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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눠볼까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순교자의 영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평상시에 제 설교하고는 약간 다른 스타일의 나눔이 될 것 같은데요. 지난주 화요일날 제가 철원에서 우리 선교교원회 최초 순교자 박봉진 목사님 순교 기념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철원에 이제 가서 세미나를 들었는데 혹시 박봉진 목사님을 아시는 분 계신가요?
박봉진 목사님 지금 살아계시는 분 중에 말고 순교하신 목사님 중에 박봉진 목사님 아무도 안 계시죠?
저도 이름만 몇 번 이렇게 들었을 뿐 이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몰랐는데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이분을 알게 됐어요. 우리 기독교 대안 선결교회 총회 본부가 대치동에 가면 이렇게 있거든요.
근데 그곳 1층에 기도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가 그 기도실이에요. 그 기도실에 저기 흉상 보이시나요?
좀 자세하게 이렇게 보면 이 흉상이 박진 순교자 박범진 목사 이렇게 표시를 해놨는데 그 정도로 우리 교단에서 흉상을 만들어놓고 기념할 정도의 순교자였던 분인데 너무 이분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박범진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게 됐고 또 이제 내년이 우리 강원 서지방의 70주년을 기념하는 때인데 70주년 기념 사업으로 이 박봉진 목사님 순교 기념관을 만들고 이제 그 정신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이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듣고 또 우리도 순교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시간이 오래된 영상이긴 한데요. 한 10년 전에 박봉진 목사님 70주년 70주기 추모 영상이 있어요. 한번 이 영상을 보고 잠깐 이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그대를 받다 보니까 박봉준 목사님 실망하시고 또 한조하신 그런 의미 눈치를 볼 때 이곳에서 우리 박홍진 목사님과 모든 사이에서 선교 모양 그족라든가 박홍진 목사님 숨어 계신다든가 가서 더 기도하고 또 받고 훈련되고 더 한가하되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현재 상황을 방치되다시피 한 아주 열악한 그런 상태입니다.
잘 정리가 돼서 누가 와서 봐도 참 기도하고 싶어 네 괜찮습니다. 거의 끝났어요. 아까 전에 마지막에 보신 철원교회 옛터가 그러니까 이 박봉진 목사님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서 교단에서 땅을 구입을 해놓은 겁니다.
근데 그 구입을 했는데 그냥 방치가 된 거예요. 수십 년이 그러다 보니까 그냥 농사를 누군가가 짓기도 하고 그냥 폐허같이 버려져 있는 땅이었는데 그냥 이게 이렇게 이렇게 흘러가다가 이 땅이 작년에 매각하기로 결정이 돼서 근데 솔직히 누군가도 살 만한 땅이 아니었던 건데 작년에 은행 가운데 매각이 됐습니다.
근데 금액이 크지는 않아요. 한 2억 원 정도 되는 돈인데 그 2억 원을 시드머니로 해가지고 올해 내년에 이제 7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강원서지방에도 아마 이분에 대한 기념 사업을 준비하려고 해서 세미나를 이번에 했습니다.
제가 이제 그 세미나 때 들었던 내용들을 여러분들에게 간략히 알려드릴게요. 제가 넘길 수 있게 해주세요. 이 박동진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될 겁니다. 이분은요. 1890년 평택 출신이신 분이에요. 그때 당시에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평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수원 쪽으로 가서 헤매이고 헤매이는 과정 속에 어느 날 우연히 교회 앞에 지나는데 두 청년이 예수 믿으라고 하는 그 짤막한 말 한마디를 듣고 교회를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수원교회에 이제 다니게 되는 참 그때만 해도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쳐도 막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던 시기입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위로와 힘이 되는 시기였던 것이죠. 20살 때 집사님이 되어서 교회를 개척하고 또 전도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이렇게 돕는 젊은 시기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3.1운동 때에는 적극 가담자로 분류가 되면서 경찰서에 가서 모진 고통을 경험하기도 해요. 이제 그런 어린 시절이 있는 과정에서 세공 금은을 금은 세공하는 세공사가 되는 걸로 이제 견습 과정을 거쳐서 이제 금은 세공사를 하게 됩니다.
