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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Rappraisala
토니 주트 저/조행복 역/열린책들
21장 누구의 이야기인가? 냉전회고
저자의 코멘트: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자신의 작품에 열광하지 않는 데 불쾌감을 토로했다.
존 루이스 개디스: 냉전사의 수장이자 대표적인 현대사가, ‘뉴욕타임즈’는 “냉전 역사학자들의 학장”이라고 표현.
개디스의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핵무기 경쟁이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다룬 부분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는 점을 최대한의 확신을 갖고 역설하는 동시에 정말로 전쟁을 마다하지 않을 뜻도 있다는 점을 소련에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에 전념했던 것을 다소간 공감하며 충분히 검토한다. 냉전이 평화를 유지하는 체제로서 <작용했다>면, 이는 소련 정부도 이유는 조금 달랐겠지만 비슷한 관심사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개디스는 소련을 다루는 부분은 이차원적(그 결과 역사는 초강대국의 대결로 이야기됨, 자료의 불균형 탓일 리가 없다.(공산당 기록보존소 개방))이다. 미국의 냉전 역사를, 미국의 관점에서 보고 미국에서 경험한 역사를, 많은 미국인 독자들이 가장 듣기 좋은(사과할 줄 모르는 승리주의자) 방식으로 썼다. 국제관계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있는 위치의 함수다. <제3세계>(모잠비크, 콩고,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파나마, 그레나다, 엘살바도르)를 색인에도 넣지 않는 것은 상당히 편협하며 하다. (마이클 베슐로스가 「뉴욕 타임스」북 리뷰에서 <냉전에 대한 고대했던 소급평결>을 내린 <비범한 재능을 지닌 학자>라고 묘사했던 사람이 쓴 책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개디스에게 <제3세계>는 수십만 명의 행위자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기는 해도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소련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1970년대 초부터 페레스토로이카(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재건’이란 뜻) 재편 또는 개혁이란 뜻의 러시아어로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의 내외 노선의 기본방침을 말한다.)가 시작될 때까지 막대한 무기를 쏟아 부었다. 냉전 후기의 <대리> 전쟁으로 가장 많이 붕괴된 아프리카 나라들, 라틴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도 냉전은 이데올로기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제국들의 충돌이었다. 소련은 제3세계를 냉소적으로 멸시했고 <민주주의>나 자유를 증진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던 반면 미국은 그런 척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무궁무진한 지원은 물론 음악과 의복, 영화, 생활방식에서 매우 실제적인 호소력을 지녔는데도 나중에 가면 대체로 냉전의 대결에서 수확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은 유럽에서 승리했지만 다른 먼 곳, 예를 들면 베트남이나 중동에서 장기적으로 입은 평판의 손상으로 그 효과가 자주 상쇄되었다는 점은 냉전의 역설 중 하나다.
『내전의 역사』는 여러 곳에서 공산당 정권들은 볼링 핀처럼 쓰러지고 미국은 화려하게 빛나고 혐의를 벗은 승리자로 나타나므로 복화술로 전해진 올림픽 챔피언의 자선전처럼 읽힌다. 개디스는 하벨을 <보편적 윤리와 국가 윤리, 개인 윤리가 전부 동일한 사회>라고 했으나 하벨은 공산주의 몰락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된 이유는 바로 이전 20년간 대부분 감에서 보내거나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고 정권의 치욕스러운 과거나 그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연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개디스의 마르크스주의와 마가렛 대처의 인기에 과한 기사는 타믈로이판 신문기사 수준이다.(미국에 가면 여기 저기 쇼핑몰 코너마다 쌓아 두기도 하고 마켓에서 장을 보거나 하면 그냥 옆에 쌓아 두고 집어가게 하는 그런 저질 신문들)), 공산당 치하의 동유럽 통념을 반복하며 간첩에 간한 이야기가 놀라울 정도로 부족하다.(결국 매카시즘(집단적인 과대망상과 정치적 순응주의)에 대한 이해부족, 474쪽 둘째 문단부터 475쪽 첫 문단까지), 영국의 냉전은 달랐다(오스트리아나 스웨덴도) <서구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 문화를 포괄했다.
