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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묵상글 들 (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 무상의 은총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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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상의 은총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43).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축복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와 질책의 말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말하는 입보다 말하는 귀를, 듣는 귀보다 듣는 입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콩을 심은 데 콩 나고, 팥을 심은데 팥난다”.고 합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절제와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해야 하며 또한 자기수행을 게을리 하자 말아야 한다는 일깨움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경우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는 쇄신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물론 구원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합니다. 인간의 공로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무상의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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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묻자, 그는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 들일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밀밭의 가라지”(마태 13,36)
주님!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해도, 결코 협조하거나 방조하지 말게 하소서.
가라지를 뿌리 뽑을 수는 없을지라도, 번지는 것을 막고 선을 보호하게 하소서.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이 세상에 판을 쳐도,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내 안에 꿈틀거려도,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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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의인들은 해처럼 빛나리라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중개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셨으므로 중개 역할이 필요없었고, 직접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셨으며 그분의 자비를 몸소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뜻이 반영된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여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권고하였는데,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과 거부하는 자들을 구분하며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전해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 것이라고 달랬지만, 그 뜻을 거절하고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삼 대 사 대에 이르기까지 벌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천대와 삼, 사대의 차이로 달래며 이르는 거의 해학 수준의 경고입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훨씬 명확한 비유로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하늘 나라의 자녀로 살아가는 의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겠지만, 그 반대로 당신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죄악을 저지르는 악인들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고 매섭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 13장에 모아 놓은 비유설교 모음에 들어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산상설교의 가르침(5-7장)과 실천(8-9장)에 뒤이어 나온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모두가 그렇지만,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있어서도 초점은 단연코 밀에 있습니다. 가라지가 섞여서 자랄지라도 밀을 보호해야 하고 그래서 밀이 자라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도 가라지 노릇을 도맡아 하는 옆 나라들이 보입니다만, 우리 사회 안에서도 공정을 짓밟고 신뢰를 깨뜨리는 자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또 오늘이 휴전협정 조인기념일인데, 7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종전을 미루고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으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밀밭에서도 가라지들은 머지않아 그 악행이 폭로되고 불에 태워질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도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그리스도인들이 의로움을 해처럼 빛내는 일입니다. 밀이 밀다움을 증거해야 가라지가 드러날 것이고 하느님께서 상황을 정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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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저녁 5시 50분에 온 사람과 저녁 6시 10분에 온 사람 중에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둘 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찍 온 사람이 약속을 지킨 것이고, 늦게 온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님께 매주 한 번씩은 꼭 연락드리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연락하는 사람과 바쁘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두 번만 연락하는 사람 중에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당연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연락한 사람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약속 이상의 것을 지켰을 때였습니다. 6시 약속인데 일찍 나온 사람에게는 약속을 잘 지킨다는 평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부모에게 자주 연락한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 이상으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말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약속한 만큼만 하면 충분할까요?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상을 행할 수 있어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자선 등의 행동 자체에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리지 비유 말씀을 설명하십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워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 종말에 심판을 받게 되는데, 남을 죄짓게 하는 자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모두가 불구덩이에 던져진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들처럼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남들의 나쁜 점들만 배우고 좋은 점들을 외면하는 삶으로도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습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 역시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지금의 모습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금보다 조금만 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해 우리 인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다루어, 우리의 인생을 알차게 알곡으로 여물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나 영원히 기다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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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져 가끔씩 균형을 잃는 게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인걸…(엘리자베스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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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세상
15살짜리 아이가 임신했습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의 나이입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을 테고, 혹시 뉴스에도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의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집안이 뒤집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조선 시대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 나이가 15살 즈음이라고 합니다. 과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만한 사건이었을까요? 현대에도 예멘 여성의 절반 이상이 18세 이전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성모님도 예수님 잉태하셨을 때의 나이가 15세 즈음이었습니다.