1920년 12월에 평택 성결교회 지금은 평택에서 거의 제일 큰 교회 중에 한 교회인데요. 제가 예전에 있었던 오늘 또 안성에서 이렇게 오신 분들이 계신데 그쪽 지역의 모체 같은 우리 여기 춘천으로 따지면 춘천 중앙교회 같은 교회를 세울 때 동참했고 그리고 그 교회를 23년에 건축하는데 그 건축비의 거의 대부분을 이분이 이렇게 헌신할 정도로 굉장히 열정 있게 교회 일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에서 이성봉 목사님이라고 굉장히 유명한 부흥사가 있거든요. 이분은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교회에 엄청 영향력을 끼치는 분인데 이분의 집회에 참여해서 은혜를 받고 튼튼하게 이제 믿음 생활을 하던 중에 불경기가 닫혀서 이제 하던 금은방이 이제 문을 닫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내가 지금 뭘 해야 될까라는 고민을 하는 과정 속에 하나님께 몸을 바쳐서 내가 더 일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1932년 43살의 나이에 이제 제가 다녔던 서울 신학대학교 그 당시에는 경성 성서 학원입니다. 그곳에 입학하게 된 그러니까 좀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된 거죠.
이제 신학교 1학년 때 이때는 저도 신학대학교 1학년 때부터 제가 교육 전도사를 했지만 이때는 1학년 바로 들어가면 막 목회하는 분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1학년 때 장호원 교회를 개척합니다. 장호원 교회 그리고 이제 졸업하면서 여주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여주 교회에서 열심히 이제 또 목회를 하고 또 이천 교회에 담임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이때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교단에서 어느 지역으로 가서 어디 교회에 이렇게 사역을 하시오 이렇게 하면 그렇게 움직여야 되는 시기였어요. 지금같이 담임 목사님들이 딱 이렇게 부임을 하면 이렇게 계속 있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계속 파송하는 그런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목회하는 시기입니다.
그렇게 이천에서 아주 잘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중에 1941년 5월에 교단에서 철원 교회로 가라고 파송을 합니다. 1941년 그러니까 지금 일제 강점기 속에 있는 상황이죠.
근데 이때 철원은 기독교를 굉장히 탄압하는 지역 중에 대표적인 지역이었어요. 특히 그 지역의 감리교회 한 목사님은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당하는 일이 직전에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인천에서 굉장히 이렇게 아주 건강하고 안전하게 목회를 하던 분이 그 위험한 지역으로 파송을 가라고 하니까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교회를 유지하거나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장소가 바로 철원 지역이었던 거예요.
이때를 회상하는 아들 장로님이 계신데요. 그때 당시에 10살이었던 이 장로님의 기억에는 이럽니다. 아버지는 안정된 교회를 뒤로 하고 고통이 예비된 임지로 간다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철저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흩어진 양떼들이 모이듯이 침체되었던 천 원 교회가 다시 활기를 뛰었습니다. 아들의 그때에 대한 회상 이야기. 그런데 이제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1943년 일제는 모든 교회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합니다. 그래서 1943년 5월 24일에 선교 교회 목사들 전원 그리고 장로 전도사 집사 해서 300여 명 정도를 전국의 경찰서로 연행해서 일본의 사상과 대립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30개 정도의 성결교회 교리를 하나하나 따지면서 심문합니다. 박봉진 목사님도 그때 연행이 되었어요.
근데 이 연행된 사람들이 신문을 당하고 고난당하는 가운데 우리 교단에 이명진 목사님 등 지도자급 여섯 분이 12월 29일 그러니까 한 7개월 정도 후에 성결교 해산 명령서라는 것에 서명, 그러니까 성결교회가 그때 없어져요. 그분들이 이제 대표자들이 이렇게 서명을 한 겁니다.
근데 이 서명을 하는 것이 어쩌면 그 당시에는 신상 참배를 받아들이는 것과 거의 비슷한 느낌의 서명이었어요. 박범진 목사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할 수 없다. 자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리고 결국 1943년 8월 15일에 순교를 합니다.
짤막한 이분의 생애와 그 목회의 여정을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분의 순교 신앙의 핵심 가치 몇 가지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이분은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가운데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박봉진 목사님이 잡혀가는 그때는 이미 한국 교회가 신상 참배를 강요받으면서 그걸 어쩔 수 없다는 그런 마음의 신사 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박봉진 목사님은 절대 신사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교회에서도 선언을 하고 그 의지를 계속 지키시는 거예요. 유치장에 들어가서 정말 처참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지만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정말 취조 당하고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요. 이 고난 중에 이가 복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사 참배를 그 당시에 거절을 하면 이때는 강요하는 시대니까요. 주리를 틀고 코에 고춧가루를 붓고 그리고 천장에 매달아서 장작 패듯이 매지를 파는 그런 수모를 겪게 됩니다.
