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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마비 장애를 딛고 뉴욕 브루클린 최연소 부장검사된 정범진
“휠체어를 타고라도 넓은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어 행복합니다” 24세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한 전신 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뉴욕 브루클린 최연소 부장검사가 되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정범진 검사. 그가 최근 자신의 재활과정을 담은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미국에 있는 그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인종차별, 신체 장애를 딛고 부장검사가 되기까지의 용기있는 도전을 들어보았다.
“당신은 법대 다니면서 판사가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못 배웠는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법정. 재판 시간에 임박해 판사가 법정 안에 들어서자 정리(법원 직원)가 “전원 기립!”을 외쳤고, 법정 안의 배심원들과 변호사 모두 미국 사법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뜻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일어서지 않는 동양인 검사가 있었다. 이를 본 판사는 서슬이 퍼런 눈초리로 이 오만방자해 보이는 동양인 검사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순간 법정 안의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기 시작했고, 모든 시선이 ‘앉아 있는 검사’에게 꽂혔다.
“판사님은 제가 앉아 있는 이 의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자신만만한 얼굴로 판사의 시선을 되쏘아본 동양인은 뉴욕 브루클린 지방검찰청 소속 정범진 검사(35). 미국에서 ‘알렉스 정(Alex Jeong)’으로 불리는 그는 휠체어에 앉은 전신 마비 장애인 검사로 미국 법정에 울려퍼지는 ‘전원 기립’의 호령에도 일어설 수가 없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은 LA 다음으로 사건 발생 건수와 검사의 수가 많은 곳. 그는 이런 방대한 조직의 심장부에서 인종차별, 신체장애를 딛고 당당히 ‘부장검사’의 직함을 손에 쥐었다. 그것도 같은 직급에 올라 있는 검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최연소 부장검사’가 되었다. 기가 막히게 빠른 승진을 한 셈인데, 그가 검사로 임용된 후 3년 동안 24회의 재판을 맡아서 24회 모두 이긴 탁월한 능력의 결과가 초고속 승진의 배경이다.
현재 그는 ‘슈퍼바이저’로서 재판정에 직접 나서지 않고 80명의 후배 검사들을 교육한다. 그의 이런 활약상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0년 크리스마스 이브, 지금은 막을 내린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통해서였다. 방송 이후 그의 전자우편함에는 하루 1백여통이 넘는 이메일이 쏟아졌고, 인터넷상에는 회원 5백여명이 모인 ‘검사 정범진을 너무나 좋아하는 모임’까지 생겼다.
최근 그는 자전 에세이집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를 찾습니다>를 출간해 전신 마비 장애를 딛고 뉴욕 최연소 부장검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사실 전신 마비 장애인의 몸으로 검사는 힘든 직업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교통사고 직후 뉴욕대학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을 때, 우연히 나소 카운티에서 현역 검사로 활동하는 장애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장애인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저 같은 사람도 검사로 일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분이 ‘장애인에게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몸이 정상인 사람들도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용기를 주었어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나소 카운티 장애인 검사의 말 한 마디에 그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그 장애인 검사를 ‘모델’ 삼아 지금의 부장검사 자리까지 왔다. 이런 의미에서 그 또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많은 장애인들과 ‘희망의 교신’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민 1.5세대인 그가 한국을 떠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76년. 당시 한국에 몰아치기 시작한 ‘아메리칸 드림’이 그의 부모와 3남매를 이민 길에 오르도록 부추겼다.
“미국만 가면 당장 수영장이 딸린 커다란 집에서 살 것 같은 장밋빛 환상에 젖어 있었지만, 뉴욕 플러싱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이 시작되자마자 환상이 다 깨졌어요. 이민 초기에 식탁 살 돈이 없어 사과 궤짝에 신문지를 깔고 밥을 먹었으니까요. 미국 생활 8년이 지나서야 제 침대를 겨우 구입할 수 있는 형편이 됐어요. 집에 늘 돈이 없어서 부모님이 싸우시는 모습도 자주 봤죠.”
한국에서 ‘엘리트’ 소리를 들으며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아버지 정규동씨(68)는 미국에서 야채 가게 주인, 택시운전 등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했지만 별 재미를 못 봤다. 가세는 점점 기울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사업을 하려고 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까지 몽땅 사기를 당했다. 어머니 이명자씨(64)가 부업 삼아 재봉일을 했지만 끼니를 잇기도 힘든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그도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새벽에는 신문배달, 학교 수업을 마치면 골프연습장 볼보이, 술집 청소 등을 했고, 집에서는 틈틈이 어머니의 재봉 일도 거들었다.