지금의 큰 문제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조금만 관점을 넓히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문제’라고 규정을 내리고, 문제의 이유만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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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르클린 성당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짐이 있어서 신문사에 갖다 주시길 부탁했습니다.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신문사에 갖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돌아와 보니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제님이 문을 이중으로 잠갔습니다. 저는 비밀번호로 문을 열기에 이중으로 잠그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옆에 있는 성당 사제관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형제님은 미안한 마음에 칫솔, 양발, 속옷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여름이라 옷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면서 갖다 주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신문사로 들어갈 방법이 있었습니다. 창문 하나는 잠그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이중문을 열었습니다. 잠시 당황했지만 신문사로 들어올 수 있었고, 덤으로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뉴스를 들으니 미국의 항공사에서 비행기 200대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기가 진정이 되면 사람들이 여행을 갈 것을 예측하고 미리 주문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비행기를 이용할 때는 좌석의 여유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빈 좌석이 거의 없습니다. 용수철이 누르면 더 높이 튀어 오르듯이, 그동안 억제되었던 여행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 같습니다. 성당에서 청년들을 위해서 주일 미사 후에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정말 많은 청년들이 모처럼 모여서 정을 나누었습니다. 1년 넘게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모두들 반가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식당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년에는 좌석의 20%만 손님을 받았어도 자리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100% 손님을 받는데도 기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공사가 비행기 200대를 주문하듯이, 예비자 교리에도 많은 분들이 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더욱 활기를 얻어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밀은 나누려는 마음이고, 더 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밀은 베푸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가라지는 빼앗으려하는 마음이고 소유하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 역시 가라지입니다. 이런 마음은 현실의 세상에서 조금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지는 마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 주려고 한다면, 더 베풀려고 한다면 우리는 ‘밀’이 되어 많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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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파스카 신비의 삶, 말씀과 기도와 회개의 삶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9년전 1992년 1월 15일 왜관 수도원에서 종신서원미사때 한 제 강론 제목이 지금도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 이후로도 강론에 여러번 인용했던 제목입니다. 오늘 가라지의 비유 설명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묻게 합니다.
먼저 번 가라지의 비유의 중심은 하느님의 ‘인내’였지만 오늘 비유 설명의 중심은 물론 하느님의 인내를 전제하지만 ‘종말 심판’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발설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입니다. 초대교회 내부 역시 가라지같은 골치 아픈 존재들이 많았던 듯 합니다. 우리 독자들 모두 종말 심판의 현실에 자기를 들여다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성찰하라는 초대입니다.
1.“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이를 갈 것이다.”
2.“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3.“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과연 우리는 죄인들과 의인들중 어디에 해당될까요? 참으로 귀기울여 ‘경청(敬聽,傾聽)’하여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런 종말 심판을 늘 염두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요즘 절박한 인류 최대의 화두는 기후변화, 기후위기, 기후재난일 것입니다. 한겨레 신문의 인터뷰 <세계지성에게 10년 생존전략을 묻다> 기사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60년간 문명을 조망해온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이며 생리학자인 로스앤젤리스 캘리포니아대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입니다.
“2050년! 우리 문명은 이제 30년 남았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상황이 나빠지는 속도, 세계인구가 증가하는 속도, 숲이 잘려나가는 속도, 그리고 기후변화 진행 단계까지---. 약 30년 후에는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돌이킬 수 없어요. 제가 코로나보다 더 크게 우리를 엄습하는 지구적 위기를 해결하자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만약에 2050년까지 이 문제들을 풀지 못한다면, 죄송합니다. 우리는 너무 늦을 겁니다. 지구 온도 1.5도 상승을 막아내기 위해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반으로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해야합니다.
지구 온도가 2도 상승하면 대재앙이 열립니다. 문명파괴의 상황은 인구의 10%가 사망하고 세계적으로 국내총생산의 50%가 감소하고 그 상태가 10년 이상 지속됩니다. 10년 안에 우리는 인류문명의 생존전략을 구축해야 합니다.”
참으로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30년후 닥칠 인류 종말 심판! 참으로 어떻게 살야 하나 절박한 질문입니다. 30년후에 앞서 우리의 실제적 종말인 죽음에 대한 준비 역시 절박한 과제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베네딕도 규칙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환히 두고 살 때 말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서, 무지의 탐욕이나 환상이 걷힌 투명한 본질적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7년전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여정중 참 깊이 깨달았던 진리가 ‘인생 광야 내적 여정’입니다. 이 여정중 제 강조하는 세 인간 유형이 성인聖人, 폐인廢人, 괴물怪物입니다. 참으로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각자 고유의 평범한 성인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비유 풀이중 좋은 씨의 하늘 나라의 자녀들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이 복음 말씀을 언젠가 그날의 아버지 나라에 앞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해처럼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인이 아니면 폐인이나 괴물이라 했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보십시오. 인생광야 내적여정중 갖가지 중독으로, 또 삶의 희망과 의욕을 잃고, 또 무지와 탐욕으로 삶의 중심과 의미를, 인간성을 잃고 폐인이나 괴물로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광야 인생 내적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말마디가 여정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하루중 몇시쯤, 일년사계중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면 오후 4시, 초겨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예도 수차례듭니다. 이런 확인이 바로 깨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합니다.
하루하루보다 더 귀하고 고마운 하느님 선물은 없습니다. 제가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둘입니다. 하루의 영적전투를, 분투奮鬪의 하루를 마치고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 때입니다. 죽음도 이처럼 맞이하면 얼마나 좋겠나 생각하곤 합니다. 끝기도후 강복은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또 하나 행복한 시간은 이른 새벽 잠깨어 강론을 쓰며 주님과 함께 지내는 관상시간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힘을 여기서 다 얻습니다. 끝기도후 다음 마침기도 역시 얼마나 감미롭고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전능하신 하느님, 무덤에서 편히 쉬신 아드님과 같이 저희도 편히 쉬게 되었으니, 내일도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말 그대로 하루하루 날마다 파스카 신비의 삶을,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략적인 윤곽을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삶을,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수적으로 자연스럽게 따르는 평생 수행 셋이 말씀공부와 기도와 회개입니다.
