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존스학당-문화와 일반은총>
제5장 공동선의 추구 (일반은총의 역할)
정대원
§ 두 가지 원리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일반사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성화된 삶은 결국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는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벧전2:11-17절에 ‘인간의 모든 제도에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 ,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간구한다. 믿는 자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의 재림 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칼빈주의자라면 현재 일어나는 교회일치운동에 대해서도 신학적으로 기여해야 하며, 내부 진영에서만 논의됐던 쟁점들을 공적인 영역에서 나누는 것이 시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확신한다.
§ 금욕의 맹세?
그렇다면 평화와 공동선을 추구할 의무가 칼빈주의자의 입장에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일부는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세상과 단절하는 자발적 금욕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스킬더) 스킬더의 입장은 거룩한 영역에서는 효과적이기는 하나 카이퍼가 강조하는 일반 영역에서 드러나는 문화변혁의 성과까지는 기대할 수 없다. 스킬더는 단순히 그저 공동체로서 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일반 사회 속에서 신실함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난의 표징만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이라는 세속 사회 속에 처하도록 허락하셨고, 그 사회의 공익을 증진시키기위해 노력하도록 명령하셨으며, 각 교단마다 다른 문화적 사명과 다른 영적 감각을 주셨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스킬더의 주장을 기독교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일반 은총의 실행자들
우리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일관함이 아닌 우리의 노력으로도 사회적 선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해야 한다. 일반은총의 영역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미치는 범위를 더욱 확장하여,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더 고상하고 순수한 사회적 선을 이루기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카이퍼는 주장한다. 가난한 자들을 구원의 자리로 초청하기위해 선을 베푸는 것 보다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돌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나는 믿는다. 가난과 정의에 대한 개념은 일반은총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 칼빈주의자의 공감
훅세마는 말한다. 선택받지 않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적들을 미워하시고 파멸시킬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말이다. 반면 칼빈은 우리를 괴롭히는 적들을 제한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택과 유기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에 기쁨과 희망은 더욱 촉진시키고, 슬픔과 번뇌를 줄여가도록 힘써야 한다.
§ 중층적 담론과 평이한 담론
일반사회 복지와 평화를 적극적으로 증진시키기위해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도 인간의 죄를 억제할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를 주장해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정의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터운 담론보다는 평이한 용어로 전환해서 우리가 공적으로 제안하는 방안에 대해서 듣고 납득이 가게하는 것이 좋을까?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견해이기도 한데, 만일 기독교가 사회와 공통된 도덕적 담론을 시작하면 우리의 신앙이 그 사회와 타협하게 되는 것을 그는 염려한다. 헤히르는 말한다. 우리가 일반세상 사회가 가진 근본적 문제에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은 사회와 인간 공동체로서 우리의 기본적 관계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 칼빈주의자의 혼란
헤히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의 요지와는 다르다. 개혁파는 인간성의 성육신적 변화가 교회라는 범주를 벗어나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지 않고, 인간 세상이 여전히 신음하고 있음을 상기한다. 우리는 사회와 대화를 나누는데 중층적 언어와 평이한 언어를 더 잘 분별하여 사용하도록 노력을 기울이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이 도전해올 때 세상 사회 속의 제자도로 어떻게 참여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공적 영역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새 예루살렘을 바라고 소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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