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선지(曾先之)가 지은 《십팔사략(十八史略)》이 처음 우리나라에 나오자 성 문대공(成文戴公 문대는 성현(成俔)의 시호)이 이를 구하고는 매우 좋아하였다. 당시에 공의 아들 번중(蕃仲 성세창(成世昌)의 자) 상공이 이미 과거에 올랐는데 공이 한차례 외도록 하고,
“이만하면 주문(主文)하기에 족하겠다.”
하였다. 건국 초에는 모든 사람들이 《고문진보(古文眞寶)》의 전후집(前後集)을 배우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도 처음 배울 때에는 반드시 이 책을 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십팔사략》은 전사(全史)를 통독한 자가 요점을 잡아서 본 다음 잊지 않고 기록한 것이고,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뽑아 모은 것이니 그 취사의 기준은 비록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몽학(蒙學)으로서 문리(文理)를 밝히는 데에는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와 《통감(通鑑)》으로도 충분한데 하필 그런 책으로 기준을 삼을 것이 있겠는가.
조 사문 위한(趙斯文緯韓)이 일찍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이 우리 동국 사람의 문장이 중국보다 뛰어남을 꺼려하여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편찬해서 동국에 보내왔다. 이 책이 온 이후로 문장 규모가 좁고 막혀서 예전에 미치지 못하니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것은 농담으로 한 말이라서 믿을 수는 없지만 나는 징험해 본 바가 있다. 나는 열두 살에 처음 글을 배워서 《십팔사략》을 읽기는 부끄러워서 먼저 《통감(通鑑)》과 《논어》를 배웠는데, 일 년이 못되어서 문리가 해통(該通)하였다. 이웃에 살던 이생(李生)은 일곱 살부터 《사략》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짐없이, 십 년을 외었으나, 《통감》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리고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자)과 이자민(李子敏 자민은 이안눌(李安訥)의 자)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는 좋기만 하였으니 지세(持世 조위한(趙緯韓)의 자)의 말도 또한 이치가 있다.
판부사(判府事) 김수(金晬)는 젊어서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해서 공부가 깊었다. 교리(校理)가 되자, 선왕이 《십팔사략》을 교정하도록 하고, 그 끝에다 발문(跋文)을 짓도록 하였다. 공의 동료들이 조롱하기를,
“신하를 알아보는 것은 임금이 제일이다.”
하였다.
세상에 문리(文理)는 부족하면서도 글은 잘 짓는 이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金誠立)은 경ㆍ사(經史)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문(科文)은 요점(要點)을 정확히 맞추어서 논ㆍ책(論策)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책문을 지을 때에는 편 끝부터 거꾸로 지어 올라가되 맨 처음 끝 부분을 짓고 그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고 다음 축조(逐條), 다음 중두(中頭)를 짓고, 시지(試紙)에 옮겨 쓸 무렵에 모두(冒頭)를 짓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니 이것은 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식년(式年)에 경서(經書)를 강(講)하도록 하는 것은 당초의 뜻이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 것이었는데 근세의 선비들은 구두(句讀)만 익히고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서의 장구(章句)에 초두(初頭)가 많아서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거짓말을 꾸며서 기록하는데, 요란한 말을 성현(聖賢)의 훈계하는 말씀 위에다 벌여 적는다. 이것은 선성(先聖)을 욕보이는 것이니 매우 한심한 일이다.
일찍이 우초춘(虞初春)이 엮은 《명퇴조록(明退朝錄)》과 왕감주(王弇州 감주는 왕세정(王世貞)의 호)가 지은 《성사술(盛事述)》을 보니 조달(早達)한 자를 갖추어 기록하였는데 11세에서 50세까지 모두 찾아내어 누락된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으므로 우선 보고 들은 것으로써 기록한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宰相班列)에까지 오른 자도 많다. 이제 20세 이전에 과거에 합격한 자에서부터 30세 이전에 고관(高官)이 된 사람과 40세 이전에 공경(公卿)이 된 사람들의 명단을 다음에 적어둔다.