인간의 부정적 정의는 무지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같은 무지에서 기인한 온갖 탐욕에 악덕들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말씀공부와 더불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감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말씀공부보다,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말씀을 먹고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의 영적 삶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기도입니다. 말씀공부가 기도에로 이끕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말씀에 이어 기도 역시 무지에 대한 답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가 기도의 모범입니다. 모세처럼 자기 방이든 성당이든 경당이든 ‘만남의 천막’으로 삼아 거기 머물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음 모세의 주님과 만남의 묘사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우리들은 또 모세의 기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신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닮을 때 모세처럼 자비와 너그러움의 달인, 분노에 더딘 인내의 달인, 자애와 진실의 달인, 용서의 달인이 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뱃장좋게, 잽싸게 기도하는 모세입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에 이어 회개입니다. 회개에 따른 참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참으로 눈만 열리면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늘 탈출기도, 복음의 가라지 비유의 우의적 해설도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자녀들로 살라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무엇보다 기후재난의 뚜렷한 징후들이 생태적 회개의 구체적 실천을 촉구합니다. 땅이든 바다든 쓰레기들로 넘치는 세상입니다. 자발적 느림, 불편함, 힘듬을 감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너무 빠르고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할수록 지구는 망가지고 삶은 천박淺薄해집니다. 구체적으로 적게 먹고 적게 쓰는 무공해의 간소한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끊임없는 말씀, 기도, 회개의 수행이 답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도 이 셋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파스카 신비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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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애와 심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와 주님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습니다. 광야에서 아론과 미르암이 모세를 시기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민수 12,7-8) 하고 말씀하실 정도였지요.
모세는 충직함과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도 그에게 당신 마음과 계획을 열어보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하고 노래하듯, 경외심은 하느님의 자애를 부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이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8)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비와 자애라는 당신 얼굴을 드러내시자 모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땅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후 하느님께서 실망과 분노로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렇게 반복해서 빌고 또 빌며 함께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
사실 백성이 우상 숭배에 떨어졌을 때 모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이런 경우에는 대개 죄 지은 이들과 자신을 분리해 스스로는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일쑤인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저들의 죄악과 저들의 잘못"이 아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이라는 표현에서는 죄를 지은 백성과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그 죄를 자신이 함께 떠안고 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립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스스로 가장 비천한 죄수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그분의 희생 제사는 죄인들과 하나로 취급당하기를 꺼리지 않으시고 성부 앞에서 "저희"의 범주 안에 모든 죄인들을 끌어안으신 겸손과 자애의 결과입니다.
복음은 '밀과 가라지 비유'의 해설 부분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0-42)
예수님 입에서 무시무시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기다려 주시고, 죄에 떨어지게 만드는 약함을 이해해 주시며,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고, 언제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모세가 죄를 지은 백성을 위해 주님께 그토록 간절히 애원하였듯, 성부 하느님 앞에서 인류를 떠안고 당신을 죽음에 넘기신 예수님이시지만, 다가올 심판의 때를 유야무야 건너뛰지는 않으시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모호하고 미지근하게 선과 악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우리를 위협하고 겁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너무 늦지 말기를" 바라시는 염려의 뜻으로 들립니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이어지는 내일 미사의 제1독서를 미리 보면,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그토록 친밀한 시간을 보낸 뒤 빛나는 얼굴로 산을 내려옵니다.(탈출 34,29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의 빛나는 얼굴'이지요.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이들이 그 빛을 반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와 악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고통과 시련의 도가니를 거친 영혼이 하느님 자애로 맑고 순수하게 변모되어 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영혼은 찬란한 빛 안을 거닐며 빛이신 분과 함께 빛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뿌리신 좋은 씨앗들이지요. 이 본성 안에서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영글어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날이 맑은 빛을 더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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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13,40)
오늘 복음은 '밭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이 비유는 '세상 종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세상이라는 밭에 하느님께서 뿌리신 좋은 씨인 '하늘 나라의 자녀들'과 원수가 뿌린 가라지인 '악한 자의 자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마지막 세상 종말의 때에 악한 자의 자녀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의인들인 하늘 나라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종말의 때!'
이 결정적인 때는,
우리가 죽어 개인적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사심판'의 때이며, 또한 산 이와가 죽은 이가 함께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최후의 심판인 '공심판'의 때입니다.
세상 종말의 때를 지금 여기에서 잘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곧 '현세적 종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늘 나라의 자녀들'입니다.