그 당시에 또 증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목사님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장작 패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고 갖가지 방법으로 3개월을 밤낮으로 근무했습니다.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말은 결집처럼 말랐지만 항복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일본 천왕에 충성하겠다고 자술서 한 장만 쓰면 풀려나올 수 있었던 상황인데 끝까지 신앙 지조를 지키신 것입니다.
그 사모님 신인숙 전도사님이 이제 부인이신데 이 사모님의 증언도 이러합니다. 유치장에 면회를 갈 때마다 일본 순사들이 면회를 허락해 주지 않는 거예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사실 을 넣어줘도 그리고 갈아입을 옷을 넣어줘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간이 길어지니까 사모님이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각오를 가지고 아침 일찍이 경찰서에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만나게 해줄 때까지 자기는 있을 거라고 경찰서에 있는데 그곳에서 흡사 장작을 패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모님 생각하기로 이곳에 잡혀오면 저렇게 사람을 때리는구나 이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 신음소리가 나중에 자세히 들어보면 자기 남편의 신음소리였다는 거죠.
그날 7시간이나 혹독한 고문을 계속하더니 오후 3시가 되어서 이제 그 박봉진 목사님을 끌어서 이제 그 아내 앞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끌려나온 박 목사님은 인사불성이 입이 되었고 전혀 걷지도 못하고 벌벌 기면서 그 계단을 내려왔다가 잠시 얼굴만 보여주고 유치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 1943년 8월 10일 이른 아침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옵니다. 인력거를 가지고 와서 박 목사를 데리고 가요. 이미 정신을 잃었고 사지가 축 늘어져서 수족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온몸이 성한 데가 한 군데가 없고 온몸이 희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그 아들 장난이 들쳐 업고 나오는데 눈물 바다가 될 수 없었겠죠. 그래서 급히 인력과에 싣고 그 당시에 구립병원이라고 하는 현재는 철원 도립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경찰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장질무사라고 하는 그러한 병명을 가지고 그러니까 이거는 전파되는 질병이다라고 해가지고 격리 시설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 당시에 그 병원의 병원장이 이건 신경 세아과 빈혈증이다. 그렇지 않다. 당신들이 말한 그런 게 아니라고 진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병원에서 잠깐 회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눈을 뜨고 첫 일성이 나는 지옥에서 나와서 지금 천당에 왔어라는 말이었고 그날 그날 새벽에 사모님에게 여보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오 부탁하면서 찬송가 167장을 불러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당시 합동 찬송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저 좋은 낙원의 이름이 그 쾌락 내 쾌락일세.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청한 춘일이로다. 영화롭다 낙원이요 그 사악을 보오니 원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집, 영원한 내 집이로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셨던 것이죠. 고문으로 만신창이 된 이 박범진 목사님은요. 그 만신창이 된 몸으로도 나는 지금 이렇게 지금 이 상태가 됐는데 우리 교단의 목사님이세요 또 총회 본부에 속한 목사님들 그들은 어떠냐고 아니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은 그 총회와 다른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다가 혼수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이제 소천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단순히 자기 중심적인 어떠한 신앙이 아니라 정말 우리 교단과 다른 목회자들과 한국 교회를 생각했던 분이셨던 거예요.
여러분 이 박동진 목사님이 보여준 신상 참배의 신학적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그 당시에 일제에 항거하는 정치적인 저항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당시 많은 교회들이요. 이 신사 참배를 하나의 국가 의식이라고 합리화시키면서 신사 참배를 받아들였거든요.
우리 한국교회가 대부분이 그랬어요. 신사 참배를 받았다. 우리 교단도 그걸 거부하다가 결국엔 교단이 해체돼 버리는 거지만 그 과정에서 그걸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는 거예요. 국가 의식이라고 타협했습니다. 하지만 박봉주 목사님은 이것 분명히 우상숭배고 하나님 외에 신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며 거부하셨던 그래서 이분이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계명의 1계명을 삶으로 지키신 겁니다. 그리고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그냥 단순한 형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예배를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천왕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그냥 우리 어차피 하나님 생각하고 예배드리면 되지 박 목사님은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건 겁니다.
