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화를 끼친 전란을 들자면 단연 고려시대의 몽고의 침략과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은 발발한지 400년이 지났지만 당시에 활약했던 많은 우국지사의 이름이 잘 남아 있고, 당시의 전황에 입각한 논공도 비교적 철저히 이루어져 이를 기념하는 많은 기념물들이 남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몽고침략과 관계된 자료는 너무도 빈약하다. 남아 있는 문헌도《고려사高麗史》나《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 극히 일부자료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며, 이에 대한 연구 또한 지극히 부진한 형편이다. 이는 몽고의 침략이 끝난 후 1세기 가까운 원나라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기에 많은 사실들이 왜곡되고 사장되었을 가능성에 기인하기도 하였고, 조상의 얼을 되살리려는 우리의 노력 부족 또한 하나의 원인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마땅히 올바르게 평가되었다면 크게 강조되어 있어야 할 많은 사실들이 오히려 축소되고 잊혀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중 특히 우리고장 충주에 있어서의 대몽항쟁 관계 사실들은 그 도가 심해 그 역사적 의의 등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충주 시민의 일각에서 충주에서의 대몽항쟁을 재평가하여 이를 기념할 만한 대몽항쟁승전비를 세워 보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매우 바람직한 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일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시도되는가 하는 것을 충주와 중원에서 일어난 대몽항쟁에 대한 자료를 엮어 그 의의를 조명하여 보고자 한다.
고려가 몽고와 최초로 접촉하게 된 것은 몽고에게 쫒겨오는 거란인(契丹人)을 강동성에서 협공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3세기초 대륙에서 몽고족이 지금의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일어나 단시일에 서쪽으로는 서하를 쳐서 복속시키고 동남쪽으로 나아가 금을 복속시키면서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동으로는 만주방면, 서로는 동유렵을 정복하여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후 동남으로 진출하여 고려와 접촉하게 된 것이다.
몽고에 쫒긴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게 되고, 영토 깊숙히 들어왔다가 제천의 박달재에서 김취려장군을 중심으로한 고려군에 크게 패하여 패주하던 중 강동성에 은거한다. 이에 고려는 고종 5년(1218) 몽고 및 동진국과의 연합으로 이들을 완전 소탕하는데, 이후 몽고는 고려의 은인국으로 자처하며 매년 고려로부터 공물을 취하여 갔다.
그런데, 그 요구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기에 고려는 이에 불응하는 일이 잦았으며 이에 고려와 몽고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로부터 귀국하던 도중 살해된 것(1225, 고종 12)을 구실로 몽고는 고종 18년(1231)에 1차로 고려에 침입하여 오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전후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고려는 서울을 강화로 옮기고(고종 19), 백성들에게는 적이 침입해오면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라고 지시하고 장기적인 항전을 계획하였으니 몽고군은 아무런 장애도 받지않고 전국을 여러 차례에 멋대로 침입하여 유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맞서 싸운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농민, 천민, 혹은 향리 등에 걸치는 각 지방민들이었다.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전은 초기에는 주로 국경지방이 중심이 되었지만 전투가 전체적으로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항쟁도 전국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많은 항쟁지역중에서도 충주민의 대몽항쟁은 가장 주목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충주에서의 몽고군과의 항전은 모두 9번에 걸쳐 일어나는데 이를 시대순으로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1) 1차 침입과 충주노군의 항전
몽고의 제1차 침입은 고종 18년(1231) 8월의 일로 살례탑이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지금 의주)을 공격함으로 시작되었다. 적은 평안도, 황해도의 요지를 대부분 장악하고 12월 초에는 개경을 포위하게 되었다. 적의 일부 별동부대는 광주, 충주, 청주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이 지나간 곳은 점령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갑작스런 몽고군의 침입을 맞아 충주성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별초군이 조직되었다. 고종 18년 12월에 있었던 충주에서의 별초 방어군의 조직과 항전의 경과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보다 앞서 충주부사 우종주가 매양 문서처리에 있어 (판관) 유홍익과의 틈이 있더니 몽고군이 곧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하는데 의견이 같지 않았다. 종주는 양반별초를 거느리고, 홍익은 노군 잡류별초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더니 몽고군이 들이닥치자 종주, 홍익과 양반들은 다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합력하여 쳐서 물리쳤다."
