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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12: 13-17
○ 용의 핍박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계12:3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출19:4, 신32:11, 계12:6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2, 계6:9, 계19:10
인류가 맞이할 21세기는 총체적인 종교화로 가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권력의 종교화, 과학의 종교화, 경제(유물)의 종교화로 가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21세기 사람들의 성향이 바로 하나님 대신 권력과 과학과 물질만능 사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 사상의 극치는 그것이 종교적 신앙으로 변신해 가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창 3:5)는 사탄의 결정적인 유혹작전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작전은 견고합니다.
성경은 역사의 최후지점에도 깨어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세를 바르게 파악하고 주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지혜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단 11:33, 12:3, 10). 그래서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앙에 감격하면서 순교적 선교의 삶을 사는 자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특징짓는 말 가운데 하나가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2:17, 14:12).
저들은 궁극적으로 이기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Ⅰ.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하였습니다.
1. 저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손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 중에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저들의 존재는 14만 4천인에 속하는 인침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계 7:4, 9, 14:1). 저들이야말로 구원받을 총수를 나타내는 상징적 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할 자들입니다.
2. 저들은 큰 붉은 용과 격전할 대상들이었습니다.
다시 요한계시록 12장 17절 하반절에 「용이…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세상 마지막에 나타날 일곱 번째 짐승이 박멸하려고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손들임이 분명해집니다.
Ⅱ. 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용(사탄)이 박멸해 버리려고 하는 대상이 되는가?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사람을 하나님 같이 되게 하려는 사탄의 책동을 이기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1.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예수 신앙).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진리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 성경 계명의 요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전 성경은 예수에 관하여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요 5:39, 20:31). 바로 그 계명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새 계명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2:34). 그 사랑의 주성분은 어린양 예수의 피입니다(벧전 1:18-19, 계 12:11).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이 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파수하는(지키는) 일 때문에 용(사탄, 짐승, 거짓 선지자)에게 핍박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 중대한 진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21세기를 맞는 교회가 참된 말씀을 선포(설교)해야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란의 설교학자인 반델 베흐트(Vander Vegt)는 말하기를 ‘설교 없이 구원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말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 곧 설교(전도)를 통하여 예수 구원운동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말씀을 선포(전도)하는 설교의 종교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바로 로마 천주교로부터의 성경관의 개혁인 동시에 설교의 개혁 아니 재흥(再興)이었습니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을 위시해서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친 초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이나 아브라람 카이퍼(A. Kuyper) 같은 자들은 ‘설교는 말씀을 통해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의 대가인 요한 부로더스(J. Broasdus)는 그의 명저인 「설교의 준비와 전달」이란 책에서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를 대신하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목회를 함에 있어서 어떤 일도 설교 준비와 설교 사역만큼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설교의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훅스트라(T. Hookstra)는 힘주어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빠진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강단)는 하나님의 계명, 곧 구속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섞임 없이 바르게 선포해야 합니다. 말씀파수는 강단파수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마땅히 ‘말씀의 사역자(Minister of the Word)’, ‘말씀의 종(Servent of the Word)’의 의미를 굳게 견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교인)들은 확실한 하나님의 계명(말씀) 선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되어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알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포된 말씀에 대한 감심(感心)적인 신종(信從)이 일어나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러했습니다(살전 2:13).
젖을 먹는 상태에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지경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러 지각을 사용할 줄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합니다(히 5:12-14). 살아있는 말씀, 운동력이 있는 말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말씀(히 4:12) 앞에서 그 생명이 춤출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파수 곧 신앙하는 일 때문에 저들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움과 핍박과 죽임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2. 또한 저들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신앙의 행위).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예수의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 곧 성경에 기록된 구주 예수를 고백하는 실제적 행동을 가리킵니다. 마음으로 믿는 예수를 입으로 시인(고백)하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그 고백을 입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에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계명)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는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에는 「우리는 보고들은 것(예수=계명)을 말(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 증거의 실제적 행동이 무엇인가?
(1) 그것은 주일예배 사명의 파수입니다.
주일과 주일예배는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창조하고, 축복하고, 영광받으시는 기본적인 목적이요 또한 수단입니다. 사람 창조의 본래의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전부)’이라고 하였습니다(전 12:13). 말하자면 주일예배는 하나님께 사람이 사람된 본분을 나타내는 행동적 고백입니다.
