주(康州) 지역도 석권하였다. 924년(경명왕 8) 천주절도사(泉州節
度使)를 자칭하고 중국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다. 927년에는 후당이 권
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봉하자,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는 등 중국의 왕조와 교섭을 활발히 하였다.141) 이후 왕봉
규의 행적은 알 수 없는데, 진주지역이 곧 후백제 견훤의 지배하에 들어
간 사실로 미루어 그의 세력도 견훤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142)
진주는 995년 전국을 10도로 개편하고 절도사를 두어 ‘진주정해군(晋州
定海軍)’이라 하였다. 이는 진주에 주재하는 절도사가 남해안 쪽 바다를
지키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나주를 해양도에 속하는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로 한 것과 함께 고려하면, 진주는 나주와 함
께 한반도 남해안을 나누어 지키는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186년(명종 16)에 진주목사 김광윤(金光允)이 백성들을 심히 착취하자
민란이 일어났는데, 조정에서 목사를 귀양보내고 민심을 수습하여 무마되
었다. 그 뒤 1200년(신종 3)에 공사노비의 폭동에 편승한 정방의(鄭方義)
일당의 반란이 일어나 인근 지역을 휩쓸며 기세를 떨쳤으나 진주민들의
협력으로 난을 진압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주의 토성(土姓)으로 정(鄭)․하(河)․강(姜)․
소(蘇)를, 입주(立州) 후(後)의 성으로, 유(柳)․임(任)․강(康)을 거론하고
있다.143) 이 가운데 강(姜)․하(河)․정씨(鄭)는 진주 의 3대 토성(土姓)이
다. 강씨는 도시조(都始祖) 강이식(姜以式)이 모든 강씨의 시조가 된다.
강이식은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 군대 30만 수군을 임유관(臨楡關)에
명주실과 오동나무가 유명하였으니, 이 모두가 부유하였던 낙랑(경주)의 餘俗
이다”라고 하였다(眉叟記言 권35 원집 외편 東事).
141) 金庠基, 1960「羅末 地方群雄의 對中通交-特히 王逢規를 主로-」海圓黃義敦先
生古稀記念 史學論叢.
142) 姜鳳龍, 2002「後百濟 甄萱과 海上勢力 -王建과 海上爭覇를 중심으로-」歷史
敎育 83.
143) 世宗實錄地理志 慶尙道 晉州牧 토성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79
서 대파하여 무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후 신라 헌강왕 때 판내이령 강진
(姜縉)이 진양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이다. 11세손인 하륜이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추봉되었
고, 하진(사직공파)의 9세손 하즙이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10세손 하
윤원이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진주 유씨의 시조 류정(柳挺)은 원래 이
곳에 세거한 사족의 후예로, 좌우위 상장군(左右衛 上將軍)에 이르고 진
강부원군(晋康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진주로 하게
되었다.
C-전라도 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전주는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고 사람들이 약삭빠르다’,144)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이니’,145)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
동거지가 볼 만하다’,146) ‘집을 다스리는 자는 대부분 곡식을 저축하여 흉
년에 대비한다’,147)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148) ‘언제나 남방에
있어서 큰 고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149)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
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150)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
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151)라고 하여, 남쪽의 거진으
로서의 비옥함과 인구의 번성함, 그리고 인재가 모인 곳이라 하였으나, 옛
백제인 곳으로 성조(聖祖: 태조)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으로 평가하였
다.152)
14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풍속.
145)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역원.
146) 東國李相國全集 권23, 記 南行月日記.
14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풍속.
14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풍속.
149)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누정.
150)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제영.
15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全羅道 全州府 제영.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80 … 한국학논총 (41)
이중환은 ‘전주 경계에 들어오면서 율담(栗潭)․양전포(良田浦)․오백주
(五百洲) 등의 큰 시내가 되었고, 이 시내들로 관개하므로 땅이 아주 기
름지다. 그리고 벼․생선․생강․토란(芋)․대나무․감 등의 생산으로 천
마을 만 부락의 삶에 이용할 물건이 다 갖추어졌고, 서쪽의 사탄(斜灘)으
로는 생선과 소금을 실은 배가 통한다. 관아가 있는 곳에는 인구가 조밀
하고 물자가 쌓여 있어, 서울과 다름이 없으니 하나의 큰 도회지이다. 노
령 북쪽의 10여 고을은 모두 장기(瘴氣)가 있으나, 오직 전주만은 맑고
서늘하여 가장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153)
전주는 통일신라 때 9주 5소경체제가 들어서면서 익산(금마)에서 옮긴
지역이다. 신라는 금마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워 백제유민들을 통제하려
다가 이것이 실패하자, 구백제의 구심점을 옮겨 백제세력의 약화를 꾀하
였던 것이다. 전주는 그런 정치적 과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후백제
견훤이 현재의 전주도심지를 비켜 승암산 자락에 도성을 쌓은 것은 이
산자락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형성된 것은 물길을 이용하려
한 때문이었다.
견훤은 900년 마침내 거점을 전주로 옮겨 도읍을 삼고 국호를 백제라
하고, 왕을 칭하였다. 901년에는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154) 견
훤이 전주로 정도하게 된 데에는, 영토 확장의 포석, 나주세력의 이반에
따른 후방의 정세 불안, 공주와 광주에 비해 전주에 배치된 신라의 정규
군사력이 2배정도 되는 등 군사력 확보가 용이 등이 요인으로 작용하였
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을 가능성이 농
152)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車嶺以南 公州江外’의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내
린 것이 사실이라면, 위의 朴暹이 “전주는 옛날의 百濟인데 聖祖(太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이니, 청하건대 왕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마십시오”라고 현종
에게 上奏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나 태조 왕건이 남긴 유훈 8조에 “차현
이남과 공주강외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는
차현은 친궁예세력의 근거지로 공주․홍주․청주 지역으로 현재 차유령 고개
로 알려진 곳이다. 또한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七長寺 인근의 안성시 일죽
면과 충북 음성군 삼성면 사이의 차현고개(수레티) 고개로 보기도 한다.
153) 擇里志 八道總論 전라도 전주. 허목은 “全州는 江海의 都會이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이해에 밝아 백성들이 순박하지
못하다”고 했다(眉叟記言 권35 원집 외편 東事 地乘).
154) 연호사용은 남원 실상사 片雲和尙 浮屠에 나타나 있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81
후한 반신라 감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견훤은 교통․군사적 요충
지인 전주로 진출해 영토확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후백제가 멸망한 뒤 고려는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
다. 이 시점은 후백제가 멸망하던 해인 936년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남도
호부는 오래가지 못하고 설치한지 4년 만에 혁파되고 태조 23년(940) 다
시 전주로 환원되었다. 안남도호부는 이후 광종 2년(951) 고부(古阜)에 다
시 설치되었다. 고부의 안남도호부는 상주에 설치된 안동도호부와 마찬가
지로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던 지방세력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보인다.
