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돼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 이야기 2012.07.24.
▲김원봉과 의열단
1919년 만주 지린성 파호문 밖 중국 농민 반 아무개 집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과 윤세주, 이성우 등 13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아나키스트 성격의 항일 무장독립단체 ‘의열단’을 결성합니다.
이들 인사들은 대부분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경의 체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급진 노선을 지향했던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급진적 폭력투쟁을 내세웠습니다. 암살과 일제 기관에 대한 직접 타격을 통해 민중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뇌관 구실을 하자는 것이었죠. 작지만 강고한 결사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중심인물들을 암살하고 적의 중심 기관들을 파괴함으로써 민족 내부의 혁명역량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9월 14일,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서장을 폭사시킨데 이어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1921년 9월 21일 조선총독부에 대한 의열단원들의 의거가 이어집니다. 김원봉 선생은 1923년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단재 신채호선생을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 선생은 독립투쟁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보았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습니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 중)
김원봉 선생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죠.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습니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가 개설했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의열단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됩니다.
군복 차림의 약산 김원봉 선생 (1898~1958). 의열단을 창단한 이후 26년간 일제와 싸워오면서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았던 김원봉 선생이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미군정의 지휘를 받던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고 말았죠. 분단된 조국은 그에게 좌익 정치인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그는 철창 속에서 모진 구타와 고문을 받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원봉 선생은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김원봉 선생을 체포해서 고문한 노덕술은 일제 종로경찰서 형사출신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다 악랄한 짓을 했던 장본인으로 신생 대한민국 경찰로 옷을 바꿔 입었던 것이죠.
1946년 밀양 표충사 ,아들을 안고 있는 김원봉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꼈을까요? 감옥에서 풀려난 김원봉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그 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에 취임합니다. 그 후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그의 이력 때문에 한국전 당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던김원봉 선생의 삶과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남아있습니다. -출처 곰PD의 전쟁이야기
의열단과 김원봉
( 1928년경 동북아 아나키스트 들 )
난 의혈단에 대해 단순히 폭파와 요인 암살을 주도한 무서운 테러리스트 단체쯤으로 알고 있었다. 특히 , 의혈단을 이끈 < 약산 김원봉 >은 공산주의자로 만 알고 있었음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고교 역사교과서 에도 아마 공산주의자 , 즉 빨갱이라고 기록 됐거나 , 그렇게 배웠을 것이라 고 생각해 본다.
김원봉 김산
< 홍범도 > 도 공식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단재 신채호 , 석주 이상용, 노은 김규식 등이 조국독립투쟁 으로 일제가 1900년 초 에 영원한 식민지화를 위해 만든 호적에 이분들의 독립운동 은 , 이름이 등재 되지못한 이유였지만 , 이분들 스스로가 일본국민이 되길 거부했기 때문에 무적자가 됐다. 해방 후 이승만은 이들을 공산주의자 로 매도하여 신원등재 를 거부 , 약 300여명이 무국적자가 된 채 , 반세기가 넘었지만 지금까지 속수무책으로 존 재 사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김원봉 ! 그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인물이었고, 그를 추포하기 위해 숱한 방법을 다 동원 하였으나 , 그때마다 그들은 김원봉의 역습에 공포에 떨어야 만 했다. 해방 후 임정요인과 김구선생 일행에 합류하여 군사부장 의 직함과 장군의 칭호를 받으며 북쪽이 아닌, 남쪽의 서울로 떳떳히 입성한 용맹스런 장군이었다.
단재 신채호.
( 광복 3개월 후 고국땅을 밟는 임정요인 과 김구선생 , 좌측 지청전장군 ) ( 김원봉은 이대열에 합튜하여 귀국 했을 것이다. )
그의 위용은 이승만과 장택상 의 비호아래 무소불위의 권력과 폭력을 반공의 깃발에 묶어 좌충우돌 하던 <김두한>조차 무서운 사람이라고 두려워 했던 증언에서 그의 과묵한 성격과 여러 정황이 그를 대변해 주고 있다.
