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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부활주일을 지키고 오늘은 부활 후 첫 주일예배입니다. 주일예배에 대한 믿음의 자세는 예수님 부활신앙이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주일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같이 매주일예배가 내 영혼이 항상 새롭게 부활의 감격으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안식 후 첫날 저녁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예수님 부활하심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무덤에 왔던 여인들(마28:1)엠마오로 맥없이 고개를 떨구며 걸어갔던 두 제자(눅24:13-35).....빈무덤을 보기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경주하듯이 뛰어갔던 장면도 있었습니다.(요20:4)..심지어는 바울은 고백하기를 5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시에 보았다고도 했습니다.(고전15:6)
오늘 함께 말씀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생전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시면서 말씀 첫 마디에 귀를 기우리게 합니다.
19절 하반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είρήνη’) 아무 걱정 없는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한 살롬도 평화인데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안심시키시고 걱정할 것 없다는 사인으로 평안을 반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부활하신 우리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 강조한 첫 마디 평강 다시 말하면 “평안”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평강(평안)을 제자들에게 선포한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평강을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은 곧 불어 닥칠 환난에 대한 두려움이 저들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는 환난을 극복 할 수 있는 것은 평강(평안)뿐임을 아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요20:19b,21,26)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두 작품이 우수한 작품으로 뽑혔습니다. 한 학생이 그린 그림은 쳐다보기만 해도 평안을 느끼게 하는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풍경이었고 마을 앞에는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삽살개 한 마리가 초가집 마당에서 한가로이 졸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그림은 폭풍우가 무섭게 몰아치고 깎아지는 벼랑의 틈바구니 속에 어미 새 품안에서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아기 참새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누구든 평안을 소유 할 수 있지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누리고자 사모하는 자에게만이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가 지고 가신 후에 제자들이 하나같이 두려워 다 뿔뿔이 흩여질 것을 미리 아시고 평안을 강조 한 적이 있었습니다.
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잊어 버렸을까요? 19절 말씀을 보세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 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예수님 부활하신 빈 무덤을 보았던 여인들이 황급히 제자들에게 전달되고 그래서 너도 나도 은밀하게 전달되어 하나씩 둘씩 마가요한의 집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모인 제자들이 하나같이 표정은 두려워했습니다........ 혹시나 예수님계시지 않기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지요 모인 자리에 가롯유다는 이미 자살했고 도마는 어디 숨었는지 연락이 되지않아요 지금 같으면 폰으로 연락이라도 할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인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문을 걸어 잠근 거예요
우리가 집 문을 잠그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택 문이 자동문이지만 잠겼나 안 잠겼나 확인 하는 버릇이 있어서 재차 확인하고자 문고리를 만집니다. 누가 들어가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러는 겁니다.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스승이 죽었으니 이젠 화가 자신들에게 미친다는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문을 꼭꼭 잠가 둔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훈련받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사명감은 온데 간데 없고 오직 숨어서 살아가야 할 궁리만 하는 겁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이 고기잡으려 갔으니 그렇게 추측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현실 앞에 두려움만 존재하고 있는겁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저와 여러분이나 가슴이 아픔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꼭 나의 모습이요, 한국 교회의 모습인 듯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 건물 안으로 예배드리고 모이기는 하지만 사명을 잃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아무 것도 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쉽습니다.......... 교회에서는 큰 소리를 치고, 성도들 앞에서 큰 소리 치고, 믿는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지만 세상을 향해서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당당한 모습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스스로 제자들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예수님 이런 제자들 앞에 노크도 없이 홀연히 나타나신 겁니다.
우리가 가끔 영화를 보면 사람이 환생하여 공간을 무시하고 닫혀 있는 문안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우리예수님 영화의 한 정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가능한 부활체의 모습입니다....... 지금 주님은 공간을 초월하시고 그냥 문을 통과 하는 거예요..... 영적 신비입니다.
