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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도 權錫燾 (1880 ~ 1946)】 "고광순 전사 후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장"
1880년 9월 9일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백전면(栢田面) 양백리(兩栢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권명구(權命九)·윤일이(尹一二) 등을 사용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였고,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심화하자 의병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백양사(白羊寺)에서 봉기한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10월에는 문수암을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에서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고광순 의병부대가 동복읍을 점령하고 지리산 화개동으로 이동 후 구례 연곡사(燕谷寺)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권석도 집터(함양군 백전면 양백리 지적원도, 1914) [판형2] |
고광순 의병부대는 일본군이 문수암에서 화개동(花開洞)으로 이동하자 부대를 둘로 나눠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고광순은 화개동으로 진격하지 않고 본진을 이끌고 연곡사에 남아 후속 작전을 구상하였는데, 함께 연곡사에 주둔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화개동을 떠나 쌍계사(雙溪寺) 방면으로 이동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연곡사를 공격하였다. 새벽에 전개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광순 의병장은 후퇴를 명령하고 전사하였다. 고광순은 전사하였지만 생존한 의병을 추슬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선봉장 이학로(李學魯), 중군장(中軍將) 김경각(金敬珏)·우수보(禹守甫), 후군장(後軍將) 박매지(朴每之) 등을 임명하고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12월 21일에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이동하여 그곳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하던 박인환(朴仁煥) 등의 요청으로 연합 의병을 결성하고 연합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합천(陜川)·삼가(三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에는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임봉구 부대와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도 총기·탄환 등 군수물자를 모집하였는데, 일본군 수비대와 만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해서 하동 일대에서 군수물자를 모집하였다. 모집 대상도 확대하여 각 고을의 부호·유지들에게도 군자금과 무기 등을 모집하였다. 6월에는 무장한 5명의 의병을 하동에 거주하는 여건상(余健相)에게 보내 군자금 1,000냥(兩)을 10일 후에 출연(出捐)한다는 증표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6월 26일에도 군자금 모집을 위해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하동군 악양면(岳陽面)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정찰 수색에 나선 하동 주재 일본 순사대의 추격을 받게 되어 치열한 교전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된 지 10여 일 만인 1908년 7월 9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대의 추격을 받아 삼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일본군 수비대의 추적을 따돌리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 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
총상 치료를 받는 중에도 부하들의 의병 활동은 계속되었다. 7월에는 하동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의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처단하고 학교를 소각하였다. 또 같은 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장재수를 처단하였다. 상처가 거의 나은 뒤인 1909년 3월 의병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때 이학로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수물자 모집을 다시 시작하였다. 진주를 중심으로 군자금 활동을 전개하던 5월 하순에도 박매지·이학로 등 의병을 이끌고 진주 산기동(山岐洞)으로 군수물자 모집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와 마주쳐 급하게 피신하는 일이 있었다. 수색 정찰이 강화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권석도 유묵 [판형3] |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도 필행상(筆行商)으로 변장하여 진주에 들어왔다. 이때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작전인 ‘남한대토벌’ 작전이 시행되고 있어 진주경찰서에서 의병에 대한 정찰 및 수색이 강화된 시기였다. 결국 진주의 민가에 숙박 중 진주경찰서의 순검에게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후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6년 9개월간 복역하다가 1916년 6월 24일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이후에도 일본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를 받다가 1918년 2월에 일본 경찰이 조작한 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요시찰 인물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거주지에서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고향을 떠나 포항·울진 등지를 떠돌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4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80년 9월 9일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백전면(栢田面) 양백리(兩栢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권명구(權命九)·윤일이(尹一二) 등을 사용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였고,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심화하자 의병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백양사(白羊寺)에서 봉기한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10월에는 문수암을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에서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고광순 의병부대가 동복읍을 점령하고 지리산 화개동으로 이동 후 구례 연곡사(燕谷寺)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권석도 집터(함양군 백전면 양백리 지적원도, 1914) [판형2] |
고광순 의병부대는 일본군이 문수암에서 화개동(花開洞)으로 이동하자 부대를 둘로 나눠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고광순은 화개동으로 진격하지 않고 본진을 이끌고 연곡사에 남아 후속 작전을 구상하였는데, 함께 연곡사에 주둔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화개동을 떠나 쌍계사(雙溪寺) 방면으로 이동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연곡사를 공격하였다. 새벽에 전개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광순 의병장은 후퇴를 명령하고 전사하였다. 고광순은 전사하였지만 생존한 의병을 추슬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선봉장 이학로(李學魯), 중군장(中軍將) 김경각(金敬珏)·우수보(禹守甫), 후군장(後軍將) 박매지(朴每之) 등을 임명하고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12월 21일에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이동하여 그곳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하던 박인환(朴仁煥) 등의 요청으로 연합 의병을 결성하고 연합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합천(陜川)·삼가(三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에는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임봉구 부대와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도 총기·탄환 등 군수물자를 모집하였는데, 일본군 수비대와 만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해서 하동 일대에서 군수물자를 모집하였다. 모집 대상도 확대하여 각 고을의 부호·유지들에게도 군자금과 무기 등을 모집하였다. 6월에는 무장한 5명의 의병을 하동에 거주하는 여건상(余健相)에게 보내 군자금 1,000냥(兩)을 10일 후에 출연(出捐)한다는 증표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6월 26일에도 군자금 모집을 위해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하동군 악양면(岳陽面)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정찰 수색에 나선 하동 주재 일본 순사대의 추격을 받게 되어 치열한 교전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된 지 10여 일 만인 1908년 7월 9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대의 추격을 받아 삼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일본군 수비대의 추적을 따돌리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 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
총상 치료를 받는 중에도 부하들의 의병 활동은 계속되었다. 7월에는 하동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의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처단하고 학교를 소각하였다. 또 같은 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장재수를 처단하였다. 상처가 거의 나은 뒤인 1909년 3월 의병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때 이학로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수물자 모집을 다시 시작하였다. 진주를 중심으로 군자금 활동을 전개하던 5월 하순에도 박매지·이학로 등 의병을 이끌고 진주 산기동(山岐洞)으로 군수물자 모집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와 마주쳐 급하게 피신하는 일이 있었다. 수색 정찰이 강화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권석도 유묵 [판형3] |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도 필행상(筆行商)으로 변장하여 진주에 들어왔다. 이때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작전인 ‘남한대토벌’ 작전이 시행되고 있어 진주경찰서에서 의병에 대한 정찰 및 수색이 강화된 시기였다. 결국 진주의 민가에 숙박 중 진주경찰서의 순검에게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후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6년 9개월간 복역하다가 1916년 6월 24일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이후에도 일본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를 받다가 1918년 2월에 일본 경찰이 조작한 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요시찰 인물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거주지에서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고향을 떠나 포항·울진 등지를 떠돌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4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