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산책
우리의 역사를 찾아서 �___박경숙
칠궁을 아십니까·3
박경숙
3. 망종芒種과 후궁後宮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과 “보리는 망종 삼일 전까지 베라”는 말이 있다. 망종芒種까지는 보리를 베어야 그 자리에 논농사나 밭농사를 하게 된다. 이처럼 농사에는 다 때가 있다.
조선시대 후궁後宮의 삶으로 돌아가 보면, 그리 영화롭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에 비추어 본다면 직첩을 받고도 차별과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위로는 정비가 있고, 후궁의 서열도 준엄하였으니 평생 2인자의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
『춘추』에 “첩을 정실로 삼지 말라”고 하여 후궁이 조강지처가 되는 것을 금하고 있으나, 조선 역사에 있어 후궁이 정비로 책봉된 예는 여럿 있다. 성종의 폐비 윤씨가 후궁으로 있다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제2의 계비로 책봉되었으며, 세 번째 계비로 들인 정현왕후 윤씨 또한 명문가 윤호의 자손으로 12세에 후궁으로 간택된 인물이었다. 숙종의 후궁 장희빈은 사사賜死되기는 하였지만, 정비로 있었던 세월이 약 5년이다. 이밖에도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모두 후궁 출신으로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후에 숙종은 후궁을 정비로 삼지 말라는 하교를 내렸는데 『춘추』 “첩을 정실로 삼지 말라”는 금언을 뼈저리게 느낀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 왕위를 계승하는 절차는 종법에 매우 충실하고자 했다. 정비가 자손이 없을 때 후궁은 낳은 자식을 정비에게 주어야 했다. 후궁의 아들 중 대통을 이을 아들을 정하고 그 정한 아들을 정비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는 달리 보면 정비가 자손이 없을 시에는 후궁들 사이에서 서로 자신의 자식을 보위에 올리고자 하는 다툼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로 인하여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되어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기도 했다.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를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에게 수빈 박씨는 17살이나 위인 효의왕후 김씨에게 순조를 입적시켰다. 후궁의 자식들은 정비의 손에서 성장하게 되고, 자연히 정비의 생각과 행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후궁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정서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으나 이는 조선 오백 년을 이끌어온 종법이라는 대원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후궁 개인 입장에서 보면, 후궁들에게 돌아가는 더 큰 실리가 숨어있다. 자손이 없는 정비에게 후궁 자식이 입적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자신이 낳은 자식이 후에 대통을 이을 것을 기정사실로 하는 것이니 이 보다 기쁜 일이 또 있었겠는가! 왕을 사이에 두고 투기와 신경전이 오고 갈 수밖에 없는 궁궐이다. 여인네들의 다툼이 끊이지 않는 구중궁궐에서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고 왕의 생모가 되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것이니 이를 마다 할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조선조 18세기, 19대 숙종, 20대 경종, 21대 영조, 22대 정조에 이어 정비가 손孫이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조선후기의 정치상황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이러한 예는 지극히 드문 일로써 북풍한설北風寒雪의 인고를 감내하고서야 얻을 수 있는 꽃과 같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금혼령으로 송화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사인교를 타고 입궁하는 것이 사대부의 처자로서는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마지막 삼간택에서 3,4명 중 최종적 선택을 받은 최후의 1인이 왕비가 되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1등 자리 만큼 확실한 보장은 없는 것 같다.
경종 4(1724)년, 육상궁이 만들어지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하자.
영조는 육상궁을 승격하던 해인 영조29년(1753)에 37회 전배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32차례 전배를 다녀갔다. 재위 52년간 육상궁에 탄신일과 제삿날을 포함하여 200차례 전배하는데, 이것은 열흘이나 보름 꼴로 다녀간 것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통수단이 용이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대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육상궁에는 자연 샘이 하나 있다. 왕실과 관련하여 우물이 궁궐 안에 있을 때에는 어정御井이라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공간에 있는 우물은 제정祭井이라 일컫는다. 칠궁의 제정은 “참으로 물맛이 차고 시원하다”하여 냉천정冷泉井이라 하였다. 냉천은 육상궁을 지을 당시에 발견된 자연 샘물이다.