또한 주일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동시에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미래적 소망에 대한 고백적 행동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민되고 선민됨의 표적이고, 우리는 세상 중에서 구별되었다고 하는 행동적 고백이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주일예배를 통하여 만백성 앞에 지존하신 하나님, 경배받으실 하나님을 증거하는 행동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는 성도(교회)의 사활(死活)과 직결하고 있습니다. 주일과 주일예배를 빼앗기거나, 양보하거나, 타협함은 바로 용(사탄)의 침략에 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고 하였습니다(히 10:25). 주일예배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결정적인 신앙행위가 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영역에 나타나는 풍성한 감사, 충만한 감사 생활의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증거들 중에 또 하나의 행동적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소득의 십일조, 예비하여 드리는 풍성한 연보, 전도비를 위한 특별 연보, 세계선교를 위한 구령의 연보, 기타 하나님의 나라(교회) 운동에 필요한 선한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풍요하여진다고 하는 소위 문화와 경제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답지 않게 탐욕에 사로잡히게 하고,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으면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유물숭배 사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신앙과 사랑의 행동적 고백은 하나님이 주신 예수의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행동입니다.
(3) 마지막 세계선교의 사명입니다.
세계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입니다.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막 16:15).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될 때 끝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마 24:14). 우리는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영역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습니다(행 1:8, 마 28:19).
성경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가리켜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창 13:16). 이것은 대륙선교를 의미함인지 모릅니다.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창 22:17). 이것은 해양선교, 해변선교를 의미함인지 모릅니다. 또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창 22:17). 이것은 도래하는 우주시대를 향한 우주선교인지 모릅니다.
문제의 초점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 그래서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의 수를 성취함에 있습니다(롬 11:26). 사실상 택자 구원완성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역사의 존재 목적입니다. 역사의 의미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한 사명수행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4주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이냐, 사탄이냐?’하는 문제를 소론해 보았습니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역사를 총체적인 종교화 시대로 이끌어 가는 성향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탄 숭배로 결말을 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권력(통치)의 종교화, 과학의 종교화, 경제의 종교화로서, 이것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변신해 버리는 시대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꾸며가는 이 세상 역사의 성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된 교회(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통하여 역사의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뿐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대하신 하나님 주권사상, 구원사적 바른 신앙, 종말론적 바른 역사관 정립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늘에 계신 자존의 하나님만 영원히, 또 영원히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합니다.
누가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자들인가?
물론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 되게 하십니다. 그는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14).
그럼에도 사탄이 아닌 성령은 이 세상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십니다. 저들(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기 위하여 두 가지 결정적인 표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명(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신앙과 예수를 증거하는 행동적 고백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여기에 대항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바다 모래 위에서 전쟁을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2:17). 여기 ‘바다 모래 위’란 무수한 인류가 생존하는 역사의 현장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사람을 하나님 같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려고 하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더불어 역사의 현장에서 그 마지막 승부를 벌일 것입니다. 그 놈은 온 천하 임금들(통치자들)을 마지막 짐승의 맹주국으로 만들어 하나의 통일제국을 형성해 가지고(계 17:12-13, 16:13-14)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대결할 것입니다(계 12:17). 이른바 아마겟돈 전쟁이 될 것입니다(계 16:16).
그때 하늘이 열리고 어린양 예수께서 그 전쟁의 현장에 친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의 이름으로(계 17:14, 19:16), 백마를 타시고 충신과 진실의 이름으로(계 19:11), 말씀의 이름으로(계 19:13) 나타나서, 정의롭게(계 19:11) 하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계 19:14), 그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과 철장으로(계 19:15) 싸워 이기고 말 것입니다(계 17:14).
그때 예수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계 17:14b)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계 12:17)들이 이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자들만이 이길 것입니다.
짐승의 표(666)를 받고 짐승에게 경배하던 자들과 거짓 선지자(어용종교), 짐승 그리고 붉은 용이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짐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계 19:20-21, 20:10).
그리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가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게 되어 버린다고 하였습니다(계 20:11, 21:1). 모든 인류는 사망의 부활을 받아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생명의 부활을 받고,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그 행위를 따라 상급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요 5:29, 계 20:12-15).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인류의 대망인 새 역사의 황금시대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황제로 모시고, 완전한 무죄 세계의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약속하였습니다(계 21-22:). 바로 여기에 별들의 전쟁의 전사들에게 소망이 있고,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세기는 하나님의 세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