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열매
23: 19
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
======================================================================
1620년 9월 16일,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총 102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떠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영국의 국교에서 탈퇴한 사람들로서 극심한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대륙으로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오로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지의 세계인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기쁨으로 설렜을지, 아니면 두려움과 불안으로 어두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모두 그들의 마음을 한 구석씩 차지하고 있었겠지요.
두 달이 넘는 항해 끝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그러나 애초에 목표했던 버지니아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메이플라워호가 닿은 곳은 원래의 목적지에서 북쪽으로 800km나 떨어진 황무지였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닥쳐온 겨울은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자고 대서양을 건너온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꿈에 그리던 아메리카 신대륙은 영국 국교의 박해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황무지와 추위와 굶주림만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진 첫 번째 겨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듬해 봄이 되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캐내면서 밭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인근의 인디언들이 옥수수를 재배하는 법과 고기잡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파릇파릇 자라나는 곡식의 새싹과 함께 그들의 희망도 새록새록 자라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씨앗과 함께 뿌렸던 눈물과 땅을 파면서 흘렸던 땀의 대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던 황무지가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빛 벌판으로 변해 있었었습니다. 지난 겨울에만 해도 죽음의 땅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풍요와 미래를 보장하는 약속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수확, 첫 번째 추수, 그것은 바로 그들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과도 같은 그 첫 번째 추수단을 모아놓고 생명의 은인인 그 인디언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던 그들의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은 애굽을 탈출하여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상대하셨던 대상은 개인들이었습니다. 아담을 시작으로 노아나 아브라함, 야곱 같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후 400년이 지났을 때 야곱의 자손은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상대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 혹은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내산 계약의 내용을 한 마디로 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출 6:7)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이 계약이 맺어집니다. 모든 계약에는 조건이 있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20장에 나오는 십계명과 그 뒤의 여러 율법조항들입니다.
이제 애굽을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하고 계시는 여러 율법 조항들은 농경사회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 조항도 농사짓는 사람들 얘기지요?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랑해야 했습니다. 40년 동안 길을 갔으면 지구도 몇 바퀴 돌았겠네요. 하지만 이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광야를 이리저리 유랑하면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무리 척박한 광야라지만 40년 동안 한 곳에 머물러 정착했더라면 상당한 문명을 일구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고 그저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터를 잡고 집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고 천막을 쳤다가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던 이 사람들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첫 수확을 거두에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자기들이 심은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더니 탐스럽게 곡식이 여물고 열매가 달리는 모습에 얼마나 목이 멨을까요? 이것은 40년만의 결실인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받고 떠나왔던 부모님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그 자녀들만 살아남아 지금 이 첫 수확을 거두고 있습니다. 탐스럽게 매달린 호박에 얼굴을 비벼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보릿단을 가슴에 안고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눈물과 고통을 한 순간에 보상해 주는 첫 수확입니다. 이런 것 구경도 못하고 광야의 거친 여행길에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익은 열매는 내 것이다.”
하나님이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소유권 주장에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뭐 못할 것도 없지요. 아이구, 하나님도 너무 하시네요. 농사가 무엇인지, 수확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죽은 부모님 생각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1년 내내 죽도록 고생해서 이렇게 수확을 하게 되었는데, 먼저 익은 것 내가 좀 맛보는 게 그렇게 못할 일입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첫 열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 속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소유권 주장과 우리의 소유권 주장이 충돌합니다.
첫 번째 익은 열매가 두 번째 익은 열매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첫 번째 베어들인 곡식단이 두 번째의 곡식단보다 더 좋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품질의 차이보다도 첫 번째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거둔 수확은 이 수확을 산출하기 위해 지금까지 쏟아 부었던 모든 노력과 희생의 결정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처음 익은 열매는 아무나 가져갈 수 없는 특별한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젊은이가 처음으로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의 속옷을 사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두 번째 월급부터는 애인 선물을 사 주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든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월급에 대한 소유권은 상징적으로나마 지금까지 길러 주시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께 귀속된다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첫 번째의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첫 번째의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이 첫 번째의 것뿐만 아니라 그 나머지 모든 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씨를 뿌릴 수도 없고 수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먹고 살면서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설령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기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땀을 흘려 수확을 한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익은 탐스러운 첫 열매를 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풍성한 첫 번째 곡식단을 엮어 하나님께 바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타우랑가 한인교회의 첫 번째 모임, 첫 번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첫 번째 열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소중하게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심정으로 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보잘것없고 미미한 것이지만, 처음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릴만한 탐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의 모든 여정과 과정도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나 목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저는 이 첫 번째 예배를 준비하면서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제가 얼마 전부터 요 아래 레스트홈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날 일해서 받은 급료를 이 첫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액수로 치면 몇 푼 안 되는 적은 돈이지만, 역시 첫 번째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소유권을 주장하실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물건에 감히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첫 번째 열매는 시간적인 순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수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재물을 첫 열매로 드릴 수도 있을 것이고, 우리의 시간을 첫 수확 삼아 하나님께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첫 열매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첫 열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마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우리의 첫 열매는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이 처음 익은 열매의 개념은 신약에 와서도 매우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첫 세대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롬 8:23)이라고 지칭합니다. 또 바울은 에배네도라는 사람을 가리켜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롬 16:5)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회심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 하나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고전 16:15)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십사만 사천 명의 사람들을 가리켜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계 14:4)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의 개념은 우리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성격이었는데, 신약에 와서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첫 열매가 된다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가장 탐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매우 아름다운 광경인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 탐스럽고 아름다운 첫 열매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바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가리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롬 12:1) 것이라고 한 이유를 알 만하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첫 열매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 아름답게 처음 익은 열매로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여러분을 받으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