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남미의 얼굴 마추픽추 [17일째]
● 마추픽추 - 오얀따이땀보 - 쿠스코
왜 남미로 여행을 가려고 하느냐 물어 오는 친구들에게 여러 매력과 그곳에서 해 보고싶은 활동들을 나열하면, 각설하고 딱 한가지만 말해 보라고 합니다. 주저 없이 마추픽추를 보러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를 재차 궁금해하면 다음 세 가지로 대답해 주었지요.
첫째는 산 정상 아래 흰 구름을 두른 높은 산들이 마추픽추를 둘러싸고 있는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다른 신성한 존재가 살고 있는 것 같고, 신비스럽고, 때로는 몽환적으로까지 느껴집니다.
둘째로는 2,400m 이상의 높은 산 위에 거대하고 단단한 돌을 떡 주무르듯 하여, 쌓고 지은 석조 건축의 아름다움과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불가사의한 문명의 흔적들을 확인해 보고 싶은 갈망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위대한 문명을 이룬 제국이 이렇다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곳이라 매력을 더하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습니다.
‘마추픽추는 남미의 얼굴’ 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곳은 1911년 미국의 고고 학자인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전설 속의 황금 도시를 찾아 다니다가 발견한 유적지입니다. “도시의 매력과 마법은 이 세계 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눈 덮인 산 봉우리가 끝없는 높이에서 구름을 굽어보고, 다채로운 색깔의 절벽들이 깎아지른 듯이 솟아 올라 도시를 비추고 있다. 이곳에는 나무와 꽃들이 만발하고 정글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발견 당시의 소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우루밤바 강이 정면으로 보이고, 강으로부터 450m정도 올라간 절벽 위에 도시가 자리 잡았는데, 안개가 낀 날에는 마추픽추 전체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냅니다. 산 아래에서는 볼 수 없어 ‘잃어버린 공중 도시’, 또는 ‘잃어버린 정원’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트레킹하면서 갈 수 있으나 일정이 짧은 단기 여행자에게는 실행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셔틀버스에 올라 구불구불한 산 길을 따라 20여분쯤 지나서 마추픽추를 만났습니다. 오르면서 창밖을 보니 삐끗하면 낭떠러지행이라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도착해 보니 열심히 비옷을 팔고 있는 상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비가 그칠 것도 같고, 실비처럼 느껴져 우의는 준비하지 않은 채 출발했습니다.
꿈같은 환상적인 풍광을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기에 정해진 행로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관광객들과 동선이 겹쳐져 정체가 생깁니다. 외부인의 출몰을 감시하는 망지기의 문을 지나, 마추픽추 유적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을 들어서자 마추픽추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백 개의 계단식 밭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펼쳐 있고,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서민들이 살았던 집, 제사장이나 귀족이 살던 집, 식량 저장 창고를 지나 젊은 봉우리라는 뜻의 와이나픽추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가서야, 인증 사진을 찍어 봅니다. 콘도르 신전, 태양의 신전, 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집을 지나 제례용 석판 같은 것을 돌아 보면서, 이곳은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주로 사용된 곳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역사 산책’ 에는 이곳의 건축 년도가 15세기 초라고 되어 있으나, 위키백과에는 15세기 중후반으로 되어 있습니다. 건설 목적은 스페인 군대를 피하려고 지은 요새이며, 군대 훈련장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믿기 어렵고, 건설 목적과 누가 살았는지에 대하여도 설이 분분합니다. 황제의 임시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규모로는 만 여명의 노동자가 약 40년 가량 동원되어야 가능한 건축인데, 계단식 밭들의 총면적이 고작 4.9 헥타르인 점으로 보아, 750여명을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식량 저장 창고인 꼴까(Colca)는 잉카 제국이 만든 대형 냉장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바닥에는 공기가 통하는 환기구를 만들어 습기로 인한 부패를 방지하고, 저장 식량 사이사이에 민트 허브를 끼워 넣어 병충해를 예방하였다니 얼마나 지혜로운 건축 기술입니까? 물론 우리나라에도 신라시대 때부터 얼음을 저장 보관하는 장빙 장치로써 석빙고가 있기는 하였지만, 얼음 저장과는 다른 냉장 시설입니다. 철기류의 연장도 없이 돌망치나 청동 손도끼나 끌만으로 만들어냈다 하나 그 정교함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돌로 만든 건축물의 견고함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눈에는 단순해 보이나 소박한 예술성까지도 느껴집니다. 쿠스코에서 본 12각 돌에도 놀랐었는데, 여기에는 36각의 돌도 있습니다.
당시의 잉카제국은 지역을 세분화하여 용도를 정하고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보면, 현대의 어느 도시에 견주어 보아도 손색없는 계획도시이자, 복합도시입니다. 제국 전역을 잇는 30,000km에 달하는 도로망을 구축하고, 일정한 거리마다 우리 식의 역참인 탐보(Tambo)를 두어, 파발마 대신 운송수단으로 사용했던 라마와 전령인 차스키(Chasqui)의 쉼터로 활용하였습니다.
잉카 제국은 고도의 문명으로 남미 지역을 호령한 황제의 나라였습니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천만 명에 달했던 제국입니다. 이런 제국이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수백명의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의하여 맞게 되는 허무한 종말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보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세상사에서 일어나야 했던 일은 일어나야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졌기에 허망한 역사의 끝이라고 했고, 드라마라고 느껴질 수 밖에 없던 것일까요?
당시에 에스파냐인들이 퍼뜨린 천연두로 이미 남미의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고, 잉카 제국 역시 폐허로 변해가는 중이었습니다. 병이 창궐하면서 직격탄을 맞은 11대 황제 잉카 우이아나 카팍(Huyana Capac)과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니난쿠요치(Ninan Cuyochi)마저 천연두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왕위 계승권을 두고 적자인 우아스 카르(Huas Car)와 서자인 아타우 알파(Atauhu Alpa)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은 잉카의 몰락을 가속화하였습니다. 배 다른 형제 사이에 벌인 전쟁은 천연두로 타격을 입은 잉카제국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것입니다.
이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둔 30대 초반의 자신만만한 아타우알파는 한 줌도 안 되는 겁 없는 이방인들을 참으로 가소롭게 여겨 카하마르카에서 배짱이 두둑한 피사로와 세기의 대면을 하게 됩니다. 1532년 11월16일 아타우알파 황제는 거드름을 피우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5~6만에 이르는 대부분의 병력은 외곽에 대기시키고, 6~7천명의 잉카 귀족과 병사들을 대동하고 서서히 카하마르카 광장에 들어섰습니다. 피사로는 전날 밤부터 광장 주위 건물에 대포와 기병, 보병 등 전 병력 160~170명을 매복시켜 놓았습니다. 사방에 깔린 잉카대군의 엄청난 위세에 스페인 병사들은 잠이 올 리 없었습니다. 매복중인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신들도 모르게 오줌을 질질 쌌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사로가 보낸 신부로부터 황제와의 대화가 결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그의 결단은 매우 신속하여 지체하지 않고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황제를 사로잡기로 했습니다. 피사로가 원주민 사이로 뛰어 들면서 갑자기 불벼락과 같은 대포가 터지고 이에 놀람 말들이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을 보고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싸우기보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대학살에 가까웠으며, 이로 인해 잉카제국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