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테라와다불교 열린법석 참관기
열립법석 참석을 권유 받고
생활인이다 보니 주중에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 일이 있든 없든 항상 대기 하고 있어만 하기 때문에 업체에서 부르지 않는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법우님으로 부터 법회 참석 권유 메일을 받았다. 남산 대원정사에서 한국테라와다 불교에서 주관하는 ‘열립법석’에 참석하자는 것이다.
메일 내용에 따르면 열린법석은 테라와다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 할 수 있고 더구나 법사는 ‘마성스님’이었다.
마성스님은 익히 알고 있다. 한번도 직접적으로 뵌 적이 없지만 지난 수년간 스님의 홈페이지를 통하여 스님이 작성한 많은 글을 보았고, 또한 불광사 동영상 법문을 통하여 스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스님은 종종 올린 글에 대하여 댓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런 스님의 이번 열린법석 법문 주제는 ‘테라와다불교와 한국대승불교의 실천적 차이점’에 대한 것이었다.
남산 대원정사 가는 길
열린법석은 6월 22일(금) 오후 2시에 열렸다. 서울 남산 대원정사에서 열리기 때문에 이동하면 오후시간은 모두 깨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오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 놓고 오늘 쓸 글도 점심때 까지 다 써서 올려 놓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전철을 탓다.
남산 대원정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서울에 살았어도 서울이 하도 넓어서 안가본 곳이 많은데 대원정사가 있는 ‘해방촌’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남영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해방촌 오거리에서 내리니 안내판이 보였다. 300미터 남산길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300미터 길이는 멀었다. 처음 가본 곳이기 때문에 더욱 더 멀어 보인다. 대원정사에 도착하였다. 절은 절인데 겉모양이 절 같지 않은 건물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보통 사무실 건물로 보인다. 2시가 다 되어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삼십여명 앉아 있었다. 대부분 나이든 세대들이다.
처음 접해 보는 테라와다불교 의식
이윽고 시간이 되자 법회가 시작 되었다. 한국테라와다 불교에서 법회를 주관하다 보니 모든 법회의식이 테라와다 불교의식으로 진행 되었다.
사실 이런 법회참석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09년 한국위빠사나선원(현 상좌불교 한국명상원)에서 1년간 50 여회 참여 한 적은 있었지만 여법한 법회의식 없이 반배의 예를 올리고 곧바로 법문, 좌선, 경행, 인터뷰 등이 3시간 30분 가량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번 열린법회의 경우 테라와다불교 의식 그대로 하는 것이었다.
처음 접해 보는 테라와다불교 의식은 생소했다. 인터넷으로 식순이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접해 본 결과 몰랐던 사항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이론이나 머리로 아는 것의 한계를 실감한 것이다.
먼저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다. 앞뒤면 모두 인쇄된 프린트물에는 의식 순서가 빠알리와 우리말로 적혀 있었다. 크게 삼보예찬, 수계의식, 청법의식, 상가다나의식 이렇게 4가지로 되어 있는 5장 10페이지 짜리 프린트 물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에서 시작 하기 때문에 대승불교의식에 익숙하다. 삼귀의, 반야심경, 천수경, 칠정례, 사홍서원, 산회가 등을 말한다. 이런 대승의 예불의식은 불교방송을 들으면 아침이나 저녁예불 시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불자들은 테라와다 불교의 예불의식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승의 예불의식과 테라와다의 예불의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삼보예찬을 보면
먼저 삼보예찬을 보면 이는 대승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모두 불단을 마주 보고 삼귀의를 낭송하는 것이 유사하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한글삼귀의문의 경우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단 한번 예찬 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테라와다 삼귀의는 삼세번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빠알리어와 한글을 번갈아 가며 한다.
이렇게 테라와다 예불의식은 빠알리어와 우리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사회자의 리드에 따라 진행된다.
