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의 염원이 이뤄졌다. 드디어 빌 골드버그가 WWE을 통해 미국 매트로의 복귀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스틴의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사상 최고의 드림매치”라고 생각되었던 오스틴 대 골드버그의 대결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팬들에게는 오스틴 대 골드버그는 정말 “꿈의 매치”로 되었지만 두 명이 지금까지 각자 달려왔던 길과 프로레슬러로써의 깊이를 살펴 보면서 비교,분석 해보고자 한다.
(참고로 레슬매니아 19에서 락이 오스틴에게 이겼고 또 이번 백래쉬에서 골드버그가 락을 이겼으므로 오스틴<락<골드버그가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글 읽는 것을 중단해 주기를 바란다.)
골드버그는 97년에 첫 프로 데뷔를 했고 오스틴은 90년에 데뷔를 했다. 항간에서는 오스틴이 89년에 데뷔 했다고 하지만 그 때는 도장생으로 활동한 시기였고 본격적으로 직업적인 프로레슬링을 한 것은 90년이다. 둘의 인생길 만큼이나 프로레슬러로써의 길도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골드버그는 학생 때부터 미식축구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92~94년 시즌을 NFL에서 뛰었다. 그는 아틀란타 팔콘스에서 뛰었으나 NFL 내에서 그리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94년, 큰 부상을 입은 그는 NFL을 그만두어야 했고(실상, 골드버그는 미식축구에 그리 큰 재능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출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 때가 그의 인생 중 유일무이한 시련기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성인용 나이트 클럽” 에서 WCW의 스타 DDP를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술집’에서 만났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골드버그를 좋아하는 초등학생’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DDP에게 권유를 받고 96년 말 골드버그는 WCW의 선수 양성소인 “Power Plant”에 입소하게 된다. 사실, 이 때까지 골드버그는 프로레슬링은 얼간이나 보는 쇼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과 태도는 대스타가 된 지금에도 간간이 엿보인다. 그는 6개월 간의 훈련을 마치고 휴 모러스(현 WWE 스멕다운! 브랜드의 빌 디못) 와의 충격적 데뷔 전을 갖는다. 이 이후로 그는 98년 케빈 내쉬에게 패하기 까지 173연승이라는 경이적인 대기록을 이룩한다. 이 173 시합을 통해 빌 골드버그라는 이름은 전세계 매트 계에 메가톤 급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99년 WCW 파산으로 인해 매트계를 떠나게 되고 02년 일본 매트에 등장해 4차례 경기를 하고 03년 드디어 WWE에 돌아오게 된다. 정말 프로레슬러 뿐만 아니라 사회 어느 사람과 비교를 해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초고속 출세가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스틴은 그리 순탄치 만은 않은 인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축구 장학생이었던 오스틴이었지만 가난했기에 텍사스의 부둣가에서 트럭 운전수와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그리고 겨우 모은 돈으로 그 때 당시 그가 가장 좋아했던 레슬러 “본 에릭”(올드 팬이라면 과거 90년 “텍사스 토네이도”라는 닉네임으로 나타난 선수를 기억할 것이다. 본 에릭은 그의 가족이다.) 을 보러 시합장을 찾아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본 에릭을 찾아가게 되고 이것이 레슬링 인생의 시작이었다. 90년 WCCW,USWA라는 인디 단체에서 시합을 시작하게 된 오스틴은 원래 본명인 스티브 윌리암스라는 이름으로 데뷔했으나 전일본 프로레슬링이라는 단체에서 매우 유명했던 레슬러와 이름과 같아서 곧 본명 조차 포기했어야만 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과 당시 유행했던 TV 드라마 ‘육백만 불의 사나이’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스티브 오스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WCW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태그 타이틀,US 타이틀, TV 타이틀 등을 거머쥐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검은 팬츠만을 입고 레슬링 하는 선수는 엔터테인먼트화 되는 현대 추세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해고 편지를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에릭 비숍이었다. 