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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0]
정의와 우애는 어떻게 행복과 관련되는 것일까요?
“정의는 가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이라 생각되며, 저녁의 별이나 새벽별도 그만큼 놀라운 것은 못 된다. 그래서 ‘정의 속에 모든 덕이 다 들어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덕의 활용이기 때문에 충만한 의미에서 완전한 덕이다. 그것이 완전한 까닭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덕을 자기 자신 속에서만 아니라, 자기 이웃 사람에 대해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네가 우울하고 힘들어서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눈을 감고 나를 생각해 봐
그러면 곧 내가 가서 너의 어두운 밤을 밝혀줄 테니까
그저 내 이름만 불러봐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네게 달려와서 널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건 넌 날 부르기만 하면 돼
그럼 내가 달려갈게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캐롤 킹,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삶 - 정의와 우애가 만나는 자리
정의와 개인의 행복이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정의가 행복을 이루는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좋은 삶이 행복의 내용이며, 이는 덕의 습득과 발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행복을 정의하는 데 동의할 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행복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때 왜 ‘좋은 삶’의 진면목을 먼저 성찰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정의가 덕 가운데서도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매우 인상적으로 강조하고 있고 또 이런 논지를 그의 다른 중요한 작품 「정치학」에서도 이어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정치의 원리입니다. 이런 입장은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정치에 비추어보면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오히려 우리가 왜 온전한 의미에서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공동체에 정의가 살아있게 하고 각 개인이 그 안에서 정의의 덕을 익히고 실행하여 ‘행복’해지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의’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덕’이라는 사실은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줍니다.
독일어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해설하는 가장 정평 있는 저서를 쓴 고전학자 잉마르 두링은 ‘윤리학’과 ‘정치학’을 해설하는 대목에서 ‘인간적으로 함께하는 삶을 위한 철학’이라는 소제목을 붙여놓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윤리와 정치는 그 본디 정신에 따르면, 서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현명한 길을 모색하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행복하기 위한 길 위에서 정의와 우애가 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본 것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신인데, 이는 사실 우리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보는 내용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한 대목을,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인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발표한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비오 12세의 유명한 좌우명을 인용해서 정의와 함께 우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연대성이야말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 할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 비오 12세의 교황직 좌우명이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justitiae pax)’였다. 오늘에도 성서적 영감에서 오는 똑같은 의미와 똑같은 어조(이사 32,17; 야고 3,18 참조)로, ‘평화는 연대성의 열매(Opus solidaritatis pax)’라고 단언할 수 있다”(「사회적 관심」, 39항).
행복의 길, 우애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
정의와 우애는 행복, 또는 평화라는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애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행복이 만개하게 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와 행복의 관계를 곰곰이 성찰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분명 타인의 이목, 재화, 명예 등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족성’에서 시작되지만, 이 사실이 우애를 통해 행복이 더해지고 충만해지는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제2의 나’라고 할 수 있는 벗에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통교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정의 없는 우애는 항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사실 진정한 우애가, 곧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이끄는 우애는 무엇인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전적인 구분을 내리고 있습니다. 곧 진정한 우애는 단순히 애착이나 유용성에 의해서 어울리는 것과는 구분되며, 덕 안에서 서로 덕스러워지며 나누는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부부 사이에는 정서적 애착만이 아니라 덕을 나누는 우정 역시 생겨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우정을 꼽는 것은 분명히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 정의를 비롯한 덕을 갈구하고 그것을 익혀가는 삶의 길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은 고대 그리스 문화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정신문화의 근간이 형성된 중세시대에 더욱 분명히 인식되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덕을 갈고 닦는 수도자들 사이에 아름답게 꽃핀 우애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배우게 됩니다.
날카로운 문명비평가였던 이반 일리치는 아마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저서라고 할 수 있을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중세시대 이러한 수도사들의 행복한 참된 우정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편지(대학자 빅토르의 휴가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세의 우애(amicitia)의 개념이 현대의 왜곡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교정할 가능성이 있음을 봅니다.
“사랑(caritas)은 끝이 없어라!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그러나 친애하는 형제여, 이제 나는 비로소 나의 충만한 체험 안에서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네. 왜냐하면 나는 이방인이었고 낯선 땅에서 그대들을 만났건만, 내가 그대들 안에서 친구를 발견했기에 나는 진정 이방인이 아니었다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친구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덕 안에서 우애를 발견했고 그것을 사랑했다네.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을 채운 것이 감미롭고 싫증나지 않았다네….”