반대로 이 결정적인 때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잘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세상 종말의 때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잘 사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되려는 끊임없는 '나의 노력'이며,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굳게 믿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나의 회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34,6-7)
주님의 이 선포는,
지금 여기에 있는 악한 자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얼른 회개하라는 선포입니다.
오늘도,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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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코로나 시대에 생긴 ‘살고픔’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을 느끼듯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느끼는 ‘살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 인사 나누고, 서로 안아 주고 눈을 맞추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는 것을 그리워하는 살고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당 소임을 맡지 않고 있는 사제에게도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과 고민을 공유하고 많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같은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기쁨과 위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사제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친해지고 싶지만 언제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존재지요. 그것은 존경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져 다가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접근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 봉사 등 어떠한 계기로 만남이 잦아지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제에 대한 거리감은 점차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고, 그분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어 일반 사람들은 그분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뵐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밭의 가라지에 대한 비유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일이 제자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분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이 묻게 되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친근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구약에서 성막을 만든 것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알게 되고 친근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고픔을 가지십시오. 늘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십시오.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알아가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예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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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이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 서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로 되는 것이다. 남을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노력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밀알이 되도록 항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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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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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라지의 비유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43).”
이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인데, 최후의 심판 때에
‘가라지 같은 자들’, 즉 악인들이 받게 될 심판과 처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13장 24절-30절에 있는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주인의 태도가
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 말씀에서는 이 세상에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현실에 대한
설명과 악인에게 즉결처분을 내리지 않으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가라지의 비유의 설명’에서는
끝끝내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1) 심판에 초점을 맞추면, ‘가라지의 비유’는
뒤의 47절-50절에 나오는 ‘그물의 비유’와 거의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의인들은 항상 핍박 받고 고난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데,
악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속 편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무능력한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인간 세상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고,
무능력한 분도 아니고, 언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오면,
잘못된 것들을 모두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날이 되면, 의인들의 모든 억울함과 한이 풀릴 것이고,
하느님은 지극히 공명정대하신 분이라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의인들에게는 인내가, 악인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영예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는 의인들이 모든 억울함과 모든 설움을
보상받게 되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영원한 절망과 분노와 후회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절망, 분노, 후회’ 자체가 끔찍한 형벌이 됩니다.
(‘절망’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영원히 차단된 것에 대한 절망이고,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하느님에 대한 분노이고,
후회는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입니다.)
2)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충실하게 노력하는 의인들을 가리키고,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악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면서 죄를 짓고 있는 악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악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죄인들의 죄는 그 죄인 자신의 책임입니다.
악마는 죄를 짓도록 유혹만 할 뿐이고,
죄는 죄 짓는 그 사람 자신이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고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살면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의인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막 살면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들도 악마의 유혹을 받지만,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면 악인이 되는 것이고.
3) 그날이 되면 신앙인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심판 때에는 가라지들과 쭉정이들이 모두 심판 대상이 됩니다.
(가라지는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는 악인들이고,
쭉정이는 신앙인이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4)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면, ‘가라지의 비유’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여기서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은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뜻입니다.
“......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5).”
악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없는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가 아니라면, ‘잃은 양’을 그냥
바로 버리는 냉정한 목자라면, 그런 분을 구세주로 믿고 따를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의 회개를 무기한으로 기다리시는 것은 아니고,
당신이 정하신 ‘심판의 날이 되기 전까지만’ 기다리십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회개하면 살 것이고,
그 날이 닥칠 때까지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5) 우리 교회의 옛말에, “하느님께서 정의의 잣대로 나를 심판하시면 나는 살아날
길이 없는데, 우선 먼저 자비의 잣대로 나를 측량하시니
나에게도 살아날 희망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라지’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가라지가 아니다.” 라고 큰소리치면 안 되고, 자만하면 안 됩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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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선봉장이 되었던 영도자 모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의 횡포를 뒤로 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 탈출한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나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지나며 노숙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굶주림과 갈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즘 캠핑이나 차박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한 달, 일 년 계속된다면 다들 힘들어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도 어서 빨리 안락하고 쾌적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날 것입니다.
큰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정신없던 모세의 귀에 슬슬 불평불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이런 저런 민원이 접수되어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짜증나는 것이어서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어서 절망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와서 대놓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 그냥 놔두지 않고 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쌩고생을 시키는가? 이집트에는 맛난 고기며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며, 얼마나 먹을 것이 많았던가? 하루 삼시 세끼 맨날 똑같은 메뉴도 이제 신물이 난다고!
