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파업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오늘 옥수에서 덕소행 전동차를 기다리면서 파업이 진행중임을 실감했다. 한참을 기다려 덕소행 열차를 탔다. 동구릉이 어디 있는 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하고 아침부터 조선시대 왕릉을 찾아봤다. 건원릉, 후릉, 헌릉, 영릉, 현릉 장릉 그리고 세조의 광릉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임금과 왕후의 능들을 계보별로 적어나가면서 역사공부를 했다. 사실 왕릉을 다니기 시작한 건 가까운 곳에 있는 태종 이방원의 능 때문이었다. 헌릉을 가 보니 그 옆에 순조의 능인 인릉이 있었고 그렇게 왕릉에 관심을 갖다 보니 가까운 곳에 있는 선릉이 성종의 능이며, 그 옆에 있는 성종의 아들 중종이 나란히 묻혀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에 갔다온 태릉이 정릉의 중종과 함께 있기를 소원했던 문정왕후의 무덤이며, 그 옆으로 그녀의 아들 명종이 묻혀 있었다.
내가 왕릉에 가기 시작한 건 참나무와 소나무등 오래된 숲이 주는 청량감이 좋아 그곳으로 책을 읽으러 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나는 선릉에서 한 나절 책을 읽으면서 도심 속에서 그렇게 머리가 맑아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까운 헌릉의 참나무 숲에서도 나는 여름철 책을 읽으면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어가곤 했었다. 그런 왕릉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곳이라니, 서오릉과 동구릉은 그런 면에서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 중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있는 동구릉에 가 보는 건 그야말로 왕릉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동구릉은 구리에 있었다. 공동묘지로 유명한 망우리와 베틀 고개를 넘어 나오는 구리였다. 동구릉까지 가면서 은미희씨의 <카스테라와 피아노>란 소설을 읽었다. 카스테라와 피아노를 연결짓는 연결고리가 좋았다. 여자 작가가 남자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인물설정도 독특했다.
동구릉이 있어서 인지 동구동이란 말이 붙어 있는 곳, 아파트 단지와 농수산물도매시장이 있는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동구릉이 있었다. 동쪽을 향해 편자 모양으로 터진 듯 보이는 산이었지만 들어서보니 안으로 깊숙한 골짜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에 구석구석 왕릉을 품에 안을 정도의 아담한 산들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면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입구부터 보이는 오래된 소나무와 참나무의 군락이 만들어놓는 기분 좋은 향기였다. 볕이 좋은 주말, 바라다 보이는 관리사무소의 건물은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서 여러 왕릉을 지켜왔을 건물답게 전형적인 한국적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용마루 그리고 작지만 조화로운 한옥의 균형감이 느껴지면서도 또한 들어서는 문이 주는 아담한 위용 같은 것도 있었다.
수릉(문조와 신정왕후 조씨), 현릉(문종과 현덕왕후 조씨), 목릉(선조와 그의 정비 의인왕후 밖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능), 휘릉(인조와 계비 장렬왕후),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경릉(헌종과 효현왕후 김씨,효정왕후 홍씨/3쌍릉), 혜릉(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 숭릉(현종/봉림대군 효종의 맏아들/과 그의 비 명성왕후 김씨)
연인들이며 부부들이 다정하게 흙길을 밟으며 걸어가는 곳, 오래된 숲길을 따라 걷는 역사산책이 그윽했다. 동구릉을 다녀오면서 느낀 것들은, 1)역사 속에 나오는 왕과 왕비가 그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했던 인물들이었다는 것과 또 그 역사를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아이들에게도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2)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조의 목릉을 지날 때면 임진왜란이, 인조의 휘릉을 지날 때면 정묘와 병자호란 그 치욕스러운 역사가, 왕이란 상징적인 인물의 능을 통해 시대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3)왕이 되거나 되지 못하는 기로,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반정으로 숨막히는 쟁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또 세도정치에 의해 왕이 유명무실해지는 시대를 겪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적 중심에 있던 왕과 왕후를 그들의 죽음과 역사적인 기록으로 다시금 읽어낼 수 있다는 면에서 실감이 났다. 4) 젊어서 죽거나 혹은 정비와 계비, 또 왕비가 되지 못한 채 왕을 낳은 생모의 처지라든가 여러가지 역사적 아이러니를 왕릉과 왕후릉을 돌아보면서 생각했다.5)특히 궁궐에서 문정왕후처럼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왕후들이 많았음을 생각할 때 왕과 왕후가 나란히 권력적인 면에 함께 참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저 왕후만이 아니라 왕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 안에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면면이 담겨져 있음을. 문정왕후과 중종 그리고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를 비롯해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가 일곱 명 궁정동의 칠궁신위에 모셔져 있다.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조선태조고황제시비라고 쓰여진 입구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등백운봉<登白雲峰>이었다.
손 당겨 탱탱이 넝쿨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남자가 흰 구름 속에
몸이 누워 있네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받아들이지 않으리.
건원릉 왼편에 지어진 한 칸 짜리 방 수복방(守僕房)과 몽고말로 음식을 차리는 부엌이란 뜻의 수라간이 인상적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었고, 그 안에 쓰여진 수많은 사람들의 벼슬과 이름이 새져겨 있었다. 더우기 그의 무덤에 자라고 있는 억새의 이야기는 그가 함흥의 흙으로 떼를 입히고 그 위에 함흥의 억새를 심어 달라고 했는데, 그 억새를 자주 깎아주면 그 억새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일년에 한 번 4월 한식 때에만 깎아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실제로 그의 능 위엔 억새가 크게 자라나 있었다. 건원릉 정자각을 보고 있으면 그 하나하나의 건물 곳곳에 세심히 신경쓴 흔적들이 역력해 보였다. 구름 모양의 장식, 뿔모양으로 기둥에 달린 것들이나 떡살을 찍을 때 쓰는 둥근 꽃모양의 기둥끝 단청하며, 당시 천하제일의 기술자들이 만들었을 솜씨를 보는 듯 했다. 다른 왕릉이 세월의 흔적 앞에 낡아진 것과 달리 영조의 능인 원릉은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보수공사로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 있었다. 특히 선조와 왕후들이 묻힌 목릉,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인 숭릉이 그랬다. 동구릉 숲을 빠져나오는데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