1012년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에 파천하였다가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에서 7일간 머무르기도 하였다. 또한 1182년(명종 12) 무인집권기
에 하극상 풍조가 만연하는 등 사회가 혼란해지자 전주성에서 죽동(竹同)
을 중심으로 한 관노들의 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난군에 내부분열이 생겨,
일품군(一品軍) 대정(隊正)과 승도(僧徒)가 죽동 등 10여 명을 살해함으로
써 난이 평정되고 잔당 30여 명도 처형되었다. 이 난은 지방관과 주리의
횡포에 반발한 주현군ㆍ관노ㆍ승도ㆍ농민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사건이었
으며, 전병력의 토벌에도 40여 일이나 버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강
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55년(공민왕 4)에는 전라도안렴사였던 정지상(鄭之祥)이 원나라의 어
향사인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감금시킨 사건으로 인해 부곡으로 강등되었
으나, 이듬해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로 승격되었다. 1380년(우왕 6) 이성
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다가 오목대(梧木臺)에서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1388년 안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을
쌓았다. 고려시대의 전주는 호남지방의 인후부로서 전공주도와 산남도에
속한 많은 역참이 있었던 교통상의 요지였다.
전주의 토성은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
백(白) 등으로,155) 전주 유씨로 문벌을 형성한 유방헌(柳邦憲) 가계, 완산
최씨로 ‘완산 삼최(完山三崔)’인 최균(崔均)․최척경(崔陟卿)․최송년(崔松
年) 일파, 전주 이씨인 현종조 고승인 지종(智宗, 圓空國師), 인종조의 이
녕(李寧)․광필(光弼) 부자, 전주리(全州吏)로 재상을 지낸 이준양(李俊陽),
155)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全州牧 토성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82 … 한국학논총 (41)
무인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준의(俊儀) 형제, 이성계의 선조이자 의
방의 동생인 이린(李隣) 등이 활동하였다.156)
나주는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157) ‘음사(淫祀)를 숭상한다’,158) ‘금성산은 바다 남쪽에
있으니, 태사(太姒, 주나라 무왕의 비:왕화왕후 오씨)의 고장으로 5백 년
이어왔네’,159)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백성과 물자가 번
성하다. 땅이 또한 바닷가라 벼가 많이 나고 물산이 풍성하니, 이에 전라
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며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든다’,160) ‘산천의 아름
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거의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었다. 나주가 주(州)
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으니, 우리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제,
군(郡)․국(國)들이 차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게 알아 솔
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牧)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
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褒賞)한 것이었다. 혜종(惠宗)이 왕
위를 계승하여 백성과 사직을 잘 보존하여 창업(創業)할 때의 도움과 수
성(守成)한 공이 있어 종묘에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156) 하태규, 2002「고려시대 全州 지역 貫鄕 姓氏와 그 동향」全北史學 25.
15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전라도 나주목 풍속.
158) 금성산 신당은 처음부터 무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淫祀로 비판받았다. 新增
東國輿地勝覽 권35 나주목 祠廟條를 보면, “매일 밤 기생 4명이 사당 안에 輪
番으로 숙직했으며, 성종 10년에 예조에 명해 이를 금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
온다. 또한 成宗實錄 권97, 성종 9년(1478) 10월 13일조를 보면, “딸을 시집
보내는 자는 그 처녀를 데리고 먼저 錦城堂에 머물면서 ‘山神에게 시집간 뒤에
야 시집간다’고 아뢴다 하니 이러한 弊風을 금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타난다.
또한 이 기록에 의하면, 나주 금성산에 친히 제사하지 아니하면 그해에 반드시
질병이 있다 하여 추수한 뒤에 도내 백성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모두 가서 제
사하였는데 늙은이는 이끌고 어린이는 끌려가면서 길을 메웠다고 한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금성대왕으로 상징되는 나주 금성산이 국가의 치제대상이면서
아울러 지역 주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성
산에는 산 정상에는 上室祠, 중턱에는 中室祠, 산 기슭에는 下室祠와 國際祠
등 4개의 사당과 성 안에도 爾朝堂이 있었다고 한다.
159)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전라도 나주목 산천.
160)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전라도 나주목 궁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83
옛 고장을 돌보고 보호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현종(顯宗)이 남쪽
으로 순수할 제, 이곳에 이르러 드디어 흥복(興復)의 공을 이루었으므로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하게 하여 서울과 비등하게 했다. (중략)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 아님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
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라고161) 하여, 고려의 어향지임을
드러내고, 남쪽의 거진으로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백성과 물자
가 번성하고, 풍성하여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며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인식하였다.
이중환은 ‘나주는 노령 아래에 있는 한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錦城
山)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靈山江)에 닿아 있다.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하여 옛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라고 하였다.162)
나주에 대해 정도전은 ‘사람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없이 농업에 힘쓴다’
고 했던 곳이며, 서거정이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물이 번성한’
곳이라 할 정도로, 예로부터 곡창 호남의 상징이며 교통․군사․행정의
중심지였다. 현종이 거란 침입을 피해 이곳에 7일동안 머문 뒤, 1018년 전
국을 8목으로 조정할 때(현종 9) 나주만이 호남 유일의 목으로 남을 수
있었다.163)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함에 있어 그 발판으로 삼았던
만큼 고려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부상하기에 이른다. 왕건이 전남지방인
금성군(나주) 등 10여 성을 효공왕 7년인 903년에 수군을 인솔하고 와서
점령하고 909년에는 진도와 고이도성을 점령함으로써 전남지역의 내륙일
부와 해안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왕건이 수군을 인솔하고 전
남지역을 장악한 것은 후백제의 배후를 교란하여 군사력을 약화시키려
하였고 서남방면의 해상을 봉쇄함으로써 대중 대일에 대한 외교활동을
방해하려 하였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경상도내 해안까지 진출하려 하였
16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전라도 나주목 누정.
162) 擇里志 八道總論 全羅道 나주.