“매일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우시면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열심히 재봉틀을 밟았어요. 어린 마음에 일을 도와드린다는 차원보다는 재봉틀 만지는 일이 재밌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한번은 옷깃을 전부 반대로 박아서 몽땅 다시 뜯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는 담임교사로부터 ‘다른 사람보다 운동 신경이 월등히 뛰어나니 운동선수가 되어도 좋겠다’는 권유를 받을 정도로 수영, 골프, 스키, 야구 등 모든 운동을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특히 야구를 잘해 한때 야구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도 “범진이가 만일 이민을 오지 않고 한국에 있었다면 야구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의 광적이었다.
3년 연속 24회의 재판에서 24연승을 거둔 타고난 승부사
그렇다고 놀기만 좋아하고 공부가 뒷전인 학생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공부벌레는 아니었지만 전교 2등의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 상태였다. 또 고교시절 뉴욕 퀸즈 한인 천주교회에서 학생회장을 할 만큼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이런 그도 사춘기 시절 ‘한국인’이란 사실이 최대의 콤플렉스였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지만, 그는 콜게이트 대학에 진학하면서 미국인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폐부 깊숙이 받아들이면서 거대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한 진로 모색도 치밀하게 했다.
“아버지가 몇 차례 사기를 당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주변에 잘 아는 변호사가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또 고려대 법대를 나온 아버지가 한국에서 사법고시에 두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대리만족 때문인지 그쪽을 많이 권유하셨어요. 저도 철저한 계약사회인 미국에서 아버지처럼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 법과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 법과 대학원에 들어가려면 ‘LSAT(Law School Admission Test)’라고 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는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조지워싱턴대학 로스쿨에 진학할 수 있었다. 미국 법과대학원은 3년 과정인데, 그는 법과대학원 2학년을 마칠 무렵 방학을 이용해 한국의 작은 법률 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 할 계획을 세워두고 짐 가방을 꾸렸다. 불과 몇 시간 후면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최대의 사건이 터지리란 예측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곧 있으면 고국에 돌아간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모님이 계신 댈라스에서 하룻밤 자고 한국에 갈 생각으로 워싱턴에서 자동차를 몰았죠.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다른 차선에 있던 차가 끼어드는 거예요. 그 차를 피해 핸들을 꺾다가 제 차가 중앙분리대쪽으로 치우쳤고, 다시 도로에 들어서기 위해 급하게 핸들을 꺾는데 또 다른 트럭 한대가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어요. ‘아! 사고가 나겠다’고 느끼는 순간 차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면서 창 밖의 세상이 정신없이 뒤집어지더군요.”
교통사고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가 눈을 떴을 때 머리를 돌려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간신히 머리 위쪽을 보니까 자동차 지붕이 내려앉아서 제 머리를 꽉 누르고 있는 바람에 목이 아주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어요.”
구겨진 차 안에 갇힌 그를 꺼내기 위해 절단기가 동원됐고 그는 차 지붕이 절개된 뒤에야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중추신경을 절단 낸 두번의 교통사고
이 사고로 그는 목뼈가 부러지면서 중추신경이 함께 끊어져버렸다. 부러진 뼈는 엉덩이 뼛조각을 일부 잘라내어 부목처럼 붙여 세웠지만 한번 끊어진 중추신경은 다시 붙일 수도, 자라게 할 수도 없었다. 24세에 닥친 불운이었다. 어깨 아래 모든 부분이 마비되어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전신 마비 장애인 판정을 받은 그는 이때의 기분을 “마치 살아있는 채로 관속에 누워 땅에 파묻힌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대형사고가 난 지 10여년이 흐른 지금이야 모자간에 농담 아닌 농담도 주고받을 여유가 생겼다. 한번은 어머니 이씨가 아들에게 “범진아. 이제 사고나서 다친 지 10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렇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태가 훨씬 더 편하겠다”고 했더니 범진씨가 웃으면서 딱 한 마디로 정곡을 찔렀다.
“엄마, 장님이 지금 당장 눈을 뜨면 어떤 게 더 편하겠어요?”
이명자씨는 아들의 에세이집을 보며 새삼 지난 일들을 떠올려보니 또 다시 우울해졌다고 한다.
“다치고 나서 자기 방에만 매일 드러누워 있었어요.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맘!’ 하고 저를 불러요. 내 몸이 고달프면 짜증도 났지만 ‘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서 이런저런 시중을 다 들어주게 되죠.”
176㎝의 훤칠한 키에 만능 스포츠맨 소리를 들었던 그는 의외로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빨리 받아들였다. 첫번째 교통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번째 교통사고를 겪는 불운이 겹쳤고 이런 절망감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재활훈련에 온몸을 던졌다.