지금은 우물 테두리를 기단 한단으로 낮게 쌓아 뚜껑을 만들어 덮고, 주위는 우거진 나무를 걷어내어 반듯하게 정비했다. 그러나, 그 이전은 달랐다. 주위는 우거진 나무들에 둘러쌓여 있고 테두리는 기단을 2단으로 쌓아 다소 봉긋한 느낌이었다. 전의 모습이 마치 자연과 일치된 야성적인 분위기라면 지금의 모습은 인공적이고 자로 잰 듯 정형적이다. 영조는 재위 3년이던 1727년 3월에 육상궁에 행차하여 샘물 맛을 보고 그 감회를 오언시로 남겼다.
유교국가 조선은 임금의 글씨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특히 왕실은 선대왕先代王의 위업을 간직하고 계승한다는 뜻에서 역대 임금의 글씨를 보존하는데 각별한 힘을 쏟았다. 그 보존방식의 하나가 왕의 글씨를 대리석에 새기는 것이었다. 영조의 친필인 냉천 우물 상단의 화강암 장대석의 각자도 이와 동일한 취지에서 만들어졌으나, 오늘날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영조의 글씨로 알려진 장대석은 이유 모르게 사라지고, 새로이 장대석을 만들어 끼워 넣었다. 한눈에 봐도 헌것과 새것이 구분될 정도로 색감에 차이가 난다.
냉천冷泉 각자刻字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냉천> 각자 탁본(2006년 7월)
御墨雲翰(어묵운한) 왕의 글
昔在靈隱中(석재령은중) 지난날 항주의 영은산 속에 있더니
今日此亭內(금일차정내) 오늘은 이 정자 안에 있네
雙手弄淸○(쌍수롱청의) 두 손으로 맑은 물을 어루만지니
冷泉自可愛(냉천자가애) 냉천을 절로 좋아라
時强○協洽○月上浣也(시강어협흡병월상원야) 때는 정미(丁未: 즉 영조3(1727)년) 병월(○月: 3월) 상순(上旬)
4. 소서小暑 수요일 비 자연紫淵
여름 장마철은 습도가 높고 비가 많이 내린다. 하지 무렵에 모내기를 끝낸 모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다. 모내기가 끝나면 논두렁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든다. 무심하게 변함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있으니, 자연紫淵 연못이다. 그 이름도 아름다워 자연紫淵,‘자줏빛이 감도는 연못’ 또는 ‘깊은 연못’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줏빛은 물이 깊은 연못의 빛깔을 표현한 것이다.
『문선文選』에 실린 장경양張景陽의 「칠명七命에서 “출화린어자연지리出華鱗於紫淵之裏” 즉, ‘깊은 연못 속에서 빛나는 비늘을 건져 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향呂向은 주에서 이를 “자연, 위기심색자연야紫淵, 謂基深色然也, 자연은 그 색이 깊은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紫’는 도교에서 매우 중시하는 색깔이다. 신선이 마시는 이슬을 ‘자하紫霞’라 하고 신선이 입은 옷을 ‘자의紫衣’라 하듯이 ‘紫’는 신선사상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에는 도교가 성행하였으며, ‘紫’가 황제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다.3) 또한, ‘紫’는 도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쓰였으며, 불국사 자하문의 경우에는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온다는 자금색 광채를 말한다. 이문을 통해서 부처가 있는 대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4)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 앞머리 부분인 제1성부터 제4성까지를 선기璿璣라 하고 자루 부분인 제5성부터 제7성까지를 옥형玉衡이라고 하는데 선기의 제 별이 형성하는 네모난 공간을 자연紫淵이라고 한다. 이는 요지瑤池, 요수瑤水라고도 하는데 도가적인 성격의 용어임을 알 수 있다.
5. 대서大暑 연호궁延祜宮
소서小暑 15일 후, 더위의 최절정이 대서大暑이다. 대체로 중복中伏으로,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 찜통더위가 심해지는 때이다. 더위를 피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계곡이나 산을 찾아가 노는 풍습이 있다. 오늘날 여름 피서이다. 이 무렵에는 과일, 채소 등이 풍성하고 과일은 이때가 가장 맛있다.