163) 高麗史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나주목.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84 … 한국학논총 (41)
고 나주지방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농업생산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경제
적 기반을 조성함과 동시에 세력의 확장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 오씨와 인연을 맺었고 또한 아들을 낳았다. 이가 장화왕후와 혜종이
다. 어향지(御鄕地)로서 중요시되어 왔다.164)
이때 나주는 왕건으로 인해 금성군(錦城郡)에서 나주라는 이름을 얻는
다. 당시 상황으로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무진주를 두고 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동안 무진주 중심의 지방편제에서 나주 중심의 지방편제
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특히 왕위에 등극한 직후인 918년 9월 나주도대행
대(羅州道大行臺)를 설치하고 전 광평성 시중 구진(具鎭)을 나주도대행대
시중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나주도대행대란 고려의 중앙정부와는 별
도로 나주를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특별기구였다. 이처럼 나주를 특별구역
으로 하고 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직명을 중앙의 최고관직인 시중이
라 칭했던 것이나, 광평성의 시중을 파견했던 것 등은 나주에 대한 파격
적인 대우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현종이 나주를 피난지로 삼은 까닭은 태조 이래 어향지로서 고려 왕실
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은 1237년 담양에서 이연년
(李延年) 형제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광주를 함락시킨 뒤 친고려 세력
이 결집되어 있던 나주를 공격했을 때, 몽골과의 항쟁에서 큰 전과를 올
린 나주도지휘사 김경손(金慶孫)에 반란군의 최고 지위인 ‘도통(都統)’을
제의하면서 포섭하자, 나주가 혜종의 ‘어향’임을 내세워 나주민의 민심을
결집시켜 이연년 세력을 물리친 것에서도 알 수 있다.165) 백제 부흥운동
이 평정 된 뒤 나주는 고려 정부를 상징하는 거점이 되었다. 고려 정부가
원에게 항복한 뒤 삼별초가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서남해의 진도를
164) 현종은 南海神祠를 지어 현종 16년(1025)부터 종묘사직을 보존한 뜻을 기려 춘
추로 祭를 모시게 했으며(高麗史 권63, 지17, 예5 吉禮小祀 雜祀 “(顯宗) 一
六年 五月 以海陽道定安縣 再進珊瑚樹 陞南海神祀典”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전라도 나주목 사묘 남해신사), 또한 충렬왕은 鄭可臣의 건의에 따라 金
城山에 ‘定寧公’이라는 작호를 내리고, 나주의 祿米 중에서 5석을 사당에 해마다
내려 운영하게 하였다는 점은 나주의 정치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高麗
史 권105, 열전18 정가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5, 전라도 나주목 사묘 금성
산사. 변동명, 2001「高麗時期의 羅州 錦城山信仰」전남사학 16).
165) 高麗史節要 권16, 고종 24년 춘월, 高麗史 권103, 열전16, 김경손.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85
거점으로 대몽항전을 전개하면서 남도의 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때에도
나주의 토착세력이었던 김응덕과 정지려 등은 고려 왕조를 등진 삼별초
와 싸워 나주성을 7일이나 지켜냈다. 고려시대 나주는 또 하나의 사직이
었던 셈이다.
나주의 토성은 토성(土姓)이 9이니, 김(金)․나(羅)․오(吳)․정(鄭)․진
(陳)․손(孫)․남(南)․박(朴)․유(柳)이다.166) 나주 오씨는 이미 국초부터
외척(장화왕후 오씨, 多憐君)이었고, 나주 정씨의 정가신(鄭可臣)과 정지
(鄭地), 나주 나씨의 태조공신인 나총례(羅聰禮)와 나유(羅裕)․익희(益禧)
로 이어지는 계열이 크게 활동하였다.
승주는 ‘풍성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한다’,167)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일컬는다. (중략) 남쪽으로 큰 바다에 연
했으므로 곧 해적들이 왕래하던 길목이다’,168) ‘고려 말년에 정치는 잘못
되고 나라는 위태로워 왜구 침입이 극렬하여 깊이 쳐들어와서 경기(京畿)
에까지 이르니, 바다에 연한 수천 리 땅이 버려져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순천(順天)이 화를 가장 참혹하게 당해서 빈터만 남고 들에는 쑥대만 우
거졌으니’라고169) 하여 고려말 왜구의 피해를 우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태조는 영규에게 이르기를, “임금이 이미 나라를 잃었는데 경의 내외가
홀로 그 아비에게 정성을 다하고 겸하여 아름다운 공을 내게로 돌려보냈
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도다”고 하여 좌승(左丞)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들도 벼슬을 시켰다. 죽어서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었다. 박란봉(朴蘭
鳳) 죽어서 인제산신(麟蹄山神)이 되었다’고170) 하였다.
1018년의 8목체제에서 승주는 나주도에 속한 나주목의 한 ‘영주(領州)’
로서 5품 이상의 지사(知事)나 주사(州事)가 배치되는 하나의 수령관이
되었다. 승주의 지위와 관호가 격하되고 또 그 임내마저 축소된 것은 승
주의 세력이 1018년을 전후하여 크게 위축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
면에 지금까지 승주의 임내이던 낙안군과 곡성군 등이 승주보다 거리가
166)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羅州牧 토성조.
16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全羅道 順天都護府 풍속.
16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全羅道 順天都護府 형승.
169)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全羅道 順天都護府 궁실.
170)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全羅道 順天都護府 인물.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86 … 한국학논총 (41)
훨씬 먼 나주목의 임내로 이속된 것은, 백제와 고려의 쟁패기부터 이미
왕건의 세력 근거지로서 고려왕실과 특수한 관계에 있던 나주세력이 승
주보다 중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승주의 토성은 장(張)ㆍ박(朴)ㆍ김(金)ㆍ강(康)이며, 망성(亡姓)은 도(陶)
이다.171) 순천 박씨인 박영규(朴英規)와172) 고려후기에 활동한 박란봉(朴
蘭鳳) ― 박천상(朴天祥) 계열과 순천 김씨의 시조인 김총(金摠)이 있다.
승주 일대의 지방 세력은 견훤에게 협력하였던 박영규(朴英規)와 김총
(金摠)이 있다. 견훤도 자신의 지배적 권위와 정권안정을 위하여 여러 지
방 유력자들과 연합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그는 유력 가문의 딸
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 북
촌(北村)의 부호(富豪)와 혼인한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딸을 각지의 유력한 가문과 혼인시키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의 사위인
지훤(池萱)과 박영규였다. 지훤은 광주의 성주이었고 박영규는 후백제에
서 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후백제에서 장군은 좌장군 우장군 등과 함께
특정한 임무와 권한을 가진 정규의 무관직으로서 단위부대의 지휘관이었
을 것으로 짐작된다.173)
박영규가 견훤의 딸과 혼인하고 후백제의 장군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승주와 그 인근지역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유력 가
문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영규는 후삼국 통일 직전에 고려에 귀부하
여 왕건과 연결을 맺음으로써 상당한 정치적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박
영규는 딸 1명은 왕건의 부인(동산원부인)이 되었고, 두 딸을 정종의 왕
후(문공왕후․문성왕후)가 되었다. 이 3건의 혼인은 물론 왕건의 의도로
이루어졌다. 왕건이 박영규의 딸과 혼인한 까닭은 박영규가 후백제 멸망
에 기여를 한 것에 대한 배려였다. 또한 이 혼인에는 왕건이 후백제 계열
171)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順天都護府 토성조.