개디스는 국가적 차이에서 냉정을 설명하지 못 했다. 문화적 측면들에서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개디스의 냉전사는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자유를 두고 벌어진 격렬한 지적, 문화적 대결뿐만 아니라 세대 간 냉전도 놓치고 있음은 놀랍지도 않다. 냉전은 공식적인 의미에서는 1940년대 말에 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강도와 지속시간을 이해하려면 그 근원이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깨달아야만 한다. 1960년대의 청년 폭동과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잘못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은 레닌 이래로 소련 지도자들이 늘 자신들보다 더 강력한 서방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 <진지전>에 그 기원이 있다. 개디스가 빠뜨린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전과 그 이후로 나타난 일들 사이의 연결을 거부한 것이다. 실로 냉전 이후의 미국 정부가 저지른 잘못은 1989년 이전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군사력 증강을 유권자들의 억압이나 안심에 사용하고 정작 1956년 11월 절박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개디스의 해석은 현대 미국, 다시 말해 나머지 세계는 물론 자국의 역사와도 이상하게 분리되었으며, <벽난로 옆에서 듣는 해피엔딩의 동화>에 굶주린 걱정 많은 나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22장 양들의 침묵 미국 자유주의의 이상한 죽음에 관하여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왜 부시 대통령의 재앙과 같은 외교 정책을 반대하거나 분노하지 않는가? 요컨대 최근 미국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왜 안전한 곳에 피해 있는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냉전기 이데올로기적 경계 너머의 선배 동조자득이 지닌 특징이었던 교조적 신념과 문화적 편협성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 선한 싸움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마침내 <이슬람 파시스트>들과 전쟁이라는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오늘날의 <싸움>이 정치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하나의 보편적 적(공동의 적)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 적의 사상을 연구하고 이론화하며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대결은 20세기의 선례와 마찬가지로 복잡성과 혼동을 제거하는 익숙한 병치로, 즉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자유 대 파시즘, 그들 대 우리로 환원 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모순, 새 자유주의자들이 실제로 구좌가가 지녔던 최악의 특징들을 재현(정권들에 쓸모가 있는 부화뇌동하는 지식인들, 오늘날 미국 자유주의의 이론적 전사들은 대테러 전쟁의 <유용한 바보들>이다. 예방전쟁이라는 부시의 정책을 앞 다투어 찬성)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자들이 잔인한 정책들을 만들어 내고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은폐할 윤리적 덮개를 제공한다.(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윤리적 책임 방기)
지난 50년간 국가 전략의 토대를 예방전쟁과 과다한 보복, 중동 전쟁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노력에 두었던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미국(초강대국)이 두 나라 어느 쪽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이스라엘의 행태를 무조건 승인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무차별적으로 모방하고 적대행위나 반대에 자기 파괴적이고 난폭하게 대응하는 그 작은 나라에 행태를 수입하며 이를 미국 외교정책의 주목적으로 삼은 것은 매우 기괴한 일이다.
전쟁은 자유주의자들이 마음속에서(꼭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최후의 수단이지 제일 먼저 선택할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요즈음 미국은 이스라엘 식 외교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alrr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침략전쟁>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 이로부터 놀라운 모순이 초래된다. 부시 대통령은 민주주을 심겠다는 희망을 천명하면서 전 아랍 세계에서 허약하나마 유일하게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팔레스타인과 레바논)가 동맹국 이스라엘의 손에 계획적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미국 자유주의를 선도하는 지식인들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 침묵을 깨는 것은 곧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나는 이슬람 파시즘에 맞선 미국의 새로운 <기동전>의 전술적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정치라는 전략적 전통이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평자들 대부분이 선택은 고사하고 인정할 뜻조차 없는 선택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맹점 때문에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관심과 금제는 모조리 모호해지며 오염되거나 망각될 위험에 처해 있다. 이 맹점은 정치적 차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테러리즘을 촉진하고 이란의 아야톨라(시아파 고위 성직자)들을 이롭게 하며 레바논을 이라크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저명한 자유주의자들 다수가 기민하게 <대테러 전쟁>의 이름으로 자기 검열에 나섰고 열렬히 전쟁과 전쟁범죄를 덮어 가릴 이데올로기적이고 도덕적인 핑계를 고안해 내고 그 핑계를 정적에게 제공했다. 보통 자유주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으로써 구분되었다. 지식인은 끝나지 않을 전쟁의 이론을 세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확신에 차서 끝나지 않을 전쟁을 조장하고 그 구실을 대는 일은 더욱 해선 안 된다. 지식인은 평화를 저해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자신들의 평화를 저해하는 일은.
23장 좋은 사회 유럽 대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의 미국과 그 나라의 추락하는 국게적 위상, 에에 반대되는 살례인 유럽을 논의했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스타벅스의 이미지와 제품에 가한 비난에 크게 속이 상한 미국인 독자들이었다.
유럽연합은 국제적인 사건들에서 결국 단일한 의견을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큰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럽연합이 부유해지거나 거대해질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유럽은 현대 유럽이 서 있는 초국ㄱ적 기반 때문에 중요해질 것이다. <세계화>의 주된 핵심은 교역이나 통신. 경제적 독점이 아니며 심지어 제국도 아니다. 세계화는 경계의 소멸에 관한 것이며 경계가 없어진 세계를 조직하는 어려운 과제에 과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인간들 사이에 오래된 경계를 뛰어넘는 유대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제도적 형태들로부터 진정으로 공동체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경계를 허물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유럽인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잘 하고 있는 일이다. 미국은 토크빌이 말한 <끊임없는 자화자찬>에 다시 빠져 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긴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요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긴장을 이용하고픈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25개가 넘는 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다루기 힘든 기구인데, 유럽헌법의 대부분은 이 기구의 의사결정 절차를 위한 실무적 규정이다.
