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외교의 허실, 미-중에 낀 한국
서희 외교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고,
고려가 실효 지배하던 강동6주를 공인받은 것뿐이다.
하지만 승산 없는 전쟁을 피했고,
고려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에서 중요 위상을 얻어내는 계기가 됐다.
국제관계를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포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2017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행사장을 빠져나가며 손을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외교로 평가되는 서희의 강동6주 획득은
세 치 혀로 침공한 거란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했다는 신화로만 채색된다.
당시 고려가 처한 상황과 지불한 대가는 간과된다
첫째,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떠오르는 거란에 적대관계로 일관하다가 침공당했다.
고려는 초전에서 패배하고, 적장 소손녕의 80만 대군 진격 위협에 시달렸다.
서경(평양) 이북을 할양해주자는 할지론을 국왕 성종이 천명할 정도로 위기 상황이었다.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선제적으로 외교협상에 나선 것이 아니다.
둘째, 서경 이북 할지론에서 보듯, 서희가 획득한 강동6주(현 평안북도 서쪽)는 거란의 영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조 이래 북진정책에 따라 성종 때에는 강동6주를 포함한 압록강 이남은 고려가 실효적으로 지배해가던 영역이었다.
거란은 고려에 그 실효적 지배를 인정해준 것뿐이다. 거란 입장에서는 강동6주 안팎의 여진족 통제를 고려에 맡기는 동시에
고려와의 국경을 압록강으로 설정해 그 이북으로 진출을 막는 공식적인 조약이었다.
셋째, 고려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었다. 거란의 신하가 되는 공식적인 신속 관계가 됐다.
기존의 사대관계였던 송나라와는 단교했다.
서희 외교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 위협 앞에서 고려는 거란이 요구하던 사대관계를 수락하는 대가로
강동6주의 실효 지배를 인정받는 거래를 한 것이다. 서희 외교에 대한 폄하가 아니다.
서희는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거란이 후방인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화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는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협상을 했다. 서희는 압록강 이북 영역도 협상의 대상으로 삼자고 주장했으나,
강화를 서두르라는 조정의 채근에 밀렸다.
고려로서는 사대관계의 대상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꾸며 승산 없는 전쟁을 피했고 시간을 벌었다.
고려는 그 후 송과 외교를 단속적으로 유지하는 한편, 군비를 확충해 거란과는 두차례 더 전쟁을 벌인 끝에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과의 분쟁을 종료했다. 거란과의 사대관계는 유지됐으나 고려는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서
중요한 국가가 됐다.
이정신 한남대 교수의 ‘거란과의 외교’ 등이 실린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동북아역사재단)는
고대 이후 한반도 국가들이 중원의 기존 패권국가와 이에 도전하는 신흥세력 사이에서 몸부림친 우리 대외정책의 영욕을 다뤘다.
그 핵심은 두 세력 사이에서 동아시아의 공인된 국제질서였던 사대책봉 관계를 얼마나 유연하게 설정하냐였다.
사대책봉 관계는 상하 관계나 불평등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원의 패권국과 주변국은 조공과 책봉을 통해
서로의 위상을 인정하는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특히 패권국은 주변국의 조공에 대한 답례인 회사를 통해
그 이상의 혜택을 부여하곤 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이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
중원의 패권국은 고정불변이 아니고, 이에 따라 사대관계 역시 대상이 바뀌는 것이 고려 때까지
한반도 역대 국가들의 대외정책이었다. 고구려는 사대관계의 국가들인 전연 등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통한 전쟁도 불사했다.
우리 대외정책 역사에서 비극은 조선에 들어서 사대관계가 ‘이소사대’의 경직된 모화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명·청 교체기에 병자호란이라는 참화로 이어졌다.
서희와 그 전후의 대외정책은 최근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나?
첫째, 사대관계는 지금으로 치면 패권국과의 동맹관계이다.
사대관계가 고정불변이 아니듯, 역사의 모든 패권국과의 동맹, 현재의 한-미 동맹 역시 마찬가지이다.
올해 초 한 민간 연구원의 새해 국제정세 전망에서 “한국의 선택은 자명하다. … 자유주의 국제질서다”라고 단언했다.
기존의 미국 패권질서를 옹호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혀서 주전을 부르짖는 목소리로 들린다.
둘째, 패권국가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한 국가의 ‘자주성’이란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다.
과거의 사대관계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된 국제질서였듯이, 현재 패권국과의 동맹인 한-미 동맹 역시 마찬가지다.
사대관계 속의 한반도 국가들은 중원 패권국가의 예속적 번국이 아니었고, 패권국을 상대로 실리를 취하려 했다.
진보진영 내의 적지 않은 이들이 한-미 동맹을 우리의 자주성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또다른 도그마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격화되고, 한국은 그 중간에 끼이고 있다.
서희 외교에서 보듯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외교는 없다.