172)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順天都護府 토성조에서는 박영규가 강영규로 기재되
어 있다. 이는 순천부의 토성인 박씨와 강씨가 태조공신인 영규를 서로 자기
조상으로 추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李樹健, 1984 韓國中世社
會史硏究 일조각, 323쪽 참조).
173) 邊東明, 2002「 海龍山城과 順天」全南史學 19 및 姜鳳龍, 2002「後百濟 甄萱
과 海上勢力 -王建과 海上爭覇를 중심으로-」歷史敎育 83.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87
의 인물을 포섭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박영규가 이 지역의 대표 유력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
역이 지닌 이점을 활용한 때문이었다. 당시 승주는 농수산물 등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서 섬진강의 상류인 보성강을 끼고 있어서 수운을 통하
여 섬진강 하구까지 연결되었다. 또한 승주의 남부지역은 직접 바다와 연
결된 해안이다.174)
한편 김총은 승주 출신으로 견훤 휘하에서 인가별감(仁駕別監)이라는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죽은 뒤에 승주의 성황신으로 받들어졌고
진례산에 그를 봉사하는 성황사가 세워졌다. 이 성황사에서는 조선 정조
대에도 그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총은 견훤의
호위부대의 장이었다. 그가 후백제에 대한 폄하(貶下)의 분위기가 상당했
을 것으로 여겨지는 고려 초에, 승주의 성황신이 되었다는 것은 주목되는
일이다.175)
고려 초에 견훤의 장수가 승주의 성황신으로 모셔진 것은, 그가 출중한
능력을 지닌 장군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외에도 승주지역이 견훤정
권의 주요한 근거지였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런 만큼 승
주지역에는 후백제에 대한 호의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해룡산신인 박영규와 함께 김총을 수호신으로 혹은 그들의 수호신
으로 사묘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지역의 주민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 승평군과 그 속현인 해읍현의 주민들은 정신적으
로 결집되었을 것이다.176)
174) 이곳에는 고려 초에 漕倉으로 海龍倉이 설치되었다. 해룡창의 위치는 沙飛浦였
는데, 사비포는 1480년(성종 11)에 潮陽浦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양포는 현 순
천시 鴻內洞 인근에 위치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海倉浦가 있었는데 稅穀
운송의 포구였다. 해창포는 현 해룡면 海倉里로 추측된다. 해창리는 東川의 하
류, 동천이 伊沙川과 합류하는 곳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175)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기록되어 있는 각 군현의 성황사에 배향된 인물로는 6
명이 확인되는데, 蘇定方과 김총을 제외한 金忍訓․金洪術․申崇謙․孫兢訓은
왕건 휘하의 장수이거나 왕건을 도왔던 인물이다. 김총은 유일하게 후백제 출
신의 인물이다.
176) 邊東明, 2006「高麗時期 順天의 山神ㆍ城隍神」역사학보 174. 성황신에 대한
연구는 변동명, 2006「城隍神 金洪術과 義城」역사학보 189 : 2006「城隍神
金忍訓ㆍ孫兢訓과 梁山ㆍ密陽」한국사학보 22 : 2004「申崇謙의 谷城 城隍神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88 … 한국학논총 (41)
이 지역 유력 세력들에게 받아들여진 불교는 대체로 화엄(華嚴)과 선
(禪)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의상(義湘)에서 비롯된 화엄종은 신라 불
교를 주도하는 종파였으며 사회에 끼친 영향도 컸다. 의상의 화엄종은 실
천적 신앙이 강함으로 해서 그 세력을 전국적으로 확산해 갔다. 신라 하
대에는 선종(禪宗)의 적극적인 수용과 그 영향에도 불구하고 의상의 화엄
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꾸준히 계승․발전했으며, 화엄십찰 뿐만 아니
라 그 밖의 많은 사찰이 세워지면서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지역에
서 종래와는 다른 화엄신앙과 관련된 곳으로 지리산 화엄사와 장흥 천관
사가 주목된다.
또한 무인정권이 성립되었을 무렵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조계산 수선
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조계종의 결사 운동을 일으켜 불교사상의 개혁을
꾀했으며, 이 수선 결사가 송광사(松廣寺)로 발전하였다. 이 지역의 대표
사찰은의 송광사(松廣寺), 선암사(仙巖寺), 정혜사(定慧寺), 동화사(桐華寺),
향림사(香林寺) 등이 있었다.
D-서해도 해주(海州)․황주(黃州)
해주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이다’,177) ‘해주
는 관서의 큰 고을인데,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폭지군(瀑池郡)을 설치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에, 고을이 남쪽이 큰 바다
에 임하였으므로 처음으로 해주라 이름하였다. (중략) 그 지역은 넓고 그
백성은 많아서, 전지의 비옥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여러 주 중에서 제일이
다’,178)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기후가 일찍 추워지고, 백
성들이 물고기와 소금으로 생업을 삼는다”라고 하여 관서의 근 주로 지역
推仰과 德陽祠 配享」한국사연구 126 : 김갑동, 1991「高麗時代의 城隍信仰
과 地方統治」한국사연구 74 : 1997「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
城隍大神事跡 懸板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 97 : 김기덕, 1998「고려시대 城
隍神에 대한 封爵과 淳昌의「城隍大神事蹟」현판의 분석」역사민속학 7 : 송
화섭, 1998「淳昌의 城隍神과 城廓說話」역사민속학 7 : 이정신, 2008「고려
시대 경주민의 항쟁과 제사」신라문화 32 : 이해준, 2011「瑞山 鄭仁卿(126
7~1305)의 死後 追崇과 關聯事蹟」지방사와 지방문화 14(2) 등이 참고된다.
17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黃海道 海州牧 형승.
