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바통 터치(출3:15)
2026.9.27, 김상수목사(안흥교회)
학창시절 운동회의 꽃은 단연 릴레이 계주 경기였다. 각 팀 주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때마다 운동장은 환호와 탄식으로 메아리쳤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계주는 먼저 뛴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긴 막대기 모양의 바통을 넘겨주는데, 이것을 보통 바통 터치(Baton Touch)로 부른다. 아무리 앞에서 잘 달렸어도 바통 터치가 잘 안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그런데 신앙에도 바통 터치가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신앙의 전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종종 믿음의 명가(名家)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데, 생각해 보면 믿음의 명가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의 바통 터치가 잘되는 집안을 뜻한다. 우리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가정은 신앙의 바통 터치가 잘 되어서, 믿음의 명가를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원한다.
최근에 가족전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눈에 확 들어온 표현이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 한 절에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총 33회 정도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스스로를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출3:6, 출3:15).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출 3:6)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5)
그런데 가만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나)의 가정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믿음의 명가를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의 바통 터치 즉 믿음의 전수를 잘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교육강령인 신명기 6장 4-9절 말씀(쉐마)도 알고 보면, 결국은 믿음의 전수 즉 신앙의 바통 터치를 잘하라는 지침이다.
“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6:4-9)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셨던 말씀과 믿음을 듣고 지키면, “복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신6:3)고 하셨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복”이나 “번성”이라는 것이 단지 이 땅에서 부귀영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모든 은총들을 총칭한다(성경적인 축복관은 차후 별도로 나눌 예정).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믿음의 바통 터치와 전수가 잘 되어가기를 기뻐하시고, 그렇게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자.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쩌면 우리들도, 신앙의 바통 터치가 원활하게 되고 있지 않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외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선택적인 가치’로 여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예배, 주일성수, 기도, 성경, 성결한 삶 등)은 ‘얼마의 수입’이나 ‘스마트폰’ 또는 TV드라마와 동등하거나 그 이하의 수준이 되고 말았다. 십자가의 은혜는 너무도 값비싼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켰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가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교육이든지 교육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전달(=주입) 이전에 삶으로 전수(=스며듬)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육 다시 말하면 믿음의 전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부모가 산대로 살고, 본대로 습득한다. 부모가 사투리를 쓰면 자녀도 사투리를 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뒷짐 지고 걸으면 손주도 그렇게 걷는다. 이렇게 형성된 삶의 양식을 문화(文化)라고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바통 터치를 잘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 완벽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신앙이 형성되고, 전달(Formation & Transmission of Life)’ 된다. 이는 [2026년 한국교회 트랜드]라는 조사에서도 통계적으로 증명되었다(“데이터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의 신앙이 자라는 과정ㅣ지용근 대표ㅣ잘잘법 284회”).
*** 데이터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의 신앙이 자라는 과정ㅣ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SgWydfzNVpo&t=309s
장례식장에 가면 자녀들이 “우리 엄마 너무 불쌍해. 고생만 하다 가셨어”라고 한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왜 이렇게 말할까? 평상시에 부모가 안 먹고, 안 입고 양보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부모의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것이 전통적인 한국인의 의식이었지만, 알고 보면 그런 모습이 자녀의 마음에 한이 된 것이다. 만약 양보만 하지 않고,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챙기고 누렸다면 최소한 자녀의 마음에 불쌍하다는 한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현숙한 여인의 조건 중에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씀을 했다(잠31:22)
“그는 자기를 위하여(for herself)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잠 31:22)
무슨 말인가 하면, 평소에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웰다잉의 삶이고, 믿음의 바통을 터치해 주고, 신앙을 전수해 주는 중요한 방법이다(“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명절에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장례예배, 추도예도 같은 것들도 알고 보면, 다 믿음의 바통을 터치하는 시간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000 장로의 하나님, 000 권사, 000 집사 또는 성도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뒤에 우리의 자녀들의 이름이 이어서 들어갈 수 있도록 믿음의 바통 터치를 잘해주자. 이것을 위해 지금부터 천국을 확신하는 사람답게 말씀대로 살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힘쓰자. 그래서 믿음의 명가를 이루어 가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