장택상 여운형 (위로부터 남쪽만 정부수립을 고집했던 이승만 , 수도청장 장택상 , 백의사 고문 김두한 ) ( 약산 김원봉 )
( 친일경찰 노덕술 <좌측> )
그 이야긴 잠시 뒤로 미루고 < 의혈단 >의 활약상황 과 <약산 김원봉 >의 독립투쟁의 생생한 기록을 살펴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자. <김원봉> 이 철천지의 원수였으며 ,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모두가 증오의 대상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물밑에서 친일파에 대한 척결문제가 종종 수면위로 부상될 때 마다 그의 행적으로 미뤄 ,장택상 은 더욱 이를 갈았고, 이때는 이미<수도경찰청장>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김원봉>을 해할 명분이 명확치 않아 눈엣가시를 껌벅이며 눈에 담는 고통 속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당시 국민들의 <김원봉>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기 때문에 더욱 괴롭고 , 고통스러웠을 대목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일부 독립군 양성론자들은 군대양성노선을 포기하고 소수의 결사를 조직하여 암살·파괴 활동을 위해같은 해 11월 9일 만주 지린 성[吉林省] 파호문 밖 중국인 농부 집에서 신흥무관학교생인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巖)·신철휴(申喆休)·서상락(徐相洛)·한봉인(韓鳳仁)·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한봉근(韓鳳根), 밀양 3·1운동의 참가자인 윤세주(尹世胄)·김상윤(金相潤),상하이[上海] 출신의 곽경(郭敬), 배동선(裵東宣)·권준(權俊) 등 13명이 모여 암살·파괴 노선의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한다.단체 이름은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 위해 의열단으로 하고, '조선독립과 세계평등을 위해 신명을 바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약 10조를 행동지침으로 결정했다. 또한 암살대상을 조선총독부고관·군부수뇌·대만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밀정 및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의열단7가살'(義烈團七可殺)로, 파괴대상을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중요기관 등으로 규정했다.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 되었다
( 1920년대 부산 경찰서, 좌측 상단인물은 박재혁 의사 )
독립운동가 김익상은 한때 기독교계 학교 교직에 있었고, 잘 나가는 연초회사 중국지점에서 근무했었으나 나라독립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뛰쳐나와 서울로 잠입,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26세), 다시 그 이듬해 1922년 3월 상해 세관 부두에서 시찰 나온일본육군대장 다나카기이치 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살해에 실패, 체포돼 복역 중 감형 석방되었으나 미행하던 일경에게 피살된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리고 제2차 암살·파괴 운동을 계획하여 같은 해 6월 ' 이종암·최용덕(崔用德)을 국내에 파견해 조선무산자동지회장 김한(金翰)과 접촉, 행동준비를 했다.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이 독자적으로 '종로경찰서 투탄의거'를 감행한 뒤 일경의 대대적 검속으로 김한이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에서의 암살·파괴운동 준비는 김시현(金始顯)과 현직 경부 황옥(黃鈺)이 담당했다.이들은 영국인 쇼우를 끌어들여 폭탄과 선전문건을 국내로 반입했으나,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관련자 전원이 체포 되었다.이때 일본에 큰 공을 세운자는 <반민특위>때 유일하게 사형언도를 받은 친일경찰 김덕기 였다.
(사진은 : 김익상 의사)
( 황옥 경부 와 김시현 의사 )
1924년 1월 김지섭(金祉燮)의 '도쿄니주바시[東京二重橋] 폭탄투척의거', 1925년 10월 이종암 등의 '경북의열단사건', 과 함께 ,
김지섭 의열단원.
( 김상옥 )
1926년 1월 김원봉 이하 단원 12명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하여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중운동이 차지하는 위치, 군사이론 및 실전 등을 학습하고 같은 해 10월에 졸업했다. 그동안 김원봉·김성숙·장지락 등은 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中山大學)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포섭하는 과정에서 100 여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엄중 심사하여 단원에 가입 시켰다.