삼보예찬은 붓다와 담마와 상가의 공덕에 대한 긴 예경과 찬탄문으로 되어 있다. 대승불교 불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부처님의 열가지 별칭에 대한 것이 붓다의 공덕 예찬문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 없는 것이 담마와 상가의 공덕에 대한 것이다. 이들 공덕문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중 상가공덕 예찬문의 경우 다음과 같다.
그분, 진지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 정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 올바르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 여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 이분들은 부처님의 네 쌍의 대장부이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 이분들은 부처님의 제자들의 상이이니. 공양 올릴 가치가 있는 분들, 환영할 가치가 있는 분들, 보시 올릴 가치가 있는 분들, 합장 공경할 가치가 있는 분들이며,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심는 대상입니다.
(상가공덕 예찬문)
이 상가공덕 예찬문을 보면 대승과 확실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대승의 경우 스님들이 승보로 되어 있으나, 테라와다의 경우 상가가 승보이다. 그런 상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의 무리들을 말한다. 그런 상가를 성스런 상가라 한다. 이처럼 스님 개인을 승보로 보는 대승과 달리 테라와다의 경우 성자의 상가 즉 커뮤니티로 보는데, 바로 이런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테라와다식 큰 절
삼보 예찬을 할 때 ‘큰 절’을 한다. 프린트 물에 ‘큰 절을 한다’라고 쓰여 있어서 흔히 불자들이 하는 큰 절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절을 하긴 하되 절 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출가자자 재가자나 불단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스님이 무릎을 꿇고 앉어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 비구들은 모두 불단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두손을 합장한다.
큰절을 하게 되면 일어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꿇은 자세에서 합장한 두손을 코앞으로 한다음 머리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이것이 테라와다식 큰 절이다. 대승불교 불자들이 본다면 좀 시시하고 밋밋하게 보일 것 같다. 대승에서의 절이라는 것이 앉고 일어남을 반복하는 매우 큰 동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절에서 안하는 것
이렇게 절하는 방법도 다르고 삼보예찬의 내용도 다르고 더구나 의식에 사용되는 말도 다른 것이 테라와다불교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에서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것은 수계의식에 대한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삼보예찬 다음에 이어지는 의식이 수계의식이다. 수계의식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법명을 지어 주는 수계의식인줄 알았으나 오계준수에 대한 의식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오계준수 의식은 이제까지 우리나라 법회 의식에서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이 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불교 일반 법회의식 그 어느 곳에서도 오계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오계준수 의식을 하는 곳도 있었다.
언젠가 오계에 대한 글을 올렸더니 어느 스님은 자신의 절에서 법회할 때 오계의식을 하고 있다고 댓글을 주셨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공식적으로 오계의식은 없지만 자율적으로 하는 곳이 일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절에서 일반법회할 때 오계준수낭송 의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일까 우리나라 스님들과 불자들이 지계의식이 희박한 것 같다. 최근 일어난 스님들의 도박추문, 룸살롱출입, 성매수 의혹, 은처의혹이 모두 오계를 준수하지 않아서 일어난 부끄럽고 창피한 사건들이라 본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일반법회의식에서 놀랍게도 오계준수 맹세의식(수계의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구들이 재가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수계의식을 하게 되면 불단을 향하였던 비구들이 모두 재가자들을 향하여 돌게 된다. 이때 역시 무릎을 꿇은 자세이다. 놀라운 일이다. 스님들이 재가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재가자 역시 무릎을 꿇은 자세이다.
사회자 비구가 빠알리와 우리말을 번갈아 가며 낭송하면 참석자들은 사회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서 낭송한다. 먼저 삼귀의를 삼세번 하고 그 다음에 오계준수 맹세를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생명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 받아 지키겠습니다. 주지 않는 물건 가지는 것을 멀리하는 계 받아 지키겠습니다. 잘못된 성적인 행위를 멀리하는 계 받아 지키겠습니다. 거짓되게 말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 받아 지키겠습니다. 방일의 원인이 되는 술이나 약물들을 멀리하는 계 받아 지키겠습니다.