세 번째 그는 신앙은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시니 신앙은 생명보다 우선이라고 하는 믿음을 지켰던 것이죠. 이분의 이 신앙 속에서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박홍진 목사님의 순교 이야기를 오늘 소개를 듣고 보는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도 그날 세미나를 이렇게 참여하면서 여러분들 머릿속에 순교자들이 좀 있죠. 한국교회의 유명한 순교자들 주기철 목사님 하면 막 못 박힌 곳을 막 밟고 지나가라 이런 뭔가 이렇게 참혹하고 강렬한 어떤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던 그런 스토리, 또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했던 그런 분들 그런데 박동진 목사님 이렇게 내용을 듣다 보니까 그냥 일반적인 그 당시에 좀 이렇게 고통당하다가 돌아가신 분 중에 한 분 정도로 처음에는 여겨지더라고요.
근데 여러분 물론 이 순교자 박홍진 목사님의 기념 사업을 지금 이제 우리 지방에서 준비하는 이제 시작점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 정보를 수집해야 되는 단계예요.
근데 안타까운 것은 이 가족들이 지금 한국을 떠난 가정이 좀 있고 이제 이민을 갔는지 그리고 또 가족 중에 우리 교단을 떠나 다른 교단으로 가신 분도 계신 거예요. 약간 뭔가 상처가 있으셨는지 아버님을 기념하는 교회도 세워놨고 우리 교단이 아버님을 굉장히 기리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좀 안타까운 상황들이 과거에 좀 있었나 보더라. 그러다 보니 지금 여러 정보를 아직은 수집하고 보완해야 되는 그런 과정에 있지만 짧은 목사님의 이 순교 스토리를 들으면서 그 짤막한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이 목사님이 그 고초를 당하는 과정에 말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순교한 이야기의 스토리에 굉장히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걸 봤어요.
여러분 이걸 우리의 삶으로 전복하면 어떤 게 될까요?
우리 하늘 소망교회가 이제 다음 달이면 벌써 개척한 지 8년째가 되는 그런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근데 여러분 이 짧은 시간 8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만 긴 이 시간에 우리가 했던 하나하나의 행동들, 우리의 말들 우리의 흔적들이 나중에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서 되새겨지고 기억된다면이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오늘 기가 막히게 15년 전에 제가 사역했던 안성에서 한 가족이 대거 오셨는데 오늘 저분들을 이렇게 보면서도 내가 15년 전에 어떻게 지냈었지 이렇게 생각이 갑자기 짧은 시간이었다 생각이 들었어요.
집사님이시죠? 지금은 권사님 되셨어요?
권사님 되셨네. 권사님이 예전에 미용실을 가셔가지고 제 머리를 이렇게 늘 잘라요. 그때 제 머리수 좀 많았죠. 이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머릿속에 없을 때 보신 분들이라 그러니까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분명히 있잖아요.
그렇죠 여러분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하는 어떤 봉사 헌신 그리고 말 한마디 또 여러분들의 그 사역의 하나하나가 나중에는 이렇게 기록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다른 마음이 들더라고요.
물론 이 세상에서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에 가면 아시죠?
여러분들 했던 모든 것들을 다 영상같이 쫙 보여준다고 내가 했던 말들, 내 행동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먼저는 우리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 박봉진 목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의 절개와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희생적인 헌신을 감당했던 그 모습을 배울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지방에 대해 이런 대단한 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거는 자랑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문에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 유명한 사람만 있어도 가문의 영광이다 막 이러는데 우리 지방에 내 이런 목사님이 있었더라고요.
근데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그 뒤를 이어가는 그러한 순교자의 영성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근데 제가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이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 목사님과 관련이 없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김은국이라고 하는 작가의 소설 순교자라고 하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순교자라고 하는 이 책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있었던 이야기로 이 작품의 내용이 전개가 됩니다.
공산당에 의해서 14명의 기독교 목사가 체포되었고 14명 중에 12명이 처형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이제 남한군 정보 장교 이대위라는 사람이 이 사건의 진실을 조사하기 위해서 그 전쟁 중에 평양으로 파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14명 중에 2명이 살아남았다고 했잖아요. 두명이 이제 신 목사와 한 목사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 사람들을 이제 인터뷰하면서 이제 그 진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군과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애국적인 순교로 미화하려고 했지만 이 대위는 그 이면에 있었던 신앙의 어떤 고뇌들 그리고 인간적인 진실을 추적하게 됩니다.