우리는 이 편지에서 휴가 우애를 표현하며 사랑, 곧 애덕인 까리따스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랑이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만 한편으로 ‘정념으로서의 사랑’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유약하고 덧없는 것인지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항구한 우애마저도 품고 있는 고귀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 철학이 미처 몰랐던, 그리스도교 철학만이 밝히는 행복의 비밀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9]
타인은 나의 행복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찬란함이여, 낙원의 여인들이여
우리 모두 황홀함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돌아가자!
엄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고요한 나래가 멈추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4악장에서).
The road is long/ with many a winding turn
That leads us to who knows where
who knows when
But I'm strong/ strong enough to carry him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더 홀리스, ‘그는 짐이 아니고, 나의 형제랍니다’).
타인! 지옥인가, 행복의 조건인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 그것은 지옥이다.”라는 말로써 인간이 다른 사람과 만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이 될 수 있는가를 강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이자 ‘관계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 시간들의 많은 부분이 다름 아니라 다른 사람과 좋았던 관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이러한 ‘도발’이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은, 긍정적인 타인과의 체험을 통한 행복이라는 ‘빛’ 다른 쪽에 드리워진, 타인에 의해 초래되는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자를 잘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다양한 행복론에서 배우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관계가 행복의 원천이라지만 그만큼이나 관계의 종말은 돌이키기 어려운 불행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우연히 만난 낯모르는 사람의 호의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만큼, 잘 알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준 적대적 태도는 순식간에 삶의 소박한 행복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들과의 긍정적 만남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관계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이미’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성과사회’라고 요약되는 현대의 문화풍토에서는 외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다양한 관계를 ‘소유’하는 것 역시 능력으로 평가되기에 ‘실용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실패의 표시로 인식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맥’으로 대표되는 과시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확대에 골몰하곤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타인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가능한 타인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평정함의 행복’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이후로 이런 관점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은 타인과 함께 ‘지속적인’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것의 고단함과 지난함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타인과 함께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가진 소중함과 보람을 말해줍니다. 스토아 철학과 같은 초연함의 길이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방식으로 ‘자기애’를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난 호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기초월에 비추어본다면 너무 일찍 우리의 한계를 그어놓는 태도일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타자를 위해 행복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애와 이타주의의 대립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한시적인 것일 뿐’(프리도 릭켄)이라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행복의 길을 밝혀주는 세 개의 단어를 꼽자면 그것은 정의, 우정,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단어들이 비추어주는 타인과 이루는 행복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행복의 조건으로서의 정의, 덕으로서의 정의
정의가 행복의 조건이라는 주장에 우리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연상하는 내용은 아마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능력에 따른 공평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체제가 나의 복리와 자아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국가 원리”라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도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존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고전윤리학에서 정의는 공평함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와 개인의 차원에서 조화로운 상태를 칭하는 덕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정의로운 사회체제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외적 재화와 성공에 정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정의 그 자체로도 덕으로서의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정의롭지 않은 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가 ‘나의 행복’에 필수적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고 긴 시간의 도야를 통해 체화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요약하였듯이 ‘정의’는 ‘타인을 위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한 선’이 어떻게 ‘나의 행복’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 윤리학의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매혹적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 폴로스, 그리고 권력을 믿는 야심만만한 젊은 정치가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전을 통해 왜 정의가 한 사람의 행복을 내적으로 규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폭군이 정의 대신에 권력에 힘입어 불의를 행함으로써 ‘그 자체로’ 가장 불행한 이가 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려 합니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러한 논증이 근거하는 ‘덕으로서의 정의’와 ‘행복’의 필연적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왜 이러한 정의는 ‘우정’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8]
‘나를 넘어선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 / 꿈꾸어 보세
거기 가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나라에서!
그 뿌연 하늘의 / 젖은 태양은
나의 마음엔 신비로운 매력
눈물 속에서 반짝이는
알 수 없는 그대 눈동자처럼
거기에는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사치와 적막 그리고 쾌락(샤를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네게 전해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버스커 버스커, ‘여수 밤바다’).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고독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인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정신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정신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인 것이다(카를 라너, 「일상」에서).
우리는 왜 여행을 꿈꾸는가?
8월, 여름이 깊어졌습니다. 한낮의 열기에도 장맛비에도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밤의 나른함과 낮의 활달함이 어느 시기보다도 생생하게 교차하는 때가 여름입니다.
이즈음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을 때, 차창에 흐르는 빗물을 보며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머리에 자주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바로 ‘여행’입니다.
훌쩍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저 ‘피서’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른한 여름밤에 참 잘 어울리는 음악 가운데 하나가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 앙리 뒤파르크가 곡을 붙인 프랑스 가곡 ‘여행에의 초대’입니다.