(오계수계 내용)
이것이 한글로 번역된 오계수계 내용이다. 한문투의 불살생, 붙투도 등과 같이 아닐 ‘불(不)’자가 붙어서 “살생하지 않는다” 등과 같이 칼로 무자르듯이 확실하게 끊어 버리는 문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멀리 하는’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고, 단순히 ‘훔치지 말것’이라 하지 않고 ‘주지 않는 물건을 멀리 한다’라고 하여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법게송을 낭송하고
이렇게 20여분 걸쳐 삼보예찬과 수계의식이 끝났다. 다음 순서는 ‘청법의식’이다. 청법은 법을 법사로부터 법을 설해달라고 청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나라 일반법당에서는 ‘청법가’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규모가 되는 법회의 경우 합창단과 함께 ‘덕 높은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로 시작되는 청법가를 불러서 법사에게 법을 설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노래가 없다. 그대신 다음과 같은 ‘청법게송’을 낭송한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완전한 닙바나에 드신 지 오래되었을지라도 이 법회에 동참한 대중 모두, 존경하는 스님께 예경 드리고, 저희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청하옵니다. 제가 들어 알기로는 이 세상 중생들 가운데 욕망이 적고 번뇌가 적은 이들이 있사오니, 존경하는 스님, 저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청법게송)
이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청법게송이다. 그런데 많이 익숙하고 많이 보던 문구가 있다. ‘안락과 행복’이라든가 ‘중생들 가운데 욕망이 적고 번뇌가 적은 이들’이라는 문구이다.
법은 청해야만 설하는 것
특히 후자의 경우 범천 사함빠띠의 청원문에서 볼 수 있다. 청원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싸함빠띠]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낸 오염된 가르침이 마가다 국에 나타났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라. 청정한 분께서 깨달은 진리를 들어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현자여,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자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자께서는 생사에 지배받는 슬픔에 빠진 뭇삶을 보시오.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일어서십시오. 허물없는 캐러밴의 지도자여, 세상을 거니십시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십시오 알아듣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야짜나경-?y?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아야짜나경(청원경-S6.1.1).docx 아야짜나경(청원경-S6.1.1).pdf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다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아야짜나경-?y?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는 ‘역류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이해 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주저하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이 기울이자 이를 알아 챈 범천 사함빠띠가 설해 주기를 간청한 것이 청원경의 내용이다. 즉, 이 세상에는 번뇌에 물든자 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부처님의 진리를 알아 들을 수 있는 번뇌에 덜 물든 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청법게송에 “이 세상 중생들 가운데 욕망이 적고 번뇌가 적은 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진리라는 것은 번뇌에 덜 물든자 들이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이를 받아 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진리는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진리도 청해야만 들을 수 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가르쳐 주려 한다면 사람들은 피곤해 할 것이다. 마치 길거리에서 예천불지를 부르짖으며 떠드는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청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스님이 말한 내용을 빠짐 없이 메모하고
이렇게 삼보예찬, 수계의식, 청법의식까지 함에 따라 설법 전에 행하는 법회의식은 모두 끝났다. 그 사이 법당 안에는 약 오륙십명 정도의 인원으로 늘어 났다. 대부분 여성들이고 나이 든 사람들이다.
사회를 보는 비구의 소개에 따라 마성스님이 법상에 앉았다. 맨 뒤에 앉아 메모할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마성스님의 법문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제가 테라와다불교와 한국대승불교의 차이점에 대한 것이라 더욱더 흥미를 유발하였다.
마성스님은 40여편의 논문을 발표 하였는데, 그 중에 테라와다와 대승에 대한 비교 검토 논문도 있다. 그리고 불교평론 등에 테라와다와 대승에 대한 다수의 글을 발표 하여 그 차이점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논문과 기고문의 글과 달리 대중법문에서 말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법문에서는 더 실감나게 표현을 한다. 더구나 대중법문의 경우 집중을 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몰입할 수 있기 ?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마치 외국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가 하는 말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라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역할과 같은 것이다.
