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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대장금 이영애가 사임당 역을 했다. 신사임당이 이영애처럼 이뻤을까?>
신사임당!
행복했던 유년생활을 했다.
사임당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부모,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사임당의 어머니가 무남독녀이기에 편찮으신 모친을 모시기 위해 강릉에 내려와 있었고, 사임당의 아버지는 500리 길은 족히 되는 한양집과 강릉을 오가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유하고 너그러운 인품의 선비였다.
사임당이 태어난 집안은 딸들에게도 글공부를 시키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가풍을 지닌 집안이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가르침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갖추게 했다.
여자 아이들은 으레 바느질과 집안일을 배우던 조선시대 관습을 생각하면 드문 일이었다.
아마 이 점이 사임당의 삶이 그 시대의 다른 여성들과 다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로 재녀였다.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시(漢詩)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울러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신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사임당이 흉내를 내자, 이사온 외할아버지는 그녀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했다. 할아버지는 그림 교재로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주었다.
어린 사임당은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고,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마을에 큰 잔치가 열린 날,
손님으로 온 부인이 빌려 입고 온 치마에 얼룩이 묻었다며 울상을 짓자 사임당이 순식간에 탐스러운 포도 알을 치마폭에 그려낸 일화는 유명하다.
열아홉 나이로 이원수와 혼인하기 전까지 사임당은 유복한 집안에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경전을 읽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한양도 아닌 시골이었지만 종이와 물감을 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버지 신명화는 벗들에게서 좋은 그림을 빌려와 보여줄 정도로 딸의 재주를 아꼈다. 또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슬쩍 딸아이의 그림을 보여주며 자랑하였다.
명종조에 살던 어숙권(魚叔權)은 어린 사임당의 작품을 보고 감탄, 자신의 저서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평하기도 했다.
딸의 영특한 재주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기꺼이 조력가가 되어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있었기에 사임당의 예술과 학문, 그리고 지금의 사임당이 있는 셈이다.
누구는 이럴 것이다.
"나도 신사임당처럼 빵빵한 가문에 태어나서 저런 교육적 지원을 받으면 나도 심사임당 같은 사람이 아니 되랴?"
ㅎㅎ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리크라테스의 친구 이야기다.
그 친구는 명문고등학교에서도 최상위층에 속했고 S대(서울의 small대학이 아니다)를 나와 고시에 합격해서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 친구 부인은 저 유명한 E자가 들어가는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나와, S대를 나와서 유명대학 교수님을 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 집 아이들은 얼마나 유전인자가 우수하겠는가?
교육적 환경은 얼마나 좋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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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한 아이는 간신히 s대(in seoul)에 갔고,
또 하나는 '서울 약대'(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에 갔다.
'서울 상대'(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진 대학) 안 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부모에게 우수한 재능 인자를 받는다고 교육환경이 좋다고 훌륭하게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무엇보다,
자신의 열정과 의지가 중요하다.
물론 천부적인 재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신사임당의 네 자매들은 똑같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왜 큰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리크라테스!
이 이야기를 미리 하면 욕을 먹을 것이니 나중에 하겠다.
혹시 답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댓글로 다시라.^^
사임당은 여성이었으나 사임당이라는 호를 스스로 붙일 정도로 당당했다. 후대의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사임당!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여 아버지 신명화나 남편 이원수를 찾아온 사대부들을 탄복케 하였다.
신사임당!
보통 사대부가의 아가씨들과 달리 살림살이와 음식 솜씨도 있었다고 한다.
참~
만능이셨다.
그렇다면 조선판 맥가이버이신가?
결혼은 어떻게 했을까?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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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보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