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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생명주일입니다. 생명주일이라고 명한 것은 받는 생명과 주는 생명을 분명히 생각해서 했으리라 저는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받는 생명은 성탄에 맞춰져 있고, 주는 생명은 부활에 맞춰져 있는데 부활로 가기 전에 반드시 죽음을 거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것을 버리는제 십자가를 지는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줬습니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받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생명을 남에게 줄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에게 척한 사람이 되지 말고 착한 사람이 되자고 말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척 기술자가 되지 말고, 착 봉사자가 되라.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 마치 기술자가 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제가 미사 기술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외적인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이룰 수 있고, 내적인 것이 기초가 되어 외적인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척한 기술자는 바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착한 봉사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착한 모습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발치에 그 값비싼 향유를 부으며 머리칼로 닦아 드리니까, 유다가 옆에서 하는 말이, 저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은가. 누가 봐도 유다의 이 말은 틀렸다고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그러나 속마음도 이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속마음의 진실이 없는 상태에서 사실을 전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봉사자의 모습은 예를 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누구나 그냥 슬쩍 보고 ‘이건 내 일이 아니야’. 말은 안 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내 일은 아니라 사제도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사람들도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차라리 낫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그렇게 쓰러진 사람을 가까이 가지 말라는 율법이 있었고 그들은 율법에 따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그러나 착한 사마리아사람은 율법을 뛰어넘고 사랑을 통해서 이것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 쓰러진 사람이 바로 주님이었구나. 저 주님은 나를 지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주님께 가까이 가서 도움을 드려야 되겠다.아마 착한 사마리아사람은 아마 심판받을 때 이런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들었을 겁니다. 내가 쓰러졌을 때, 아파할 때, 힘들어할 때, 절대적 도움을 필요할 때, 그대는 외면하지 않고 나를 잘 보살펴 주었으니 내가 대신 갚아야 하겠다. 이런 말씀을 했으리라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척한 사람이 되지 말고 착한 사람이 되십시오. 척한 사람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오만을 만들어냅니다. 착한 사람은 회개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보속을 만들어 냅니다. 이 점도 같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택이라는 단어와 사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선택, 누가 선택했나. 성부 아버지께서 우리를 선택했습니다.사제는 누가 될 것인가. 선택받은 우리가 사제가 되어야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선택했기에 나는 성탄을 맡게 되었고, 내가 사제의 길에 동참했기에 아픔이 따르지만 그러나 부활을 얻어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제가 무엇인가.사제가 무엇이냐고 하느냐면 사제는 너를 위해서 내가 죽는 겁니다. 그런데 너가 나를 위해서 죽으면 열심한 신자다. 사람 참 좋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사제인 제가 이름을 사제라고 이름까지 붙여놓으면서 언제나 바로 내 앞에 있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주라는 것을 바친 적이 있었던가.가만히 있을 때 봐도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고 그러면 죽을 때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 갈 것인가 했을 때도 너무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필립보에게도 말합니다. 나는 계속 보이고 있고, 아버지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인성을 봤으니 신성을 볼 것이다. 그러니 이 많은 사람들이바로 주님 아니겠습니까. 그저 이 사람들은 주님을 대하듯이 우리가 인성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성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피정을 하면서 오늘 성사가 된 사람, 보이는 것은 예수님인데,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로, 메시아라고 믿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고 함께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는 아주 진실하게 솔직하게 잘합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데 주님은 내가 가는 길은, 당신이 가는 길은 안다고 합니다. 저는 거짓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제자들은 아는 것처럼 한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척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토마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거고 모르는 거고, 아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때 다 모르고 있으면서, 왜 토마스만 모른다고 얘기하실까. 토마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너가 진실을 알고 있기에, 진실을 전하고 있으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말씀입니다.