다양한 측면의 위협으로 인해 리더십이 흔들릴 만도 한데, 지도자로서 모세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틈만 나면 공동체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결코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 같았으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내가 지금 왜 이 쌩고생을 하고 있지?“하면서 당장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마다 백성을 잠깐 떠나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수시로 조언을 구했고, 지혜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변덕 투성이인 백성들을 대신해서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강렬하고 간절했는데, 한번 주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밤낮으로 사십 일을 단식하며 기도바치기도 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기 34장 9절)
이런 모세의 모습을 어여삐 보신 주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마치 절친에게 하듯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때 그 때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고, 항상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든든한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들, 손주 손녀들이 오래 전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는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은 자매님들께 제가 단골로 드리는 제안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기도하라고 부탁드립니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자매님께서 그들 몫까지 대신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보시라고 권고해드립니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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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밀과 가라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아서 다 자라고 나서 마지막 때에야 심판이 내려집니다.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 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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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다.”
모세와 함께 움직이는 지파들은 진영을 만들어 마치 군대와 같은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만나는 대신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만남의 천막을 칩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만날 일이 있으면 그 만남의 친막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며 온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의 천막 어귀에서 모세가 천막에 들어갈 때까지 치켜보곤 했습니다.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며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 ‘야훼’를 선포하십니다.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끓고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사십일 주야를 지내면서 빵도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트립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라. 그러면 네가 깨뜨려 버린 그 처음 돌 판에 새겨져 있던 말을 내가 새 돌 판에 다시 써 주겠다.”(탈출 34,1)
모세는 하느님께서 명하신대로 돌 판 두 개를 깎아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두 개의 돌판에 기록합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 하느님과 친구처럼 가까웠던 인물을 없었습니다.
모세가 모얍 평야의 한 산에서 삶을 마감했을 때 신명기 저자는 이러한 말씀을 남깁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주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또 ‘가라지 비유’를 들어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잘 자라나는데, 생각지도 않게 원수가 가라지를 흩뿌리고 갑니다. 좋은 땅에서 밀과 함께 가라지가 자라는 것입니다.
집 주인은 종들에게 수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좋은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오시자 제자들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께서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설명하십니다.
수확 때에는 세상 종말을 말하고 일꾼들은 하느님의 천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또한 주님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세상 종말에 주님의 천사들이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울 것이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불구덩에 던져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3)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둠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3-4)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이 있었듯이 좋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라지를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심으로 악인을 지옥불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빛으로 싸여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는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더불어 악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악인들이 있는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말을 나누던 모세의 얼굴이 하얗게 변화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좋은 땅에 좋은 밀에게서 성취됩니다.
우리는 때로 현실이 힘겹고 악으로 기울어지는 듯한 현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디에서든 자신의 중심을 잡고 빛의 세계,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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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하며 좋은 씨앗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 풀이는 하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밭에 좋은 씨를 뿌리십니다. 곧 하늘 나라의 자녀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생명을 품은 우리는 뿌려지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좋은 씨앗’뿐 아니라 악마가 뿌린 가라지도 있습니다. 악한 자의 자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릅니다.”(13,41) 가라지는 자신의 죄도 모자라 남까지 죄짓게 합니다. 가라지는 남의 사랑과 선을 짓누르고 빼앗아버려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가라지는 정의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공정한 도리를 그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의 회개를 기다려주시지만 세상 종말에는 가라지를 뽑아 버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실한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는”(13,38) 영광을 입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입니다(13,41-42).
그렇다면 누가 좋은 씨앗이고 누가 가라지일까요? 이런 질문 앞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나는 좋은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가족이나 친지,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가라지 같은 사람이 먼저 떠오르지요. 사회를 부패와 불평등으로 내몰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암적인 존재들을 더 빨리 떠올립니다.
그러나 나 또한 가라지의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지요.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좋은 씨앗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좋은 씨가 된다는 것은 말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느님의 좋음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뿐인 신앙, 마음과 머릿속에서 맴도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 종말’이 저 먼 훗날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한 시간 뒤, 5분 뒤, 아니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바로 그 종말의 때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겠지요.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주님의 심판은 나의 회개를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자비인 셈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여 지금 여기서 사랑과 온유, 정의와 평화, 배려와 관대함의 씨앗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두려워 좋은 씨가 되려고 몸부림친다면 그 또한 비참한 일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공포감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품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오라는 초대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의 초대에 더 큰 사랑으로 응답하도록 해야겠지요.
다른 한편 가라지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도록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가라지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가라지를 판별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인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좋은 씨앗이 되어 그저 묵묵히 주님의 선과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면 그만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데서 더 나아가 모든 이가 주님의 좋은 씨가 되도록 사랑의 연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의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먼저 자신을 살필 줄 아는 속깊은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남을 탓하고 사회를 탓하기보다 의인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주님을 굳게 믿으며, 더 큰 열정으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씨앗을 키워가야겠지요.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고, 선과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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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우리는 겸손이라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질문을 할 수 있고
질문을 통해 깨우칠 때, 그의 삶은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문은 세상을 향한 개방성의 시작입니다.
