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6:17-20 - 사단의 활동 - 이근호 목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인간 사회에서는 거부감을 보입니다. 사단을 끌어드리게 되면 인간 사회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되기보다는 부정적 분위기로 흘러가서 살 맛이 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서로가 잘 아는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즉 사탄의 영역으로, 공동체 사회를 구성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이 ‘나와 나’의 관계로 구성되는 현실입니다. 즉 나 빼놓으면 다 남이 되고 네가 되는 그런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일수 밖에 없기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해가 가십니까?참으로 친숙한 현실이 바로 이런 현실이지요. 몸에 짝짝 달라붙는 현실이 바로 이런 ‘나와 나’로 구성된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단이라는 단어를 주입하게 되면 세상은 한쪽으로 쏠리고 그 여백이 만들어지는데
그 여백의 자리에는 인간들의 관심사를 끌지 못하는 하늘에 속한 내용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로서 인간의 세상과 하늘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적대적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이 이 인간 세상에서는 잘 나간다 할지라도 이것은 어디까지 ‘너와 나’의 비교에 의한 세상에서나 먹힐 일이지, 땅과 하늘로 대비되는 위상에서는 먹혀들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직전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지만 그들은 거대한 홍수 심판을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전통과 경험의 한계에 갇혀있다보니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의 위상이 철저히 거부 당하는 것을 감당하거나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행위를 통해서 결코 하늘의 저주와 심판을 이겨낼 수 없더라는 것입 니다. 그래서 사도는 과감하게 ‘사단’을 언급합니다.
마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일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사단의 실재하는 세상이 곧 먹고,마시고,시집가고,장가가는 이 인간세계라는 겁니다. 이로 인하여 17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자기 몸(배)을 섬기는 것을 겸하여 실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게 되면 결코 자기 몸(배)을 섬길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이라고 표현된 말로 인하여
인간 중심의 현실관이 문제가 됨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교는 ‘생노병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출생 전을 말하지 못합니다. 사단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해서 좇겨난 창세기 3장 시점부터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관심두게 합니다. 즉 인간은 이 땅에서 고생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부터 보면, 인간 보다 우선되는 것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말이 인간의 행함보다 우선됩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어를 만들고 동원시킵니다.
인간의 말, 즉 언어란 인간이 그 어떤 경우에도 우선된다는 정신이 함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온 시점에서 생긴 사단의 품속에서나 밝혀질 후유증입니다.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이러합니다. “의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고 말입니다.
이 구원의 반대되는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사단의 활동 취지입니다. 즉 사단은 말합니다.
“인간아, 네가 믿을 것은 네 밖에 없는 거야. 너는 너에게 신경 쓸 가치가 있는 존재야. 그 어떤 경우에도 너를 포기하지 마. 너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돼. 그래서 너는 너로 인하여 기쁘하고 즐거워해야만 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배를 섬기는 ”것에 해당됩니다.
비록 교회 와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척하지만
실은, 이렇게 대조되는 세상에서 남들에게 써먹든 그 시도를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써먹게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몸 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창세기 2장의 안목으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악마의 하수인’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에서 일을 끄집어내십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일이 우선이고 그 벌어진 일에 기호로 표현하면 그것이 곧 말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말씀에 대해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면, 혹은 자기 존재의 중요함을 담아서 새로이 만들어내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법과 규칙 같은 것은 만들어 낸 쪽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주는 증거물입니다.
이미 범죄한 인간들에게 의해서 주어진 모든 언어는 사단의 사주 아래에 더욱 공고히 놓이게 하는 그물망에 불과합니다.
허물없는 사이에 사단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단은 늘 친구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줄 좋으신 이웃이요 친구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닭 울 때, 세 번 씩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인간은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존재로 이미 출발을 하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위상대칭은 인간은 그저 같은 인간들 상대하는 것처럼, ‘너와 나’의 관계인 위치대칭으로 구성된 세상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사단이 본격적으로 정체를 드러낸 계기는 어디서부터 일까요?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권세자의 소리였습니다.
세례 요한 그 소리로 인하여 처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즉 세례요한은 결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나중에 사도들도 이와같은 길을 가게 됩니다.
사도들은 믿는다고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보호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위치를 창세기 3장의 주체 자리가 아니라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로 인해 죄인이 되게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17-20에 보면, “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의 기록의 우리의 현존재보다 앞섭니다.
사단을 이겼다 는 예수님의 성과가
우리 존재보다 앞서기에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십자가 능력의 효과로 구원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