맨 뒤에 앉아서 스님이 말한 내용을 빠짐 없이 메모하였다. 작은 취재 수첩 같은 노트에 적다 보니 21페이지가 되었다.
테라와다와 대승의 구분방법
스님이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였다. 가급적 원래의 법문에 충실하였지만 부분적으로 보충한 것도 있다.
현재 지구촌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라 지구촌이 글로벌화 됨에 따라 테라와다와 대승의 구분에 대하여 단지 승복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대승가사를 입고 있으면서도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스님도 있고, 반면 노랑가사를 입었지만 대승의 교리를 공부하고 있는 비구도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옷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중국에서 인도로 공부하러 갔던 법현, 현장, 의정 등과 같은 구법승들의 글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승과 테라와다는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가장 쉬운 방법은 두 가지라 한다. 첫째는 대승경전을 독송하면 대승불교도이고 아니면 비대승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보살사상을 믿으면 대승이고 안 믿으면 대승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이 대승과 테라와다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차이점이지만 더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직 그분 부처님과 다불다보살
테라와다불교에서 신봉하는 대상은 오로지 하나이다. 오직 그분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이 신앙의 대상이다. 반면 대승불교의 경우 ‘다불다보살’이다. 대승에서 부처님은 현세불인 석가모니 한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라는 한다. 그래서 대승에서 모시는 부처님은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 하여 삼천불이라는 말이 있고 더구나 보살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이렇게 신앙의 대상이 다르다 보니 그 외 다른 것 또한 매우 많다. 이에 대하여 크게 5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과 대중 둘째, 분석과 직관 셋째, 아라한과 보살 넷째, 의식과 무의식 다섯째, 이성과 감성
이러한 구분 방식은 일본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가 주장한 것이라 한다.
어느 여성불자가 이의제기를
이중 첫번째 항을 보면 테라와다의 경우 개인중심이고, 대승의 경우 대중중심이라 하였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에서 상구보리는 테라와다에 해당되고, 하화중생은 대승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의 불교의 경우 개인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기적인 것이라 하였다. 반면 하화중생을 표방하는 대승불교는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것이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비교설명에 따르면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자들이나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법문이 끝나고 질문시간에 어느 여성불자가 이의제기를 하였다. 자신의 예를 들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여성불자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대승불교를 신봉하다 7년전 초기불교로 전향하였는데, 지금은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대승불교를 믿을 때는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런 활동을 하게 된 이유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서 남을 배려 하는 마음이 생겨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가 스님이 말씀하신 상구보리만 있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마스터니 후미오가 비교분석한 내용이 전부 맞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비교설명하다 보니 테라와다 불교는 개인적인 것이고, 대승불교는 대중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비교가 된 것이라 본다.
초기불교경전을 읽어 보면 부처님이 설한 내용이 개인의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내용위주 이긴 하지만 공덕을 강조 하고 자애수행 등에 대한 것을 보면 칼로 무 자르듯이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개인적인 것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는 것이라 보여 진다.
다섯가지 비교에서 첫 번째 항은 테라와다불교 입장으로 본다면 수용하기 어려운 면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테라와다와 대승의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으로 스님은 분석과 직관, 아라한과 보살,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이라는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테라와다와 대승의 비교표
표와 같이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차이가 많은 서로 다른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결국 ‘믿음의 차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테라와다와 대승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테라와다와 대승 모두 ‘믿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믿음을 빠알리어로 ‘삿다(saddha)’라 한다. 삿다는 맹목적 믿음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한 확신을 말한다. 그런 믿음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데 여기에 계를 하나 더하여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마성스님은 설명한다.