17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黃海道 海州牧 궁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89
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전지의 비옥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여러 주 중에
서 제일’로 보았다. 또한 ‘기후가 일찍 추워지고, 백성들이 물고기와 소금
으로 생업을 삼는다’고179) 하여 해주의 지역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산
이 높아서 서리가 일찍 오고, 바다에 임한 고을 역시 서북 바닷 바람으로
인하여 일찍 춥고 늦게 따뜻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황주는 ‘농사짓고, 누에치기를 힘쓰며 음사(淫祀)를 숭상한다’,180)
‘황주가 서도(西道)의 요긴한 지방에 있어, 사신과 거마(車馬)들이 모여드
는 곳이다. 고려 때에는 관내도에 속하였는데 토지가 기름지고, 백성이 많
아서 풍부하기가 여러 고을에 제일이었으며, (중략) 고을 서북쪽에 대동
강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岊嶺)․극성(棘城)이 있으니, 모두 국가의 요새
지로서 제어하는 일을 소홀하게 할 수 없고’,181)라고 하여 국가의 요해처
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중환은 ‘대체로 국도(國都) 서북쪽에 위치하여 지역이 평안도․함경
도와 이웃하였으므로 활쏘기․말달리기를 좋아하는 한편 문학을 공부하
는 선비는 적다.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납․철․면화․벼․기장․
생선․소금 따위가 생산되고 있다. 비교적 부유한 자는 많은 편이나 사대
부는 적다. 그러나 평야 지대에 있는 여덟 고을은 땅이 기름지고, 바닷가
열 고을은 경치로 이름난 곳이 많아 역시 살지 못할 곳은 아니다. 지세가
서해로 불쑥 들어가서 삼면은 바다에 임하였고 동쪽 한 면만이 남북으로
통행하는 한길에 닿아 있다. 북쪽에는 높은 영(嶺)이 있고, 남쪽은 강이
겹으로 막았다. 안팎이 산과 하수이며, 높고 험한 성곽이 많다. 또 넓은
들과 기름진 벌판이 있어 참으로 천부(天府)이며, 전략적으로 이용할 만
한 지역이다’라고 하였다.182)
이 지역은 패강진(浿江鎭) 지역으로 예성강 하구를 통안 대외무역으로
독자적인 상업세력의 구축도 가능했다. 이로 인해 신라 말기에는 예성강
이북지역에 많은 지방세력이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고려를 건국한
179) 世宗實錄地理志 황해도.
180)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黃海道 黃州牧 풍속.
18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黃海道 黃州牧 궁실.
182) 擇里志 八道總論 黃海道.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90 … 한국학논총 (41)
왕건(王建)과 박수경(朴守卿)․순지(順之) 등 왕건에 가담하여 활약한 많
은 사람들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 특히 왕건 집안이 혈구진(穴口鎭)의 군
사력을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 발전하였듯이, 패강진 지역에서
성장한 군진세력들이 고려 건국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서해도 지역은 한 때 관내도(關內道)로 불리고 해주가 우신책군
(右神策軍)․우보(右輔)로 불렸을 만큼 개경․경기와 밀접한 공간이었다.
이는 수도 개경을 보위하는 역할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이 지역의 중심
은 해주와 황주였다. 황주는 목이었고, 해주는 안서도호부→안서대도호부
→해주목의 변천 과정을 밟았다. 서해도는 개경과 서경 사이에 끼여 금교
도(金郊道)와 절령도(岊嶺道)가 교차하며 개경-금교-평주-절령-황주-서경
으로 이어졌다. 절령은 황주 일대와 더불어 개경․서해도와 서경․서북면
의 경계선이고 전략선이었다. 때문에 목종 때 강조(康兆)를 막으려 절령
을 차단했고, 서경의 묘청(妙淸)은 군사를 일으켜 절령도를 차단했으며,
서경의 조위총(趙位寵) 군대는 절령역에서 윤인첨의 중앙정부군을 격파해
개경을 위협했다. 또한 고려초의 거란족(요)의 침입, 무인집권기 거란족
(합단적)과 몽골의 침입,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이 지역에서 일
어나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
서해도는 예성강을 끼고 개경과 경기에 마주해 있다. 개경과 경기권의
서쪽과 북쪽에 위치해 개경과 경기를 보좌하는 기능을 했다. 단 황주 일
대는 서해도 일원이면서 절령 이북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서경의 영향력
도 상당히 작용했으며, 개경과 서경의 완충지대였다.
황주의 토성(土姓)은 윤(尹)․김(金)․백(白)․지(池)․노(盧)․동(董)․
단(段)․황(黃)․최(崔)․석(石)․황보(皇甫)가 있으며, 이 가운데 황보․
김․황씨와 촌성인 변씨(邊氏)가 전기에 활동하였으나, 후기에는 황주 출
신 가문은 보이지 않는다.183)
황주의 위상은 고려초기에 후비의 배출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황주출신
으로 태조의 비가 된 신정왕후 황보씨가 대종(戴宗 추증)과 대목왕후 황
보씨(광종의 배우자)를, 대목왕후가 경종을, 대종이 성종과 헌애태후 황보
씨(목종의 모, 천추태후)와 헌정왕후 황보씨(현종의 모)를 낳았다. 신정태
183) 李樹健,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 277쪽 참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91
후의 딸과 손녀들은 황보씨를 칭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해 황주에 유폐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황주가 고향이었다. 때문에 현종대까지만 해도 황
주의 위상은 예성강 서북지역에서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왕실과 밀접해
있었다.184) 이외도 광종이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여 주지로 임명한 균
여(均如) 역시 황주 변씨(邊氏)이다.
이와 반대로 황주가 후비 배출이 끊기면서 해주의 위상은 높아졌다. 태
조 왕건이 이곳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했다고 ‘해주(海州)’라 명명한 뒤
서해안과 중국과 가까워 서해를 장악하는 수로의 요충지로서 개경의 배
후지로서 뿐만 아니라 산동반도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잇는 지역이었다.
해주는 왕건의 배우자를 배출하지 않은 대신 왕실의 배후지역이었다. 왕
건은 해주 수미산(須彌山)에 광조사(廣照寺)를 창건해 스승인 이엄(利嚴)
을 머물게 하여 선종의 중심지로 만들었고,185) 중국에서 유입된 오백나한
화상(畵像)을 해주 숭산사(嵩山寺)에 안치해 나한도량의 중심지로 만들었
다.186)
해주의 토성(土姓)은 정(鄭)․오(吳)․민(閔)․최(崔)․임(林)․경(景)․
임(任)과 망성(亡姓) 문(文)․욱(郁)․송(宋)이 있다.187) 이 가운데 고려전
기에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최유길(崔惟吉)―최사추(崔思諏), 고려
후기에는 최유엄(崔有渰), 최자(崔滋)가 활동하였다.188) 특히 해주 향리의
184) 이태진, 1977「金致陽 亂의 性格-高麗初 西京勢力의 政治的 推移와 관련하여
-」韓國史硏究 17 및 김창현, 2008「고려시대 서해도 지역의 위상과 사원」한
국사학보 33, 171쪽 참조.
