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경전 耕田
초복 初伏이다. 한여름의 땡볕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수박은 그 뜨거움을 먹고 익는다. 장맛비 사이로 햇볕이 며칠 내리쬐더니 비닐하우스 안에 커다란 수박의 줄무늬가 선명해지고 색이 진해졌다. 손주에게 잘 익은 수박을 안겨주고 싶어 텃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낡은 비닐하우스를 새로 씌우고 수박을 일찍 심어볼 심산이었으나 쉽지 않았다. 시골에 일할 이를 구하기 어려운데다 봄바람이 자주 불어와 방해해서다. 우여곡절 끝에 비닐하우스를 교체하고 제일 먼저 심은 것이 수박이다. 삽으로 땅을 파고 쇠스랑으로 이랑을 만들고 축분을 듬뿍 넣었다. 쇠갈퀴로 곱게 고른 뒤 검은 비닐을 덮었다. 그리고 수박 모종을 육묘장에서 너 대포기 사 왔다. 지난해 덩굴 마름병이 와서 낭패를 본 탓에 올해는 박에 접붙인 튼실한 싹을 골라 와 심었다. 그래서인지 수박 덩굴이 쭉쭉 뻗어 간다. 틈틈이 곁순을 따주고 줄기를 펴는 손길에서 손주의 웃음꽃이 함께 피어났다.
서두른다고 수박이 빨리 크지 않는다. 하지와 초복 사이, 여름 햇살을 한껏 머금더니 작은 항아리만큼 몸집을 불렸다. 대략 쌀 두 말 무게는 족히 될듯한 수박이 서너 개 덩굴에 매달렸다. 손주에게 줄 잘 익은 수박을 골라야 했다. 우선 꼭지 가까운 곳에 있는 덩굴손과 땅에 닿은 부분을 눈여겨서 보았다. 대부분 덩굴손이 갈색으로 변하고 바닥은 노란색으로 변해있어서 고를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수박을 가볍게 두들겨 보았다. 어떤 수박은 ‘퉁퉁’하며 속이 꽉 찬 북통을 두드리는 울림 같고, 또 다른 수박은‘통통’하며 가벼운 장구처럼 맑게 들리는 것 같았다. 소리로는 잘 익은 수박을 가릴 수 없었다. 당도기를 들이대 보았다. 과즙을 넣고 재보니 다소 차이가 났다. 10에서 13브릭스. 가장 높은 것을 차에 실었다.
미사를 보고 손주를 만나러 갈 참이다. 성당에 도착하자 어르신께 삼계탕을 대접하는 날이란다. 요즘 기억의 휘발성이 강해진 것 같다. 지난 바오로 회*에서 총무로부터 초복 날 삼계탕을 끓여 어르신을 대접하자고 들어놓고 까맣게 잊고 지냈다. 총무는 새벽시장에 가서 닭을 이백여 마리를 사다가 끓일 수 있게 손질해 놓았다. 누가 시키지 않은 것 같은데 농사를 짓는 이는 찹쌀 대파 마늘을, 한의원을 운영하는 이는 인삼 대추 오가피 등 약재를 가져왔다. 식당을 운영하는 이는 삼계탕 재료를 가마솥에 넣더니 불을 올린다. 주방에서는 자매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겉절이김치를 버무리고 개피떡 인절미를 접시에 담는다. 홀에 있는 형제들은 연신 음식을 날라다 식탁에 올려놓느라 분주하다. 나도 거들었다. 국물을 담백하게 만들려고 끓는 가마솥에서 기름을 떠냈다.
미사가 끝나자, 어르신들이 삽시간에 자리를 가득 메웠다. 뜨거운 삼계탕을 조심조심 날라다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한 분 한 분께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라는 덕담도 빼놓지 않았다.
“수박 한쪽 있으면 좋겠네.”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어르신이 수박을 찾는다. 미식가인듯하다. 바로 곁에 조용히 먹던 이도 맞장구친다. 주방에 들어가서 이 구석 저 구석 뒤져보았다. 수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손주에게 주려고 차에 실어놓은 수박이 떠올랐다. 수박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눈빛에 망설임을 오래가지 않았다. 차에 있던 수박을 잽싸게 가져왔다. 큼지막한 수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을 깊이 밀어 넣자‘쩍’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속살이 환하게 드러났다. 과육에서 시원한 단내가 주방에 번졌다. 주방에 있던 이들의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불현듯 ‘돈 주고 뺨 맞을 수 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접시에 수박을 네 쪽씩 담아 오십여 접시를 상에 올려놓아야 했다. 지난 면장 시절 마을 경로잔치를 다니며 수많은 이에게 배식하던 기억을 되살려 나누어 보았다.
돌아오는 길이다. 차 뒤에 트렁크는 텅 비었지만, 마음은 뿌듯하다. 손주에게 줄 수박 한 통을 잃은 게 아니라 여러 어르신의 웃음을 한가득 얻은 하루였다.
바오로 회*:: 00 성당 60대 형제 봉사단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