이 충주성 싸움은 성의 방어를 위하여 주의 관리가 중심이 되어 별초군이란 방어군을 편성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별초군은 양반별초, 노군잡류별초라는 신분별 편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노군은 관청에서 사역하는 공노비를 주축으로한 일종의 잡역인들이다. 흥미있는 것은 막상 몽고군이 박두해 왔을 때 이들의 지휘관인 관리들과 양반별초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해 버렸고, 실제 전투에 참여, 성을 방어한 것은 노군잡류별초였다는 사실이다. 도망했던 지휘관과 양반들은 몽고군이 물러간 후 돌아와 적이 약탈해 간 물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군을 죽이려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몽고군의 침입 이전부터 있었던 충주부사 우종주와 판관 유홍익의 반목은 자칫 충주 실함이 위기로 연결될 뻔 하였다. 이같은 위기를 모면케 한 것은 그들의 봉건적 지배하에 있던 노비와 잡류들의 전적인 공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몽고의 1차 침략으로 야기된 충주성전투는 아마도 충주의 주성이 전투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몽고병의 퇴각후 부사 우종주 등이 다시 성에 돌아와 관사의 은기 등 물품을 점검한 것이나 이후 노비들의 봉기과정 등으로 볼 때 거의 분명하다고 하겠다.
2) 금당협전투
고종 40년(1253) 몽고의 5차침략 중에 있었던 충주산성 공방전은 대몽항전사상 가장 인상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몽고 5차 침입군은 1253년 7월, 야굴의 지휘하에 내침하여 9월에는 이미 몽고군이 충주지역에 출몰하고 있다.
10월부터 시작되는 충주성 공방전에 앞서 충주 인근에서는 피아간에 산발적인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종 40년 9월 9일)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금당협(金堂峽)에 복병을 두어 몽병이 오는 것을 기다려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그 병장과 포로된 남녀 200여인을 빼앗았다. 이 공으로 대정(隊正)에 제수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창정이란 고려의 향리직이다. 이로써 생각하면 최수는 충주지방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움직여 임시적으로 부대를 편성, 대몽전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충주민이 몽군으로부터 2백여의 포로를 탈취한 사실은 이들이 몽고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충주 금당협에서의 전투는 충주 지방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차원의 항전이었던 것이다.
3) 김윤후의 충주성 방어전
충주민들의 이같은 자발적인 항전에 직면한 몽고는 마침내 침략군의 사령관 야굴(也窟)이 직접 주력을 이끌고 내려와 충주성을 공략하는 작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10월의 기록에 "야굴(也窟)등이 충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고 하고 이어 "전소경 정수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경산부(星州)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고하여 이들의 남진으로 인해 바야흐로 충주 인근의 지역이 적의 세력권으로 흡수되고 있는 상황을 전해준다.
당시 충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인물은 1232년(고종 19)의 처인성 승첩으로 널리 알려진 김윤후였다. 그는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승첩이후 산사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정부로부터 섭랑장(攝郞將)을 제수받아 무반으로서 관도에 올랐는데, 이 무렵 그는 랑장(郞將)으로서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에 임명되어 있었다.
고종 40년(1253) 10월 충주성을 둘러싼 공방전은 무려 70여일간 계속 되었다. 당시 몽고는 주장 야굴(主將 也窟)의 지휘하에 부장 아모간(副將 阿母侃), 그리고 반역자 홍부원(洪副源)과 이현(李峴) 등의 인도를 받은 주력군이였으며 게다가 인근 지역에서 항복한 고려인들을 공격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다음의 기록이 그러한 당시의 사정을 잘 전한다.
