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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콜라레 운동
포콜라레 운동은 1943년 제 2차 세계대전 중 이탈이아
북부의 도시 트렌토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인 무솔리니가 지배하고 있어서 전 국토가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에 노출되었고,
트렌토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합군의 폭격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마을 주민들은 방공호로 대피하기에 바빴다. 일상을
무너졌고 삶은 피폐했져만 갔다. 그 곳에 20대 초반의 여성 끼아라 루빅(Chiara Lubich) 이
있었다.
방공호로 대피할 때 끼아라는 작은 성격책을 지니고 갔다. 폭격 아래, 침침한
방공호 안에서 읽는 성경구절은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끼아라를 사로잡는 구절이 있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배푼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오 25,39)" 끼아라와 친구들은 방공호에서 나왔을 때 이 구절을 즉시 실천하고자 하였다.
가난하고, 병들고, 또 부모를 잃고 공포에 질린 아이들까지. 폐허가 된 도시를
누비며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끼아라와 친구들은 저녁 식사에 초대하곤 했다. 가장 좋은 식탁보를 깔고, 같은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필요한 물품을 나눴다. 이들의 사랑의 행위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트렌토 시민들은 이 젊은 여성들을 찾아와 기꺼이 자기 물건을 내놓기 시작했다. 같은
도시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에게 공급해 달라는 것이다. 다양한 자루와 꾸러미가 끼아라의 집 앞에 놓이기 시작했다. 끼아라와 친구들은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일종의 '재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끼아라에게 당시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기에 체험의 농도는 더욱 짙었다.
끼아라는 모든 인류가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상호 존중으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했다. 인종과 이념의 우수성을 앞세운 파시즘과 나치즘이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끼아라는 '차이'가 아닌 '일치'에 더 몰입했다. 일치는 용기를 일깨웠고, 용기는 연대를 만들어 냈다. 폭탄도
무너뜨릴 수 없고 죽음마저 손댈 수 없는 일치의 이상(理想)을 가슴에 품었다. 함께 있을 때 그들은 두렵지
않았다.
이들의 삶을 보고, 사람들은 끼아라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집을 포콜레라라고
불렀다. 포콜레라는 이탈리아 말로 '벽난로'라는 뜻으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따뜻한 가족공동체를 상징한다. 모임의 규모는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가톨릭 정신에 기반을 뒀지만 종교의 벽을 허물고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
포콜라레는 이탈리아 가톨릭 교회에서 시작됐지만 기독교의 모든 교파로 확대됐고,
나아가 이슬람을 포함한 다른 종교에까지 퍼져 나갔다. 끼아라는 수많은 종교과 이념들이 공통으로 지닌 황금률을 실천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평화와 정의를 지키며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따.
포콜라레 운동은 시작된 지
6년만인 1949년에 북부 이탈리아에서 회원 수가 3,000명을 넘어섰다. 21세기에는 전 세계 180여 개 나라에 약 4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국제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필리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처음
포콜라레 모임이 시작되었고,1969년에 지역본부가 설립됐다. 현재 다양한 연령과 계층을 망라하여 2만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www.focolare.or.kr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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