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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근과 코리안 째즈 퀸텟 '78
[Jazz: 째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
1978년은 한국 재즈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국내 최초의 재즈클럽 ‘올 댓 재즈’와 ‘야누스’가 문을 열었고 ‘공간 사랑’에서 정기 재즈 음악회가 시작되었으며 라틴 팝과 재즈를 뒤섞은 앨범 [류복성과 신호등]이 발표되었던 것이 ’78년도였다. 아울러 발매 후 지난 35년 동안 완전히 기억 저편에 묻혔던 음반 [Jazz: 째즈로 듣는 우리 민요, 가요, 팝송]이 녹음된 것도 같은 해인 ’78년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음반 [Jazz]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 음반은 모던재즈, 그러니까 비밥이라는 음악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은 재즈가 한국 연주자들의 손을 통해 기록된 최초의 녹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한국에서 재즈는 존재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에 손목인은 베니 굿맨이 1937년에 녹음했던 <싱싱싱 Sing Sing Sing>을 2년 뒤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녹음했고 이 무렵 ‘재즈송’이라는 이름의 미국풍의 음악이 새로운 조류를 타고 속속들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재즈’는 단지 미국식 대중음악의 동의어였다. 그것이 미국과 유럽에서처럼 대중음악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음악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단적인 예로 모던재즈가 등장한 것은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한 1940년대였다(이때 재즈는 일반적인 팝 음악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런데 그 음악이 한국에서, 한국 음악인을 통해 ‘입적’되기 까지는 [Jazz]가 녹음될 때까지의 40여 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왜 그랬을까. 왜 한국에서 재즈의 수용은 그토록 지체되었을까? 왜 우리에게 오랫동안 재즈는 미국의 대중음악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었을까? 그 많은 동네 피아노 학원 간판에 재즈 피아노란 이름(그것은 파퓰러 뮤직 피아노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은 아직도 붙어있는 것일까? 반대로 그런 상황 속에서 자칫 사라질 뻔 했다가 35년 만에 디지털 음원으로 복원되어 기적처럼 부활한 이 매혹적인 연주는 어떻게 ’78년에 가능했을까?
한국에서 미국의 대중음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종전 후 미8군 사령부가 용산에 자리 잡은 1955년부터였다. 대규모 병력의 주둔과 더불어 미군들을 위한 클럽들이 전국 곳곳에 생겼고(이 클럽의 수는 이미 ’50년대 중반에 264개에 이르렀다. 신현준 외 지음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25쪽) 이곳 무대에서 공연할 한국인 연예인들에 의해 미국 음악의 유입은 급물살을 탔다. 이 음반의 주인공인 최세진(1931년 생), 강대관, 이판근(이상 1934년 생)이 8군 무대에 서기 시작했던 때가 모두 이 무렵이었으며 김수열(1939년 생) 역시 1958년부터 8군 무대에서 직업 연주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이들이 8군 무대에서 연주했던 것은 주로 스윙, 탱고, 맘보와 같은 미군들의 여가를 위한 댄스 음악이었다(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음악을 모두 뭉뚱그려 재즈라고 불렀다). 하지만 8군 무대는 간간히 연주자들에게 ‘본격적인’ 재즈연주를 요구했고 미국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심사위원단의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 연주자들은 어느 정도 ‘진짜’ 재즈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몇몇 연주자들의 재즈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당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던 이판근은 재즈에서 사용되는 화성, 리듬, 앙상블에 깊이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편곡에 눈을 떠 그가 속한 밴드에게 독창적인 사운드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테너 색소폰 연주자 김수열은 러키 톰슨(Lucky Thompson)이 연주한 <나의 귀여운 발렌타인 My Funny Valentine>, <부드럽게 Tenderly>를 하나하나 채보하면서 즉흥 솔로의 방식을 터득해 나갔다.
하지만 그들에게 재즈 연주의 기회가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들이 클럽을 가득 매웠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댄스 음악을 연주했고 손님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들을 매료시켰던 재즈를 비로소 연주할 수 있었다. 김수열은 ’60년대 자주 연주했던 재즈 레퍼토리로 <튀니지아의 밤 A Night at Tunisia>, <한탄 Moanin'>, <빗나간 음정 Desafinado> 등을 꼽았다.