완전한 부활 전 모습그대로 우리 예수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두려움으로 가득찬 저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위트홈 같은 세상에서 누리는 안식처이겠습니까?....... 피 할 수 있는 도피처를 가르쳐 주어야 하겠습니까?
초초하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경직된 저들에게 오직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은 “평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확실하게 확인시켜 준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냥 손과 옆구리가 아닙니다. 저들이 보는 순간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에서 못 박하신 상처의 흔적 손의 못 자국 그리고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 상처 입은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것은....... “ 내가 너희의 상처를 안다 내가 너희의 허물을 안다...... 두려움을 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너희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이젠 평안하라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21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니까 제자들 보세요 " 비로소 " 예수님의 부활체 모습을 보고 20절 하반절에.......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두려움에서 이제 기쁨으로 반전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쁨이란 어떤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마음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 할 때가 많습니다......며칠후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당선된 분은 두손 들고 기뻐 할거예요....공부에 몰입하여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면 그 기뻐 최고입니다. 우연히 사위 폰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임용합격 했을 때 친척 한 분이 너무 좋아 개업할 때 세워 놓은 스텐드형 꽃다발에 임용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위에게 보내온 사진을 봤어요 너무 기뻐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상처 입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느낀 기쁨이 어느 정도 될까요?......이 기쁨은 감히 형용 할 수 없는 황홀한 순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제자들 앞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그냥 놀래 어리중절 하다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반전된 것은 집문 밖의 상황이 바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을 집안에서 만났으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실체를 보여주신 예수님 주저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곧 바로 감당해야 할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 오직 사명입니다.
21절 보세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고 십자가 지시고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사명을 감당하셨듯이 이제 제자들에게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로써 사명을 감당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기쁨 없이 감당 할 수 없습니다.......부활의 확신가지고 주님이 부르신 곳이라면 아골 골짜기라고 가겠습니다. 십자가만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1893년, 32살 젊은 윌리엄 존 맥켄지선교사가 계셨습니다. 복음의 황무지 조선에 와서 선교를 하는데 한복을 입고 된장고추장을 먹으면서 전도했답니다. 얼마지 않아 위장병이 생기고 고통스런 날들도 있었지만 조선사람을 구원하고자하는 열정으로 자기의 좋은 것을 다 내려 놨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사명으로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들과 살다가 마지막 나팔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같이 일하리라”이렇게 일기까지 쓰면서 헌신을 했지만 맞지 않는 음식과 환경의 어려움으로 일사병을 이기지 못하시고 딱 2년 사명자로 사시다가 황해도 소래에서 천국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놀란 것은 당시 복음을 받은 소래주민들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맥킨지 선교사를 생각하며 외국의 원조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소래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는 소래교회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로 복음의 빚을 갚으면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마지막 명령대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사명자로 살아야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계속해서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우리예수님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이젠 사명감당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2-23절.....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을 받아야 사건이 되고 효력이 발생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두려워 집안에 있지만 두려움을 초월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 예수님 제자들을 향하여 친히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주셨는데 성서학자들은 이것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주신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제자들을 새롭게 다시 창조하신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 새 생명을 부어주신 겁니다......... 절망에 차있는 저들에게 에스겔의 환상처럼 마른 뼈다귀만 남아있는 그들에게, 주님의 거룩한 숨결로 새 희망과 새 능력을 새 생명을 새 인생을 불어넣어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숨결과 함께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죄악에 매여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23절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사제권의 능력을 제자에게 부여해주셨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 중에 베드로가 제일 먼저 선봉에 서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친 말씀이 있습니다.
행2: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받았던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임한 성령의 능력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의 죄를 사해줄 수도 있고 그냥 둘 수도 있는 사제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이름으로 사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이 죄사함의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말조심 해야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 복을 빌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부활주일 후 한 주간이 지난 성도여러분!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주님 분부한 사명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어디로 보내든 사명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