이렇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불법승계에 대하여 ‘사불괴(四不壞)’라 하는데, 이는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성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진리에 대한 눈뜸이 있을 때 가능하고, 진리에 대한 확신과 체득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대승의 믿음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
대승의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의 믿음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내가 부처임을 믿고 나서 그 다음에 이해하고 닦고 증명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대승에서는 이를 ‘신해행증’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믿음이 다르니 수행과정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점수와 돈수에 대하여 설명한다.
“열심히 하라!” vs “성불하세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의 수행은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는 ‘점수’라 한다. 단계별로 닦아 성숙하는 것이기 때문에 닦음을 매우 중요시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하는 말은 “열심히 하라!”라고 말하는데, 이는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말이라 한다.
반면 대승에서는 ‘급진적’ 깨달음을 중시한다. 이를 ‘돈오’라 한다. 담박에 깨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을 매우 중요시 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성불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불하세요”대신 차라리
스님은 ‘성불’이라는 말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불자들 간의 인사말인 “성불하세요”라는 말은 “부처가 되라!(become a Budha!)”는 말인데, 과연 이 말 대로 ‘우리들 모두는 부처가 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하는 것 자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대승이다.
그러나 대승의 성불론은 목표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목표도 정도 껏 잡아야 되는데,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잡았을 때 ‘허황’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부처가 되라’는 이야기는 뜬구름 잡기식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초등학교 교실에 붙어 있는 성실, 근면, 정직, 순결 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에게 “복도에서 뛰지 마라”라고 하면 잘 알아 들을 것인데, 그들 앞에 성실, 근면 등의 고상한 문구를 붙여 놓았을 때 공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말하기를 “성불하세요”대신 차라리 “정진합시다” “행복하십시요” “건강하십시요”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실천 가능한 말이라는 것이다.
돈오는 한탕주의
담박에 깨닫는 돈오는 전형적인 ‘한탕주의’와 같다고 한다. 진리에 대한 눈을 뜨는 것이 깨달음인데 반하여 대승의 돈오의 경우 깨닫고 나면 인간이 개조 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배웠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지금 초등학교 수준 밖에 되지 않는 수학실력을 가졌는데, 돈오 하였다 하여 대학수준의 수학실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영어도 못하는데 담박에 깨달았다고 하여 영어가 술술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방에 개조 된다고 믿는 것이 돈오이고, 그렇게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 테라와다이다. 그렇다면 급진적인 깨달음인 돈오와 점진적인 수행의 점수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에 대하여 삼예의 논쟁을 들 수 있다.
돈오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난 사항
794년 티벳 삼예(samye)사원에서 논쟁이 있었다. 그때 담박에 깨닫는다는 중국 선불교의 돈오론과 점진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인도의 점수론이 격돌하였다.
이 논쟁에서 돈오론를 주장한 선사가 패하게 된다. 그 후 티벳에서는 돈오의 선불교 대신 단계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인도불교가 각광받는다. 이처럼 단계적 깨달음에 대한 것이 티벳불교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보리도차제론’이다.
이처럼 돈오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난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로 보여진다.
심성불정설 vs 본래청정설
다음으로 ‘번뇌’와 ‘보리(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심성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든가 악하든가에 대한 논쟁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이를 ‘번뇌’와 ‘보리’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뇌와 보리 역시 테라와다와 대승에서 보는 입장이 다르고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다. 즉 테라와다에서는 인간은 본래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닦아서 제거 해야 하는 것으로 보지만, 대승의 경우 따로 닦을 것 없이 본래 청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테라와다의 심성불정설과 대승의 본래청정설에 대한 것이다.
대승의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하여 본래청정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되는 경이 하나 있다. 앙굿따라니까의 ‘앗차라산가타왁가(A1.6.1)경’이 바로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났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다고 나는 말한다.”