김수열이 8군 무대에 오를 무렵, 그곳에서 연주하던 드러머 최세진은 당시 국내 재즈 음악인 중 중심인물이었던 테너 색소폰 주자 이정식(현재 활동 중인 색소폰 주자와는 동명이인)의 제안에 따라 ‘일반무대’(당시 연주자들은 8군 무대 외에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마련된 무대를 이렇게 불렀다)로 진출했고 이듬해에는 이정식 밴드와 함께 동남아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정식 밴드는 곧 귀국했지만 최세진은 홍콩에 머물렀고 그것은 16년 동안 지속된 그의 해외체류의 시작이었다.
최세진이 홍콩에 머물고 있던 동안 국내무대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격렬해지자 ’63년부터 미국은 병력을 베트남에 파견했고 8군 병력 역시 베트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8군 무대의 급속한 축소를 의미했다. ’60년대 중반이 되자 8군 무대를 기반으로 생활하던 음악인들은 일반부대로의 진출을 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는 미국 대중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60년대 가요의 등장과 궤를 같이했으며 ’60년대 초 연이어 문을 연 방송국들은 8군 무대 출신 연예인들의 새로운 진출로였다. ’64년 개국한 동양방송(TBC)은 8군 무대에서 기량을 닦아온 이봉조를 악단장으로 TBC 악단을 창단했고 트럼펫 주자 강대관은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8군 무대의 일급 연주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 시내의 시장은 그리 넓지 않았다. ‘유엔 센터’, ‘경동 호텔’, ‘아스토리아
호텔’과 같은 장소가 그들의 무대였지만 심야 통행금지가 있던 당시에 연주자들이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장소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재즈 연주자들은 손님이 없던 초저녁과,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손님들이 서둘러 클럽을 퇴장하던 밤 11시 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이 목말라하던 재즈를 연주할 수 있었다.
그나마 그러한 무대도 갈수록 위축되었다. 그때부터 불기 시작하던 로큰롤의 열풍은 댄스홀 의 분위기를 일거에 바꿔 놓았고 과거 8군 무대를 주름 잡던 일급 연주자들은 급변하는 유행에 난감해 했다. 이판근의 표현을 따르면 자신들은 ‘8군 무대의 귀족’이었다. 하지만 일반 무대에 나와 보니 자신들보다 등급(당시 8군 무대는 3~6개월 간격으로 시행한 오디션을 통해 연주자들의 등급을 나누었다)이 훨씬 낮았던 연주자들이 싼 출연료로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유행은 과거 일급 연주자들의 취향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8군 무대에서 활약했던 음악인들 중 가요계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들(엄토미, 김광수, 손석우, 박춘석, 길옥윤, 이봉조, 김인배, 김강섭 등)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부분 다른 직업으로 전향 하던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 ’70년대 모습이었다고 이판근은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60년대 중반 재즈에 심취했던 연주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대중은 재즈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66년을 끝으로 8군 무대를 떠난 김수열이 이후 몇몇 방송 악단과 클럽에서 연주하다가 무교동에서 새롭게 문을 연 클럽 ‘스타 더스트’에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출연했던 것은 ’69년이었다. 그리고 이 클럽에는 이정식 밴드가 함께 출연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정식 밴드는 이판근(이때 그는 베이스 주자로 역할을 바꿨다), 강대관과 함께 TBC 악단 소속이었던 드러머 조상국으로 짜인 ‘골수’ 재즈밴드였다. 그리고 여기에 이미 ’67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이 밴드에 가입하면서 주위로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얻었던 손수길(1948년 생)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 무렵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 손수길의 음악적 교류가 ‘스타 더스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들이 재즈를 세상에 알리기에는 아직도 때는 너무 일렀다. 단적인 예로 ’70년 무렵 이정식 밴드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이때 강대관은 TBC 전속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김수열이 대신 출연해 이정식과 트윈 색소폰을 연주했다) 출연 후 담당 피디는 대중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을 방송에 내보냈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써야 했던 것이 당시 재즈를 둘러 싼 우리의 풍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재즈는 더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71년 밴드 리더 이정식이 간경화로 마흔의 나이에 눈을 감았을 때 그것은 한 재즈 순수주의자의 비극적인 죽음이자 그나마 버텨왔던 구심점의 해체였다. 