14세 : 곽거완(郭居完)이 진사가 되었고, 그 후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校理)였으나 일찍 죽었다.
15세 : 구수영(具壽永)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고, 이희순(李希舜)ㆍ이승건(李承楗)ㆍ권주(權倜)ㆍ김규(金珪)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沈彦光)은 향시(鄕試)에서 삼장(三場)에 모두 장원하였다.
16세 : 권홍(權弘)ㆍ심은(沈隱)ㆍ장계금(張繼金)ㆍ이명한(李明漢)이 진사가 되었다.
17세 : 남지(南智)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고, 이행(李荇)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8세 : 구성군 준(龜城君浚)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李坡)는 문과에 합격하고, 김수녕(金壽寧)과 박지(朴篪)-원문에는 박지(朴篪)로 되어있으나 《국조방목》과 《국조인물지》에 의거하여 박호(朴箎)로 번역함- 문과에 장원했으며, 허봉(許篈)ㆍ윤훤(尹暄)ㆍ이구(李久)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다.
19세 : 이대해(李大海)ㆍ이집(李㙫)ㆍ이후(李厚)는 문과에 합격했고, 오남(吳楠)은 무과(武科)에 장원했다. 우흥적(禹弘績)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20세 : 박은(朴誾)ㆍ박홍린(朴洪麟)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李久)는 문과에 방안(榜眼 갑과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이었다.
21세 : 구성군 준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며, 윤계선(尹繼善)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22세 : 성표(成㟽)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다.
23세 : 엄흔(嚴昕)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24세 : 허봉과 김신국(金藎國)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南怡)는 승지가 되었다.
25세 : 윤계겸(尹繼謙)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朴東亮)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26세 : 남이는 병조 판서, 이파는 도승지, 박원종(朴元宗)은 병조 참의, 김신국은 사인(舍人)이 되었고, 정사룡(鄭士龍)은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27세 : 허봉은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성표는 당상 첨지(堂上僉知), 김수녕은 이조 참의, 신면(申㴐)은 승지가 되었다.
28세 : 구성군 준은 영상(領相)이 되었고, 이행(李荇)은 승지가 되었다.
29세 : 윤사흔(尹士昕)은 감사(監司), 박은(朴訔)은 승지, 한숙창(韓叔昌)은 호조 참의, 이계동(李季仝)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30세 : 권건(權健)ㆍ신종호(申從濩)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柳雲)은 충청 감사가 되었다.
31세 : 이덕형(李德馨)은 겸 대제학(兼大提學)이 되었다.
32세 : 박원종(朴元宗)은 판윤(判尹),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33세 : 김감(金勘)은 예조 판서, 김정(金淨)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34세 : 박은(朴訔)은 병조 판서, 한확(韓確)은 이조 판서, 허종(許琮)은 행 함경감사(行咸鏡監司)가 되었다.
35세 : 김감은 겸대제학(兼大提學), 윤사윤(尹士昀)은 참찬(參贊), 유담년(柳耼年)은 판윤(判尹)이 되었다.
36세 : 성준(成俊)ㆍ이극감(李克堪)은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37세 : 윤사흔은 찬성, 이정귀(李廷龜)는 호조 판서, 이자(李耔)는 참찬이었다.
38세 : 이덕형은 우상(右相), 한확은 찬성, 이정귀는 대제학, 장운익(張雲翼)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39세 : 윤사흔(尹士昕)은 우상(右相), 이파(李坡)는 찬성, 황치신(黃致身)은 참찬, 성표는 음직(蔭職)으로 봉군(封君)되었다.
40세 : 김질(金礩)은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남지(南智)는 우상, 최천건(崔天健)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외에도 75세에 정승이 된 자가 두 사람이니 심청천(沈聽天)과 이완성(李完城)이다. 나의 외사촌형 김자한(金自漢)은 62세에 강경(講經)에서 14푼(十四分)을 받아 입격해서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기이한 일이다.