(앗차라산가타왁가-Acchar?sa?gh??a Vagga -For the fraction of a second- 손가락 튀기기 품, 앙굿따라니까야 A1.6.1, 대림스님역) 앗차라산가타왁가(손가락 튀기기 품-A1.6.1).docx
마음은 원래 빛나는 것인데, 단지 오염되었기 때문에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닦아야 할까. 경에서는 정진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선법을 일으키고 불선법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설명으로서 마음이 본래 빛나고 청정한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이 경의 내용에 대하여 ‘여래장사상’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활용 하였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한 것이고 본래 부처인 것으로 다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누구나 다 깨달은 부처이기 때문에 맑은 하늘에 덮여 있는 구름을 걷어 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광막한 푸른 창공을 보면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성층권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 하얀 뭉게 구름 위로 펼쳐져 있는 창공은 광대하다. 이를 한자식 표현을 빌리면 검을 ‘현(玄)’이고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vast’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비행기 속에서 본 푸른 창공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광막하다.
그런데 비행기가 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하기 위하여 구름을 뚫고 내려 가야 하는데 이때 하늘은 뿌였다. 잔뜩 흐리고 비라도 뿌릴 듯한 날씨이다. 불과 몇 분전에 보았던 푸른 창공과 딴 판이다. 이처럼 대승에서는 본래 우리마음이 청정하고 본래 부처이지만 구름이 낀 것처럼 오염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구름을 걷어 내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나 테라와다의 경우 ‘고’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고를 일으키는 번뇌의 해결을 해야 하는데 그런 수행방법은 매우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빠사나를 들 수 있다.
이렇게 테라와다에서 고와 고의 소멸, 번뇌의 소멸에 중점을 두며 번뇌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 하지만 대승에서는 ‘본래 번뇌는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있는 번뇌를 없는 것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기가 차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승에서는 없는 것이라 할까.
‘에드워드 콘즈’가 한 말 중에
여기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너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 좋아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치를 적용하는 것이 대승이라 한다. 인간이 번뇌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든가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말을 듣기 좋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라고 한다.
사람들은 칭찬 받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똑 같은 사람에게 ‘사모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아라 하고, ‘아지매’라고 부르면 싫어한다. 그래서 높은 것처럼 불러 주면 좋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많이 있다.
여성불자에게 ‘보살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아라 한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또 남자불자에게 머슴의 이미지가 풍기는 ‘처사’보다 유마거사를 떠오르게 하는 ‘거사님’이라고 불러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는 모두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 주는 것이다.
‘내가 부처’라든가 ‘본래부처’라는 말은 다 듣기 좋은 말이고 듣고 싶은 말이다. 위안으로 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반야부에 대하여 30년간 연구한 영국의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가 한 말이라 한다.
좋은 말만 듣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인간은 나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듣기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는데 이는 순간적으로 위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테라와다 에서는 이와 같은 위안을 주는 말 대신 철두철미하게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아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에 가득찬 미완성의 마음을 완성된 마음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이와 반대로 말한다. 열반사덕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잘못된 견해이다. 그래서 ‘사전도견(四顚倒見)’이라 한다.
이는 바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승에서 부처의 경지에서 본다면 상락아정은 맞는 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본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려 주는 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본래부처다든가 번뇌는 본래 없다든가 열반은 상락아정이라든가 등의 말인데, 스님은 이처럼 듣기 좋은 말의 대표적 경전으로서 화엄경을 들 수 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
화엄경은 부처님에 삼매의 경지에서 본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그래서 화장세계, 연화장 세계라 하는데, 중생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보살들에 대한 찬탄과 찬양 그리고 향기롭고 온갖 것들로 화려하게 장엄된 엄청난 스케일의 세계이다. 화엄경의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의 마니보장전(摩尼寶藏澱)에 큰 보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 보살들은 모두 최상의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은 이들로서, 저마다 다른 세계에서 여기에 모여든 것이다. 그들은 보살이 지혜로 증득한 경지에서 머물고, 여래의 지혜를 거울 삼아 부지런히 수행하여 쉬지 않으며, 여러가지 신통에도 능하였다.모든 중생을 교화하되 그 시기를 잃지 않으며, 보살의 큰 원을 이루기 위해 어떤 세상에서 나 어떤 겁(劫)에서나 어떤 불국토에서나 여러가지 행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화엄경, 화엄경십지품)
화엄경은 중생의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를 묘사 한 것이기 때문에 화려 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화엄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었다는 말인데,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식된 세계를 말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대한 묘사를 보고 환희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엄경 바깥으로 나오면 역시 고통스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전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런 경전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도에서 ‘영화’의 예로 설명될 수 있다.
