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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년전 쯤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은 중국의 시진핑주석에게 중국이 북한에 대한 초강경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미국이 대중무역보복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최후통첩’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북한에 대해 이렇다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이 과연 중국은 북한에 대해 제재를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바른 답은 둘 다 맞다는 것입니다. ‘안’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한 순간 무너지기를 중국이 원한다면 바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재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송유관을 잠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만 잠그면 북한 경제는 한 순간 올스톱이고 북한 인구중 수백만명이 북한에서 살 수 없어 중국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합니다. 북한이 무너지기를 원한다면 15억인구에 수백만명이 더 한다고 해도 중국에게는 큰 타격이 아니니 해볼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북한이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기에 송유관을 ‘못’ 잠그는 것이 아니라 ‘안’ 잠그는 것입니다. 중국은 북한이 완충지대로 남아서 미국과 중국군이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막아주고 전쟁이 나더라도 한반도에서 벌어지기를 원하기에 북한이 이대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남북분단상황이 계속 유지되는 이 상황이 중국을 위해서는 최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대북 제재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면에서는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 정권은 자주파라는 것입니다. 북한은 중국을 통해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친중파와 자립갱생을 주장하는 자주파로 정권의 무게중심이 왔다갔다합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친중파의 대표였던 장성택을 숙청하고 장성택의 보호를 받던 김정남을 죽이면서 이제는 자주파가 압도적으로 북한정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김정은과 김정은을 따르는 자주파들은 중국의 말을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한국전쟁이후 지금 북중관계는 최악입니다. 그래서 중국을 통해 북한이 핵폐기하도록 만드려는 것, 미사일개발을 중지하게 하려는 것은 트럼프대통령의 오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중국은 북한정권을 제재하는 것은 ‘안’해야할 이유도 존재하고 ‘못’하는 원인도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여 전도사역하시는 장면을 말씀을 통해 보고 이 사역속에서 나타나는 고향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고향사역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실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잘 열리지 않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특별함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이전에 알고 있던 친척, 이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드시며 고향에서의 전도사역이 참 힘들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일반적인 교회목회자, 전도사역자, 선교사 등이 이 말씀으로 위로받는 정도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신 구원자이시고 온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십니다. 이런 분이 왜 전도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과연 예수님의 전도사역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회심에 대해 ‘안’하신 것인지, ‘못’하신 것인지를 살펴보고 우리 또한 믿음의 눈으로 전도의 귀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이 고향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한 이유, 첫째로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2절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께서 고향이신 나사렛에 방문하여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시는데 이 말씀전파사역을 통해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그 권능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뭔가 훈련을 받은 어떤 사람 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뛰어난 식견, 어떻게 저렇게 신기한 기적을 행하시지 혹시 저 분은 인간이 아니고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사람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의 사역을 함께 했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사렛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예수님의 본성을 볼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왜냐면 어릴때부터 자신들 주위에서 보아왔던 모습을 계속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특별한 능력을 보면서도 신기해하고 의아해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이 되는 누가복음 4장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의 회당을 방문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씀에 대해 토론하시고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그 곳에 있던 회당장과 그 회당사역관련자들은 정말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던 어느 제사장, 어느 서기관들보다 너무나 선명하게 말씀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사장과 서기관은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도 어느 유명한 연애인에 대해 아는 사람과 어느 유명인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정말 천지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주시고 정확한 뜻을 전해주시는데 이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을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셨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귀한 음식을 준비해놓아도 그 밥상을 걷어차버리면 못 먹는 것이고 그 밥상에 숟가락을 가져가서 떠먹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을 경험할 때 그 은혜에 대해 순종하고 따라가면 역사가 나타나는거고 아무리 은혜를 부어주셔도 거부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 또한 예수님의 존재를 세상의 어떤 유명한 현자, 어떤 세상적 지식을 통찰한 인물, 어떤 종교의 교주 혹은 어느 시대에 갑자기 나타나 한 시대를 흔들었던 뛰어난 인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정도의 인식으로는 우리는 진정 제대로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자체를 버리는 것이고 교회가 존재할 필요도, 다닐 필요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예수님의 위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 기적에 동참하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인간적 지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이해력으로 큰 권능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은혜가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이 고향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한 이유, 둘째로 가족과 출신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동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선포를 들으며 정말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머리속으로는 지금 말씀을 풀이해주는 사람이 ‘우리 동네의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다. 우리들이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이웃 사람 예수이다’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말씀을 선명하게 풀어주며 정말 감동적인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실 때에 큰 감동을 받지 못할 뿐아니라 구세주를 보고서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 역사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람의 외모가 아닌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는데도 우리는 결국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자격을 따지고 환경적인 배경을 따지다보니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을 택해서 놀라운 선교역사를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지만 이방인들을 반대하는 유대파 기독교인들로 인해 정말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35절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행하려는데 우리는 정말 우리의 시각적인 편견,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우리의 사고체계에만 가로 막혀 있을 때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실제 의료행위과정에서 생길 판단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이런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음악의 지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었지만 그런 가족가운데에서 태어난 그는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가지고 일들을 잘못 판단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때 나다나엘이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너무나 작은 시골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오고 구세주가 나오고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한 사람이 나올 수 있냐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은 “그럼 와서 우리 선생님을 한 번 만나보고 이야기 나눠봐라. 그리고 옳지 않다면 그 때 거부하고 돌아가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아예 이건 아니다, 이 방법은 될 수 없다’라는 판단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실패한다고 단정지을 때도 많습니다. 