어느 죽음이든 죽음 뒤에는 말이 없다. 죽은 이도 남아있는 이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죽음은 그 만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커다란 우주의 섭리이다. 구릉진 산비탈 그 육상궁을 내삼문에 서서 올려다보니 새삼 그리움이 밀려온다. 사람은 가고 그리움만 남았다.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앞에 서 본다. 영조는 열흘이나 보름꼴로 다녀갔을 이 길에서 어떤 그리움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혹은 앞서 떠난 자식들에 대한 회한의 그리움!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된 진종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조선조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漢京識略』을 보면 “북부순화방順化坊에 있는데 정조 2년 1778에 건립하여 정빈 이씨를 향享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경복궁 추성문 밖 서북방으로 정조 2년(1778)에 정빈묘를 연호궁延祜宮으로 정호하였다. 고종 7년(1870)년 육상궁에 모셔져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같은 정당에 함께 모셔짐으로써 합사合祀되었다.
숙빈 최씨는 20대 숙종의 후궁이며 정빈 이씨는 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숙종과 영조가 부자사이니 숙빈 최씨와 정빈 이씨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이다. 전통적인 가족관계에 있어 고부 사이는 가장 불편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에 비추어 보면,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죽어서도 시집살이를 하는 셈이다. 정빈 이씨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것인지 고종 7년(1870)에 지금의 신교동에 있던 연호궁延祜宮을 육상궁으로 옮겨 왔으니 무슨 투정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함에도 육상궁과 연호궁은 갈등없이 조용하다. 고부간에 어떠한 큰소리도 없다. 밤낮없이 고요하다.
나름 너스레를 떨어보면 아마도 며느리인 정빈 이씨가 좋은 자리를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시어머니께 상석인 서쪽을 내어드리고, 정빈 이씨는 겸손하게 동쪽에 앉았다. 이로써 위계를 스스로 정하여 죽어서 공경을 다 하고 있으니 숙빈 최씨로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효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영조의 아들 중에서 사도세자가 많이 회자되곤 한다. 영조는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효장세자는 영조의 장남이며, 사도세자는 차남이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나이 35세인 1719년에 낳은 아들이었으나, 7살인 1725년 세자로 책봉되어 무신년인 1728(영조 4) 10세의 나이로 아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정조에 의해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어머니 정빈 이씨 또한 효장세자를 낳은 2년 뒤 산후병으로 1721년 11월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게 되니, 모자母子가 모두 요절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현빈 조씨는 영조의 큰며느리이다. 효장세자인 남편이 죽은 23년 후 영조 27년(1751)에 죽었다. 어려서 남편을 잃은 현빈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영조가 총애하였던 이유도 있겠지만, 현빈 조씨의 가문은 명문가였다. 풍양조씨 가문으로 소론의 영수인 조문명趙文命이 부친이고 숙부가 조현명趙顯命이었다. 현빈은 자기 관리에 철저한 여인이었다. 임금의 외척으로서 대신이 되는 것에 엄격했고 바로 이러한 점을 영조가 높이 여겨 어여삐 보았던 것이다.
효장세자 사후 7년 동안이나 종사를 잇지 못할까 노심초사 하다 마침내 영조 나이 42살이던 영조 11년(1735년) 1월 21일에 어렵살이 원자를 얻게 된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드디어 창경궁 집복헌에서 삼종의 혈맥5)을 잇게 된 것이다.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황급히 찾아 기쁨을 나누었던 영조에 앞서 두 아들이 황망히 가버렸으니 영조의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저경궁儲慶宮
저경궁에서 저경儲慶이란 ‘경사스러움을 쌓거나 이어감’을 뜻한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며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당이다. 인빈 김씨의 신위는 처음에는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定遠君 즉, 원종元宗의 잠저인 한성부 남부 회현동 송현松峴에 있던 송현궁松峴宮에 모셔져 있었다.
