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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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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구다래 떨어진
거는/ 꼭지나 있잖소/ 우리 둘이 정 떨어진 거는/ 꼭지도 없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대정팔년 공동묘지에 쇠스랑 귀신아/ 무얼 먹고 사나/ 거치고 고생하는 나를 다 찍어가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저 산 저 꾀꼬리는 없는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이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나/ 아리 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아리랑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어떤 아리랑? 아리랑은 하나 아닌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엄청
많지 않아요? 백 수 정도? 밀양, 진도 아리랑은 들어봤는데….”
“윤도현이 부른 아리랑 말고 다른 아리랑이
있어요?”
20~30대의 대답이긴 하지만 아리랑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이 정도에서 멈춰 있다. 아리랑에 대해 조금 안다는
사람들도 정선, 진도, 밀양, 경기, 본조아리랑 다음에선 말을 잇지 못한다.
현재 전해지는 아리랑은 몇 수나
될까?
아리랑 1만68수의 노랫말을 서예가 120명이 한지에 붓글씨로 남긴 ‘아리랑 대장경’이 완성됐다. 가로 40㎝,
세로 60㎝ 크기 한 권에 200수씩 묶어 총 50권 분량이다. 기사 앞부분에 소개한 아리랑을 비롯해서 국내 각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리랑은
물론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해외에 퍼져 있는 아리랑을 총망라했다. 그중에는 광복군 아리랑, 고려인 아리랑도 있고 일제강점기
권번기생들이 부르던 아리랑도 있다. 부분적으로 아리랑을 수집하고 기록한 것은 있지만 1만68수를 한꺼번에 묶은 것은 최초의 일이다. 1만68수
노랫말에는 한민족의 삶과 애환이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과 중앙아시아에 버려진 동포들의 디아스포라가 녹아
있는가 하면 낯 뜨거운 남녀의 통정을 노래하기도 하고 고단한 노동을 견디기 위한 주문도 있다. 한 수 한 수가 바로 한국의
민속사이다.
아리랑이 1만수가 넘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국의 대표 서예가들이 각기 다른 한글 서체로 한지에
옮겼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120명에 달하는 작가가 한 작업에 매달린 것은 전무후무한 일. 현존하는 한글 서체가 모두 담겼다고 보면 된다.
이 작업에는 아리랑 학자, 서예가, 한지 장인 등 200여명이 2년을 매달려 완성했다.
소리로만 전승되던 아리랑
1만68수를 집대성해 기록 아리랑으로 남긴 작업은 경북 문경시의 작품이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2013년 3월 6일 사단법인 한국서학회(이사장
이종선)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1만68수 아리랑 대장경’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국서학회는 한글 서예작가들의 단체로, 초대작가 이상 80여명이
회원이다. 이번 작업에는 서학회 회원과 문경시에서 추천한 43명의 서예작가가 참여했다. 한지는 문경의 한지장 기능보유자인 김삼식 장인이 맡았다.
작업에 들어간 한지만도 7000여장(한 장에 두 수씩 기록). 한지를 뜨는 데만 꼬박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실무를 맡아 진행한 엄원식 문경시
문화관광과 계장은 “세종대왕 한글반포 이래 가장 큰 한글 쓰기 작업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랑을 수집하고 선별하기 위해
아리랑선별위원회가 꾸려졌다. 구비문학 전문가인 경북대 김기현 교수(국문학)를 위원장으로 부산외국어대 한국어문화학부 권오경·최은숙 교수 등이
참여한 선별위원회는 먼저 기록으로 남겨진 아리랑을 전부 모았다. 2만5000수가 넘었다. 그중 노랫말이 겹치고, 가사로서 가치가 없는 것들을
추려낸 게 1만68수다.
아리랑이 총 몇 수인지,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모른다. 아리랑 전승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60여종 5000수에 이른다는 학자도 있고 90종 7000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김기현 교수는 “아리랑은 천의 얼굴, 만의
얼굴을 가졌다. 아리랑은 삶의 공간에서 불리던 민요이다. 민요는 한 사람이 불러도 아침에 부르는 노래와 저녁에 부르는 노래가 다를 수 있다.