( 나석주 의사가 폭탄을 던져 파괴하려던 식산은행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에 잇었다.)
( 조선인 의 고혈을 빨던 동양척식 주식회사 와 나석주 의사 )
1926년 12월 폭탄을 식산은행에 던진것이 불발되자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철도회사를 찾아가 권총을 난사, 일인들을 사살한 후 추격하는 일경에 맞서다 지녔던 총으로 3발을 자신의 몸에쏘아 자결한 나석주는 이미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의혈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다.
(朝鮮民族革命黨)으로 확대·개편했다. 이어 민족주의적 강령과 정책을 채택하고 김원봉을 당수로, 김성숙·오성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민족혁명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광저우에 두고 활동했으나, 1927년 국공분열로 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유명무실해져 의열단으로 환원되었다. 1928년 10월 상하이에서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제국주의타도'·'조선독립만세'·'전민족적 혁명적 통일전선'·'자치운동타도'의 4대 슬로건과 20대 강령을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유일당운동 대신 국내의 광범한 노농대중에 기반한 조직적 투쟁을 주로 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좌파단원들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둥[廣東] 봉기에 참가했고, 김원봉 이하 소수단원들은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겼다.
( 이육사 < 본명 : 이원록>)
1935년 7월 5일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재미대한독립당·뉴욕대한민단·미주국민회·하와이국민회·국민동지회 등 민족주의 단체가 모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출범됨으로써 참가 단체들의 해소가 진행되고 의열단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선비의 고장 밀양은 경북 안동과 더불어 성리학의 본류로 알려져 있다. 그 맥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의열단원 으로 청춘을 조국 광복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산 김원봉은 밀양이 낳은 걸출한 인물이다. 1898년에 밀양에서 태어난 뒤에 십대에 망국인이 되었고, 표충사에서 독학으로 꿈을 키우며 1919년에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해서 일제에 대항하여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약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과 투쟁은 치열했다.
1919년 11월 10일은 약산이 21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된 날이다. 이후 10여년 가까이 진행된 의열단의 각종 암살, 폭탄투척 같은 의열 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조선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의열단의 투쟁은 그 차제가 무장독립투쟁사의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약산은 의열 투쟁에 머물지 않고 무장 독립군부대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 꿈은 '조선 의용대'의 창설로 이어졌고, 나중에 조선의용군이라는 무장부대로 맥을 이어갔다. 그들은 중국인과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독립투쟁사의 마지막은 찬란할 수 있었다.
( 국내진입작전 선봉을 맡은 광복군 특수부대 , 그러나 일본의 조기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1947년 암살전 몽양 여운형)
(1949년 암살당한 백범 김구)
나의눈으로본것들--( 김원봉 의 월북에 대한 배경 ) [출처] 김두한, 트루만, 장개석, 다일리(대립), 백의사등.. - 동아방송 김두한 육성증언 |작성자 외로운넘
김두한 (전 국회의원)
제42회 이박사 와 관계 - 이제까지 좌우합작 을 하려고 나선 세력들과 싸웠다는 얘기를 계속했는데 , 그당시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본거지는 이승만박사 진영이 었고 , 좌우합작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 만나서서 무슨 협의를 했는지 ? 몇 번이나 만났나요 ?
그런데 민주의원 산하에 반탁투쟁위원회라고 있지 않아요? 내가 그때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이고 경비부장이었어요. 그래서 찬탁을 하는 영화 배우, 연극 배우는 이제부터 노래, 연극, 영화를 못 하게 했어요. 총으로 갈기고 해서 걔네들이 노래, 연극, 영화를 일체 못 했어요. 그런데 내가 과격한 것을 잘 아니까 장택상 수도총장께서 나를 불러서, 될 수 있으면 앞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말고 혼 정도만 내라고 그러는 바람에 저번에 여운형씨를 납치했다가 죽이지 않고 놔줬잖아요. 두 번째는 그래도 좌우 합작을 하니까 시한 폭탄을 던졌는데 빗나갔단 말이에요. 그때 여운형이 안 죽었으니까 앞으로 좌우 합작이 되면 중대한 문제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좌우 합작은 공산당과 합작하는 것인데 선거철 때 중간 노선이라는 건 큰 두통거리거든요. 그런데 이박사께서 비서실장이었던 동산(東山) 윤치영 선생을 보내서 ‘날 좀 도와달라고’해요. 그래서 이박사께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김두한이 왔다고, 이박사가 웃으면서 애 많이 썼다고 영어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난 꼭 그런 데만 써먹는 거야. 다른 데는 안 써먹으니까.