그 길은 무슨 길인가. 십자가의 일이었습니다.십자가에 길에는 수직의 길이 있고 수평의 길이 있습니다. 그 수직의 길이 받은 생명의 길이고, 수평의 길은 주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받은 생명과 주는 생명, 이 점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받은 생명은 뭡니까 성탄입니다. 주는 생명은 뭡니까 부활입니다.받은 이유가 뭡니까 결국은 주기 위해서 받은 겁니다. 그래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가 있습니다. 공짜로 받았으니까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매우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라 했는데 안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데 십자가는 상대가 지고, 나는 가장 작은 십자가를 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분명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깊이 헤아려 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을 해 봅니다.그래서 여러분들 이제 생명을 받은 것은 바로 선택이었고, 이제는 이 생명을 주는 것을 사제로, 여러분들은 세상의 사제이고, 저는 교회의 사제입니다. 똑같은 사제단에 가입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해서 내 앞에 있는, 내 옆에 있는 이 형제에게 목숨을 주는 것을 맞출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을 여러분들이 늘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그것을 실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또다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름은 완전한데 실천은 불안전한 모습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에 대해서 얘기할 때 생명은 이렇고 저렇고 의논하면서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얘기하는데, 실제로 생명을 봉헌하는 삶에 사람들이 미진하다면 그러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겁니까. 그 말이 바로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야고보서의 말씀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참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은 것이고 방관하는 사람은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동참하는 사람은 내 생명이 사라지면서 상대의 생명을 살릴 것이오.방관하는 사람은 내 생명을 살리면서 상대의 생명을 죽일 것입니다.똑같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는 주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말씀을 들었고, 마귀도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말씀도 유다도 그랬을 것입니다.그런데 베드로는 후회를 했습니다. 똑같이 유다도 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여기에 포인트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떠들어봐야 그것이 우리가 사람한테 인정받을 받겠지만, 주님한테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고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영원한 가치로 삼지 않는 초기 신자들의 마음에는, 세상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은 언제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분배가 공정하지 않아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터뜨렸는데, 믿는 이들도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일곱 부제를 뽑고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어쩌면 영적 교회와 제도 교회인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 사제들이 어떻게 보면 세상의 일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고, 특별히 정치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얘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늘의 사제들은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라는 사도들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인가 받은 생명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무엇인가 주는 생명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받은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이것을 줄 것을 연상하면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누구에게 전달될 것인가를 깊이 헤아리고, 꼭 필요한 사람한테 이것이 전달되고, 사제는 잠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 그리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나에게 얼마를 줬다. 무엇을 줬다. 이것은 교회에게 준 것이지 사제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세워진 그리스도인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할 사회적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영적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제도들은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영적 집을 짓는 데 쓰이는 살아있는 돌로 만드신다고 고백합니다.믿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지만, 불신은 사람들을 편견과 오해의 걸림돌이 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려면 내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고그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일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용기를 청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생명주일 만나서 그 생명주일이 태동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 본다면 바로 내 생명을 잘 보존하라고 이런 생명의 날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바로 내가 만나는 그 상대의 생명을 잘 보필하고 잘 보살펴주고 예수님을 향해서 내 목숨을 내 생명을 그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하라고 한 말씀으로 저는 알아들었습니다. 보존하라고 내 생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용하라고 주는 생명을 이제 진정으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사용하고 나면 결국 우리는 죽음을 만나게 되고 그 죽음은 부활의 티켓이 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장욱진 그 화가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생명을 다 연소시키고 가겠노라’ 이미 불은 붙었습니다. 연탄재가 되었다는, 반만 타고 죽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타고 꺼지는 것처럼, 내 몸도 이미 불이 붙었습니다. 완전히 연소시키고 아버지 앞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이런 멋진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알아듣고 있는지 깊이 헤아려 보고 오늘 이 말씀을 잘 되새기고, 나 또한 완전히 연소시켜 하얀 연탄이 되어 주님의 앞에 찾아갈 때,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하고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님처럼 이제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생명을 봉헌하는 생명의 날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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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