선율도 가사도 부를 때마다 바뀌는 것이 민요이다”고 말했다.
1만수 아리랑 비의
숲으로!
아리랑 수집, 기록, 선별 작업을 거쳐 각 작가들에게 작품을 할당하고 글씨를 쓰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한국서학회 신명숙 부회장은 “작가, 서체, 작품 순서를 고려하다 보니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지방 사투리가 많아 단어
하나하나 김기현 교수의 감수를 받아가며 작업을 해야 했고 시행착오도 많이 거쳤다.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 1~2시까지
작업하면서 힘들었지만 의미 있는 일인 만큼 보람도 컸다. 그렇게 많은 아리랑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제본작업을 맡은 김영국(아름표구사)씨는 “35년 표구 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작가가 하나의 작업을 한 것은
처음 봤다. 아마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고 말했다.
문경의 아리랑 노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만68수
아리랑 대장경’을 시작으로 문경시를 ‘아리랑 시티’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문경시는 한지에 새긴 1만68수를 비석에도 새겨 문경을 1만68개
아리랑 비의 숲(비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시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업이다 보니 국민의 참여를 유도해 ‘1인 1비석 세우기’ 운동을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국민의 기금으로 만든 비석 1만68개에 기증자의 이름을 새기고 문경의 곳곳에 세워 아리랑 로드를 만들겠다는 것. 그
시발점으로 지난 8월 17일 옛길박물관 앞에 있는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아리랑을 비롯해 정선, 진도, 본조, 밀양 아리랑을 새긴 비석 5기를
세웠다. ‘1인 1비 국민운동’을 위해 ‘1만수 비림위원회’를 추진 중이다. ‘아리랑세계화포럼’의 멤버인 남궁진 전 장관, 탤런트 최불암씨,
국악인 김영임씨를 주축으로 조각가 등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 낼 계획이다.
이번 1만68수 한글서예 작업은 도록으로도
펴낸다. 한 수 한 수마다 출전을 밝히고 관련 정보와 설명을 담은 도록 1000질을 제작할 예정이다. 이번 1만68수 사업에는 문광부 지원과
도비, 시비 등 8억여원에 달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문경시는 도록이 완성되면 오는 12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출간기념회를 갖고 ‘아리랑도시
선포식’을 가질 계획이다.
문경과 아리랑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근대 아리랑에서 문경새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이 최초로 서양악보로 기록된 것이 바로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얼싸 배 띄워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
당시 유행하던
이 아리랑을 채보해 세계에 알린 사람은 고종의 외무특사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는 1896년
자신이 발행하는 영문잡지 ‘코리아 레파지토리(Korea Repository)’에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이다’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소개했다. 헐버트는 ‘이 노래는 언제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다. 한국인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 이후 아리랑의 인기에 불을 붙인 것은
1926년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이다. 영화 대흥행과 함께 변사가 부른 아리랑이 국민 대표 아리랑이 됐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아리랑으로 ‘본조아리랑’이라고 불리는 곡이다.