이현(李峴)이 벼슬을 옮겨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는데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2년이나 머무르게 되매 야굴(也窟)을 설유하기를 "우리 국도(國都)는 해도(海島)에 개재(介在)하여 공부(貢賦)가 모두 주군(主郡)에서 나오니 만약 가을 전에 주군(主郡)을 엄습하면 군인(郡人)이 반드시 궁색할 것이다." 마침내 금패(金牌)를 받고 야굴을 인도하여 왔다. 그리하여 몽고병을 따라 제성(諸城)을 설유하여 항복케 하는데 양근(楊根), 천룡(天龍) 두 성에 이르러 위협하기를 "경산(京山), 동주(東州), 춘성(春城) 등의 성이 모두 항복치 않으므로 도륙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속히 나와 항복하라. 만약 수장(守將)이 허락치 않거든 곧 베어 오라."고 하여 2성이 항복하는지라 스스로 달로화적(達魯火赤)이 되어 2성의 항복한 백성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쳤다.
그러나, 충주관민들의 항전은 강력하였다. 당시 충주민들의 치열한 항전상은 이듬해 고려정부가 산천신기(山天神祇)에 제사하는 기고문(祈告文)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또, 전년(고종 40년)에 적이 대거 침입하여 동족 번병(藩屛)의 수성(數城)이 며칠사이 모두 도단되매 적은 승승장구 예봉을 풀어 곧 군사를 거느리고 중원(충주:忠州)으로 옮겨 빗발같은 시석(矢石)과 우뢰(雨雷)같은 전고(戰鼓)로 여러달 공격하니 남은 외로운 성이 거의 위태하였나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성이 함락되었던들 그 밖의 여러 성보(城堡)는 가볍게 석권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이도 월악대왕(月岳大王)께서 큰 위력을 나타내어 가만히 도와주시므로 이에 능히 수어(守御)하여 만세의 공을 이루었나이다.
충주성 포위 다음달인 11월 달이 되자 약간의 사태 변화가 발생한다. 즉 적장 야굴이 병들어 전선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야굴이 충주에 있는데 병이 들었다. 점치는 자가 이르기를 "오래 머물면 돌아가기 어렵다." 하므로, 야굴이 아모간과 홍복원으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고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북으로 돌아갔다.
위의 기록에서는 당시 야굴이 충주 포위군을 두고 먼저 돌아간 것은 그의 신병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함께 출정한 황족 탑자아(塔刺兒)와의 갈등으로 소환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황족 탑자아와의 갈등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충주산성에 대한 작전이 지지부진 하였던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야굴의 소환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은 부장 아모간, 그리고 홍복원 등의 지휘로 충주성 공격을 계속하게 되지만 지속적이면서도 강력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충주성은 끝까지 사수되고 있다. 그리하여 12월 18일자 《고려사》의 기록에는 충주에서 몽고군이 포위를 풀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적고 있다. 10월부터 12월중순까지 무려 70여일에 걸친 끈질긴 공격을 방어해 냄으로서 충주민은 5차 침략의 몽고군을 크게 좌절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충주산성의 방호별감 김윤후는 어떻게 몽고군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가.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김윤후전의 다음 기록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몽고병이 주성을 포위하기를 무릇 70여일 성내의 식량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김윤후는 사졸들을 독려하여 이르기를 " 만일 능히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내리겠으니 그대들은 이를 믿으라." 하고 드디어 관노의 부적을 가져다가 불태워버리고 또 노획한 우마를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대적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충주성의 승전은 김윤후의 뛰어난 지휘력과 충주민들의 강인한 항전의지의 결합으로 이룩된 것이었으며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된다. 처인부곡의 경우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김윤후의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피지배 민중들에게 잠재한 항전력을 불러일으켜 이를 실질적인 에너지로 점화, 분출시킨다는 점에 있다. 충주의 경우 이미 1231년 몽고의 1차 침입시 노비잡류별초의 항전으로 이들의 잠재력이 실증된 바 있거니와 고종 40년 충주성 방어전은 이러한 민중의 항전력과 훌륭한 지도력이 잘 결합된 결과였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충주민의 승전은 몽고군의 남진을 좌절시킴으로써 경상도 지역에 대한 전장의확대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몽고로 하여금 미구에 화의를 명분삼아 서둘러 출군케 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적군이 철수한 뒤인 이듬해 고종 41년 2월 충주민들은 몽고군 격퇴의 전공으로 사졸로부터 관노, 백정에 이르기까지 군공에 따라 관작이 제수되었다. 지휘관 김윤후는 랑장(郞將)으로부터 일약 감문위 상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원래 처인성 승첩 당시 상장군을 제수하였는데 자신이 고사하는 바람에 섭장군에 임용되는 선에서 그쳤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섭상장군이 된 것이다. 한편 정부는 동년 4월, 상기한 포상에 대한 후속조치로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충주민들의 항몽운동에 합당한 보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종 40년(1253) 몽고의 5차침략 중에 있었던 충주산성 공방전은 대몽항전사상 가장 인상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몽고 5차 침입군은 1253년 7월, 야굴의 지휘하에 내침하여 9월에는 이미 몽고군이 충주지역에 출몰하고 있다.
