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거니!”하며 놀려대는 자들은
부끄러워 되돌아가게 하소서
(시편70,4).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려고 할 뿐 아니라“옳거니!”하면서 공적인 수치를 당하게 하려고 하고 있음을 느낀다.큰 승리를 축하하던 사람들은 불명예스럽게 되고 부끄러워하며 전쟁터를 떠날 것이다.시인은 이런 잔인한 공격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쫓아버릴분은 주님이심을 믿는다.주님은 심각한 고통을 당하는 이들 편에 서 계시고,그분께 자신들의 삶을 적응시키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다.
시편 70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70편의 주제는 시인의 목숨을 노리며 그가 불행하게 되기를 바라는 원수들로부터의 간절한 구원이다(3절).이 시인이 기도하는 목적은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개입으로 원수들의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이 시편에서는‘시인의 목숨을 찾는 이들’과‘하느님을 노리는 이들’의 운명이 대조를 이루도록 기도한다.원수들은 시인의 불행을 고소해하며“옳거니!”하며 놀려댄다(3-4절).시인은 이런 상황에서 위협을 느낀다.시편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어서”(2,6절)와“지체하지 마소서”(6절)는 신속한 구조를 바라는 갈망을 표현한다.시인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구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해달라고 한다(5절).그는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라 힘이 없으므로 하느님이 어서 오셔서 악한 사람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6절).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한 시인의 구원은 원수들이 부끄러움과 수치와 치욕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슬프지만 세상에는 내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 위로하기보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려움이 닥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왜냐하면 고통과 오해의 시간은 오직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도해야 함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이럴 때를 위해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23-2 시편42-89편/바오로딸)
Ⅱ.기술 지배 패러다임의 세계화
106. 근본적인 문제는 좀 더 심각한 다른 것,곧 인류가 기술과 그 발전을 획일적이고 일차적인 패러다임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습니다.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외부 대상을 논리적 이성적 과정 안에서 점진적으로 인식하여 지배하는 주체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그 자체가 이미 소유와 지배와 변형의 기술인 과학적 실험적 방법을 정립하려고 이 주체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이는 마치 이 주체가 완전히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실재 앞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인간은 언제나 자연에 개입해 왔습니다.그러나 오랫동안 이는 사물 자체의 가능성을 존중하며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이는 자연이 직접 손을 내밀어 주듯 스스로 허락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반대로 이제는 만물에 손을 대는 것은 인간입니다.그러면서 인간은 종종 우리 앞에 있는 실재를 무시하거나 망각하면서 만물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려고 시도합니다.그래서 인간과 사물들은 더 이상 서로 다정한 손길을 건네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여기에서 인간은 무한 성장 또는 제약 없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쉽사리 받아들이게 되었으며,경제학자,금융 전문가,기술자들은 이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이는 지구 자원을 무한히 활용할 수 있다는 거짓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지구를 그 한계를 넘어서 최대한‘쥐어짜는’데에 이르게 됩니다.이는“무한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그것들을 신속히 재생할 수 있으며,자연 질서의 착취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쉽게 완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개념입니다.
107. 그러므로 현대 세계의 많은 어려움은,사람들이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무엇보다도 개인의 삶과 사회의 기능을 좌우하는 인식의 패러다임에 따라 과학과 기술의 방법론과 목적을 설정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방식을 인간과 사회의 모든 실재에 적용한 결과는 환경 악화로 드러났습니다.그러나 이는 인간 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환원주의의 한 지표에 불과합니다.우리는 기술의 산물이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기술의 산물은 결국 특정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활 양식을 좌우하고 사회적 기회들을 조성하는 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순전히 도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결정도 실제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지와 관련된 결정입니다.
108. 또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을 장려하고 기술을 단지 도구로만 이용한다는 개념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오늘날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매우 강력해져서 이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려워졌고,그 논리에 지배되지 않으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기술과 그에 드는 비용,세계화하고 획일화하는 그힘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생활 양식의 선택은 반문화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사실 기술은 모든 것을 그 엄격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기술을 지닌 이들은“기술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의 동기인 권력이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 결과“인간은 자연과 인간 본성의 본래 요소들을 모두 움켜쥡니다.”그래서 개인의 결단적,온전한 자유,고유한 창조성을 위한 자리가 줄어들게 됩니다.
109. 기술 지배 패러다임은 또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을 받아들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금융은 실물 경제를 질식시켜 버립니다.우리는 세계 금융 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고,환경 훼손에서는 너무 더디게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일부 집단은 현대 경제와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또한 비전문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전 세계 기아와 빈곤이 단순히 시장의 성장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들은 오늘날 그 누구도 감히 옹호하지 않는 특정 경제 이론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들은 경제를 기능하게 하는 실제적 운용만을 중시합니다.그 이론들을 그들이 말로는 짖지하지 않을지 몰라도, 더 균형 잡힌 수준의 생산, 더 나은 부의 분배,환경과 미래 세대의 권리에 대한 배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그 이론들을 지지합니다.그러한 행동은 그들에게는 이윤 극대화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지속되고 있는 비인간적인 박탈 현상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비되는 낭비적이고 소비 중심적인 일종의‘초발전’”을 누리고 있습니다.그 반면에,가난한 이들이 정기적으로 생필품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제도와 사화 계획의 개발은 너무 더딥니다.우리는 현재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것의 가장 깊은 뿌리를 보지 못합니다.이는 기술과 경제 성장의 방향,목적,의미,사회적 맥락과 관련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이승훈의 죽음의 형식에는 殉敎와 背敎가 합쳐져 있다.그는 고문과 순교의 과정을 배교로 마감하고 참수되었지만,그의 최후의 내면이 배교인지 순교인지는 달레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클로드 샤를 달레-‘한국천주교회사’를 쓴 신부
정약용의 신문 과정은 그가 천주교 지도자들과 동료 지식인을 고발한 대가로 사형을 모면했으리라는 정황 political bargaining을 보여 주지만 증거는 없다.형틀에 묶여서 고문당하고 있는 인간의 육성 진술을 놓고 신앙의 순수성을 따지는 言說은 무의미해 보인다. 이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정약용은 이미 천주교와 결별했음을 상소문으로 공포했으므로 이 고발이 하느님과 교회와 신앙에 대한 배반인지는 논리상 모호하다.그‘한 권의 책’으로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던 정약용은 형틀에 묶여서 가깝고 비루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의 언어로는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허송세월 232-233쪽/김훈)
여름날 이른 아침
거닐어 보는 숲길에는
후덥지근한 나무들의
몸비린내 쓰거운 풀비린내
아,
저들도 지난 밤
잠을 설쳤나 보구나
힘겨운 오늘 하루
등짐 장수 떠나나 보구나
(여름날 이른/나태주)
늘 행복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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