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시조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 | 1世 |
|
|
|
|
|
| 참정판병부사 진준(陳俊) | 2世 |
|
|
|
|
| 2子 휘 광수 (光脩) | 1子 휘 광순(光恂) -譜:光純 | 3世 |
|
|
|
| 2子 휘 온(溫) 예빈경파조 ▼ 나주진씨 시조 | 1子 휘 식(湜) 어사공파조 |
| 4世 |
| 3子 휘 각(慤) | 2子 휘 신(信) |
| 1子 휘 취(就) |
|
| 5世 |
| 사위(壻) 청주 한광윤(韓光胤) 配:나주진씨 (羅州陳氏) |
|
| 子 휘 영찬 (英贊) |
|
| 6世 |
|
|
| 2子 휘 인각 (麟角) | 1子 휘 용각 (龍角) |
|
| 7世 |
|
|
|
|
|
|
| 8世 |
여양진씨 예빈경파 (가상)손록재구도
其二
|
|
|
|
|
| 시조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 | 1世 |
|
|
|
|
|
| 참정판병부사 진준(陳俊) | 2世 |
|
|
|
|
| 2子 휘 광수 (光脩) | 1子 휘 광순(光恂) -譜:光純 | 3世 |
|
|
|
| 2子 휘 온(溫) 예빈경파조 ▼ ☞나주진씨 (羅州陳氏) 시조 | 1子 휘 식(湜) 어사공파조 |
| 4世 |
3子 휘 각(慤) | 2子 휘 신(信) |
|
| 1子 휘 취(就) |
|
| 5世 |
사위(壻) 청주 한광윤(韓光胤) 配:나주진씨 (羅州陳氏) |
| 2子 휘 자화 (子和) 나주인羅州人 근거:고려사 |
| 1子 휘 자후 (子厚)
|
|
| 6世 |
|
|
|
| 子 휘 영찬 (英贊)
|
|
| 7世 |
|
|
| 2子 휘 인각 (麟角) | 1子 휘 용각 (龍角) |
|
| 8世 |
참고자료 >나주진씨에 대하여....여양진씨 자료
>웹상에서... 萬姓譜(만성보)에 나오는 羅州陳氏(나주진씨) 시조는 諱 英略(영략) 장군으로서
그의 아들은 戶長(호장) 諱 懿(의)로 되어있다.
이분들은 고려초 서기 1030년대 인물로서 淸州韓氏(청주한씨) 족보에 6世 諱 光胤(광윤 1) <守司空左僕야(수사공좌복야)>의
配(배) 通儀郡(통의군) 나주진씨 父 戶長(호장) 諱 懿(의) (古名 世長) 祖 諱 英略 장군으로 기재 되어 있다.
> 청주한씨 사적을 고찰한바, 만성보기록에 오류가 있는것으로 판단된다. 청주 한광윤公의 배위(配位)는
통의군부인 나주 진씨(通儀郡夫人 羅州 陳氏)인데 호장(戶長) 각(慤)3)의 따님으로 公과 合兆이다.
-청주한씨 씨족사는 고려 의종(高麗 毅宗:1147~1170년)로 정리한 반면에 만성보기록에 나오는 진의(陳懿:慤)의 기록은
1030년대 인물로 기록하여 대조를 이루고있는데, 두 기록간에는 110여 년의 오차가 있다.
> 위의 羅州陳氏(나주진씨)는 고려 초엽이고 우리의 驪陽陳氏(여양진씨)는 고려중엽 서기1105년 경이니
여양진씨 禮賓卿派 계열의 나주진씨와는 아무런 聯關(연관)이 없다."라고 적고있다.
> 2) 실재로 여양진씨 예빈경파조 4세 진온(陳溫)을 나주진씨 시조로하여 예빈경파 후손 일부가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정미대동보(1967년발간)수보시 여양진씨로 합보였습니다. 사마방목편 여양진씨 진사/생원기록을 살펴보면
▶진여정(陳汝貞)진사시에서 급제를 하는데... [합격등위] 3등 0080 본관(本貫):나주 진(羅州 陳)
▶진 훈(陳訓)-생원시급제 [합격등위] 3등 0087 본관:나주 진(羅州 陳)
▶진광철(陳光喆)-진사급제 [합격등위] 2등 0026 본관:나주 진(羅州 陳)
▶진성재(陳聖材)-생원급제 [합격등위] 3등 0045 본관:나주 진(羅州 陳)
▶진응구(陳應龜)-생원급제 [합격등위] 3등 0046 본관:나주 진(羅州 陳)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아래-
>註 1)고려(高麗)에서 예빈경(禮賓卿)을 지냈다.
> 예빈경공 한광윤(禮寶卿公 韓光胤) 6세
>고려 때의 문신(文臣)으로 公의 휘(諱)는 광윤(光胤)이다.
公이 고려 의종(高麗 毅宗:1147~1170년) 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관작(官爵 : 벼슬)이 조정대부예빈경(朝正大夫禮賓卿)을 역임(歷任)하고
원나라(元)에서 금자광록대부수사공좌복야(金紫光綠大夫守司空 左僕射)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묘소(墓所)는 전남 영광군 진량면 지장산하 신사동 임 좌병향(全南 靈光郡 陳良面 支藏山下 新寺洞 壬坐丙向)인데
中間世代에 실호(失護 : 잃어버림)되어
오랫동안 吳,姜, 金, 等 民間人들이 모점(冒占 : 저희들 것인양 점유하고 있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인 영조 17년(1741)에 후손인 세구, 희맹, 일주, 중언(世龜, 希盟, 日周, 重彦)등이
묘소를 찾아 묘비(墓碑)의 13字 즉 조정대부행예빈경한광윤지묘(朝正大夫行禮賓卿韓光胤之墓)라는 글자와
뒷면에 나주 진씨(羅州 陳氏)외에 아들 누구, 관직이 무엇 등등(子某, 官某 等等)문자가 확인되므로
다음해(壬戌 : 1472) 관(官)에 제소(提訴 : 確認,을 求하는 訴事)하여 판결(判決)을 받은 후
산소(山所)를 개봉축(改封築)하고 위토(位土)를 마련하였으며
전라감사(全羅藍 1)司)로 재임(在任)한 익모(翼暮)가 재각(齋閣)을 짓고 위토(位土)를 더 마련하였다.
또 한 계진(啓震)은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와서 표석(表石 : 墓表)을 세웠고
후에 용구(用龜)는 전라도 순찰사(全羅道 巡察使)로 와서 성묘(省墓)하고 제수(祭需)를 더욱 풍성하게 조력(助力)하고
화수회(花樹會)를 설립(設立)하여 일가간의 우의(友誼)를 두텁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 종친회(宗親會)의 효시(曉失 2) : 始初)이다.
公의 배위(配位)는 통의군부인 나주 진씨(通儀郡夫人 羅州 陳氏)인데 호장(戶長) 각(慤)3)의 따님으로 公과 合兆이다.
-청주한씨 종친회 카페에서 자료를 퍼옴-
註 1)감(監)자를 오기한듯?
註 2)시(矢)자를 오타한듯?
註 3)만성보 기록:의(懿)는 >訂:각(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