185) 현재 광조사에는 937년(청태 4)에 죽은 진철대사(이엄)의 부도비가 남아 있다.
비에는 崔彦撝가 찬한 ‘廣照寺 眞徹大師寶月乘空塔碑’라고 각명되어 있다. 높이
3.7m이다. 광조사는 東國輿地勝覽 편찬 당시(1481년, 성종 12)에도 존재한 것
으로, 1900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에 편찬된 寺塔古蹟攷
에 의하면 ‘옛터에 오층석탑과 비석, 기와조각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186) 태조 때 숭선사가 언제 신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현종 대에는 신광
사로 나온다. 태조 6년(923) 福府卿 尹質이 오도자가 그린 오백나한 그림을 중
국 후량에서 가져와 이곳 숭산사에 봉안하였고(高麗史 권1, 世家1 太祖 6년
6월 癸未 福府卿尹質使梁還 獻五百羅漢畵像 命置于海州嵩山寺), 현종과 문종의
행차가 이어지기도 하였는데, 문종은 신광사에 가서 羅漢齋를 설하고 신하들에
게 향연을 베풀었다(高麗史 권5, 世家5, 顯宗 17년 9월 甲子 幸海州神光寺 및
권7 세가7, 文宗 7년 9월 庚寅 次安西都護府留三日 辛卯次北嵩山神光寺).
187) 世宗實錄地理志 홍해도 해주목 토성조.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92 … 한국학논총 (41)
아들인 최충(崔沖)이 목종 때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 때 시중에 오르고
사립학교인 구재(九齋)를 세워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만든 이래 그 자손
이 대대로 급제하고 재상의 지위에 오르면서 해주의 위상은 높아갔다. 최
충의 증손인 최용(崔湧)의 딸(장신궁주 숙비)은 예종 16년 정월에 예종의
배우자가 되었다. 그 결과 해주가 예종 17년(1122) 황주목을 제치고 안서
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외에도 해주 오씨가 이 지역의
유력가문으로 성장했다. 오연총(吳延寵)은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과 함
께 여진족을 토벌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
章事)의 벼슬에 올랐다. 또한 무인란을 주도한 정중부(鄭仲夫) 역시 해주
정씨이다.
황주와 해주의 물자는 개경을 위해서 쓰이기도 했고, 권력자나 왕에게
수탈당하기도 했으며, 서해도 사람들은 개경의 공사와 행사에 동원되곤
했다. 또한 개경에 인접했기에 그 토지가 왕족과 권력자에게 점유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고 평주를 중심으로 거주지 내지 별장지로 인기가 많았
다. 이 지역의 사원으로는 해주의 북숭산(北嵩山) 신광사(神光寺, 嵩山寺)
와189)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 등이 대표적이었다. 광조사는 선종
9산의 하나였다.
5. 맺음말
고려의 대읍인 12목은 신라의 9주 5소경을 모태로 편제되었다. 9주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각 3주씩 배정되었으며, 5소경은 고구
려․백제․가야의 옛 땅에 설치되었다. 고려는 신라의 9주 5소경의 군현
188) 李樹健,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 278쪽 참조.
189) 신광사는 충숙왕이 해주에 행차했던 길에 이곳에서 축수 법회가 개설되기도
하였다(高麗史 권35, 世家35, 忠肅王 후4년 八月 己未 幸海州 初王欲遊獵海州
憚朝議未果 御香使金信本國人希旨 口宣聖旨云 祝壽于海州神光寺 及托以行). 또
한 충숙왕 때 원 順帝의 원찰로 중창되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海州牧
佛宇 神光寺). 그리고「佛祖直旨心體要節」의 찬자인 白雲和尙과 惠勤(懶翁) 역
시 이곳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93
제를 바탕으로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을 5도와 양계로
행정구역을 재편하였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 무인집권기에 일어난 ‘삼국부
흥운동’은 그러한 지역적 속성을 가지고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12목의 지
역적 특색은 인구의 번성, 교통의 요지, 군사적 요해지, 물자의 생산과 활
발한 유통과 함께 고려왕실의 혼인관계 등의 특징을 가진다.
광주는 한강에 자리한 ‘중부지방의 거진(巨鎭)’․‘남로 요해처’로서의 전
략적 요충지이며, 왕규의 두 딸이 태조의 제15비(妃) 광주원부인(廣州院夫
人)과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은 제16비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이
되어 왕실의 외척으로서, 광주를 기반으로 막강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왕규의 몰락으로 광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2목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전략과 교통의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행적을 남
긴 광주 출신 인물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광주는 반역의 땅으
로 낙인찍혀 이곳 출신 인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양주는 충청도와 강원도를 개경과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곳으
로, 왕건은 항복한 견훤에게 상보(尙父)라 하고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삼
도록 하였다. 1010년(현종 1)에는 거란의 침입에 개경을 버리고 나주까지
몽진할 때, 양주에 며칠간 머문 일도 있다. 1067년(문종 21)에 이르러 양
주는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서경․동경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
(南京)이 되었고, 인근의 군민을 옮겨 채우기도 했다. 이후 남경 천도 계
획은 일시적이지만 실제 천도의 단행 등 양주는 도읍지로서의 자연환경
과 군사 방어적 의미, 풍수도참적 의의와 교통 편의 등이 모두 갖추어진
곳으로서 주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는 남한강을 끼고 ‘남쪽 방면의 요해처에 자리 잡고 있는 땅’으로,
군사적 요충지뿐만 아니라 교통로로서 중시되었다. 충주의 유력 세력인
유긍달(劉兢達)의 딸이 918년(태조 1) 태조 왕건의 제3왕비(신명순성태후)
가 됨으로써 강력한 지방 세력으로 중앙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실
의 외척 세력으로 등장한 때문이다. 그 결과 충주는 정종과 광종 이후 ‘풍
패지지(豊沛之地)’로 인식되어 고려 왕실이 중시하는 지역이 되었다. 때문
에 충주는 지덕(地德)이 왕성한 곳으로 인식되어 삼소(三蘇)의 하나로 정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94 … 한국학논총 (41)
해진 후 역대 왕들이 와서 머문 곳이었다.
