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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문학회(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는 한국의 천문우주과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술단체로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원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1965년 3월 21일(춘분)에 창립되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SCIE 전문학술지인 한국천문학회지(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JKAS)와 더불어 등재 학술지인 천문학논총(Publications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PKAS)을 발간 한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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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관천대 [觀天臺] (천문학백과)
관천대
[ 觀天臺 ]
관천대(觀天臺)는 조선시대 관상감 관해(官廨) 내에 설치한 천문관측을 위한 관측대이다.
목차
위치와 명칭
서울특별시 종로구(율곡로 75) 현대건설 본사 우측에 있었는데, 좌측으로 이동하여 보존하고 있다. 과거 북부광화방(北部廣化坊) 관천대 또는 관상감관천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고시로 서울 관상감(觀象監) 관천대(觀天臺)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같은해 12월 23일에 보물 제1740호로 지정되었다. 대략 290 cm x 260 cm x 458 cm의 크기를 가지고 있고, 9층의 축대에 난간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천대의 북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서운관지에서 이것을 관천대라고 명명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주로 첨성대(瞻星臺)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1433~1434년(세종 15~16)에 정초(鄭招, ?~1434)와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이천(李蕆, 1376~1451) 등에 의해 소간의(小簡儀)가 창제되었는데, 소간의를 이 천문대에 놓고 관측하였기 때문에 소간의대(小簡儀臺)라고 불렀고, 조선후기에는 줄여서 간의대(簡儀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축조 역사
1394년(태조 3)에 조선의 태조는 한양(한성부)으로 천도하여 1395년에 경복궁을 창건했고, 1405년(태종 5)에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당시 서운관의 관해는 이 시기에 창덕궁 서쪽 밖에 조성되었다.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표준시각을 관장하였다. 1417년(태종 17), 서운관에 관천대를 축조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1420년(세종 2)에 비로소 서운관에 관천대를 축조하였다.
한편 1433년(세종 15)년 안순(安純, 1371~1440) 등에 의해 경복궁 안 경회루 뒤 후원(後園)에 간의대를 축조하고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안 상의원(尙衣院) 남쪽에 서운관(書雲觀)을 또 만들었다. 소간의가 제작된 후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소간의대를 축조하였는데, 경복궁 내 관천대도 있었다. 결국 경복궁에는 내서운관이, 창덕궁에는 외서운관이 만들어졌고, 임금이 경복궁(법궁)과 창덕궁(이궁)을 오가며 생활하였는데, 그때마다 내서운관의 소간의대(관천대)와 외서운관의 관천대가 임금이 머무르는 궁궐에 맞게 행정적인 업무를 맡았던 것 같다. 즉 밤에는 상번, 중번, 하번으로, 낮에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관상감 천문학 관원이 간의대나 관천대에 올라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당번을 섰다. 조선 전기에는 두 서운관에서 관측일지를 모두 보고하기도 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이 폐허가 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1609~1616년(광해 1~8)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을 사이로 하나의 궁역이 되어 동궐이라고 하고, 1623년에 경덕궁(경희궁)이 조성되어 서궐이라고 하였다. 동궐의 서문인 금호문 밖에 북부 광화방으로 관상감이 재건되고, 경희궁 남문인 개양문 밖인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에 관상감의 관해가 다시 들어셨다. 금호문 외관상감은 1688년(숙종 14)에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옛 소실된 관상감 터를 살펴 복구했다. 한편 개양문 외관상감은 숙종이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에 이국화(李國華), 송섬(宋暹) 등이 공사하여 건설하였다. 두 관상감이 새로 조성하면서 관해 내에 관천대를 보수하고나 신축하였다.
그림 1. 금호문 외관상감(1688)의 상상도와 관천대의 위치(출처: 민병희, 이기원, 안영숙, 이용삼, 2010, 조선시대 관상감과 관천대의 위치 변천에 대한 연구, 천문학논총 25권 4호, p.107)
1865년(고종 2)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건 공사는 1868년에 완공되었다. 이를 위해 경희궁 전각들을 경복궁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경희궁 개양문 외관상감도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밖인 북부 의통방(義通坊) 영추문계(迎秋門契)로 이전했다. 영추문 외관상감에도 관천대가 축조되었다.
조선은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양궐 체제가 붕괴된다. 관상감 제도는 명목상 1907년 초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는 시기인 1894년 7월에, 관상감이 학무아문(學務衙門) 소속의 관상국(觀象局)으로 축소되고, 1895년(고종 32) 3월에는 다시 학부소속의 관상소(觀象所)로 변경되었다. 1895년 9월에 영추문 외관상감 자리에 매동소학교가 설립되고, 1906년 5월에 금호문 외관상감에 휘문의숙(徽文義塾)이 들어서면서 관천대를 통한 천문관측이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1907년(순종 1)에는 관상소마저 폐지되고 학부 편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문업무인 역서(曆書) 발행만 수행하게 되었다.