반면 가르치는 이는
자신이 가진 기준과 경험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온전히 배려하며 알려주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고귀하고 중요한 진리를 전해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라면
허공에 퍼지는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배우는 이의 질문은
가르치는 이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 안에 담긴 의미를 명확히 전해주십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겸손한 이만이 답을 찾아 나설 수 있고
답을 찾은 이만이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오늘 복음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도
스스로 갇혀있는 자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받아들인다 하여도 세상의 유혹은 함께 자라납니다.
작은 의혹이 가라지를 키우고
작은 질문이 밀을 키워나가지만
작은 변화이기에 우리가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를 바라보며
지금 자신의 나약함과 죄 지음에 좌절하기보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찾는다면
주님 안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를 바라보는 우리의 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며
신앙에 대한 건강한 질문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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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가라지도 처음엔 가라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굿뉴스 - 강만연 [fisherpeter] 210727. 05:13 ㅣNo.148593
오늘 복음에서는 밀에 대한 언급은 돼 있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 복음에 이어서 나온 복음입니다. 이 앞전 복음에서 나오는 밀과 가라지 복음의 비유는 문자 그대로 액면적인 내용만 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복음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복음을 잠시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시면 원래는 밀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라지가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가라지를 뽑아야겠다고 하는데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잘못해서 밀까지 뽑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좀 색다른 관점에서 이 복음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처음엔 밀만 있었고 나중에 가라지가 생겨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다른 관점에서 한번 이 복음을 들여다 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분명히 비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와 예는 성질을 달리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설명을 할 때 비유와 예를 들어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좀 더 어떤 현상의 본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는 거의 일대일처럼 들어맞는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는 일대일처럼 단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도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실에만 국한해서 이 비유를 묵상한다면 묵상의 범위를 제한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의 의미를 좀 더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a,b,c,d....... 라는 밀 씨앗이 뿌려졌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각각 다른 개체였습니다. 이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밀로서 온전히 잘 성장한다면 그건 분명 밀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근데 만약 b라는 씨가 처음엔 분명 밀이었습니다만 이 씨가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해서 가라지로 변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왜 가라지를 미리 뽑지 말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지는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도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추수를 하다가 실수로 가라지를 밀로 착각하여 뽑을 수도 있을 확률도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확률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본성 자체가 기다림입니다. 원래 세상 자연계에서는 밀이 가라지가 될 수는 있지만 가라지가 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근데 복음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연계의 현상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중의적인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밀에서 가라지로는 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이 가라지가 밀로 변할 수 있을 여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굳이 추수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추수 때까지 기다리면 확실히 구분될 수도 있지만 그때라고 해서 그럼 완벽하게 밀과 가라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분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간단하게 다시 정리를 한번 해본다면 이렇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선인이 없습니다. 처음엔 선인이었다고 해도 환경적인 여타 다른 이유로 악인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악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설령 악인으로 산 사람도 나중엔 회개를 하고 다시 악인의 삶에서 참회를 하며 선인으로 선회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인이라고 해서 계속 선인이라고 할 수 없고 지금 악인 같다고 영원히 악인으로 산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이해하고 묵상한다면 좀 더 색다른 묵상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하는 묵상도 설득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오늘 복음 40절 이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과 같은 묵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라지는 분명 불구덩이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이 불구덩이는 지옥을 상징할 것입니다. 지금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이고 천주교도 지옥에 대해서는 언급을 잘 안 하는 추세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님도 그렇고 일부 천주교 신부님도 이런 부분에 대해 교회가 잘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하시는 것을 유튜브 강론이나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표명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사실 어떤 게 맞는지는 각자 개인이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마지막 심판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로마에서 성서를 전공하신 대전 교구 신부님의 오늘 복음 강론을 봤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신부님이 아니라서 언급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묵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고는 하지만 하느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강론에서 언급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비도 회개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원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예전에 경남에 있는 용국사라는 절에 가면 절 입구부터 참회문이 스피커로 나옵니다. 그 당시 그 참회문을 들으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르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린 처음엔 다 밀과 같은 씨앗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밀이 아니고 가라지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밀로서 남아 있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밀이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로 하늘 나라의 자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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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일부)
강만연 (fisherpeter) 11:36
찬미예수님! 지금 방금 원주교구 신부님께서
문자를 주셨습니다. 제가 부탁을 드렸습니다.
사실 새벽에 글을 올린 후에 오늘 올린
묵상글이 교리나 혹시 성경 말씀에 저촉이
되는지 살펴봐 주십사 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과 같이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글 관점이 참 새롭다고 하셨습니다.