10월부터 시작되는 충주성 공방전에 앞서 충주 인근에서는 피아간에 산발적인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종 40년 9월 9일)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금당협(金堂峽)에 복병을 두어 몽병이 오는 것을 기다려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그 병장과 포로된 남녀 200여인을 빼앗았다. 이 공으로 대정(隊正)에 제수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창정이란 고려의 향리직이다. 이로써 생각하면 최수는 충주지방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움직여 임시적으로 부대를 편성, 대몽전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충주민이 몽군으로부터 2백여의 포로를 탈취한 사실은 이들이 몽고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충주 금당협에서의 전투는 충주 지방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차원의 항전이었던 것이다.
4) 다인철소인의 항전
충주민의 항몽전투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전투의 현장으로 다인철소(多仁鐵所)가 있다. 이 다인철소는 생활도구 혹은 무기류의 제작에 필수적인 철을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으로 충주의 서쪽 근교에 해당하는 현재의 충주시 이류면 일대이다. 이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주서쪽 30리' 지점이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에서는 18세기 당시 이 지역이 충주목의 '이안면'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사실을 전한다.
다인철소민의 항전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도 그 기록이 극히 단편적이다. 《고려사》의 세가에서조차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같은 책의 지리지에서 행정구획의 연혁과 관련한 간략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종 42년, 다인철소의 사람들이 몽고군을 막는 공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으로 승격시겼다. (고려사 권56, 지리지 충주목)
다인철소민의 항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 내용에 대하여는 이 기록만으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전투의 주체가 철소민이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이들의 전공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강화정부가 소를 익안현으로 승격시킨 사실에서 확실해 진다.
항몽전쟁의 과정에서 지방민들의 집단적 공적을 포상하는 한 방법으로 해당지역의 행정구획을 승격시키는 사례는 정부에 의해 간혹 시행된 사실이 있다. 가령 고종 18년(1231) 3개월에 걸친 몽고군의 파상적인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었던 여몽 1차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귀주를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 고종 40년(1253) 70여일의 사력을 다한 항전으로 몽고의 5차 침략군을 저지, 철퇴케 하였던 충주를 국원경으로 승격시킨 것이 그 예이다. 여기에 특수행정구역인 부곡이 현으로 승격된 사례로서 고종 19년(1232) 적장 살례탑을 사살, 2차 침략군을 철퇴케 하였던 처인부곡을 들 수 있다.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서 해당지역의 행정구획을 승격시킨 사례는 다인철소를 포함하여 확인 가능한 것은 모두 4건에 불과하다. 그리고 앞의 모든 경우가 한결같이 1, 2, 5차의 각 전투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려의 승전사례, 혹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전승과 관련된 것들이다. 다인철소민의 항전내용에 관하여는 기록상 알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다인철소의 현 승격 사실만으로도 이 전투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곳의 승전은 전투자체가 갖는 전략적인 중요성 이외에도, 이것이 지방민들에 의한 순수한 자체방어 노력에 입각한 일종의 민중항전의 대표적 사례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이 다인철소의 전투는 1253년의 충주성의 싸움에 대한 포상으로 국원경으로의 승격이 다음해인 1254년 4월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포상기록이 있은 1255년이라기 보다는 그 전해인 1254년 9월 초순쯤의 일이라 짐작된다.
5) 그밖의 대몽항전 사례
충주에서의 대몽항쟁은 1차침입때 충주성에서의 노비, 잡류별초군의 승리에서부터 5차침입시인 고종 40년의 충주산성의 방어전, 이듬해인 다인철소민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뜻깊은 항전의 연속이었다. 전쟁의 말기에도 이러한 항전사례는 꾸준히 등장한다.