이박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감투는 다른 사람 다 주고 우리 같은 사람은 순사부장도 안 시켜줬으니까. 또 시켜줘도 하지도 않지만……그때 이박사가 영어 신문을 놓고 영어로 얘기하는데 동산 선생이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지금 장개석 총통이 상하이에 있는데 광동으로 밀렸다’ 이거예요. 트루먼 정부가 마셜정책을 해서 총 한 방 못 쏘고 교섭으로 밀려가는데 이것 때문에 큰일이라는 거예요. 이 박사께서 ‘중국이 새빨개졌어요. 트루먼과 미국무성의 중국 정책이 실패하는데 여기서도 좌우 합작을 해서 여운형, 김규식 박사한테다가 정권을 주려고 움직이니 큰일났다’는 거예요. 공산당은 중대한 문제인데 미스터 김이 심각하게 생각해서 빨리 처리해 주기 바란다는 거예요.이박사가 ‘죽여라!’ 그런 말은 안 하거든요.
대개 보면 미국식 사고 방식은 그 사람이 있으면 이 일은 못 할 테니, 이상하게 장애가 되니, 우리가 건국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곤란하다는 식이에요.
그러면서 이박사가 하는 말이 ‘며칠 전에 얘기를 들어 보니까 김규식 박사에 대해서는 미스터 김이 가서 어떻게 해서 좌우 합작에서 자진 탈퇴했다 하는데’ 하는 거예요.
그뿐 아니라 김규식 박사 대신 대한임시정부 계통에서 김원봉이 나오려는 것을 내가 습격을 했잖아요.신문에 굉장히 크게 났습니다. 김원봉은 의혈단 단장으로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의혈단 단장 김원봉 장군, 그때는 장군이거든요.
그는 대한임시정부의 군사부장으로 왔는데 그 유명한 김원봉 씨가 똥통 밑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고 신문이 그때 굉장했어요. 그런데 김원봉 씨는 이북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장사 있나? 총질하면 가는 건데. 그러니까 이박사가 대단히 애썼다고 하시더군요. ( 이상이 전 국회의원 김두한씨 의 약산 김원봉에 대한 증언이다 )
동아방송의 육성녹음 일부를 발췌함으로 약산 김원봉의 월북 배경을 생생하게 알 수 있을 것같다. 결국 , 김원봉은 자진하여 월북 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테러로 약산 을 북으로 쫓아내 빨갱일 만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만의 야망을 위해 민족이 반토막으로 분열이 되던 말던 ,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국민에게 테러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오른 이승만 , 우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
침략국 일본에 대항해 싸운 ,안중근의사 나 김구 , 윤봉길 , 약산 김원봉을 < 테러리스트>로 매도하고 성토한 이승만 , 그러나 그는 침략국 일본이 아닌 , 자국민에게 테러를 감행했다. 어찌 설명해야 할것인지 ? 그의 테러집단은 변모하여 깡패들로 구성된 화랑동지회 를 마지막으로 정치운명이 끝난다. 이때는 < 깡패 공화국><사바사바 공화국> <의회 민주주의 실종 공화국><민주주의 독재공화국>이 었다.