인빈 김씨仁嬪金氏6)는 선조의 후궁이다. 선조가 16세인 1567년 즉위하여 명종의 국상이 끝난 3년 후 의인왕후 박씨와 가례를 올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인왕후 박씨는 후사 없이 선조 33년(1600)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아들 순회세자가 명종 18년(1563)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자 선조 하성군는 명종의 총애를 받아 왕통을 이었다. 정비가 자손을 두지 못하는 가운데 선조는 후궁을 들이게 되는데, 그 수만도 여덟이였으며 낳은 자식만도 13남 10녀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이다. 공빈 김씨가 먼저 입궁하여 왕손을 낳아 선조의 사랑을 받아 왔으나, 후에 입궁한 인빈 김씨 또한 선조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선조를 두고 서로 총애를 다투게 되는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선조 7년(1574) 공빈 김씨는 왕손 임해군을 낳아 빈의 직첩을 받게 되었다. 1년 후 곧 15대 광해군을 낳았지만, 광해군을 낳은 2년 뒤 산후병으로 25세라는 젊은 나이에(선조 10년(1577) 5월 27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조의 사랑은 공빈 김씨에게 있었다. 공빈 김씨의 죽음으로 질투와 견제의 시기는 2년으로 짧게 끝이 났다.
한편, 인빈 김씨는 명종明宗의 후궁 숙의 이씨와 사촌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빈 김씨는 어린 나이에 입궁할 수 있었다. 유순하고 침착한 면을 눈여겨 본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7) 심씨가 기특하게 여겨 선조의 후궁으로 삼게 하였다. 인빈 김씨는 의안군義安君·신성군信城君·정원군定遠君·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을 만큼 선조가 특별하게 생각하였다. 인빈 김씨는 선조 6년(1573) 종4품의 숙원淑媛 직첩으로 시작하여, 선조 39년(1606)에 정1품 빈嬪에 책봉되어 광해 5년(1613) 59세로 일생을 마감한다.
인빈 김씨는 사헌부 감찰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후손 전주 이씨 가문이다. 선조 10년(1577) 첫째 의안군 출산 후 정3품 소용昭容의 직첩을 갖고 있었던 김씨는 경쟁자였던 공빈의 묵은 잘못을 들춰내어 선조의 총애를 자신에게 이끌어낼만큼 지략과 권모를 갖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선조가 베푼 사랑이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듯 술수와 미봉에 능란하였던 현실적인 여인 인빈 김씨를 보자.
공빈 김씨가 죽자 선조는 임해군, 광해군 형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인빈 김씨의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여 유언비어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인빈 김씨가 정사에 관여한다는 비난이 이어졌고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임해군, 광해군 형제는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 역시 인빈 김씨를 위해 두 형제를 위태롭게 여겼다. 광해군이 선조의 뜻을 잃자, 대비 이하 여러 후궁 또한 동궁을 대할 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인빈 김씨만은 유독 동궁을 후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유영경, 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가 한창 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는데, 인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를 보더라도 광해군이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인빈 김씨가 큰 힘을 실어주었기에 가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에도 인빈 김씨가 궁중에서 힘을 썼기 때문에, 원종대왕 정원군과 의창군이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에 참여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며 고마움을 표하였다. 이 때문에 인빈 김씨가 죽을 때까지 원종의 형제들은 모두 탈이 없었다. 인빈 김씨는 이처럼 광해군을 지원함으로써 자칫 네 아들에게 미칠 화禍를 모면하는 현실을 택한 매우 실리적인 여인이었다.
네 명의 아들 중 정원군定遠君은 그의 아들 인조 10년(1632)에 원종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된다. 정원군은 천성이 우애가 있어 다른 왕자들과 달리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615년(광해군 7) 정원군의 3남 능창군을 신경희申景禧 등이 왕으로 추대하려던 일이 발각된다. 이 능창군추대사건綾昌君推戴事件으로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후에 사사된다. 이에 정원군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정원군은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말이다. 정원군은 끝내 심신의 병환을 이기지 못하여 훙薨하는데 그의 나이 40세였다.