서정적이면서 나른한 관능성의 멜로디와 분위기도 좋지만, 아마도 그 제목 자체가 음악에 빠져들 정서를 이미 마련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 곳의 풍경에 대한 상상이나 기억이 떠오르고 동경이 깨어나면, 이미 마음은 음악에 열리게 되니까요.
모르긴 하지만 여름날 많은 이들이 서점의 여행서적 분야에서 책을 뒤적이며 소리 없이 그러한 여행의 동경을 달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련된 글로 현대인의 숨은 생각과 갈망을 꼭꼭 짚어내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과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것 자체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름에 여행을 생각하는 것은, 물론 많은 경우, 더위와 일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문자 그대로의 ‘휴가’,또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는 ‘일’로 보입니다.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단둘이 있고 싶은 낭만의 표현이겠지요.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도 더 뿌리 깊은 ‘그리움’이 있기에 ‘여행’이라는 말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의 존재에 뿌리내린 갈망이라 할까요. 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초월성’의 가장 일상적인 표시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는 곳을, 또 나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나 자신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아를 찾고 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깊은 관심에 비례해서, 여행이 상징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일’에 대한 열망이 커진다는 사실은 행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근원적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런 동경이 향하는 참된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초월의 대상’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초월의 참된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글을 읽다 보면 자기를 넘어서는 것, 초월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엑스타시스(extasis)’로서 여기서 유래된 현대어 ‘엑스터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기를 잊고 열광에 빠져드는 몰아, 망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예술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됩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존의 자기를 잊고 사회적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기회를 갖기를 은근히 바라곤 하는데 이런 바람도 어느 정도는 ‘엑스타시스’로서의 초월과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초월을 극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계기가 바로 격렬한 음악과 움직임(춤)에 빠져들 때입니다.
열광을 통해 일종의 초월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멋진 록 음악 공연에 가보면 됩니다. 황홀한 공연은 때때로 시간과 경제적 문제로 미뤄야 했던 먼 곳에서의 긴 여행을 단 하룻저녁에 압축해서 경험한 느낌을 갖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탈아’를 체험하는 것이 과연 자기를 ‘넘어서는’ 것의 참모습일까 질문하게 되는 것은 그 열광의 하룻밤이 지난 후 느끼는 묘한 허무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에 대한 두 번째 단어 ‘에페케이나(epekeina)’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넘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플라톤은 자신의 주된 저서 「국가」에서 태양의 비유를 들 때 “존재를 넘어서”라는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진리를 인식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등장시키는 것이지요. 여기서 존재를 넘어서 만나게 되는 대상은 ‘선의 이데아’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한 가지 더해서 그는 이데아들의 원천으로서 선의 이데아를 말하고, 이를 태양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는, 세상의 통념과 상식과 경험의 제한에서 정화된, 정신만이 파악할 수 있는 어그러짐 없는 원형으로서의 존재입니다.
선의 이데아, 태양은 이런 참존재의 세계의 원천으로서 이것들조차도 ‘넘어섭니다.’ 플라톤이 ‘존재를 넘어서는’ ‘선’을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감이 됩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의 참뜻은 결국은 모든 생명이 태양을 향하듯 나를 넘어서는 ‘선’을 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선을 향함은 일차적으로 존재론과 신학의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존재들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이란 말이 뜻하는 여러 차원을 생각하면, 선을 향함이 나 자신 안에 갇혀있는 존재로 머무는 것에서 그 존재를 넘어서 타자에게 향하는 ‘이타주의’의 움직임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나를 넘어섬’으로서의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행복이라는 말이 ‘자기애’만이 아니라 ‘이타주의’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개념은 과연 이타주의와 자기애를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여행의 계절, 8월을 보내고 가을의 예감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7]
과연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는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같지 않는 사실에 입각하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인간들을 똑같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 가르침이다.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은 사람 간의 바로 이런 상이함에 있다. 능력과 성향이 서로 다른 데에 있다. 하느님이 포괄하시는 힘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의 무한한 다양성, 각각 한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이 다양성에서 드러난다. … 한 군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귀한 보배로서 실존의 성취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보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각자가 서있는 제자리라는 것이다”(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중에서).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 나는 영원히 갈래”
(패닉, ‘달팽이’).
