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 설악산 12선녀탕계곡
추모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설악산에 있는 여러 계곡 가운데 경관이 빼어나기로 손꼽히나 사람들이 존재 자체를 모르는 계곡이 있으니 바로 ’12선녀탕계곡’이다. 그 까닭인즉 설악산을 대표하는 명소인 백담계곡이 가까이 있는 데다 미시령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에 다소곳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해보다 무더웠던 여름, 설악산 계곡 가운데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뜸한 ‘12선녀탕계곡(12仙女湯溪谷)’을 찾았다. 12선녀탕계곡은 강원도 인제군 남교리에 있는 계곡으로 북천 건너 들머리에서 대승령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탕과 폭포가 8㎞에 걸쳐 이어진다.
설악산 서북능선은 최고봉인 대청봉에서 인제 남교리까지 길게 뻗은 능선을 가리킨다. 서북능선 서쪽에 있는 내설악은 ‘백담’, ‘수렴동’, ‘가야동’, ‘백운동’, ‘12선녀탕’ 등 여러 계곡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12선녀탕계곡’은 내설악 서북쪽 가장 낮은 쪽에 있는 계곡으로 골짜기의 너비는 좁으나 폭포와 함께 물이 깊게 고인 탕(湯)이 많다. 그래서 밤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탕에서 목욕했다고 해서 선녀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제 선녀들이 목욕하고 떠난 계곡에는 선경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람들을 손짓한다.
12선녀탕계곡에는 가래나무, 소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박달나무 등이 원시림처럼 우거졌다. 산길은 험하지만 깊은 골에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여러 개 놓여있어 산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계곡에 흐르는 물빛이 푸르다 못해 비취색을 띠었으며, 응봉폭포, 용탕폭포, 두문폭포를 차례로 더듬어 올라가는 동안 물소리와 바람 소리에 가슴이 시원하다. 또한 산길을 걷다 지칠 때 물가에서 잠시 쉬며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면 마음속에 쌓여 있는 온갖 번거로움이 모두 씻겨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12선녀탕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여기저기 눈길을 돌리면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하던 많은 것들이 눈에 띈다. 여름에는 다래덩굴에 다래가 주렁주렁 열어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늦가을에는 가래나무 아래 떨어져 뒹구는 가래를 주울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숲속에 요염하게 피어 있는 말나리꽃이나 함초롬히 피어 있는 금강초롱꽃을 볼 수 있으며, 때로는 계곡에서 헤엄치는 열목어나 어름치와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다 단풍철에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붉다 못해 손으로 쥐어짜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단풍잎을 잊지 못해 다시금 이곳을 찾게 된다.
남교리 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약 800m쯤 올라가다 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에서 조금 벗어난 계곡 왼쪽 둔덕에 가톨릭의대 산악회에서 세운 검은색의 조그만 추모비가 오도카니 서 있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고이 잠드시라! 젊은 산악의 용사들이여! 1968. 10. 25. 일곱 산우들의 영혼이 이곳에 잠들다. 지나는 산우들이여! 그들을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명복을 빌자’ 그리고 비석 아랫부분에는 그 자리에서 숨진 산악회원 7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사연이 얽혀 있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68년 10월 25일, 가톨릭의대 산악회원 9명이 설악산 종주를 하기 위해 12선녀탕계곡을 찾았다고 한다. 12선녀탕계곡은 폭이 좁아 큰비가 내릴 땐 급류가 흘러 몹시 위험하다. 그런데 산악회원들이 계곡을 얼마 오르지 않아 갑작스런 폭우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계곡에는 등산로조차 없을 때였다. 그래서 우왕좌왕하다가 9명 가운데 3명은 급류에 휩쓸리고, 4명은 저체온증으로 숨졌다고 한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숨진 7명의 넋을 생각하니 공연히 마음이 아렸다.
일반적으로 12선녀탕계곡을 찾은 사람들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대승령을 넘어 대청봉에 오르거나, 아니면 대승폭포를 둘러보고 장수대 쪽으로 하산한다. 그런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나절에 돌아와야 하는 짧은 일정 때문에 응봉폭포 앞까지 갔다가 아쉽게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은 그가 쓴 <동국명산기>에서 풍광이 수려한 설악산의 여러 명소 가운데 ‘십이선녀탕계곡’을 단연 첫손가락에 꼽았다. 그리고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에 ‘12선녀탕계곡’ 일대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98’호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