이정식이 떠나자 손수길은 의욕을 잃고 다른 음악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심지어 이듬해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건전한 사회기강 확립, 퇴폐풍조 추방이라는 이름으로 나이트클럽 영업 단속을 밥 먹듯이 반복했다. 재즈가 움틀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재즈가 어려움에 처해 있던 것이 어디 이곳뿐이었을까. 아무리 시장 밖으로 내몰린 재즈였지만 그것이 죽지 않고 지난 100여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이 음악에 대한 뮤지션들의 특별한 열정 때문이었고 그 열정은 재즈의 동토(凍土) 한국에서도 웅크리고 살아 있었다. ’77년 서울 내자호텔(이 호텔은 미군 전용 호텔로 ’90년 한국 정부에 반환해 그해 철거되었다) 클럽에서 재즈 잼세션 무대가 생기자 지독하게 버텨온 재즈 뮤지션들은 한 자리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대에는 16년 동안의 홍콩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던 드러머 최세진도 합류해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 등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어느덧 유신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78년, 세상의 분위기는 엄혹했지만 재즈를 독자적인 감상음악으로 접할 수 있는 분위기는 저 한편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해 이태원 부근의 외국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재즈 클럽 ‘올 댓 재즈’가 처음 문을 열었으며, 역시 8군 무대 출신의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은 신촌에 재즈 전용 클럽을 열고 그곳에 ‘야누스’라는 간판을 걸었다. 아울러 안국동의 ‘공간 사랑’은 매달 정기 재즈 음악회를 시작했는데 이곳에는 앨범 [Jazz]의 주인공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 손수길, 최세진뿐만이 아니라 신관웅, 유영수 그리고 프리재즈를 추구했던 강태환 트리오(여기에는 트럼펫 주자 최선배, 드러머 故김대환이 참여했다) 등이 출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재즈가 미국음악을 통칭하는 막연한 음악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주 양식을 가진 구체적인 음악이라는 인식은 ’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 음반 [Jazz]도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재즈를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음반 제작자 엄진이 있었다. 그는 ’70년대 음반 제작사였던 포시즌을 운영하면서 한대수, 윤복희, 윤항기, 박상규의 앨범들을 히트시킨 유능한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그는 제작자이기 이전에 열렬한 음악팬, 특히 재즈팬이었다. 당시 포시즌의 전속 밴드였던 무지개 사운드의 멤버이면서 편곡을 담당했던 이경석은 제작자 엄진을 오로지 재즈만을 이야기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일과 후 술 한 잔을 하는 시간이면 늘 마일스 데이비스의 주법과 새로 나온 음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는 것이 엄진에 대한 이경석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엄진이 이전까지 재즈음반을 제작하지 않았던 것은 그를 매료시킨 국내 재즈 연주회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78년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아마도 그는 당시부터 서울시내에서 진행된 여러 재즈 연주회를 관람했을 것이고 그러한 빈번한 연주회는 밴드 팀워크를 급격히 발전시켰을 것이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엄진은 자신이 작곡한 두 개의 곡을 넣어달라는 주문 외엔 모든 것을 이판근에게 위임했다. 이판근은 나머지 곡들의 선정, 편곡, 녹음을 담당하면서 당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동료 재즈 연주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있다면 베이스 주자 이수영이다. 이판근은 당시 그가 연주하던 클럽 ‘블루 룸’에서 함께 출연 중이었던 록 밴드 조커스의 베이스 주자 이수영을 발견했다. 더욱이 이판근은 앨범을 녹음하기 얼마 전 이수영이 콘트라베이스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서울 시향과 연주하는 것을 TV에서 인상 깊게 보았고 레코딩 세션에 그를 기용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편곡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재즈와 우리 음악을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싶었다.” 