무엇보다도 국제관계를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포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원문보기: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8229.html#csidx115291e5aa68540b78e5605e8aa473e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격화되고,
한국은 그 중간에 끼이고 있다.
서희 외교에서 보듯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외교는 없다.
무엇보다도 국제관계를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포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본문)
몇 가지 보충 내지는 반론입니다.
1. 강동6주가 기존에 고려가 실효지배하던 지역??
당시 기록을 보면, 그리 보기가 어렵습니다. 서희가 요나라에게 댄 핑계는 '여진이 양국의 교통을 막고 있어서' 라고 할 정도로 강동6주는 당시 여진의 영역이었습니다. 다만, 고려가 실력이 없어 이 지역 장악을 못했다기보다는 이 지역을 장악하는 게 요나라를 자극할 수 있어 자제했었다고 봐야겠지요.
국경이 '선'으로 정해지는 요즘과 달리 과거의 국경은 양국 사이에 '중간지대'를 설정하는 '면' 개념의 국경이 많았는데, 강동6주도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면 개념의 국경(중간지대)에 가까웠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이 때 서희가 교통불편을 핑계로 이 지역을 고려가 장악하는 것에 대해 요나라의 양해를 구한 것이지요.
그래서 요나라의 양해를 구한 뒤에 6성을 쌓아 비로소 군사를 두고 실효 지배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강동6주에 군사거점도 두지 못하고 무력투사를 하기도 힘들었으니 실효지배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2. 고려가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어 거란의 동맹국 또는 신속관계가 되는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송과 단교했다?
명목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죠.
소손녕의 1차 침입 시의 서희의 교섭대로라면, 고려는 송과 단교하고 강동6주를 교통로 삼아 요나라에 입조하여 요나라에 사대했어야 합니다. 이게 조건이었죠. 하지만 고려는 저 조건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송나라와도 몰래 교류를 했었고, 요나라에 그리 고분고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라는 황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 형태로 고려를 다시 침략합니다. 이게 2차 침략입니다. 그 목적은 강동6주가 고려에 중요하므로 강동6주를 빼앗고, 고려를
더 굴복시키는 것이었지요. 이 때 고려는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하지만 국왕이 피난하면서까지 저항하였고, 요나라도 전쟁이 길어지고 병참이 늘어져 부담이 커졌습니다. 이 때 고려가 형식적으로 요나라에 입조하겠다고 하여 요나라는 군대를 물립니다.
이후에도 고려는 요나라에 잘 입조하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나라와 교류를 끊다시피하고 다시 송나라와 교류하지요. 그래서 요나라는 강동6주를 달라고 하다가 안 되니까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합니다. 이게 3차 침략입니다. 이 때 흥화진전투로 수공을 벌여 요나라 군의 기를 꺾은 후, 귀주의 평원에서 맞붙어 대회전을 벌여 이김으로써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에 뭐라고 할 힘을 잃게 되고, 동아시아에서 고려는 초강대국 요나라를 군사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군사 강국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이 글 논지가 마치 미중무역갈등에서 일방적인 미국편은 위험하단 뜻인거 같은데 그러면서 중국편을 드는 듯한 느낌이 있음, 근데 미국도 싫지만 과연 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더라도 중국보단 미국이 더 클 듯, 그냥 잘난척하고 싶어 글 쓴듯
3. 서희의 협상 이후 고려와의 국경을 압록강으로 설정하였다?
이것도 조금 애매한 것이.....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은 엄밀히 말해 압록강 하류 전체는 아니었습니다. 압록강 이남(최하류 쪽)에 요나라 영역인 보주성과 내원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2성은 현재의 의주 지역입니다. 즉, 강동6주를 고려가 차지했음에도 요나라 또한 압록강을 건너와 현재의 의주 지역을 장악했다는 겁니다.
이 의주 지역을 언제 고려가 확보하느냐? 요나라 멸망 이후입니다. 요나라 멸망시 고려가 보주성 등을 장악해서 압록강을 국경으로 확실히 굳히려 하는데 금나라가 보주성 등을 내놓으리고 하는데, 고려는 내놓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몇 번의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 금나라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보주성을 고려 영역으로 인정해 버립니다. 이 때부터 고려가 확실하게 압록강 이남을 장악하게 됩니다.
당시 고려의 경우, 어떤 패권국에게 크게 의존하거나 패권국에게 고개를 숙이는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동맹관계의 국가가 있기는 했는가 싶을 정도로 요나라나 송나라 등과 느슨한 관계만을 맺고 있던 나라였지요.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패권국(요나라)과 전쟁도 불사하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조선과 차이가 있다면, 후금(청)이 침략해 올 때(병자호란 등) 비참하게 항복하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요나라가 침략해 올 때 이걸 저항하거나 격퇴할 능력이 있었다는 차이지요. 고려라고 해서 전쟁을 안 겪은 게 아닙니다.
그런 고려가 과연 본문에서 말하는 취지와 부합하는 나라일 지는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