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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날이 되었지만, 이날이 이렇게 유명한 날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수년 전에 어떤 대화에서 성탄절의 역사 이야기가 나와서 조사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복잡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도저히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일들이 이렇게 많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특히, 고대 로마와 유대의 달력들이 서로 다르고 오늘날의 달력과도 달라서 날짜를 서로 맞추기가 까다롭습니다. 결국, 기록도 부족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논문들과 두꺼운 책들까지 쓰면서 조각을 맞추어 보았지만 명확한 결론은 찾을 수 없는 문제임을 알게 된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조금 두서없이 제가 발견한 흥미로운 것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한때 개신교인들이 교회가 성탄절 지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17세기 종교개혁자 존 녹스(c.1523-1572)를 비롯해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여러 절기들과 함께 성탄절을 수용하기를 거부했고, 지역 교회들이 성탄절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법까지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시적으로 명령하지 않은 것을 지키도록 교회가 정하는 것은 양심을 얽매는 일이며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Simmons로부터 재인용). 이들의 영향으로 영국과 식민지 미국 교회에서 한동안은 성탄절이 의도적으로 제거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 논리를 성탄절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겼는지, 얼마 후 교회들은 성탄절을 회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일찍이 교회의 중요한 절기가 되었고 그 날짜도 대략 알려져 있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최소한 처음 2백 년 동안은 교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30년 정도 지나 기록되기 시작한 복음서들에서도 예수님의 생일이 기록되지 않았고, 예수님이 태어난 정확한 년도(대략 주전 7년부터 주전 1년 사이)와 날짜는 아주 이른 시기에 잊혀져 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주후 200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c.215)의 기록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해뿐만 아니라 날짜까지도 확정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일이 아우구스투스 황제 28년(주후 1년) 5월 20일(오늘날의 달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일어났다고 말한다.…다른 이들은 그분이 4월 20일 또는 21일에 태어나셨다고도 한다. (Clement, Stromateis 1.21.145)
이 당시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탄생 연도와 날짜를 정확히 알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c. 185-254)라는 교부는 로마인들이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을 이교도들의 관습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는데(McGowan으로부터 재인용),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한 생일 축하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생일이 12월 25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정확한 역사적 기원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유력한 설명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예수님이 어머니의 몸속에 수태된 날과,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날과, 죽으신 날이 같은 날이라는 믿음이 생겨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유월절(양력으로는 대략 3월 24일부터 4월 14일 사이)이므로 날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날이 예수님이 수태된 날이라면 그 후로 9개월을 계산하면 대략 12월 24일부터 1월 14일 사이의 날짜가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느 해의 유월절이 되는 3월 25일(당시의 춘분)부터 9개월을 계산하면 12월 25일(당시의 동지)이 됩니다. 그런데 12월의 여러 날 중에 특별히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로 여겨진 다른 한 가지 유력한 이유는, 그날이 당시의 동짓날이기 때문입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인데, 그날에 하나님의 섭리로 예언이 성취되어 “의로운 태양”(말 4:2)이신 예수님이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소아시아 등 일부 지역에서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는데, 이것도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의 유월절을 4월 6일로 계산한 결과라는 설명이 있습니다(Förster, Nothaft로부터 재인용). 어쨌든 주후 200년대 어느 시점부터는 예수님의 생일이 12월 25일로 널리 알려진 것 같습니다.
성탄절의 날짜 12월 25일과 관련해서 유명해진, 학자들의 글에서도 종종 인용되는 잘못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12월 25일은 로마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절기였는데, 기독교가 로마의 주요 종교가 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 재위)나 다른 황제가 그날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독일의 문헌학자 헤르만 우제너(Herman Usener)가 1889년에 쓴 책에서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제시한 가설에 상상력이 추가되면서 마치 확립된 사실처럼 널리 알려졌습니다(Nothaft). 우제너가 다루었던 문서는 예수님의 생일을 12월 25일로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데, 한 부유한 그리스도인 발렌티누스라는 사람이 소유했던, 주후 354년 한 해의 중요한 날짜들을 기록해 놓은 책(The Chronography of 354 AD)입니다. 책의 6부에는 로마의 기념일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12월 25일 부분에 “정복당하지 않는 이(태양신의 별명)의 생일을 위해 서른 개의 게임이 마련됨”이라고 적혀 있고(아래 <그림 1> 참조), 같은 책의 12부에 기독교 순교자들의 기념일을 열거한 중에, “12월 25일, 그리스도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이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아래 <그림 2> 참조).
그림 1
그림 2
최근의 학자들은 우제너가 근거로 제시한 이 자료를 다시 평가하면서, 그 문서에 쓰인 12월 25일은 태양신의 주된 축제일이 아니라 단순히 전차 경주가 있었던 날일 수도 있음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다른 자료 중에 태양신 축제일이 8월과 10월 그리고 12월 11일로 나오는 기록들이 있지만 12월 25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Nothaft). 그리고 칙령을 통해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정했다고 종종 잘못 전해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서 그곳에서 통치를 했는데, 정작 그가 통치하던 337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절기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곳의 교회는 380년경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절기로 도입하였습니다(Talley, Nothaft로부터 재인용).
어쨌든 발렌티누스의 책은 주후 350년 훨씬 전에 이미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주후 400년경에 쓰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관하여』에도 “그분은 전통에 따르면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이날이 교회의 전통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2월 25일이나 그에 가까운 날이 과연 예수님의 탄생일이 맞는다면, 누가복음의 기록처럼 목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새며 양 떼를 지키는 일(눅 1:8)이 계절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목자들은 3월에서 11월에 주로 들에서 양을 쳤고 겨울에는 양들을 우리에 두고 사육하였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스타인). 그러나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잘못 알려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그림 3>)에서 보듯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사시사철 양 떼를 밖에서 먹이고 기를 수 있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의 겨울 기온은 섭씨 8-13도 정도로 온화하기 때문입니다(Jenkins).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서는 목축이 금지되었으나, 특별히 성전 제사에 사용될 양들은 늘 필요했으므로,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특별히 성전 제사에 사용될 양들을 먹이고 지키는 목자들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림3' 성탄절에 양치는 베들레헴의 목자(Jenkins) (원본: LifeintheHolyLand.com)
노종문 「좋은나무」 편집주간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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