그러나 새정부들어 임정의 역사를 폐기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옹립했으니.....지나가는 개도 웃을일이다. 순국선열들이 지하에서 원통히 통곡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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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지식] 김원봉 밀양시에서 태어난 김원봉 열사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2006-03-02 09:47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김산이 김원봉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였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김원봉은 의열단장,조선의용대 창설,임시정부광복군 부사령,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북한정부 검열상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이런 화려한 발자취가 오히려 그를 남북 모두에게서 잊혀지게 만들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월북을 한 이유로 그의 일가친척이 풍비박산이 났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숙청되고 말았다. 그가 좌익인가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제국주의침략기의 독립이라는 목표는 이데올로기보다 언제나 우선되어야 했던 것이다.
1.어린시절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나 이후 상경하여 민족주의성향이 짙은 중앙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현재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 중앙학교는 계몽운동가들이 민족독립의 후진양성 차원에서 만든 학교인데 김원봉이 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민족주의자인 유근이 교장으로 있었다. 따라서 초기 김원봉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교육 받은 듯 싶다. 교장 유근이 학생들을 강화도 마니산으로 데리고 가서 단군이야기를 해주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학생과 교사가 모두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김원봉은 학교를 중퇴하고 선후배인 김약수, 이여성과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원봉의 호가 약산인데 우국지사이자 고모부인 홍명규가 물과 같아라 약수, 별과 같아라 여성, 산과 같아라 약산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김약수는 북풍회 계열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해방이후에는 남한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반민특위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친일파 숙청에 앞장서다가 국회쁘락치사건에 연류되어 수감되어 있다가 6.25전쟁 중 월북(혹은 납북)하였다. 이여성은 일월회 계열로 역시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했으며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여성은 한국복식사에 큰 획을 그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 대신 인민당 대표로 남북연석회담에 참여하면서 월북하였다. 김약수, 이여성 모두 나중에는 북한에서 숙청되었다.
2.의열단 활동과 황포군관학교 입학 “과거 조선에 관한 흉악한 음모로서 이미 폭로된 것은 모두 이들의 소위라 할 만큼 의열단은 광포한 암살단으로,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란 청년을 단장으로 하고 있다. 동단체가 조직된 것은 다이쇼(대정) 9년으로 그후 동인은 상해, 북경, 천진을 구치(驅馳)하면서 항상 음모를 기획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고심하고 있다.” 당시 악명높던 마루야마 조선총독부 경무부장의 담화문에서….. 1919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백(단장)이 된다. 앞에 연재했던 조선총독부 폭파사건, 다나카 기이치 저격사건,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외에도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도쿄 이중교 폭탄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김달하, 박용만 등 친일파 암살 등 의열단은 수많은 대일 테러와 암살을 감행하였다. 김원봉은 1922년 겨울 북경에서 평소 존경해 오던 신채호에게 의열단 활동의 지침이 될 만한 선언서를 작성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여기서 마련된 것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 이다. 조선혁명선언의 내용은 아나키즘적인 사상이 엿보이는데 의열단에서도 유자명 같은 이는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러한 테러, 암살 활동으로는 조국독립을 성취하기 어렵다고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물론 김원봉은 처음부터 대일 테러만으로 독립 운동을 해낼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기 전에 국내에서도 광복단이라는 암살조직이 있었는데 박상진을 단장으로 하고 김좌진 등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친일거부인 장승원을 암살한 사건인데 장승원은 해방공간에서 수도청장을 역임하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아버지이다. 김원봉은 광복단의 단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광복단의 운동방향에는 회의적이였다.
즉 단발적인 테러나 암살로는 조국광복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인데 자신이 의열단 활동으로 하여금 그 것을 더욱 절실히 느낀듯하다. 1926년 김원봉은 강력한 군사조직만이 독립을 이룰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그 첫걸음으로 단원들을 이끌고 장세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이미 김원봉은 명성이 내외로 떨쳐져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가 다시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동지들도 있었고, 그의 결심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상윤 같은 이는 의열단이 해체되는 것을 비관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로 졸업하고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 투신하게 된다.