청주는 ‘청주 고을이 토지가 비옥하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은 곳’으로,
청주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은 전라도를 장악한 견훤이 한강 일대의 평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나 교통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
다. 고려 건국 후 왕건은 청주를 비롯하여 중부일대 지방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순군
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사건’등과 같은 많은 모반 사건이 일어
나자, 청주세력에 대한 견제정책을 취하였다. 때문에 고려개국 1․2등 공
신 중에는 청주출신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건국 초기에 대대적인 관
직임명 기사에도 청주인들은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청주세
력은 점차 고려 중앙정부에 흡수되거나 토착 향리층으로 변화하여 더 이
상 고려의 중앙정부에 적대적인 지방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공주는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중심산인 동남쪽의 계룡산을 중심으로 금
강을 끼고 있어 입지상 방어의 거점지로서, 또한 인근의 백마강․강경
강․진강은 서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수운에 편리한 지리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전라도와 충청도 서쪽 사람들은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 차령
을 넘고, 천안․직산을 거쳐 경기도 양성과 진위․수원․과천을 지나 서
울을 오가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공주가 12목의 하나가 된 것은 강조(康
兆)가 목종을 폐위한 것을 구실로 시작된 요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는 과정에서 유숙(留宿)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신정권기인 명종 6
년(1176)에는 ‘명학소(鳴鶴所)의 난’이 일어나 망이․망소이의 무리들이 제
일 먼저 공략한 곳도 이곳이었다.
상주는 동남방 일백 고을 중 첫째로, 팔방으로 통한 거리가 있어서 신
라 때부터 큰 부(府)가 되었다. 상주는 신라 이래 진흥왕 때 잠시 중단되
었다가 다시 주가 된 이래, 대 백제․고구려의 요충지로 중요한 지역이었
고, 신라말 후삼국의 하나인 백제를 세운 견훤의 출자지이기도 하였다. 상
주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을 끼고 있어서 서쪽의 요지에 위치한
다. 이 길을 통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충돌을 빚어왔고, 백제와도 잦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진주는 동방의 육해(陸海)로.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95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나 되며, 토지의 비옥함과 인물의 번화함이 딴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라고 평한 곳이다. 진주에는 왕봉규(王逢規) 세력
이 있었다. 비록 견훤에게 소멸되었지만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를 자칭
하고 중국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진주는 995년 전국을 10
도로 개편하고 절도사를 두어 ‘진주정해군(晋州定海軍)’이라 하였다. 이는
진주에 주재하는 절도사가 남해안 쪽 바다를 지키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나주를 해양도에 속하는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
使)’로 한 것과 함께 고려하면, 진주는 나주와 함께 한반도 남해안을 나누
어 지키는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으
로 인식된 곳이다. 즉 남쪽의 거진으로서의 비옥함과 인구의 번성함, 그리
고 인재가 모인 곳이라 하였으나, 옛 백제인 곳으로 태조도 또한 싫어하
던 곳으로 평가하였다. 전주는 호남지방의 인후부로서 전공주도와 산남도
에 속한 많은 역참이 있었던 교통상의 요지였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체제
가 들어서면서 익산(금마)에서 옮긴 지역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뒤 고려
는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아마도 그 시점은 후백
제가 멸망하던 해인 936년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남도호부는 오래가지 못
하고 설치한지 4년 만에 혁파되고 태조 23년(940) 다시 전주로 환원되었
다. 안남도호부는 이후 광종 2년(951) 고부에 다시 설치되었다.
나주는 영산강을 기반으로 고려의 어향지임을 드러내고, 남쪽의 거진으
로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고, 풍성하여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며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인식
하였다. 현종이 나주를 피난지로 삼은 까닭은 태조 이래 어향지로서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은 1237년 담양에서 이
연년(李延年) 형제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광주를 함락시킨 뒤 친고려
세력이 결집되어 있던 나주를 공격했을 때, 몽골과의 항쟁에서 큰 전과를
올린 나주도지휘사 김경손(金慶孫)에 반란군의 최고 지위인 ‘도통(都統)’
을 제의하면서 포섭하자, 나주가 혜종의 ‘어향’임을 내세워 나주민의 민심
을 결집시켜 이연년 세력을 물리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승주는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일컬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96 … 한국학논총 (41)
는 곳이며, 남쪽으로 큰 바다와 접해 있어 해적들이 왕래하던 길목으로
인식되었다. 박영규가 후삼국 통일 직전에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과 연결
을 맺음으로써 상당한 정치적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박영규는 딸 1명은
왕건의 부인(동산원부인)이 되었고, 두 딸을 정종의 왕후(문공왕후․문성
왕후)가 되었다. 1018년의 8목체제에서 나주도에 속한 나주목의 한 ‘영주
(領州)’로서 5품 이상의 지사(知事)나 주사(州事)가 배치되는 하나의 수령
관이 되었다. 승주의 지위와 관호가 격하되고 또 그 임내마저 축소된 것은
승주의 세력이 1018년을 전후하여 크게 위축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해주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로, 황주는 서도
(西道)의 요긴한 지방에 있어, 사신과 거마(車馬)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또한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岊嶺)․극성(棘城)이
있으니, 모두 국가의 요새지로서 주목되었다. 해주가 우신책군(右神策
軍)․우보(右輔)로 불렸다는 점은 수도 개경을 보위하는 역할을 담당했음
을 의미한다.
황주의 위상은 고려초기에 후비의 배출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황주출신
으로 태조의 비가 된 신정왕후 황보씨가 대종(戴宗 추증)과 대목왕후 황
보씨(광종의 배우자)를, 대목왕후가 경종을, 대종이 성종과 헌애태후 황보
씨(목종의 모, 천추태후)와 헌정왕후 황보씨(현종의 모)를 낳았다. 신정태
후의 딸과 손녀들은 황보씨를 칭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해 황주에 유폐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황주가 고향이었다. 때문에 현종대까지만 해도 황
주의 위상은 예성강 서북지역에서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왕실과 밀접해
있었다. 이와 반대로 황주가 후비 배출이 끊기면서 해주의 위상은 높아졌
다. 태조 왕건이 이곳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했다고 ‘해주(海州)’라 명명
한 뒤 서해안과 중국과 가까워 서해를 장악하는 수로의 요충지로서 개경
의 배후지로서 뿐만 아니라 산동반도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잇는 지역이었
다. 해주는 왕건의 배우자를 배출하지 않은 대신 왕실의 배후지역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하의 12목에는 또 일찍부터 외관과 함께 의학박사와 경
학박사가 파견되었고, 학교가 건립되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및 사
상과 문화적 해택을 입을 수는 있었다. 또한 성황사 등을 운영하면서 지
역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교종과 선종 사찰이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97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들어선 지역으로 불교사상 또한 일찍 수용된 것
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다른 군소의 군현을 통할하면서 독자적인 문화
권을 형성해 갔을 것이다. 때문에 12목 지역은 고려시대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대읍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98 … 한국학논총 (41)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稼亭集․牧隱文藁․世宗實錄地理志․四佳集․東文選․
浩亭集․眉叟記言․新增東國輿地勝覽․輿地圖書․擇里志
姜鳳龍, 1991「統一新羅 州郡縣制의 構造」白山學報 52.