영조 19(1743)년 당시 인빈 김씨의 신위는 넷째 아들이었던 의창군義昌君의 현손(玄孫 : 4대손)인 임양군의 손자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집 사당에 의창군, 낙선군 신위와 함께 모셔져 있었다. 이에 인빈 김씨의 추숭追崇을 진행하고 있던 영조는(영조 19년, 1743) 6월 인빈 김씨의 신위를 다른 신위들과 함께 모시며 제사지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여 인빈 김씨만을 위한 사당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묘는 영조 31(1755)년 6월 2일 봉원封園되었다. 그러나 당시 여천군 이증李增이 역률逆律로 처벌되어 그 집에 인빈 김씨의 신위를 모시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영조는 (영조 31년, 1755) 6월 2일 인빈 김씨의 묘를 봉원封園하면서 그 사당을 송현궁으로 옮기고 이름을 저경궁으로 고쳤다.
영조 실록 31년의 기록을 통하여 이증의 집에 봉안되었던 인빈 김씨의 사우를 송현궁으로 옮기고 봉원封園된 과정을 살펴보자.
영조실록 31년(1755) 6월 2일
임금이 원묘元廟의 옛집인 송현松峴 본궁本宮에 나아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사우祠宇를 봉안奉安하였는데, 인빈김씨는 바로 원종 대왕을 낳은 친親으로 사우가 예전에는 이증李增의 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미 증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해 그대로 봉안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날에 임금이 도승지 정홍순鄭弘淳에게 명하여 사우를 송현궁으로 받들고 가게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본궁으로 가서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예관禮官을 불러 전교하기를,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있어 어찌 추숭追崇과 승통承統이 다르겠는가? 육상궁毓祥宮의 예에 의해서 궁원宮園으로 인빈을 모시고자 하며, 이렇게 한 연후에야 내가 원묘를 만나 뵈어 절을 할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른 말이 없었다. 임금이 입궁하여 참포를 입었는데 바로 기신忌辰 치재복致齋服이다. 사우에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갖추고 이르렀으며, 명하여 연석筵席과 상탁床卓을 갖추도록 재촉하였다. 또 명하여 궁원宮園의 호號를 의논해 올리게 했는데 궁은 저경儲慶이라 하고, 원園은 순강順康이라 하였다.
앞서 소개한 『고종실록』 7(1870)년 1월 2일의 기록처럼 왕명으로 인빈 김씨의 신위는 영빈 김씨寧嬪金氏 및 화빈 윤씨和嬪尹氏의 신위와 함께 경우궁 별묘別廟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인빈 김씨 신위를 이전하라는 명령은 동년 1월 22일 대왕대비 조씨의 명령으로 취소되었다.
순종 2, 융희 2(1908)년 7월 저경궁의 신위는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위와 함께 육상궁 별묘로 옮겨졌다. 한국은행 뒤편 옛 저경궁 자리에 1927년 4월까지 남아 있었던 저경궁 정당 건물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건물을 지을 때 일반에 매각되었다. 현재 이곳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106 남대문로 3가 110번지 한국은행 뒤편이다. 옛 저경궁 자리에는 저경궁의 하마비가 남아있다.
6. 대빈궁大嬪宮
대빈궁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빈大嬪이란 ‘크고 높은 후궁’을 뜻한다.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20대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당이다. 희빈 장씨의 신위는 처음 정동貞洞 사저에 모셨다. 이후 경종 2(1722)년 10월에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증하면서 사당 대빈궁을 한성부 중부 경신방庚申方 지금의 종로구 낙원동 24번지에 신위를 모셨다. 이 곳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측후소京城測候所 자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앞서 소개한 『고종실록』 7(1870)년 1월 2일의 기록처럼 왕명으로 희빈 장씨의 신위는 고종 7(1870)년 1월 육상궁 별묘로 이전하였으나 어떤 사정인지 고종 24(1887)년 4월 30일 왕명으로 옛 대빈궁으로 환봉還奉하게 되었다. 이후 고종 4, 융희 2년(1907) 1월 희빈 장씨의 신위는 다시 육상궁 별묘로 이전되었다.
희빈 장씨는 숙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옥산부원군 장형張烱의 딸이다. 궁녀로 입궐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어 소의昭儀로 있을 때 경종를 낳았다. 이듬해 원자로 책봉됨으로서 장씨는 숙종 15년(1689) 기사년 1월 15일 정2품 소의에서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된다. 이때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이항李杭과 장씨의 동생 장희재張希載가 민암·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과 모의함에 못하는 바가 없어, 국가의 화禍가 장차 조석朝夕에 있어,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떨었다고 실록에 기록할 만큼 그 기세가 대단했다.
