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있으되, 영화에 빠지지 않기-
우리는 스크린 앞에 앉아 빛의 흐름을 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본다’기보다 ‘그 안에 들어간다’. 이야기의 결에 붙들리고,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며, 서사의 파도에 휩쓸린다. 이때 스크린은 더 이상 스크린이 아니고, 주인공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여기서 이미 하나의 전도가 일어난다. 보는 자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만이 남는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이며, 불교가 말하는 무명(無明)의 한 장면이다.
무명은 어둠이 아니라 동일시다. 대상이 나를 점유하는 사건, 혹은 내가 대상을 나로 오인하는 미묘한 결박. 영화는 그 은유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낸다. 우리는 픽션임을 알면서도 울고, 허구임을 알면서도 분노한다. 앎은 있으되, 깨어 있음은 없다.
여기서 수행은 시작된다. 수행은 스크린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스크린을 다시 스크린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극장의 어둠과 좌석과 나 자신의 몸을 느낄 때, 비로소 하나의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 이 문장은 지식이 아니라 각성이다. 세계를 중지시키지 않으면서, 세계에 붙잡히지 않는 자리. 이것이 알아차림(sati)이다.
그러나 수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극장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은 해탈이 아니라 회피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스크린을 보는 일이다. 다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야기는 여전히 흐르고, 감정은 여전히 일어나지만, 그 모든 것이 ‘영화임’은 끊어지지 않는다. 울면서도 알고, 몰입하면서도 붙잡히지 않는다. 이때 동일시는 해체되고, 경험은 투명해진다.
이 투명성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동시에 본다. 장면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무상(無常). 그 어디에도 붙들 수 있는 중심은 없다—무아(無我). 그러므로 모든 것은 비어 있다—공(空). 그러나 이 공은 무(無)가 아니라, 자유다. 스크린이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영상이 가능하듯, 집착이 비어 있기 때문에 삶은 온전히 경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은 영화와 같다. 완전히 빠지면 고통이 되고, 완전히 물러나면 생동이 사라진다. 길은 그 사이에 있지 않다. 길은 둘을 가르는 선을 지워버리는 데 있다. 몰입하되 영화임을 잊지 않는 알아차림, 세상에 참여하되 공성-무집착을 견지. 이것이 지관쌍운이며, 깨어 있음의 미학이다.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본다. 다만 이제는 안다.
이것이 영화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앎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온전히 본다.
光影流轉不曾停, 광영유전부증정
看者忘時便入形; 간자망시변입형
忽覺此身在座上, 홀각차신재좌상
笑裏猶見萬緣空. 소리유견만연공
빛과 그림자 흘러 멈춤이 없는데
보는 자를 잊는 즉시 형상에 빨려드네
문득 깨달아 이 몸이 좌석 위에 있음을 알면
웃으면서 온갖 장면이 텅 빔을 본다
첫댓글 날 마 다 좋 은 날
너무 깊이 빠지면 마음이 시리고
멀리서 바라만 보면
쓸쓸한인생이라는 커다란 영화.
이쪽일까 저쪽일까
길을 찾아 헤매지 마세요.
경계가 스르륵 사라진 새하얀 빈자리에
길이 있답니다
마음껏 울고 웃으며 영화를 즐기되
가짜 스크린인 걸 잊지 마세요
세상 속으로 첨벙 뛰어들되
내 것이라 움켜쥐지 않는답니다.
가만히 마음을 멈추고 똑바로 바라볼 때
비로소 피어나는 깨어 있는 아름다움.
이제 하얀 스크린 너머를 보며살며시
방긋 미소 지어보세요.
모두가 한바탕 즐거운 영화인 걸 아는 순간,
세상이 처음처럼 맑게 보일 거예요^^~
마 하 반 야 바 라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