발리우드(Bollywood)영화
미국에 허리우드가 있다면 인도에 ‘발리우드(Bollywood)’가 있다. 발리우드는 인도의 영화산업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그런데 발리우드에서 만들어 내는 영화의 수는 할리우드 보다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리우드 영화는 인도국내용이라 한다. 인도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라는 것이다.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짧은 것이 3시간 짜리이고 길면 5시간이라 한다. 그래서 도중에 휴식시간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무희가 출연하여 춤추고 노래하는 즐겁고 행복한 장면 위주라 한다. 괴로운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현실도 괴로운데 돈주고 또 괴로움을 맛보는 영화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가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판타지’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를 봄으러서 마치 자신이 그 환상의 세계에 있는 듯하고 더구나 그 환타지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 역시 현실은 현실이다. 소똥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보고 싶은 것만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화엄경과 인도영화
그런데 화엄경도 인도영화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것 등이 모든 면에서 인도영화와 유사한 것이 화엄경이라 한다. 이는 대승경전 자체가 대부분 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부처, 본래 깨달은자, 본래 청정함, 열반은 상락아정과 같다는 말이 모두 듣기 좋은 말, 듣고 싶은 말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례’ 또한 발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새벽예불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간 차이점 중의 하나가 ‘의례’에 대한 것이다. 대승에서는 의례가 매우 발달하여 의례로 시작하여 의례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테라와다의 경우 의례라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스님이 1987년 스리랑카에 갔었는데, 첫날 아침 예불 때문에 몹시 긴장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잠도 잘 못자고 새벽 예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새벽 3시가 되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4시가 되고 5시가 되어도 새벽예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7시가 되자 비질 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 하였지만 끝내 새벽예불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새벽예불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새벽 3시가 되면 도량석이 시작 되고 잠시 뒤에 북소리가 나는 등 요란 하지만 스리랑카의 경우 너무나 평온하였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의 전통대로 생활하기 때문이라 한다.
수행 따로, 삶 따로
이처럼 의례가 대승과 테라와다의 큰 차이점이다. 의례를 중시하는 대승에서는 북, 종, 목탁 등 갖가지 도구가 등장한다. 또한 육법공양이라 하여 향, 초, 꽃, 과일, 차, 쌀을 올린다. 특히 사시마지에서 부처님에게 밥을 올리는 장면을 보면 그 정성이 지극하기 이를데 없다. 마치 살아계신 부처님에게 공양올리는 듯하다.
이렇게 갖가지 도구와 공양물을 올리는 법당은 성스런 장소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법당에서 예불드릴 때 가사를 입는다. 가사를 입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임을 뜻한다. 하지만 법당을 벗어나면 더 이상 가사를 입지 않고 승복을 입고 생활 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대승불교가 ‘수행 따로, 삶 따로’ 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성스런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법당이라 한다. 법당에 올리는 공양물은 ‘꽃’ 하나로 족다고 한다. 그것도 꺽은 꽃이 아니라 땅바닥에 떨어진 꽃을 물로 깨끗이 씻어 올려 놓으면 그만이라 한다.
