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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救國)을 위하여 동경(東京)에서 단식투쟁
그 뒤 강진 출신 오기호, 부안출신 이기(李沂) 지사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해 미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하여 러일전쟁이 종식되고 포오츠머츠에서 강화회의를 열게 되자 이 회의에서 우리 나라 장래에 대한 중대문제가 다루어지리라 믿고 우리의 입장을 미국 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를 결심하였으나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6월에 유람을 빙자하여 일본 동경에 가서 다시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동경에서 체류하는 동안 이등박문과 일본 총리대신 대외중신 등에게 조선주권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중, 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고 선린우의로서 독립을 보장하라는 서신을 보내고 또한 일왕에게 정의대도(正義大道)와 동양평화를 촉구하였다. 회신이 없자 궁성앞에서 3일 동안 단식하며 항쟁하였다.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을사 5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 30일에 귀국하였다. 1906년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공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세칭 「5적 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
김인식 등 동지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이대하로 하여금 권총 8정을 구입하도록 하고, 이기, 윤주찬 등은 자작회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작성하고 선생은 선생은 헌간장과 동맹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윤주찬 등에게는 우리 정부와 일본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작성하고 김동필, 박대하, 이홍래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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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거사일을 음력 정월 초하루(2월 13일)로 정하고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 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 이후 3회에 걸쳐 [음력 2월 5일(3월 18일), 음력 2월 8일(3월 21일), 음력 2월 12일(3월 25일)] 5개조로 나누어 다시 시도를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지 서창보가 피체되어 일제의 고문에 못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 가게 되자 선생은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하여 1907년 7월 3일 유형 10년을 받아 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동년 12월 광무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만에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경술국치후 민족정기 수호 단군신앙인 대종교 창시(創始)
1910년 8월 「경술 7조약」 체결로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자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의 잘못으로 강대한 외세에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서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서 자신의 영화(榮華)와 출세만을 추구하고 저가 친중(親中)하면 나는 친일(親日)로 또는 친러(親露)로 처신하였으며 서로 자기네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 급급하였으며 간사하고 교활한 기회주의가 만연되어 나라는 부패하고 민족의 기상이 꺾였던 것이다.
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전통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世)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1909년 1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 이기, 김윤식, 유근柳瑾) 등 수십 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하였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 30일 칙령을 발표하여 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총본사를 백두산록 화룡에 옮겨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시키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그 옛날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몸소 알고 역사와 교훈을 깨달아 겨레의 나아갈 길을 찾아보려고 성지순례의 길을 나섰다.
강화와 평양을 거쳐 백두산 아래의 중국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의 확대 포교를 구상하게 된다. 이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 지사가 정착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어 대종교를 크게 번창시켰다.
한편으로는 교인과 교조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청산리전쟁」을 주도한 서일, 김좌진을 비롯하여 박은식, 김규식, 김구 등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시켰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구월산 삼성사에서 절식수도로 순절(殉節)하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현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에서는 완벽한 서류를 냈으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神敎)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 가증스런 종교탄압이었다. 선생의 신변도 위협해왔다. 창교이래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 중 택일을 위해 매일 기원했다. 이윽고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는데 이는 단군 성적지를 찾아 순교하려는 결단이었다.
1916년 음력 8월 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 뒤 삼성사에 도착한다. 8월 한가위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한다. 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찾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여러 유서들이 나왔으나 모두 죽음으로써 침략자들에게 항쟁한다는 뜻이었다.
선생은 국조(國祖)단군을 만들어 민족정기를 지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러한 민족애와 애국심은 광복이 되는 1945년까지도 계속 이어져 수많은 후진들이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