그 후, 무언가를 느낀 그는 레슬링 실력을 중시하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일본 최고의 메이져 단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순탄치 못한 길을 걷는다. 당시 노랑 단발머리에 평범한 외모, 그리고 나름대로 꾸몄으나 촌스러운 별 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은 그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내에서 가장 미국 실정에 밝다는 해설자 히로 사이토도 그의 일본 데뷔 매치 때 “오스틴은 텍사스 출신으로 거친 플레이가 주무기입니다.” 로 모든 소개를 마쳤다. 그는 일본 내의 톱스타 무토 케이지, 초노 마사히로와 붙기도 했다. 하지만 공격 위주의 선수 무토 케이지와의 시합에서는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10분도 안 되어서 패배했고 상대방의 공격을 웬만해서는 다 받아주기로 유명한 초노와의 시합에서도 형편없이 당했다. 게다가 초노와의 시합에서는 파일 드라이버를 잘못 구사해 초노의 목을 부상 입히기도 했다.(문제는 상대가 부상인 상태에서 시합을 하는 데도 큰 공격 한번도 제대로 못하고 졌다.) 이 날, 오스틴은 라커룸에서 선배인 초노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오스틴은 골드버그와는 달리 일본에 배우려는 자세로 갔고 풀 참전이 아닌 스팟 참전이었지만 선수들과의 훈련에는 참가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풋내기 오스틴의 실력은 급상승 하게 된다. 이에 반해, 02년에 첫 일본 투어를 한 골드버그는 유명세를 이용, 돈을 엄청 많이 받았으면서도 단 4시합을 뛰었고 그 4시합 중에서도 무토 케이지와 태그를 맺은 시합을 제외하고는 채 10분을 넘긴 시합이 없었다. 골드버그가 일본에 왔을 때 팬들은 모두 “Mr.프로레슬링”이라고 불리는 텐류 겐이치로와의 시합을 원했지만 텐류는 “레슬링을 10분도 안 하려는 놈하고 무슨 놈의 시합이냐. 프로레슬러로써 수치다.” 라면서 거절했다. 그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그를 불렀던 무토 케이지조차 처음에는 골드버그를 옹호했지만 그와 태그 팀을 맺고 한 시합을 뛴 후 “골드버그와는 다시 태그팀을 하지 않겠다.”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또, 사실 골드버그는 전성기 때인 99년 일본에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정말 경미한 부상을 핑계로 오지 않았었다. 당시 그와 대전을 요청했던 초노나 무토는 그 소식을 듣고 실소하기도 했다. 그가 강한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따라야 할 프로적인 면이 뒤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빗나갔는데 일본 투어를 마친 오스틴은 곧 다시 미국으로 복귀한다. 그는 곧 실력파 단체 ECW로 가게 되었다. ECW는 초과격 하드코어 단체로 현재 WWE 스멕다운! 브랜드에서 활약 중인 폴 헤이먼이 사장으로 있었고 더들리 보이즈, 크리스 벤와, 크리스 제리코, 레이 미스터리오 주니어, 타지리, 라이노 등 엄청난 스타 배출을 자랑하는 단체이기도 했다. 또, 현재 WWE에서 쓰는 각본이나 경기 방식은 ECW에서 힌트를 얻은 바가 매우 크다. 오스틴은 여기서 과격한 레슬링을 배우게 되고 그것을 일본에서 배운 스트롱 스타일(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자랑하는 그들의 레슬링 스타일.)을 접목시켜 지금의 경기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맥주 마시기” 역시 ECW의 전설적 스타 샌드맨의 그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오스틴은 ECW에서 자신이 WCW에서 짤린 경력을 오히려 어필하며 WWF(현 WWE)로 이적하려는 선수에게 “너도 쇼하고 싶어서 WWF로 가는건가? 그렇게 제 2의 헐크호건이 되고 싶나? 헐크호건 처럼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건가? 하긴, 레슬링을 못하면 연기라도 잘 해야지…” 라면서 조롱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당시까지 단발 노랑머리였던 그는 헐크 호건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결국 WWF에 오게 된다. 역시 검은 팬티를 입은 채. 사람들은 역시 처음에 그가 왔을 때 대머리에 어느 정도 탄탄한 실력을 갖춘 선수라는 사실 이외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마이크를 잡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바로 겁도 없이 ‘성경말씀’을 패러디 한 “Austin 3:16”이 탄생한 것이다. 이 Austin 3:16에 힘입어 그는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뛰어난 경기력으로 당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브렛 하트와의 경기로 인해 WWF를 대표하는 선수로 거듭난다. 정말 눈물 겨운 인생 역정 끝에 거둔 성과였다. 신일본에서 그와 시합한 무토 케이지도 “오스틴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뒤늦게 극찬하기도 했다.