이판근의 이 생각은 이 음반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손수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이 음반을 위해 긴 시간을 준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녹음에 들어갈 때 우리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뭔가 우리만의 느낌이 있는 재즈, 코리안 스피리추얼 재즈, 코리안 소울 재즈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몇 잔의 막걸리로 목을 적시고 마장동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스튜디오에는 그 어떤 부스나 파티션도 없었고 하나의 공간 안에서 전체 뮤지션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재즈를 연주한 지 20여 년 만에(최세진, 이판근, 강대관은 이미 마흔을 훌쩍 넘겼다) 처음으로 그들의 음악, 재즈를 위해 레코딩 마이크 앞에 선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음반을 시작하는 <아리랑>의 첫 머리는 비장하다 못해 기이한 귀기(鬼氣)마저 감돈다. 맬릿으로 둔탁하게 두드리는 드럼의 루바토 위에서 테너 색소폰이 느리게 주제를 노래하면 저 멀리서 트럼펫은 새벽의 여명과 같은 한 줄기 빛을 쏘아 올린다. 그 뒤를 이어 넘실대는 드럼과 베이스의 그루브 위에 펼쳐지는 솔로들은 악기 각각의 선명한 색깔을 펼쳐 보인다. 존 콜트레인의 [올레 콜트레인 Ole Coltrane] 혹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녀들의 태동 Bitches Brew]에서 만들어졌던 재즈의 주술적 향기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한국의 연주자들에 의해 재연되는 광경은 그냥 놀랍다 못해 경이롭다.
[올레 콜트레인]과 [마녀들의 태동]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은 언뜻 부조리하게 들린다. 두 음반은 ’61년과 ’69년이라는 8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녹음 되었고 스타일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음악의 뒤섞임은 ’78년 한국에서는 가능했다. 실제로 이 음반의 연주자들이 두 음반을 들었는지 혹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는지 필자는 확인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60년대 초의 재즈와 ’60년 말의 재즈-록 사이의 간극이 한국의 뮤지션들에게는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재즈에서 그 급변했던 8년이란 시간은 한국에서는 매우 압축적이었다. 심지어 전도되어 있을 수도 있다. 두 음악은 한국의 뮤지션들에게 거의 동시에 소개되었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순서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에서 모든 외국 음반은 수입 금지였고 그래서 한국에 소개되는 외국 음악은 매우 선택적이고 우연적이었기 때문이다(한국에서 음반 수입 자율화는 ’89년부터 시행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 시간의 압축 혹은 전도는 기묘하고 독창적인 효과를 만들어 냈다. 만약 ’60년대 미국 재즈를 우리가 동시대적으로, 순차적으로 수용했다면 여기 <아리랑>의 그루비한 록 비트를 위해 이판근은 기타리스트를 더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혹은 손수길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주문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사운드는 훨씬 더 전형적인 재즈-록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78년 한국의 재즈는 재즈-록의 리듬을 어쿠스틱 퀸텟으로 연주했다. 그것도 베이스만은 록 밴드 출신의 이수영이 일렉트릭 베이스로 연주 한 채(록과 디스코가 유행하던 그 시절 국내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를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모든 음반에 스타일을 불문하고 적용되었던 사이키델릭 스타일의 녹음은 이 음반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색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미국 재즈의 방대한 녹음 안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사운드다. 특히 ’78년 당시의 미국 재즈는 재즈-록 퓨전과 메인스트림 재즈로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음반과 같은 사운드는 아마도 상상 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한국에서의 재즈는 그것이 가능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결과가 자연스러웠다. 이는 재즈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매우 흥미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이것은 모방되거나 재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도 재즈를 알아주지 않던 시절, 재즈 잡지를 하나 보기 위해 미국 문화원의 높은 문턱을 넘어야 했던 시절(실제로 손수길은 잡지 <다운비트 Downbeat>를 보기 위해 미 문화원을 찾아가야 했다), 결핍과 그 만큼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연주자들이 천재일우의 녹음 기회를 만나 빚어낸 그 시대만의 아우라다.