지난 이야기 1 - 현명함이 보여주는 행복의 길
이제 이 연재가 예정된 순서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번 지난 이야기들을 요약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말이 우리의 일상에서 넘쳐나지만 이 말이 본디 가진 무게와 다의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우리의 분명한 체험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행복에 대한 숙고된 생각을 기대하는 이유이겠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의 여러 가지 상이한 뜻을 곰곰이 살펴보는 것이 행복의 철학을 위한 여정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피상적이지 않고, 삶의 체험에 부응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의를 내려보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이 현명함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관점을 매우 중요한 토대로 삼아, 그의 주장이 뜻하는 내용을 오늘의 관점에서 명료화하려 노력하고
논증의 설득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공들인 숙고의 결과로 그의 입장이 가진 포괄성과 타당성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현명함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윤곽을 그려본 행복은 본연의 의미에서의 ‘잘 사는 삶’입니다.
현명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어그러진 사회적 통념이나 질서 잡히지 않은 정념이 강요하는 ‘모방의 욕망(르네 지라르)’의 충족을 행복으로 믿는 것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비교우위에 행복을 종속시키는 어리석음을 멈출 때 행복의 진면목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명함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매 순간 스스로 판단과 의지를 통해 행하는 결단과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므로, 현명함을 통한 행복은 보편적인 것이되, 각자의 상황에 대한 고려와 자율성을 요구하는 개별성의 영역도 포함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현명함을 요약하자면 객관적 행복의 조건을 사려 깊게 발견하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나의 삶의 영역에서 그를 위한 효과적인 길을 모색해 가며 차근차근 실천해 가는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명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진 행복의 관점을 정립해 놓고서도 조금씩 마음에서 자라나는 아쉬움이랄까 의문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 이야기 2 - 나에게 고유한 행복의 길을 찾아서
그건 ‘지금 여기의 나’의 상황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행복의 개념이 개별성을 포괄한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객관적 덕’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모범답안으로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이 정해진다면 ‘이런 행복에 나의 개성과 독특한 바람이 담길 수 있을까?’ 하는 근심과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는 못하지만 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하고 떼어내기 어려운, 감정과 삶의 궤적과 취향을 표현해 주는 것들이 행복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을 따라 실천이성의 관점에서 정립된 행복의 윤리학이 과연 나의 고유함을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의 의미 있는 것들을 다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난 호에서, 행복에서 주관적인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을 ‘의미물음의 인간학’이라는 주제어 아래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를 단지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사와 사상사에 비추어서도 성찰해 보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기 진실성’이라는 현대철학의 개념을 곰곰이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를 찾는다.’, ‘자기실현을 한다.’, 아니면 ‘일상의 행복을 찾는다.’, ‘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말들로 행복에 대한 추구를 표현할 때, 사실 여기에는 ‘좋은 삶’이라는 객관적 행복과 ‘자기 진실성’에서 오는 주관적 의미들의 만남과 갈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길에서 답을 찾아보다
행복에 대한 탐구는 이런 두 가지 방향의 갈망들이 서로 상보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러려면 손쉬운 조화보다는 먼저 그것들이 충돌하는 지점들을 담담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숨겨졌던 ‘자기 진실성’에 대한 바람이 얼굴을 드러내는 표현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관습적’ 삶의 방식과 객관적 행복의 조건에 대해 주관과 개성의 이름으로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의 철학’이 지닌 의미는 획일화의 경향을 지닌 근대와 현대의 삶의 조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색이 가진 맹점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진실성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데에 이르거나 ‘부정으로서의 자유’만이 옹호될 때 이는 이미 좋은 삶의 실현이라는 긍정적인 행복의 개념과 더 이상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나 안에서만 유래하는 개성과 독특함을 주장하는 입장은 자아가나 밖의 풍성한 수원들에서 분리될 때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른 삶보다도 더 피상적이고 진부한 삶의 모습에 머물게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진실성이 객관적 행복과 접점을 찾는 중요한 계기로서, 인생의 깊이에 대한 관심과, 내면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를 초월하는 영역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서만,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를 넘어선다.’ 또는 ‘초월’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서 현실적 필요나 욕망을 넘어서는 또 다른 갈망과 동경을 가지고 있을 때, 이미 이런 ‘초월’을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경과 갈망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같되 그것들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기만 합니다.
이제 행복의 철학이 가야 할 길은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의 다양한 의미를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앞으로 두 번쯤에 걸쳐 곰곰이 생각해 보려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6]
나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은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개성 없어 보여 싫지 / 그것은 세상 어느 곳엘 가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잖아 /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고 지난 일에 집착하지 않아 / 아무도 이해 못할 말을 하고 돌아서서 웃는 나는 아웃사이더 / 명예도 없고 금전도 없어 자존심이 있을 뿐이야”(봄여름가을겨울, ‘아웃사이더’).