신선한 느낌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교리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젠 묵상 글을 쓰면서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주 이상한 글을 올리지 않는 이상
너무 세심하게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쓰겠다고 했습니다. 항상 이점이 글을 쓰면서
걱정을 많이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얼마든지 혹시 자문을 구하면
신부님께서 면밀히 교리와 성경에 어긋나는지
감수를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혹 의구심이 든다면
이젠 신부님께서 기꺼이 해주시겠다고 하시니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다행히 문제가 없다고 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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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제1독서 (탈출33,7-11;34,5ㄴ-9.28)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구름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서 경배하였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가 진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젊은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천막 안을 떠나지 않았다." (9-11)
'구름 기둥이 내려와'에서 '에레드'(ered)는 '내려가다'(탈출2,5), '흐르다'(이사15,3)등의 뜻을 가진 '야라드'(yarad)의 미완료형으로 '내려오곤 하였다'(would come down ; would descend)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나이 산 정상을 덮고 있던 구름, 곧 하느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인 구름이 천막 위로 이동하여 지속적으로 머물렀음을 의미한다.
또한 '머무르고'에 해당하는 '웨아마드'(weamad; and stood)는 '서다'(창세24,30)라는 뜻의 '아마드'(amad)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 '그리고 그것이 섰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모세와 천막에서 대화를 나누실 때, 구름 기둥은 백성의 접근을 막으면서 동시에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천막을 에워싸 서 있었던 것이다.
탈출기 33장 10절의 '경배하였다'에 해당하는 '웨히쉬타하우우'(wehishithahauu ; and worshiped)는 '엎드리다'(이사51,23)는 뜻을 가진 '샤하'(shaha)의 재귀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것으로, 이렇게 재귀형으로 쓰이면 이 동사는 '절하다'(신명11,16), '경배하다'(신명26,10)라는 뜻을 갖는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할 때에도 사용된 것(탈출32,8)이지만, 이제는 금송아지가 아닌 하느님을 경배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느님 앞에서 중재 기도를 드리는 동안, 모두 천막 밖에서 모세와 더불어 하느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 대신 중재 기도를 드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 자신도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는 심정으로 간절히 통회하며 회개의 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입술로 직접 자신의 죄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탈출기 33장 11절의 '얼굴을 마주하여'에 해당하는 '파님 엘 파님'(panim el panim; face to face)는 문자적으로는 '얼굴에 얼굴'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세가 마치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여 대화 하듯이 하느님과 친밀하게 교제했다는 의미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느님과 모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장차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는 그때에도 그렇게 볼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1코리13,12)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천막 안을 떠나지 않았다'에서, '로'(lo)는 '아니하다', '않다'를 나타내는 강한 부정어이고, '떠나지'에 해당하는 '야미쉬'(yamishi)는 '움직이다'(이사46,7), '갈라지다'(즈카14,4)는 뜻을 가진 '무쉬'(mushi)의 사역형으로 '벗어나다'(미카2,3), '떠나다'(탈출13,22)는 뜻이다.
또한 '~을'로 번역된 '밋토크'(mithok)는 '가운데'(창세1,6), '중앙'(창세3,3)을 뜻하는 '타웨크'(thawek)에 '~로부터'라는 뜻의 전체사 '민'(min)이 결합한 형태로 '~가운데로부터'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오헬'(haohel)은 천막(the tabernacle)을 뜻하는 '오헬'(ohel)에 정관사 '하'(ha)가 결합한 것으로, '그 천막' 바로 앞에서 언급된 만남의 천막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그가 그 천막 가운데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여호수아가 천막에서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생활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처럼 여호수아에게 천막을 지키는 임무가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며 타락했을 때, 그는 무리를 떠나 시나이 산 중턱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탈출32,17).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금송아지 우상 숭배로 더럽혀지지 않은 가장 확실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13,24-43)
24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 씨, 말씀. 그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은 이가 좋은씨, 그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37절에서)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 성경에서 잠은 죽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향해 깨어있지 못하고 땅, 세상을 향해있는 그 상태의 때를 ‘잔다, 죽었다’ 라고 한다.
그 때에 악마(뱀)의 거짓말을 뿌린 것, 곧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가르침을 준 것.
그러면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 그 인간의 계명, 거짓 가르침이 자라면,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신앙이 아닌 인간의 뜻을 위한 열심한 종교행위의 신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 사람은 자기의 지혜로 밀과 가라지를 분별할 수 없다.(1코린2,6~참조)
보이지 않는 깨달음의 신앙보다 보이는 인간의 행위의 열심한 신앙이 더 크고 멋져 보이기에 분별할 수 없는 것,
그래서 하늘의 일군 천사(39절)를 시키시는 것, 천사만이 하느님의 눈으로 구별할 수 있기에~~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 29절‘아니다, (쉴레고)’는 허락하다, 용납하다. 라는 뜻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가만 두어라’로 번역했음.)
그러니까 그 가라지들을 허락, 용납하셨다는 것, 그것은 밀의 구별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세상. 38절) 뿌렸다.