3. 조국의 독립에 주의, 주장은 없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제1차국공합작을 깨뜨리는 구테타를 일으킨다. 김원봉은 이 사건을 좌우합작운동을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반 장개석 진영에 서게 되어 중국공산당과 보조를 함께 하기도 하며 국내에서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와있던 안광천과 함께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하여 중국과 조선에서 온 청년들을 훈련시켜 조선 국내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때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졸업한 권인갑이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는데 테러리스트 김원봉이 공산주의운동가라는 사실로 국내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김원봉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연계한 흔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1국1당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자인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그가 비정통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저 급진적인 민족주의자일 뿐인 것이다. 한편 황포군관학교의 졸업은 김원봉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황포군관학교는 당시에 우리나라의 육사를 졸업한 것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사실은 중국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황포 동창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중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명으로 남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만주사변 이후 김원봉은 국민당세력과 화해하고 1932년 장개석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남경 외부에 설립하고 혁명 요원 양성에 나선다. 150명 가량의 졸업생 가운데 많은 이가 후에 조선의용대에 가담하게 된다. 김원봉은 중국내 항일민족세력의 단합을 모색하면서 분열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의 통일 전선을 이룩하게 된다. 대일전선통일동맹과 그 후신인 민족혁명당에는 의열단세력을 비롯, 한국독립당(조소앙, 양기탁), 대한독립당(김규식), 신한독립당(홍진, 이청천),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등 5개 정당과 재미 4개 단체를 합하여 모두 9개 정당과 단체였다. 그러나 김구 세력은 참가를 거부하였고, 김원봉의 좌우익을 가리지 않는 급진적인 성향을 비판하던 일부세력이 빠져나가 1937년에는 임시정부세력이 주도하는 한국광복진선과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항일진선이 양립하게 되었다.
4.분단의 비극속으로 사라지다.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무한전투가 한창일 무렵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황하강 이남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전개한 일로써 일정한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즉 독자적인 조선독립군이 아니고 무장군대도 아닌, 이름 그대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돕는 보조군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원봉의 좌장격인 윤세주와 우장격인 박효삼이 군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건너가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것이 김원봉이 화북지역의 무장세력과 연합을 모색하려 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윤세주 등이 화북으로 건너가고 김원봉이 관내에 남은 것은 갈등의 표출이 아니라 관내에 김원봉이 남아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계속받으려는 의도 였다는 것이다. 김원봉이 윤세주의 사망이후 석정동지약사(석정은 윤세주의 호)를 기술한 점은 김원봉과 윤세주의 우애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주력부대가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으로 건너간 후 김원봉은 남은 세력들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다.(총사령 이청천) 또한 1944년 4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해 지자 임시정부를 나와 좌익쪽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6년 봄 수십년 만에 찾은 밀양 고향을 찾은 김원봉은 열렬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원봉이 오는길에는 광목으로 카페트가 깔렸으며, 밀양국민학교에서 열린 환영대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읍내 극장에서 상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우익측과 결별한 김원봉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김원봉이 연류되어 체포되었는데 김원봉을 체포한 사람이 악명높은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였다. 결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풀려 나기는 하였지만 친일파나 우익들의 표적이 되어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원봉은 5개의 거처를 마련하고 테러를 피해 항상 옮겨다니며 잠을 잤다고 한다. 1948년 김원봉은 이승만의 남한단정에 반대하고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다시 월남하지 않고 그 곳에 남아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이후 1954년 노동상,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까지 승진하고 이듬해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당시 김원봉 계열과 납북된 김구계열이 모두 숙청되었는데 아마 김원봉도 함께 숙청된 듯 싶다. 한때 자살했다는 설과 강등되어 시골에서 생활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였으나 확실치 않다. 북한에는 빨치산 투쟁가들을 위한 혁명열사릉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자들을 위한 애국열사릉이 있는데 숙청이 되었어도 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김원봉의 무덤은 애국열사릉에서 찾아볼수 없다고 한다.
김원봉은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 정부와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되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었다기 보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보다 조선의 독립을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등 모두 5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역시 북한에서 장개석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분단이 낳은 수많은 비극 중에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자료: <약산과 의열단> 박래원, 깊은샘: <김원봉연구>염인호, 창비:<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김영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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