왜 문경새재아리랑이 당대의 히트곡이 됐을까. 학계는 흥선대원군이
1867년부터 강행한 경복궁 중수가 이유라고 보고 있다. 7년간에 걸친 공사기간 동안 전국에서 인력이 강제 동원되고 문경 지역에 자생하던
박달나무가 다 베어져 올라왔다. 고향을 떠나온 부역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회유책으로 노래자랑대회를 열기도 하고 유랑
연예패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팔도 민요가 불려졌는데 그중 애창곡이 문경새재아리랑이었다. ‘~는 ~로 다 나간다’는 후렴구가 붙은 이
아리랑에는 부역에 대한 불만과 상실감이 응축돼 있었다. 문경새재는 중수공사를 위해 각지에서 공출된 물자를 한양으로 실어나르는 관문이었다. 저항의
노래는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새로운 가사와 버전으로 진화해 나갔다. 진도아리랑을 비롯해 많은 아리랑에 ‘문경새재’라는 대목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아리랑의 인기는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적혀 있다. 고종과 민비가 밤마다 연회를 열고 통속적인 아리랑을 들으며 장단을 맞췄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문경을 아리랑 도시로
문경시가 문경새재아리랑을 근대 아리랑의 시초라고 하는 근거이다. 문경시는 ‘1만68수
아리랑 대장경’ 50권을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옛길박물관에 전시할 예정이다. 문경시는 오는 9월 5일 책을 가마에 싣고 옛길박물관에
옮기는 이운식을 진행한다. 문경에 아리랑을 입힌 것은 문경시 고윤환 시장의 ‘아리랑’ 사랑 덕분이다. 지난 8월 17일 이운식을 앞두고 문경시를
찾았다. 고윤환 시장의 접견실 의자 뒤에는 한글 서체로 아리랑을 기록한 병풍이 놓여 있었다. 고 시장은 미국 연수 시절 목격한 한 장면이
가슴속에 아리랑을 품게 했다고 말했다. “2008년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근무하며 1년 동안 연수를 할 때였습니다. 70세가 넘어 은퇴하는 흑인
동료의 파티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파티 참석자는 흑인이었습니다. 파티가 끝날 때쯤 흑인들이 모두 일어서더니 흑인 영가를 부르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어떻습니까. 2세만 되면 한국어를 잊어
먹습니다.”
고 시장은 그 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아리랑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언젠가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면 아리랑으로 민족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문경시장이 되면서 실천에 옮겼다. 고 시장은 “문경새재를 넘어보면
압니다. 1관문에서 3관문까지 걸어보면 문경새재는 아리랑 고개이자 인생의 고개입니다. 이곳에 아리랑민족관을 짓는 것이 마지막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리랑은 지금도 진화 중
문경에는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회장 송옥자)를 비롯해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문경새재아리랑을
전승하고 알리기 위해 발로 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문경새재에 가면 꼭 이 사람의 아리랑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제2관문을
지나 제3관문을 오르다 보면 ‘동아원’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즉흥 아리랑 공연이 벌어진다. 이 사람이 마이크를 잡으면 넓은
야외 테이블은 바로 객석이 되고 한바탕 신명난 아리랑 춤판이 벌어진다.
악기라고는 북과 파이프에 구멍을 뚫어 만든 피리가
전부인 무대의 주인공은 한산(55)씨다. 문경새재아리랑 전도사로 나선 한산씨는 문경과는 아무 연고가 없다. 한산씨는 길 위의 삶을 살았다. 전국
각지는 물론 네팔, 인도, 산티아고 등 하늘을 지붕 삼아 각지를 떠돌았다. 4년여 전 문경새재에 왔다 주흘산에 반해 팔자에 없이 정착을 하게
됐다. 우연히 식당에 들러 김치 담그는 것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됐다. 처음엔 ‘수상한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식당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보물’이 됐다. 타악기 등 음악에 정통한 한산씨가 부르는 문경새재아리랑은 직접 편곡한 곡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을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빠르게 편곡을 해 신명을 불어넣었다. 그의 아리랑을 듣고 있으면 젓가락 장단과 함께 절로 어깨가 들썩여진다. 그의 아리랑은 문경시에서 올
6월에 엮어낸 음반 ‘문경새재아리랑 2015’에도 들어가 있다.
김기현 교수는 아리랑은 원래 신명의 노래였다고 주장한다.
“세마치장단인 강원·영남지역 아리랑을 보면 경쾌하고 밝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의 울분과 애환을 노래하면서 아리랑은 한의 노래라고
알려지게 됐지만 아리랑을 한 가지 색깔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아리랑은 산과 들에서 부르던 일노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유희의 노래가
되고 무대의 노래가 되면서 본래 가지고 있던 건강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김기현 교수의 말처럼 삶의 노래인 아리랑의
생명은 현장성이고 변혁성이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진화 중이다. 문경시를 비롯해서 아리랑을 찾으려는 지자체들의 노력도
진화의 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리랑이 과거의 노래가 아닌 현재 우리의 노래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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