= 사람의 비유, 곧 예수님의 말씀 선포를 뜻하는 것이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 하늘의 새(악마, 49절)는 거짓 가르침으로 받은 율법, 구약을 뜻하는 것으로~ 작은 겨자씨, 곧 작게 보여 감추어진 그 신약의 진리가 구원의 힘, 능력이 없는 그 행위로 커 보이는 구약, 율법을 품는 모습인 것이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 여자의 비유, 여자는 피조물과 교회를 뜻하는 것, 누룩 또한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이는 말씀을 뜻하지만 그 말씀에다 인간의 생각과 뜻을 넣어(섞어) 헛된 바램이 들어가 부풀린 상태의 그 잘못된 교회, 나라를 뜻한다.
누룩은 항상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 하셨다는 것.(탈출12,8~ 13,3~ 외 다수 50곳이상)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의 비유 말씀이 옳음과 그름의 나라를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지 같은 맥락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밀과 가라지를 대조 하셨듯이 성경은 그 두가지를 대조하여 가르친다. 그러니까 남자의 씨를 받은 것이 밀이고 여자의 누룩으로 받은 것이 가라지인 것이다.
(마태16,12) 12 그제야 그들은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말씀으로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않고 인간의 계명, 교리로 받아 열심한 종교 행위에 만족한다면 헛된 신앙을 사는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 죄를 덮으시기 위한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인간들의 계명, 법으로 주어 하느님의 뜻, 계명을 거스르게 죄를 짓게 하는, 그래서 십자가의 용서를 못 받는 죄의 상태로 남게 되는 그 죄 짓게 하는 이들 또한 하늘의 의로움이 아닌 인간의 자기 의로움을 위해 사는 그 불의한 이들은~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억울해서 이를 가는 것이 아니라 씹을 것이 없어 이빨끼리 부디치는 것, 땅의 법으로 열심히 자기열심, 의로움 그 양식만을 모았으니 하늘의 의로움, 그 구원의 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하느님의 귀(지혜)로, 뜻으로 들어라~ 그러면 십자가의 대속을 구원의 진리로 믿어 거저 의인이 된다 하시는 것.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아멘.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음(마태13,36~43)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1~42)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처음에 씨를 뿌렸던 '사람의 아들'(인자)이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자로 서게 된다.
그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자신의 나라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던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 나라 밖으로 거두어 내어,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넣으실 것이다.
여기서 '그의 나라'에 해당하는 '테스 바실레이아스 아우투'(tes basileias autou)는 '그의 왕국'(his kingdom)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he)는 '사람의 아들'(人子)을 가리키므로, '그의 왕국'은 '사람의 아들의 왕국', 즉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왕국이지만, 거기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도 활동하고 있던 것이다.
하나의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하나의 세상에 천국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이 서로 뒤엉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결국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내던져질 것이다.
여기서 '~에서'로 번역된 '에크'(ek; out of)는 어떤 공간이나 영역 '밖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이므로,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왕국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던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의 왕국 밖으로 완전히 축출할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사실은 '거두어'에 해당하는 '쉴렉수신'(sylleksousin; they will weed; they will gather)는 마태오 복음 13장 28절과 29절에서 '뽑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쉴레고'(syllego)의 미래 능동태로서, 적극적으로 뽑아 격리시킬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서도 확인된다.
한편 마태오 복음 13장 41절은 주님의 원수인 악마에 의해 그리스도의 왕국 가운데 심기워지고, 종말에는 그 왕국 밖으로 거두어 내어져 불구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의 자녀들(마태13,38.39)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는 자들인지 보여 준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로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a; thing that offend; thing that causes sin)의 원형 '스칼달론'(skandalon)은 중성 명사로서 동물을 잡는 '덫'이나 '올가미', 또는 길에 숨겨 놓아 지나가는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뜻한다.
'스칼달론'은 중성 명사이며 뜻도 중성적이지만, 심판받을 대상은 사람이므로 본문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마태16,23참조).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은 원문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직역될 수 있는데, 여기서 넘어지게 한다는 것은 확신과 결단력이 약하거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을 죄로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고, 신앙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믿는 이들 가운데 존재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불의'로 번역된 '아노미안'(anomian; iniquity)의 원형 '아노미아'(anomia)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 '아'(a)와 '율법'이라는 뜻의 명사 '노모스'(nomo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율법이 없는 자의 상태'라는 뜻이다.
여기서 '율법'은 하느님의 의로우신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하느님의 모든 신적(神的)인 법률을 말한다.
따라서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의 통치 원리인 신, 구약의
모든 율법이 그 사람 안에 아예 없는 자들과 인위적으로 그 법을 조작하거나 무시하며 깨뜨리는 자들로서, 하느님 나라의 통치 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져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진 것 때문에, 과거의 자기 행위를 후회하면서 극도의 절망과 비탄으로 절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