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은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숨어다니면서 마치 없는 사람처럼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강남 도곡동 이모 댁에 머물면서 중학 3년을 마치자마자 두 번의 성형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는 마침내 새롭게 태어난다. 이름도 승미로 바꿨다. 완벽했다. 마치 신인류의 탄생과도 같이.
2
준서는 초등과 중등을 간신히 꾸역꾸역 마치고 헬스와 수영을 시작했다. 현재의 몸무게 100킬로를 70킬로로 만드는 데 인생 전부를 걸었다. 많은 시간이 그후로 흘렀고 어느날 아침 세안 후 거울을 들여다 보는 준서의 앞에 원빈의 얼굴과 현빈의 몸매를 한 자신을 새삼 발견한다. 이전에는 살에 파묻혀 있어 얼굴이 아예 없는 지경이었는데, 마침내 21세기 최신형 페르소나를 장착하게 됐다. 위대한 변신에 기어이 성공한 것이다.
3
승미는 강남의 거리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성형미인들 가운데서도 흔치 않은 빛나는 존재가 되었고 신촌과 압구정을 넘나들며 자신의 자신감을 마음껏 뿌려댔다. 그넣게 시간이 또 흘렀다.
4
준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장학금 수혜를 받게 되어 시골 촌구석을 떠나 낙성대 근처로 서울 입성을 한다. 수많은 난관들을 뚫고 여의도 에이스 증권맨으로 쑥쑥 커갔다. 그리고 마침내 염원하던 페라리를 구입한다. 처음 거울을 보며 놀라워하던 그 때 만큼이나 63빌딩 꼭대기 레스토랑 창가에서 창문에 비쳐지는 우뚝선 모습의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놀란다.
5
승미가 신상 구두를 사기 위해 명동으로 향하던 어느날 준서는 명동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명동 큰손 사채업자와 만나고 있었다. 한시간쯤 후 준서는 자신의 볼 일을 다 마치고 퇴계로 길을 따라 걸으며 소공동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승미를 발견한다.
6
갑자기 머릿속에 지진이 날 만큼 준서는 승미를 보고 놀랐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니가 거기서 왜 나와?"라고 소리칠 뻔할 만큼 승미는 21세기에 존재해선 안 되는 선녀같았기 때문이다.
7
승미도 준서를 보자마자 커진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무심코 "어맛!"하는 신음같은 외마디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남자! 그의 뒤로 커다란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난생 처음 느끼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8
멀어져가는 서로를 향해 여러번 뒤돌아서고 싶었지만 상기된 얼굴인 채의 준서도 장미꽃처럼 붉어진 얼굴의 승미도 왠지 겁이 나고 두려워 감히 뒤돌아보지 못 했다.
9
두 낯선 인연들이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두 사람 각자는 자신들의 가슴속에서 무언지 모를 감정이 커가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그날의 설레임 역시도 오래토록 사라질 줄을 몰랐다.
10
그런데 운명이었나보다! 어느날 승미는 준서를 영등포 반디앤루이스에서 다시 보게 된다. 승미는 자신이 왜 거기에 갔는지 하얗게 까먹었으며 오로지 준서의 눈부신 자태만 넋 놓은 채 자기도 모르게 뚫어져라 바라본다.
11
텔레파시가 통했을까? 책을 뒤적이며 고르던 준서가 마침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내 준서의 몸이 갑자기 움찔하더니 동작을 멈췄다. 정지된 상태로, 무섭게 반짝이는 두 눈이 곧바로 승미에게 꽂혀갔다.
12
찰나와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마치 서로에게 홀린듯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서로가 아주 잘 알았던 사람처럼.
13
중간에 드라마가 마치 잘려진 것처럼 둘은 지금 커피숍에 마주앉아 있다.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쌍의 눈동자가 너무 강렬하다 못해 끈적거릴 정도가 되었다. 말 없이 눈으로만 하는 대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14
뜨거운 커피로 입술을 적시며 승미는 속삭이듯 말한다.
"나 당신 알아요." "그날 거기서 내 눈이 당신을 담았었거든요." "당신은 날 알아보겠어요?" 독백을 하듯 승미는 열심히 입술을 놀린다.
15
준서는 자신의 귀를 닫고도 승미의 움직이는 입술의 모습만으로도 승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를 전했다.
왠지 당신을 또 보리라 믿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여기에 있네요.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참 신기하네요.
준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의 소리를 눈으로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소리를 들은 것 같다. 확실히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6
같이 라면과 김밥을 먹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준서는 오늘밤의 꿈을 예약해뒀다. 그녀와 함께 손잡는 꿈을. 내친김에 내일밤 꿈도 예약했다. 승미 입술을 훔치는 꿈을.
17
승미는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낸다. 흥얼대기가 멈춰지지 않는다. 오늘밤 잠들기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밤새도록 준서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리라. 준서의 라면 먹는 모습도 반복해서 계속 떠오를 것이다.
18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은 두달여 지난 어느날 마침표를 찍게 된다. 준서는 승미의 아파트에서 우연히 승미의 어릴 때 사진을 보게 되고 초등학교 졸업앨범까지 보게 된다. 철저하게 숨겨왔지만 승미는 천려일실일까 그 사진 한 장과 앨범을 없애지 못했던 것이다.
19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날 둘이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승미가 아니라 혜경이란 것도 알았다. 승미 역시 어린 준서를 기억해냈다. 둘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고 만다.
20
승미는 환하게 웃으며 준서에게 말한다.
"우리 이제 더는 안 되겠지?" "결혼 역시 아닌거지?"
준서가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너, 다시 봐도 참 이뻐." "내 기억이 너무 원망스러워. 넌 어때?"
승미가 돌연 슬픈 눈빛을 하며 말한다.
"짧았지만 참 행복한 시간이었어." "나도 내 기억을 지우진 못할거야."
준서와 승미는 서로에게 따스한 눈빛을 건넨다. 그리고 둘은 이 웃픈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산문도 잘 쓰시고 내공이 있으신 분인데요 좋은 작품기대합니다.
순 아마추어입니다. 과한 칭찬에 춤을 출 뻔 했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