“우리들은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자꾸만 잊어 버린다. 우리들은 물음표를 충분히 깊게 던지지 않는다”(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에서).
필경사 바틀비 - 근대적 삶의 방식과 개인의 운명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고래를 쫓아 사투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주인공인 대작 「백경」으로 유명합니다. 이 소설을 대개 해양소설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종교적 상징과 의미가 놀랄 만큼 풍부하게 담겨있기도 합니다. 깊고 거대한 이 작품은 작가의 세계관의 장대함과 근대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작가의 작품 가운데 좀 덜 알려진 걸작이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단편에서 멜빌은 독자들에게 근대적 세계상에 짓눌리는 개인의 삶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명료한 문체 속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짧지만 풍부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시대를 많이 앞선 작품이라 할 이 단편을 최근 들어 몇몇 철학자들이 새로이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멜빌이 보여주는 근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심오한 직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공황이 밀려오는 20세기 초 미국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되며, 창백한 외모를 지닌 주인공 바틀비가 필경사로 등장합니다. 변호사의 소송장을 옮기는 것이 맡겨진 임무인 이 직업을 우리는 산업화된 사회 안에서 같은 일의 반복과 관료주의 속에서 자아상실로 내몰리는 수많은 개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섞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필경사 일을 수행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주어진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거부를 표시합니다.
그는 상사의 지시에 오직 “난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만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답에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산업사회 안에서 바틀비의 비극적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소설은 그 귀결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그저 몰락인 것인지 아니면 소리 없되 의미 있었던 획일화와 몰개성의 시대상에 대한 저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정’의 몸짓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만큼은 이 소설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부정의 대답은 행복을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신조로 삼는 근대 이후의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한 미력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거부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로서의 ‘행복의 윤리학’이 각 개인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삶의 의미에 대한 ‘의미물음의 인간학’을 담지 못할 때 생겨나는 공허감을 바틀비의 부정의 몸짓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허먼 멜빌은 문학을 통해 근대적 삶의 조건에 살고 있는 개인의 비극을 가슴 서늘하게 그렸지만, 이러한 산업사회 안에서 본연의 자신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 안에서 ‘근대성 비판’이라는 중요한 주제로 20세기 내내 꾸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 로마노 과르디니의 「근세의 종말」 같은 저술들에서 우리는 근대정신의 본질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유의 시급성을 논하는 대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교수 시절에 저술한, 20세기 신학의 손꼽을 성과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 - 어제와 오늘」을 봐도 근대정신의 부정적 그늘에 대한 성찰과 이의제기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근대성의 비판이 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도한 객관주의와 양적으로 계측 가능한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의 근대성 비판은 파스칼, 키르케고르, 니체 같은 전 시대의 사상가들의 예언자적인 통찰에 크게 힘입고 있습니다.
과도한 객관적, 타산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행복에 관해 새롭게 가져온 관점의 전환은 바로 자기 진실성 /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입니다.
이제 객관적으로 좋은 삶을 실현해가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찾고 그것을 주위의 견해와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고수해 가는 데서 행복의 비밀을 찾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연출하는 예술가인 셈이고 그러기에 20세기 들어 예술가들의 평범치 않은 삶의 궤적들이 미화되고 영웅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진정성’이라는 가치의 발견은 분명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우리 시대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책에서 잘 정리하고 있듯, 이는 현대의 과도한 주관주의적 사고방식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주관적 의미의 중요성에 눈을 돌린 것은 근대적 삶의 방식에 깃든 병리현상에 대한 처방이었지만 ‘진정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에는 전통, 역사, 공동체와 같은 삶의 의미와 행복의 풍요한 원천을 잃고 피상적인 것들로만 가득 찬 삶으로 귀착될 수 있다고 테일러는 말합니다.
사실 진정한 ‘자기 진실성’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듯 생의 ‘깊이’와 접촉할 수 있을 때만 논의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름지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로 유명한데, 그가 한 이 말에는 사실 ‘말할 수 없는 것’ 곧 인생의 의미의 한없는 깊이의 중요성이 함축되어 있기도 합니다. 세상의 개별적 사건들은 세상 안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세상 자체의 의미는 세상 안에 매인 관점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진정성(본래성)’ 개념을 처음으로 철학에서 다룬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는 진정한 본래성의 체험을 ‘양심의 부름’을 통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결단성을 통해서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혜안을 음미하면서 우리는 행복과 의미라는 두 개념을 이어주는 진정한 ‘자기 진실성’은 오히려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그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행복에서 ‘초월성’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