<한오백년>을 오스티나토로 단순화시켜 즉흥연주를 펼쳐냈던 것이 ’60년대 마일스-콜트레인과 소통한 결과라면 이어진 <나의 모든 것 My Favorite Things>은 <아리랑>으로 시작된 이 음반의 대미로 딱 어울리는 곡이다. 보통 세 박자의 왈츠로 인식되던 이 곡은 특히 강대관의 솔로가 등장하는 지점부터 명백히 우리 장단의 흥을 타고 넘실거린다. 그리고 주제가 재현되면서 마무리 되는 지점에 이르자 못내 아쉬운 듯이 모든 연주자들은 즉흥 선율로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것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을 위한 사자후처럼 들린다.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레코딩 세션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최세진만이 이 모든 녹음에 봉고 연주를 더빙하기 위해 한 번 더 스튜디오를 찾았을 뿐이다.
이후에도 이들이 또 다시 재즈를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것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은 11년의 시간을 기다려 [박성연과 재즈 앳 더 야누스]에서 연주를 남겼으며 손수길은 그간 수많은 가요 레코딩에 세션맨으로 참가 했지만 재즈를 녹음한 것은 ’90년대 초 정성조 재즈 앙상블의 음반 [올 댓 재즈]가 유일했다. 최세진은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29년 뒤인 2007년 그의 유일한 음반 [미래로 돌아가다 Back to the Future]를 발표하면서 평생의 숙제를 풀 수 있었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도 이들은 재즈를 포기하지 않고 세월을 이겨냈다. 긴 세월 동안 이들이 끈질기게 일궈놓은 길을 따라 젊은 연주자들이 하나 둘씩 걷기 시작했고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재즈는 본격적으로 한국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제작자 엄진은 ’80년대 중반에 눈을 감았지만 여기 참여한 뮤지션들은 마음껏 재즈를 연주할 수 있게 된 세상, 2000년대를 몸소 맞이할 수 있었다. 2008년 최세진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 강대관은 은퇴 공연 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뮤지션들은 여전히 클럽, 공연장, 그리고 교실에서 그들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아울러 35년 전 그들이 남긴 역사적인 녹음 한 편이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것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남겨주고 있는 중이다.
- 황덕호 (재즈 애호가/ 2013년)
[마스터 음원 안내]
제작자 엄진의 미망인에 따르면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과 그에 이어지는 급작스런 생활상의 변화로 인해 관련 자료와 마스터등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마스터 테잎은 그렇게 사라졌고 부득이하게 최상의 민트급 바이널을 찾아내 마스터링하는 수 밖에 없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음반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제작사 디스크데시네의 대표이자 엔지니어인 마사오 마루야마씨가 자진하여 최선을 다해 작업한 음원이니만큼 넓은 마음으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정 안내]
1978년도의 오리지널 음반에는 정보 부재에 의해 아래와 같이 작곡자가 잘못 표기된 것이 있었으나 이번 발매반에서는 오리지널 작곡가의 정보로 수정하였습니다. 재발매의 특성상 원형 그대로의 디자인을 가져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작곡가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곡에 대한 정보는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니 청자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
이판근: 편곡
강대관: 트럼펫
김수열: 테너 색소폰, 소프라노 색소폰
손수길: 피아노
이수영: 베이스
최세진: 드럼, 봉고
기획, 제작: 엄진
프로듀서: 이판근
녹음 엔지니어: 미상
믹싱 엔지니어: 미상
스튜디오: 마장동 스튜디오
리마스터링: 마루야마 마사오(production dessinee) at Studio Djoke, Japan
오리지널 디자인: 엄진
캘러그라피: 엄진
해설: 황덕호, 박민준(DJ Soulscape/360 Sounds)
영문 번역: 배기준
사진 제공: 박성연(야누스)
디자인: 백지훈(Beatball Design Lab.)
재발매 프로듀서: 이봉수
감사의 말 올릴 분들:
안종숙, 이경석, 박성연, 마사오 마루야마, 황덕호, 박민준, 정원용, 신현준, 송명하
최초 발매: 엔젤프로덕션/대한음반제작소 1978년
첫댓글 1978년에 이런 음반이 녹음되었다니.
kbs fm 2013년 11월 10일 '재즈수첩'에서 다시 들을 수 있는 명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