시도해보고 아니다라고 해도 늦지 않은데 미리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어떤 일을 그르치는 잘못된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이 꼭 옳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말 어떤 의견이 나올 때 그리고 정말 괜찮은 일들이 생길 때 내가 생각하던 방식이 아니라도 그래도 될 것 같으면 인정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우리의 편견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마저 거부하는 그릇된 신앙이 되도록 만드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이 고향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한 이유, 마지막 셋째로 공과 사를 모르고 개인적 관계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놀라운 권능까지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말씀도 권능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 방금 읽었던 본문의 말씀처럼 상황을 해석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밖에서는 존경받는데 자기 고향, 자기 친척, 자기 집에서는 대접을 못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권능이 있고 말씀의 큰 능력이 나타나고 정말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인물인데도 가족들에게는 그냥 자녀, 그냥 배우자, 그냥 부모, 그냥 형제자매로만 대접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친구들중 어떤 친구는 그냥 편하게 친구로만 대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는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간증을 말해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냥 친한 개인적 이야기만 할 뿐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개인적인 전화를 할 때와 목회적인 상담과 신앙적인 나눔을 할 때를 구분하며 평소에는 편하게 호칭을 하다가 공적인 만남시에는 깍듯이 목사님 목사님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적인 대화나 모임, 공적인 대화나 모임에서 호칭도 구분하고 대화내용도 구분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신앙적인 나눔이 가능하고 목회적인 상담을 하곤합니다. 정말 우리 인간들은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마저도 자신들의 일들속에서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몇 달 전에 새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 임명되기 위해 이화여대교수인 한 여성분이 후보로 임명되었습니다. 장관으로 임명되려면 자질을 검증하는 청문회절차를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이화여대 교수재직시절 최근 5년동안 모두 6차례 해외세미나를 다녀오면서 두 달과 함께 다녀온 것이 밝혀졌습니다. 미국 하와이, 일본 오키나와, 스페인 바로셀로나 등지에서 세미나를 한다며 한국연구재단에 여행경비를 신청했는데 약 4,300만원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청문회 위원으로 참석한 한 야당의원은 “국가 예산으로 두 딸을 데리고 네 번이나 출장을 갔다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장관 자질이 없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사적인 감정으로 대했는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4장 44~4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갈릴리로 가셨을 때에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난 환영을 하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너무나 열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사렛에서의 말씀사역과 권능의 기적이 다른 곳에서와는 달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이나 예루살렘이나 가버나움이나 사마리아지역이나 동일한 말씀과 동일한 이적을 행하시는 구세주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나사렛은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들이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사적인 감정으로 예수님을 대했기에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고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과의 첫 만남부터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공적으로 만났기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유명한 사람, 너무나 뛰어난 인물, 너무나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사람을 사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굳이 우리에게 좋은 점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적으로 알았기에 공적인 혜택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적인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어느 정도 공적인 관계속에서 얻어야할 혜택을 사적인 부분에 치우쳐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교회의 중직자들, 영적인 교제를 해야할 중요한 사람들을 너무 사적인 감정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적으로 잘 아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결국은 우리가 누려야할 은혜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기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위에 너무나 뛰어난 영적 지도자, 너무나 영적인 은혜의 설교자, 너무나 영적인 지도력을 갖춘 귀한 목회자가 있는데 나와 사적인 교감이 있기에 그 능력을 무시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인 나눔을 풍성히 나누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모든 일에 공과 사를 잘 구분하여 은혜도 충만하고 세상사에도 바른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할지라도 고향사람들에게서는 전도의 결실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호응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장 5절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조용히 전도하며 조용히 치유의 사역을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떠들썩할만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신기하게 보여질 정도로 전도가 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6절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왜 이상하게 여겼습니까? 지금까지 본 것을 보고도 믿지 않으니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들은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믿을 것 같은데 믿지 않으니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지옥불에 떨어진 부자는 천국에서 나사로와 함께 있는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나사로를 다시 세상을 돌려보내서 천국와 지옥이 있음을 알려주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이제라도 바로 깨닫고 지옥에 오지 않을 것인데 자기 형제들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좀 막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16장 31절입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사탄의 지배를 받고 구원의 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며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 돌아와서 죽은 이후의 영적 세계에 대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줘줄 때 믿을 사람은 그 말을 믿고 변화되지만 믿지 않을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아예 전도자를 미친 자로 취급합니다. 그러기에 이미 선택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맞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할지라도 전도가 되지 않고 기적을 행할 수 없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이신데 왜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봤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구원을 받지 못할 영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을 전하셔도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예수님께서 살던 동네의 사람들을 오늘 본문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도 안되는 나사렛마을을 보며 정말 복음전도는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님,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 계신데 왜 전도하는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을 ‘안’하시는 것일까요? ‘못’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명령하면 아무런 느낌이나 아무런 감정없이 지시하는대로만 따라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우리가 기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2절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고린도후서 7장 15,16절입니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나사렛동네에서 보여주신 전도의 사역과 열매없는 권능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켜 예수믿도록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되도록 할 수 있으시지만 우리의 악함을 그대로 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만한 상황과 우리의 마음상태, 우리의 변화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놓으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굴레를 끊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또한 그런 심령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냥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심령의 변화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봤자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스파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많을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고 호응하거나 따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억지로 예수님 믿고 따르게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혹 말씀을 전하고 간증하고 전도하지만 그럼에도 문이 열리지 않는 상황속에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안 되는 것이 우리라고 되겠습니까? 단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대로 열심히 살아가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믿음으로 살고 열심히 맡겨진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