근래의 재신(宰臣)으로서 90세를 누린 이가 두 사람이니 판부사 원혼(元混)과 삼재(三宰) 송찬(宋贊)이다.
형조 참판 이거(李蘧)의 모친은 1백 3세에 죽었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77세였고, 큰딸은 85세, 다음 딸은 82세였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의 나이가 만 1백세 되었을 때에 임금께서 부인 칭호를 봉하고자 했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히 그 아들에게 우윤(右尹)을 제수하고, 아들의 관직에 따라서 부인의 고명(誥命)을 내렸으며, 이외에도 쌀ㆍ폐백(幣帛)ㆍ술ㆍ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사(恩賜)가 많았다. 참판의 아들 다섯 사람이 모두 벼슬길에 들었고, 손자가 근 1백 명이었으니 또한 당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江陵府) 태화현(太和縣)의 갑사(甲士) 임세적(任世績)은 1백 17세에 죽었으니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근세에 다섯 아들이 문과에 오른 자로는 윤신(尹新)의 아들 후(昫)ㆍ길()ㆍ서(曙)ㆍ감()ㆍ탁(晫)이다. 모두들 2~3년 사이에 연달아서 발탁되었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죽었다.
그 다음은 윤해원(尹海原)의 아들 방(昉)ㆍ양(暘)ㆍ휘(暉)ㆍ훤(暄)이 모두들 문과에 합격했고, 벼슬은 모두 당상이었다. 맨 끝으로 서자 한(旰)도 과거에 올랐는데, 자급(資級)과 녹봉이 당상급으로 승진되었다. 다섯 사람이 과거에 오르고, 아울러 당상인 것도 또한 드문 일이다. 이외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李應獬)와 부안의 민정란(閔庭鸞)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서 높게 발탁된 경우로는 우상(右相) 정지연(鄭芝衍)이 13년 만에 등용되었는데 이는 감반(甘盤)의 노고가 있기 때문이었고, 좌상(左相) 기자헌(奇自獻)은 15년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인아(姻婭 사돈관계)로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延原君) 이광정(李光庭)과 금계(錦溪) 박동량(朴東亮)이 4년 만에 정옥(頂玉,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 정3품 당상 이상의 관원은 조각을 하고 종1품 이상의 관원은 조각을 하지 않았음)한 것은 호종(扈從)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安宗祿)이 8년 만에 금대(金帶)-금띠. 정2품 관원이 공복(公服)에 두르던 띠. 가장자리와 띠 등을 금으로 아로새겨 꾸몄음-를 두른 것은 관리로서의 능력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宋駿)과 참의 성이문(成以文)이 모두 5년 만에 붉은 옷을 입은 것은 청반(淸班)으로 제수되어서 갑자기 승진한 것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자기 승진된 자는 이월사(李月沙 월사는 이정귀(李廷龜)의 호)로, 정유년(1597, 선조30)에 병부 낭관으로서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서 준직(準職)으로서 집의(執義)가 되는 동시에 당상에 올랐다. 무술년(1598,선조31)에는 병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1600, 선조33)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되었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문학으로써 임금에게 인정을 받아서였다. 그 다음 한유천(韓柳川 유천은 한준겸(韓浚謙)의 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잠깐 후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 최분음(崔汾陰 분음은 최천건(崔天健)의 호)은 정유년에 헌납(獻納)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했고, 기해년(1599, 선조32)에 가자(加資)되어서 지신사(知申事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를 겸했는데, 같은 때에 장원했던 이충원(李忠元)은 겨우 시정(寺正)이었다. 그 후에 오성(鰲城 이항복의 봉호)도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였고, 같은 때 장원이었던 황치성(黃致誠)이 또한 시정(寺正)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는 서로 부합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그대가 완원(完原 이충원(李忠元))같이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鄭相 정언신]같이 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였다. 대개 완원은 그 후에 일품(一品)에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정 정승은 정승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귀양 가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Mozart - Eine kleine Nachtmu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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