그 해 기사년(1689) 5월 초, 4일에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는 숙종의 변에서,
비妃 민씨閔氏는 화순한 성품이 부족하고 유한幽閑한 덕이 적었고, 책봉을 받은 처음부터 경계하고 삼가함을 생각하지 않았고, 궁중에서 질투하는 일을 드러내어 실로 허물이 많았다. 심지어는 꿈을 일컫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더욱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조일석에 생긴 일이 아니라 그것은 오래 전부터이다. 선왕·선후의 말씀을 빙자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를 참을 수 있으랴
인현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삼은 이틀 후인 5월 6일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겠다는 전지를 내린다.
《주역周易》은 건곤乾坤을 기본으로 하였고, 《시경詩經》은 관저關雎를 첫머리로 하였으니, 대저 풍속을 바르게 하고 비필妃匹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주곤을 아직 세우지 못하여 음교陰敎가 통달하지 아니하니, 위호位號를 정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희빈 장씨는 좋은 집에 태어나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 인효공검人孝恭儉하여 덕이 후궁後宮에 드러나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 함께 종묘를 받들고 영구히 하늘의 상서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에 올려서 왕비를 삼노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일체 예절禮節에 따라 즉각 거행하게 하라.
숙종 16년(1690)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희빈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됨과 함께 폐위된 인현왕후仁顯王后8) 민씨의 뒤를 이어 숙종 15(1689)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숙종 20(1694)년 서인 김춘택金春澤 등이 중심이 된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었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궁인·무녀와 함께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며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렇다면 왕비 민씨가 서궁西宮의 경복당景福堂에 입어入御하는 것에서부터 희빈 장씨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숙종실록을 통해 살펴보자.
숙종 20년(1694) 갑술년 4월 12일 왕비 민씨를 서궁의 경복당에 입어하기 하루 앞서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해풍 부부인海豊府夫人 이씨李氏·은성 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풍창 부부인豊昌府夫人 조씨趙氏의 작호爵號를 회복하였다. 그 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는 수찰手札을 왕비 민씨에게 내리고 답서를 주고 받았다.
“처음에 권간權奸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으나, 곧 깨달아서 그 심사를 환히 알고 그 억울한 정상을 깊이 알았다. 그립고 답답한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깊어져, 때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니, 깨어서 그 일을 생각하면 하루가 다하도록 안정하지 못하거니와, 이때의 정경情境을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시인時人이 임금을 속이고 공도公道를 저버리는 것을 보게 되니, 지난날 경신년9)의 여당餘黨에 연결된 말이 참으로 나라를 위한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고, 조금도 사의私意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더욱 알았다. 옛 인연을 다시 이으려는 것은 자나깨나 잊지 않으나, 국가의 처사는 또한 용이하지 않으므로 참고 머뭇거린 지 이제 6년이 되었는데, 어쩌면 다행히도 암적10)이 진신搢紳을 도륙屠戮하려는 생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비로소 뭇 흉악한 자를 내치고 구신舊臣을 거두어 쓰고, 이어서 별궁에 이처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 뒤에 어찌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겠는가?
왕비 민씨는 답서를 올리어
첩妾의 죄는 죽어도 남는 책망이 있는데 오히려 목숨을 보전한 것은 또한 성은聖恩에서 나왔습니다. 스스로 반성할 때마다 오히려 이 죄명을 지고도 곧 죽지 않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낯을 들고 사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오직 엄주嚴誅가 빨리 가하여져서 마음 편히 죽기를 기다릴 뿐인데, 천만 뜻밖에 옥찰玉札이 내려지고 이어진 사의辭意는 모두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받들어 보고 감격하여 눈물만 흘릴 뿐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제私第에서 편히 사는 것도 이미 스스로 분수에 지나치거니와, 별궁에 이처하라는 명은 더욱이 천신賤臣이 받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천은天恩에 감축感祝하며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경복당에 인현왕후 민씨를 모셔오기 위하여 숙종은 10일에 중사中使를 보냈다. 외문外門을 열려고 열쇠를 청하였으나, 민씨는 여염집의 아낙으로 깊지 못하여 감추어지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한다. 중사中使가 두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아내지 못하였다. 중사는 숙종이 문을 열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려 마침내 인현왕후 민씨가 황공한 마음으로 열쇠를 주어 중사가 문을 열게 되었으나, 사가 마당에는 풀이 빽빽하고 인적이 없어 절로 목이 메어 방문했던 군졸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인현왕후 민씨가 입어할 때 도성 안의 분위기는 위로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종들까지 남녀노소가 길을 가득 메우고 기뻐하며 울었다 한다. 시골에서 입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자 올라온 이들도 있어 동리가 다 비었을 정도였으며, 유생과 조신朝臣은 지영하며 인현왕후 민씨를 맞이하였다. 6년동안 살았던 그녀의 사가에는 부녀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갔는데, 그러한 풍경은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다 하니 갑술년 백성들의 민심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있었던 것이다.