그 결과 지금은 하루 종일 볼링 선수들이 끼는 것 같은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여기에 난 조그만 홈에 숟가락을 끼워 밥을 먹거나, 볼펜을 꽂아 글씨를 쓰고 컴퓨터 자판까지 두드린다. 사고 직후에는 글씨도 쓸 수 없었고, 밥을 먹어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양이 훨씬 더 많았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발전이다. 그렇게 어깨근육을 되살리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뒤따랐다. 그는 지금 쓰는 글씨가 교통사고 당하기 전보다 훨씬 필체가 좋아졌다며 웃는다.
그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휠체어를 타고 다시 법과 대학원에 다니며 하루 8시간씩 꼬박 미국 사법고시 공부를 해서 합격의 영예를 안았고, 93년 10월 마침내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에 첫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는 브루클린 검찰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당백의 일 잘하는 검사로 소문나 있다. ‘알렉스한테 맡기면 재판에서 안 진다’는 소문뿐만 아니라, 후배 검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검사로도 악명이 자자하다.
“미국 검사들은 인기 관리 차원에서 남에게 싫은 소리 안해요. 그런데 저는 후배 검사들에게 재판과정에서 잘한 점, 못한 점을 솔직하게 말해요. 후배 검사들이 오히려 저의 그런 점을 더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끼죠.”
현재 검사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자부하는 그도 초임 검사 시절에는 전신 마비 장애인의 몸으로 야근과 철야를 감수하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무리하면 혈압이 뚝뚝 떨어지거나 욕창의 위험이 있어 그도 죽을 맛이었고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저는 범진이가 사고 후 재활훈련 받을 때보다 검사 수습기간이 더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사건 접수받느라고 사무실에서 하루 24시간 일한 적도 많거든요. 늘 어지럽다고 하고, 속이 느글느글해서 토할 것 같다고도 하고. 그런데도 꾹 참고 재판과 관련된 모든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하더라고요. 제 아들이지만 가끔 ‘너 참 독하다’고 욕도 하죠.”
이젠 ‘함께 살고 싶은’ 여자 만나고 싶어
이제 어머니 이씨는 이런 아들에게 좋은 배필이 나타나길 바란다. 그가 <성공시대>를 통해 전파를 탄 이후에 많은 한국 여성들이 프로포즈를 했지만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떤 분은 매일 청혼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집으로 결혼반지까지 보냈어요. 선물도 많이 와요. 와이셔츠, 넥타이, CD, 목도리, 또 십자수로 제 얼굴을 새긴 쿠션과 티셔츠를 보내셨는데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요.”
방송의 위력에 놀란 것은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처음 한달간 범진이가 하루에 1백통이 넘는 이메일이 와도 다 답장을 써줬어요. 그래서 답장을 받은 한국 여성들이 전부 자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나봐요. 간호사라고 밝힌 어떤 여성은 저한테도 전화를 해서 ‘어머니, 결혼해서 잘하겠어요’ 하고 엉엉 울어요. 거의 중학생이 연예인한테 매달리는 식으로 아우성이었어요. 요즘 한국 젊은 여성들은 다 그렇게 대담한가요?”
심지어 ‘한눈에 반했다’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 집은 물론 브루클린 검찰청에 전화를 해서 그곳 직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여성들도 있고, 미국식 사고 방식과 영어에 익숙한 그와 결혼하기 위해 유학을 결행한 여성도 있었다.
이런 곤란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 그는 3단계 전법을 취한다. 우선 자신과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설명해준다. 두번째 부모님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상대방 여성이 결혼하겠다고 하면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서 대머리가 될 것 같다”고 하면 대부분 ‘그것만은 절대 안된다’며 전화를 뚝 끊는다고 한다. 의지의 화신인 그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숙제 ‘사랑’과 ‘결혼’에 대해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된 후에는 애인, 자식,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한때 사귀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졌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 나름대로 잘 해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요. 비장애인도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진 않잖아요. 책제목처럼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는 좀 과장이에요(웃음). 건강하고 잘 웃고 저와의 인생을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내년이면 검사 10년차에 접어들어 미국 사법부 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조건을 갖게 되고, 뉴욕 한인사회 대학동문총연합회로부터 ‘차세대 지도자상’을 받은 전도 유망한 정범진 검사. 가끔 휠체어 음주운전으로 등짝에 어머니의 손도장을 찍히는 아들이기도 한 그에게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물었다.
“가수 강원래의 재활과정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봤는데 아직도 한국에는 장애인에게 재수 없다고 소금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면서요? 정말 그래요? 충격받았어요.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가 되어야지요. 저도 장애인을 위해 뭔가 하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일이 끝나자마자 침대 위에 계속 누워있어야 돼요. 하지만 앞으로 장애인을 위한 사회활동을 꼭 시작할 겁니다. 장애인 화이팅!”
여성동아. 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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