姜鳳龍, 2002「後百濟 甄萱과 海上勢力 -王建과 海上爭覇를 중심으로-」歷史敎育 83.
權純馨, 1990「高麗中期 南京에 대한 一考察」, 향토서울 49.
金周成, 1988「高麗初 淸州地方의 豪族」韓國史硏究 61․62합집.
김갑동, 1986「‘고려초’의 주에 대한 고찰」고려사의 제문제, 삼영사.
김갑동, 1988「고려 태조대 군․현의 내속관계형성」한국학보 52, 일지사.
김갑동, 1990 나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연구 고대민족문화연구소.
金壽泰, 1989「高麗初 忠州地方의 豪族; 忠州劉氏를 중심으로」충청문화연구 1.
김아네스, 2002「고려 성종대 유교 정치사상의 채택과 12州牧」震檀學報 93.
金在弘, 1991「新羅 中古期의 村制와 地方社會 구조」한국사연구 72.
김창현, 2008「고려시대 서해도 지역의 위상과 사원」한국사학보 33.
김혜완, 2008「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9.
李仁在, 1990「고려 중․후기 지방에 개혁과 감무」外大史學 3.
박종기, 1987「≪高麗史≫ 地理志의高麗初 年期實證」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
叢 일조각.
박종기, 1988「高麗 太祖 23년 郡縣改編에 관한 연구」한국사론 19.
박종기, 2002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박종진, 2003「고려시기 안찰사의 기능과 위상」東方學志 122.
박종진, 2010「고려시기 ‘상주목 지역’의 구조와 지리적 특징」한국중세사연구 29.
邊東明, 2002「海龍山城과 順天」全南史學 19.
변동명, 2006「高麗時期 順天의 山神ㆍ城隍神」역사학보 174.
申虎澈, 2002 後三國時代 豪族硏究 충북대 출판부.
심재석, 2005「高麗 惠宗代 王規의 廣州院君 옹립모의와 定宗의 卽位」역사문화연구 특별호.
安永根, 1992「羅末麗初 淸州勢力의 동향」朴永錫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上, 탐구당.
윤경진, 2005「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 9州․12牧과의 연결성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36.
윤경진, 2006「고려초기 10道制의 시행과 운영체계」震檀學報 101.
윤경진, 2013「고려 按察使의 연원과 ‘五道按察使’의 성립」한국문화 61.
李樹健,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
정요근, 2008「後三國時期 高麗의 남방진출로 분석」한국문화 44.
鄭淸柱, 1996 新羅末․高麗初 豪族硏究, 일조각.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99
蔡雄錫, 1986「高麗前期 社會構造와 本貫制」高麗史의 諸問題 삼영사 : 2000 고려시대의
국가와 지방사회 서울대 출판부.
崔柄憲, 1978「新羅末 金海地方의 豪族勢力과 禪宗」韓國史論 4.
하태규, 2002「고려시대 全州 지역 貫鄕 姓氏와 그 동향」全北史學 25.
한기문, 2004「尙州의 行政區域 變遷과 文化圈」尙州文化硏究 13.
홍영의, 2010「고려 현종의 나주 南幸시 공주 경유의 배경과 의의」한국중세사연구 29.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100 … 한국학논총 (41)
국문초록
고려의 대읍인 12목은 신라의 9주 5소경을 모태로 편제되었다. 9주는 신라․고
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각 3주씩 배정되었으며, 5소경은 고구려․백제․가야의
옛 땅에 설치되었다. 고려는 신라의 9주 5소경의 군현제를 바탕으로 지방을 효과
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을 5도와 양계로 행정구역을 재편하였다. 때문에 무
인집권기에 일어난 ‘삼국부흥운동’은 그러한 지역적 속성을 가지고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12목의 지역적 특색은 인구의 번성, 교통의 요지, 군사적 요해지, 물자의 생산
과 활발한 유통과 함께 고려왕실의 혼인관계 등의 특징을 가진다. 또 일찍부터 12
목에는 외관과 함께 의학박사와 경학박사가 파견되었고, 학교가 건립되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및 사상과 문화적 해택을 입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성황사 등
을 운영하면서 지역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교종과 선종
사찰이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들어선 지역으로 불교사상 또한 일찍 수용된 것으
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다른 군소의 군현을 통할하면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
해 갔을 것이다. 때문에 12목 지역은 고려시대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대읍으
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주제어 : 12목․9주5소경․5도양계․삼국부흥운동․성황사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 … 101
Abstract
Locality and cultural area of Goryeo
- Focused on 12 Mok(牧) -
Hong, Young Eui
12Mok, a big town of Goryeo were organized based on 9Ju(州) 5Sogyeong
(小京) in Silla. 9Ju were organized of old lands of Silla, Goguryeo, and Baekje_
three Ju each land. 5Sogyeong were organized of old lands of Goguryeo,
Baekje, and Gaya. Goryeo reorganized nationwide administrative district to 5Do
and Yanggea(五道兩界) based on Gunhyeon-je of 9Ju(州) 5Sogyeong(小京) to
effectively govern regions. ‘Three nations restoration movements’ happened in
a period when soldiers came into power seemed to occur with such regional
attribute.
Regional color of 12Mok is characterized by prosperity of population,
transportation point, military strategic point, production and active distribution
of goods, marriage relationship of Goryeo Royal family etc. And from early
times, local official, Uihakbaksa(醫學博士) and Gyeonghakbaksa(經學博士) were
sent, a school was constructed. Thus, 12Mok had political, thoughts, cultural
benefits compared to other regions. But region’s own identity maintained while
operating Seonghwangsa etc. And doctrinally-oriented tradition(敎宗) and
meditation tradition(禪宗) temples established there earlier than other areas. So
it seems that Buddhist thoughts were accepted early. From such point, it can
be said that 12Mok would form unique cultural area while governing other
minor Gunhyeon. Accordingly, 12Mok area could maintain a position of a big
town through Goryeo, Joseon, even today.
Key words : 12Mok․9Ju(州) 5Sogyeong(小京)․5Do and Yanggea(五道兩
界)․Three nations restoration movements․Seonghwangsa
투고일 : 2014. 1. 24 심사일 : 2014. 2. 4 게재확정일 : 2014. 2. 17
교보문고 KYOBO Book Cen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