스리랑카 2006 웨삭(Vesak) 악까까소(Akkakaso)비구의 포토스트림에서
그런 법당은 신도들 뿐만 아니라 거지도 들어 올 수 있는 곳인데, 심지어 개들이 들어와 ‘헐레’를 하기도 하는 장소라 한다. 또 비구들의 복장은 우리나라 스님들처럼 승복따로 가사따로가 아니라 가사자체가 승복이고, 생활복이고, 잠옷이어서 항상 걸치고 다닌다고 한다.
왜 테라와다와 대승은 정반대의 입장일까
그렇다면 왜 대승불교는 테라와다 불교와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반대급부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테라와다불교가 이성에 매달리다 보니 반대급부로 대승에서는 감성에 호소 하게 되었고, 둘째, 테라와다불교가 번뇌와 그 소멸에 치중하다 보니 반대급부로 대승에서는 보리(깨달음)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셋째, 테라와다불교가 교리에 치중하다 보니 반대급부로 대승에서는 믿음을 유도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비교표를 만들 수 있다.
테라와다에 대한 대승의 반대급부 논리
이처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이다.
열반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 비교표 중 내세관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대승의 경우 죽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극락 또는 정토를 매우 중요시 한다. 하지만 테라와다의 경우 매우 현실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 수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N131, 전재성님역)
밧데까랏따경(MN131)-전문.docx 밧데까랏따경(MN131)-전문.pdf
이것이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의 행복관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 di??ha-dhamma, 現法)에서 삶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라와다와 대승을 왕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염하면서 위빠사나수행을 한다든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니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절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또 한편으로 초기불교를 교학과 수행을 겸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짬뽕’처럼 어찌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네~” 하며
이렇게 1시간 30분에 걸친 마성스님의 열정적인 법문이 끝났다. 법문 도중 스님은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내 말 뜻 이해하시겠어요”하며 물어 본다. 그러면 경청하고 있는 여성재가불자들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네~” 하며 맞장구를 쳐 주곤 하는데, 이런 호응은 대승불교 불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서로 무릎을 꿇고 앉아
법회가 끝나고 난 후 남은 의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시간이다. 이를 식순에서는 ‘공덕회향’이라 하였다. 공양물을 스님들께 올린다음 3배를 드린후 제자리로 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해 온 공양물을 들고 스님들 앞에 앉아 있는 불자들을 볼 수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세이었다.
스님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을 테라와다 불교 의식에서 처음 보았다. 의식을 시작할 때 수계의식에서 볼 수 있었고, 공양물 올릴 때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탁발의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스님들
그 동안 한국불자들은 스님을 매우 높은 존재로 보아 왔다. 한글삼귀의문에 표현 되어 있듯이 스님들은 ‘승보’로 간주되고, 어느 스님이건 간에 모두 삼배의 예를 올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스님들은 모든 법회 행사에서 정해진 의식에 따라 법회를 주관하는 역할을 하고 각종 기도회나 천도재에서 마치 사제의 역할 까지 하여 매우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 알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님이 법문하러 법상에 올라갈 때 청법가를 부르고, 대선사의 경우 법문할 때 주장자를 들고 ‘할’을 하는가 하면, 법문 도중 ‘아미타불 게송 노래’를 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스님들은 재가자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스님들이다.
단지 하나의 수행자로서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비구들을 보면 우리 재가불자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어떤 계급의식이 없음을 말한다. 천주교 신부처럼 ‘사제’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천도재에서처럼 이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해 주는 제관도 아니다. 그렇다고 목사들처럼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생활인’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수행자로서 보일 뿐이다. 그런 모습을 무릎꿇은 자세에서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부처님 당시의 탁발모습을 보는 듯
테라와다 비구들이 재가자들 앞에서 무릎꿇은 자세는 신선한 충격이다. 재가자들 역시 무릎을 꿇고 공양물을 올리는 모습 역시 아름답다. 탁발정신이 완전히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출재가 사이에 마치 부처님 당시의 탁발모습을 보는 듯 하다.
2012-06-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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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