특별히 생존자 중에 신 목사라고 하는 분은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하는 오해를 받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소설의 과정에 쭉 따라가 보면 이 신 목사님이 유일하게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이었던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전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가는데 이분은 평양에 남아서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노약자들을 섬기면서 진정한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소설이 기록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와 박봉준 목사님에게서 배우는 진정한 순교 같은 동동 포인트가 있는데 그건 삶으로 진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설이 주는 것 중에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가 뭐냐면 죽음이 순교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지키는 삶이 순교라고 하는 포인트를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신 목사님은 고난을 고문을 계속 당하면서도 끝까지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살아남아서 온 유일한 사람이다 보니 니가 배신을 하고 살아남았구나라고 하는 자기의 고정관념으로 이 신 목사님을 비난합니다. 배신자라는 그리고 반면 죽은 12명의 사람들은 목사님들은 순교자라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갔노라고 추앙을 받으면서 그렇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 12분이 신앙을 저버렸던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고문하고 죽이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변절한 사람들을 오히려 죽였던 그런 상황들이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묻는 겁니다.
누가 진짜 순교자입니까?
신앙은 죽음으로 증명되는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지키는 삶으로 증명되는 것인가 끝까지 이 신 목사님은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본 것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죽은 자들의 명예를 지키고 그 죽은 목사님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는 침묵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변절자라고 배신자라고 욕하는데 그 가운데 자기 희생을 하면서 진리를 지키는 고요한 순교를 담당한 거예요. 결국 병든 몸을 이끌고 피난도 하지 아니하고 노약자들과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돌보면서 그의 일상을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에 대해서 굉장히 이렇게 뭔가 동경하고 아주 높게 생각합니다.
근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순교를 할 수 있는 시대예요. 아니에요. 지금은 우리가 목숨을 잃어가며 수교할 수 있는 시대는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간증을 나눴었지만 군대에서 제가 교회에 애를 데리고 가는 것 때문에 맞아본 적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근데 맞고 나서 막 생각해 보니 내가 언제 이렇게 복음 때문에 맞아보겠어라는 생각 때문에 웃었다고 제가 그랬잖아요. 그 정도로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 때문에 뭔가 매를 맞거나 내 목숨을 잃거나 하는 것은 지금 시대에는 우리나라 안에서는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순교라는 그 정신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념도 하고 기억도 하지만 나하고 순교는 거리가 멀다라고만 생각을 하다 보니 전혀 순교적인 정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이죠.
근데 이 소설 속에 신 목사님의 침묵과 그 헌신,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화려한 외형 외적인 성공 그것들보다 내면의 진실성과 지속적인 헌신이 더 중요하게 지켜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메시지를 이 책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박봉진 목사님 그리고 이 소설책 순교자라는 책을 통해서 순교의 영성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순교자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속해 있는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 순교자의 염성을 가지고 녹아지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 가정 공동체 또 지역이 살아남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는데요. 우리 교단 마크가 뭔지 아시나요?
제가 사진으로 준비를 했어야 되는데 교단 마크가 이렇게 면류관 가시 면류관 안에 백합파가 있는 게 우리 교단 마크예요. 그래서 가시밭에 백합파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박봉진 목사님이 순교를 당하고 나서 이성봉 목사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아주 우리 한국 교회에서 유명한 부흥강사 목사님인데 이분이 이 박봉진 목사님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너무 애통해가지고 지은 찬송의 일부분입니다. 그 가사를 이렇게 보면 그 가사 안에 이 동료 목회자에 대한 애타는 심정이 담겨 있기도 하고 또 그 고백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도 해요. 한번 우리 같이 쭉 읽어볼까요? 1절부터 시작
이 정도로 십자가로 세상을 벌써 이기신 주님께서 승인이 이르시네. 가시밭의 백합화 나의 형제요. 앞서 가신 성도들 보는가 제단 아래 수교자 너를 부르며 주님 품에 영광을 돌리네.
가시밭에 감아 주에 신구여 흠과 트와 주름이 없도록 여러 가지 방면에 연단하시어 주님 사랑 영원히 받으리니. 동랑풍화, 포로라, 서부 풍화 포로라 가시밭의 백감과 나의 사랑은 아름다운 향기를 펼친다.
네 여러분 이 가시밭에 백합화 이성근 목사님은 성도들을 향해서 가시밭에 백합하여 이렇게 호칭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가시밭과 같다는 거예요. 조금만 이렇게 해도 찌르는 거죠. 신앙을 제대로 지킬 수 없게 찌릅니다.
근데 가시밭의 백합화는 그 찔림을 당하면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까요?
백합화가 향기를 펼친다. 우리 교단가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교단 간에 그게 다 있어요.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그거예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순교의 영성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여러분들의 삶의 터전에서 녹아져 내린다면 아무리 찌르고 아무리 여러분들이 어려움을 당해도 신앙을 굳건히 지킨다면 여러분들을 향해서 가시밭 태백 카파가 되어서 그 향기가 펼쳐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가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