다섯번째의 전투로 1254년 9월 14일자 기록에 '차라대군이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휘몰아쳤다. 성안사람들이 정예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하여 차라대 군이 직접 충주를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때의 전투는 현재의 월악산성이 주무대 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섯번째의 전투는 그 이듬해 전개되는데 고종 42년(1255) 10월 2일조에는 '몽고병이 대원령을 넘으므로 충주에서 정예병을 파견, 기습공격하여 몽군 1천여명을 사살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대원령은 지금의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문경군 관음리를 연결하는 하늘재로 추정되는데, 당시 충주민들이 지리적인 여건을 이용하여 큰 전과를 얻은 것이다.
일곱번째의 전투는 고종 43년(1256) 4월에 몽고군은 또 다시 충주에 들어와 주성(州城)을 도륙하는 사실이다. 이때 충주의 관민들은 대부분 산성으로 피난하여 있었기에 쉽게 주성을 도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대몽 항쟁사에 있어 충주민이 몽고에게 당한 유일한 기록이다.
여덟번째의 전투는 주성을 도륙한 몽고병은 바로 충주관민이 입보하고 있는 충주산성을 공격한 사실이다. 충주 등에서 피난온 관리와 노약자가 두려워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산사로 올라갔는데 홀연 운무가 끼고 비바람과 우뢰가 몰아치자 몽고병이 신이 돕고 있음이라 여겨 두려워 공격을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록 또한 남아 있다. 이때의 산성은 월악산에 있는 현재의 덕주산성임이 분명하다.
몽고군은 이후에도 철수와 출병을 계속하며 고려민을 괴롭히는데 아홉번째의 전투는 고종 45년(1258) 충주의 별초가 박달현에 숨어 있다가 몽병을 저격, 포로된 사람들과 우마 및 무기를 빼앗았다는 박달재싸움이다. 이는 일종의 유격전 형태로 앞서 금당협에서 창정 최수가 벌렸던 전투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30년간을 지속한 몽고의 침략은 고종 46년(1259) 최종 철수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
이상에서 몽고의 침입과 충주민의 항전기록을 살펴보았다. 번번이 충주성만이 유일하게 엄청난 몽고의 침략을 능히 막아내어 극복하였다는 사실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중원지방 사람들의 강인한 투지와 향토애호의 의지 즉, 중원인의 의식이 뚜렷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9번의 항전사례에서 거의 모두가 충주민이 전투의 주력이 되어 몽고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은 1253년 방호별감 김윤후를 제외하면 실제 전투의 지도능력을 거의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충주민의 항전은 관노, 소민 등 당시 신분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던 천민들의 적극적인 공헌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최근 충주에서 일고 있는 대몽항쟁의 승전지지에 승전비를 세워보자는 논의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아직 대몽항쟁의 주무대가 되었던 충주산성의 위치비정의 문제가 학계에서 통일되지 않은 실정이다. 즉, 제5차 몽고침략시에 항전하였던 충주성의 위치가 현 충주시 남산에 있는 남산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충주 대림산에 위치한 대림산성, 월악산에 있는 덕주산성을 지칭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김윤후가 처인부곡에서 평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현재의 충주읍성보다 더 큰 규모의 충주읍성이 있었는지 등의 문제가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대한 규명은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어 확연이 풀리기 전까지는 누구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 생각되나, 현재의 자료로는 충주 대림산성이 가장 타당한 장소로 여겨진다. 어쨌든 현재까지의 대몽항쟁사에 있어 충주민들의 활약상을 볼 때 충주의 거의 전부가 전장이었다고 하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워진 역사를 복원하고, 또 이를 오늘의 정신적 활력의 자산으로 삼는 것이야 말로 700년 전 조상의 위대한 항쟁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될 것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떳떳한 삶의 자세가 될것이라 생각한다.
이 다인철소의 전투는 1253년의 충주성의 싸움에 대한 포상으로 국원경으로의 승격이 다음해인 1254년 4월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포상기록이 있은 1255년이라기 보다는 그 전해인 1254년 9월 초순쯤의 일이라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