비록 중간에 WWE에서 나가게 되는 시련기가 있었지만 프로레슬링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수많은 실패가 지금의 오스틴을 만들었다. 그 긴 여정 속에서 얻은 목 부상이 그를 지금 선수로써 은퇴 시켰지만 우리는 스티브 오스틴을 90년대 최고의 스타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골드버그는 어떤가. 그는 팬들을 위해 과격한 경기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고 경기는 어지간해서는 10분 내외에 끝낸다. 일부 팬들은 그의 체력에 의문을 제시할 정도이다. 그가 몸담은 단체는 단 하나 WCW였고 현재 WWE에 데뷔한 상태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프로레슬링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얼간이 같다.”라는 말한 그의 프로레슬링 관은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팬 싸인회에서 그는 예약 시간이 2시간이든 3시간이든 30분 이상을 있지 않는다. 팔 부상을 당하고도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싸인을 해주는 것이 “보통” 프로레슬러로써의 개념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이런 기본적인 프로 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또한, WCW파산 이후 월급을 테드터너 소유의 CNN에서(WCW역시 테드터너 소유다.) 주게 되었는데 다른 WCW 선수들 중 열정적인 선수들은 프로레슬링을 하루라도 더 빨리 하고 싶어서 계약을 파기하고 각자 다른 단체로 흩어졌다. 하지만 골드버그 만이 홀로 남아서 지금에야 WWE에 데뷔를 했다. 돈 받을 것을 다 받고 난 후에야 나타난 것이다.
시합을 보더라도 골드버그의 시합은 “저 선수는 강하다!”라고 느낄 뿐, 어느 긴장감이나 변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골드버그는 누구와도 시합을 해도 비슷한 패턴에 비슷한 경기가 나온다. 프로레슬러로써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결정적으로 상대방의 기술을 받는 능력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일본에서 릭 스타이너라는 선수와 시합을 가졌는데 그 한심스러움에 까다로운 일본 팬들은 대스타 골드버그님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오스틴은 골드버그와 같이 단조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합에 유동성이 있다. 매 시합에 변화가 있고 흥미요소가 있다. 시합 운영도 매우 매끄러운 편이다. 오스틴은 현역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크리스 벤와와의 경기에서도 엄청난 경기력과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경험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오스틴은 WWE에 몸담으면서 자잘한 하우스 쇼까지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골드버그는 RAW에서 조차 시합을 하지 않는다. 그의 계약서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1년에 몇 번만 시합에 나온다라고 계약하는 것은 골드버그가 좋아하는 조건이다.
미국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우선시 하는 기믹의 문제도 그렇다. 골드버그의 이미지는 단순히 “괴물”의 이미지 일뿐 어떤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스틴 같은 경우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미지 메이킹을 기가 막히게 해서 성공을 한 케이스인데 그의 기믹적 성격은 매우 입체적이다. 때로는 거칠고, 싸가지 없고, 타협을 모르는 남자이지만 때로는 부드럽기도 하고, 유머러스하다. 이런 럭비공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을 만들었고 사람들을 TV 앞에 불러 모으게 된 것이다. 90년대 침체된 프로레슬링 계를 살린 것도 바로 영화나 드라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캐릭터였다. 강한 선수는 종합 격투기를 봐도 얼마든지 있다. 골드버그의 캐릭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 오스틴이나 골드버그 모두 악역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오스틴이 열성적으로 1년 동안 악역 활동을 훌륭히 마친 것에 반해 골드버그는 1달도 못 채우고 본인의 강력한 주장으로 다시 선역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프로의식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 드러나는 단적인 예이다.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은 부상으로 인해 시합에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골드버그는 이런 캐릭터와 안일한 경기 수준을 계속 보여준다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첫댓글 급하게 써서 좀 그렇지만 참조해서 보라고 써봤다. 이건 나의 주관적 의견이니 너무 유념치는 말고...
길게쓰면 안본댔잖아(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