숙종 20년(1694) 갑술년 4월 12일에 장씨의 왕후 새수를 거두고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희빈의 옛 작호를 내린다.
국운國運이 안태安泰를 회복하여 중곤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의 왕후 새수王后璽綬를 거두고, 이어서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는 폐하지 않도록 하라.
같은 날 장형張炯의 부원군 교지府院君 敎旨와 그 아내의 부부인 교지府夫人 敎旨를 불사르라고 명하고, 또 장씨의 왕후 옥보王后 玉寶를 부수라고 명하였다.
숙종 27년(1701) 신사년 9월 25일 밤에 비망기를 내려 장희빈을 자진하게 하게 한다.
옛날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구익 부인을 죽였으니, 결단할 것은 결단하였으나 그래도 진선盡善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만약 장씨가 제가첩이라는 운명을 알아 그와 같지 아니하였다면 첩을 정실로 삼지 말라는 《춘추春秋》의 대의를 밝히고 법령으로 만들어 족히 미리 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구익 부인에게 한 것과 같이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죄가 이미 밝게 드러났으므로 만약 선처하지 아니한다면 후일의 염려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니, 실로 국가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다. 장씨로 하여금 자진自盡하도록 하라.
숙종 27년(1701) 신사년 10월 7일 희빈 장씨에게 자진할 것을 하교하기 하루 앞서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도록 하였다.
이제부터 나라의 법전을 명백하게 정하여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게 하라.
같은 날 숙종은 10월 7일 국청에서 죄인 숙정·숙영 등이 흉물을 궁전에 파묻은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하교하게 된다.
모역謀逆한 죄인 숙정淑正과 숙영淑英 등이 저주한 일을 자복한 뒤 각씨角氏와 참새·쥐의 뼈가루 등의 물건을 대조전大造殿 동쪽과 침실 안에서 찾아 내었다. 이외의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으로서 대조전과 통명전通明殿의 섬돌 아래에서 파낸 것도 또한 많았다.
국청에 의해 흉물이 발견된 하루 뒤인 10월 8일에 재차 희빈 장씨를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 죄로 자진하게 하라고 하교하기에 이른다.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희빈 장씨가 내전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대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것이다. 전대에 의하여 자진自盡하게 하라. 아! 세자의 사정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 만약 최석정崔錫鼎의 차자의 글과 같이 도리에 어긋나고 끌어다가 비유한 것에 윤기倫紀가 없는 경우는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겠지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춘궁을 위하여 애쓰는 정성을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다시 충분히 생각한 결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처분을 버려두고는 실로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나의 뜻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유시하는 바이다.
희빈 장씨는 사사賜死 되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왕비에 책봉되는 영화를 누렸지만 단지, 5년 뿐이었다. 살아 생전 희빈 장씨의 삶이 특별하듯 사당 또한, 네모난 기둥대신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보통 3단의 계단보다 하나 더 많은 네 단의 돌계단으로 사후 예우를 하였다. 희빈 장씨의 치열했던 영욕의 삶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임금을 향한 애틋한 열정과 증오를 가슴에 묻고 영겁의 세월로 영면한 것이다
.
박경숙 / 국민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조선후기사를 전공했으며 칠궁 문화유산해설사(2009년 12월~ 2011년 9월), 7대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