결어(맺음말) 부할한 사회문제
1997년, 자타리아(포린 어페어스 편집장)는 내게 다가올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외교의 문제나 발전에 관해 쓸 것을 요청했다. 나는 빈곤과 저고용, 사회적 배제의 새로운 <사회문제>와 정치적 좌파가 세계화의 이러저러한 딜레마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을 재평가 하지 못한 것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후 10년간 일어난 일들은 나의 음울한 진단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회문제는 내버려둔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과격한 해답을 모색할 뿐이다.
최소 국가와 최대 이윤이라는 영미 모델이 헤게모니, 다시 말해 값싼 노동력과 안정된 투자 환경에 동반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현재 유럽연합 인구의 17퍼센트는 공식적인 빈곤선(거주 국가 평균소득의 50퍼센트) 아래에서 살고 있다.
시회적 위기는 실업이 아니라 <배제된 자들>에 관련되어 있다. 부분적으로만 국민 공동체에 속한 자들
물질적 빈곤이 아니라 공용이나 안정을 얻는 통상적인 전망이 거의 없거나 그러한 경로에 동반되는 사회적 연결고리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편부나 편모, 비상근 노동자나 단기 노동자, 이민자, 비숙련 청년, 조기에 강제로 퇴출된 육체노동자, 그러한 사람들은 품위 있게 살 수 없으며 지역공동체나 국민 공동체의 문화에 참여할 수 없고 자식에게 자신의 경우보다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할 수 없다. 현재 제시되는 신자유주의 기획들(예산 삭감, 규제 철폐)에서는 불안정한 처지의 사람들과 배제된 자들, 가난한 자들의 숫자가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유럽의 취약 계층이 대부분 집중되어 있고 다음 세대까지 남아 있게 될 바로 그 장소들, 직업들, 숙련도의 수준에서 일거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 세계적 현상
정책적으로 보자면 이 문제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사회보장제도의 재원은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국가가 노동에 과세하는 것, ㉡복지 급부금을 삭감하고 실업 급여와 기타 소득 보충 성격의 급부금을 개인의 과거 근로 기록(그리고 소득)과 일자리를 찾고 가능하면 취직하려는 지속적인 의지에 연계하는 것(미국, 영국), 이 방안은 작금의 세계경제에 적절한 사회정책이락 얘기되고 있다. 현시세의 임금으로는 취직할 생각이 없는 자들을 처벌하고 공용주의 비용을 줄여 주며 국가의 책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일자리의 획득 가능성 비자발적인 실업으로 노동 경험의 지속적인 중단 없을 것, 그리고 임금이 충분히 높아서 실업 급여로 지불되는 일부분이 한 사람이나 가족을 재취업할 때까지 빈곤에 빠지지 않을 것. 이 방안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는 종류의 노동자와 노동(제조업)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결과 고정된 일자리를 가지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소득을 올리고 세금을 내는 집단에서 배제(패배자 그룹: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한 자, 비숙련 노동자, 시간제 노동자, 이민자, 실업자 이들은 다양한 양식의 단체 가맹과 사회적 지원, 직업적 연대를 상실했기 때문에 더욱 취약하다.)될 수밖에 없다. 배제된 자들이 잠재적으로 사회문제, 우리 시대의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미국과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유럽 모델에 조금 더 가까운 영국 국가는 국민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적이 전혀 없다. 국가는 잔학하든 자애롭든 경제주체로서 매우 무능하다는 점이다.
유럽 대륙에서 국가는 세 가지 이유로 공적 생활에서 계속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첫째는 문화적 이유이다. 국가가 적절히 인도될 경우 중요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믿음. 이해관계들, 재화들 사이에서 납득할 만한 공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국가뿐이다. 공동의 합의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영미 모델)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없다. 둘째 논거는 세계시장은 실제로 존재한다. 자본과 자원은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그들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났다. 지금 국가 자체도 하나의 매개 제도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대의 민주주의의 필요성도 전통적인 국가를 옹호하는 최고의 논거다(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단적 운명을 어느 정도 통제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합의 속에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정치는 일종의 반정립 행위로서 개방된 사회에서 상이한 집단적 선호도가 표현되는 적절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532쪽 두 번째 문단부터 538쪽 첫 번째 문단까지 좌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역할에 대한 얘기.
원칙의 재고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엄정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경제적 변화에 희생당한 국민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더는 보수가 좋은 안정된 생산적 일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해도 품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부담을 나누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을 떠받치는 데 필요한 경제성장이 그것이 이바지해야할 목적 때문에 억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 국가의 일이다. 따라서 다가올 몇 년간 유럽 좌파의 과제는 행동주의적 국가의 논거를 재정립하고 21세기를 위한 교훈은 가능하면 19세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왜 아닌지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