표 1. 조선시대 관천대의 역사명칭축조훼철소속 관청비고
북부광화방관천대 (서울관상감관천대) | 1420 | 현존 | 외관상감 (1405~1592) 금호문 외관상감(1688~1906) | 1985년경 현대건설 본사건물을 신축할 때, 관천대의 위치를 이동 |
경복궁 소간의대 | 1434 | 1592 | 내관상감 (1433~1592) | - |
개양문 관천대 | 1702 | 1868 | 개양문 외관상감 (1702~1868) |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영추문 외관상감으로 이동 |
영추문 관천대 | 1868 | 1933 | 영추문 외관상감 (1868~1895) | 1934년 이후로 조사되지 않았음. |
그림 2. 1910년 이후에 촬영된 서울관상감관천대(출처: 조선총독부관측소, 1912, 『일용편람』 「조선측후사략」, 株式會社 東京國文社, pp.156-161)
그림 3. 1910년 이후에 촬영된 영추문 외관상감의 관천대(출처: 와타나베 덴가이(渡邊天倪), 니노미야 하테이쿄초(二宮琶汀), 1910, 『조선명승기(朝鮮名勝記』, 朝鮮名勝記編纂所(京城))
창경궁관천대
창경궁 내에 보물 제851호인 창경궁관천대(昌慶宮觀天臺)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는 와다유지(和田雄治)에 의해 금호문 외관상감에 있던 것이 옮겨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에 관천대로 명명되어 오고 있다. 1931년 5월에 남남서쪽 수 m의 지점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관측대는 일성정시의를 설치한 관측대라는 주장이 있다.
그림 4. 창경궁 관천대(출처: 민병희/한국천문학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천문학회(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는 한국의 천문우주과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술단체로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원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1965년 3월 21일(춘분)에 창립되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SCIE 전문학술지인 한국천문학회지(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JKAS)와 더불어 등재 학술지인 천문학논총(Publications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PKAS)을 발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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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관천대 [觀天臺] (천문학백과)
관천대
[ 觀天臺 ]
관천대(觀天臺)는 조선시대 관상감 관해(官廨) 내에 설치한 천문관측을 위한 관측대이다.
목차
위치와 명칭
서울특별시 종로구(율곡로 75) 현대건설 본사 우측에 있었는데, 좌측으로 이동하여 보존하고 있다. 과거 북부광화방(北部廣化坊) 관천대 또는 관상감관천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고시로 서울 관상감(觀象監) 관천대(觀天臺)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같은해 12월 23일에 보물 제1740호로 지정되었다. 대략 290 cm x 260 cm x 458 cm의 크기를 가지고 있고, 9층의 축대에 난간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천대의 북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서운관지에서 이것을 관천대라고 명명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주로 첨성대(瞻星臺)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1433~1434년(세종 15~16)에 정초(鄭招, ?~1434)와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이천(李蕆, 1376~1451) 등에 의해 소간의(小簡儀)가 창제되었는데, 소간의를 이 천문대에 놓고 관측하였기 때문에 소간의대(小簡儀臺)라고 불렀고, 조선후기에는 줄여서 간의대(簡儀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축조 역사
1394년(태조 3)에 조선의 태조는 한양(한성부)으로 천도하여 1395년에 경복궁을 창건했고, 1405년(태종 5)에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당시 서운관의 관해는 이 시기에 창덕궁 서쪽 밖에 조성되었다.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표준시각을 관장하였다. 1417년(태종 17), 서운관에 관천대를 축조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1420년(세종 2)에 비로소 서운관에 관천대를 축조하였다.
한편 1433년(세종 15)년 안순(安純, 1371~1440) 등에 의해 경복궁 안 경회루 뒤 후원(後園)에 간의대를 축조하고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안 상의원(尙衣院) 남쪽에 서운관(書雲觀)을 또 만들었다. 소간의가 제작된 후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소간의대를 축조하였는데, 경복궁 내 관천대도 있었다. 결국 경복궁에는 내서운관이, 창덕궁에는 외서운관이 만들어졌고, 임금이 경복궁(법궁)과 창덕궁(이궁)을 오가며 생활하였는데, 그때마다 내서운관의 소간의대(관천대)와 외서운관의 관천대가 임금이 머무르는 궁궐에 맞게 행정적인 업무를 맡았던 것 같다. 즉 밤에는 상번, 중번, 하번으로, 낮에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관상감 천문학 관원이 간의대나 관천대에 올라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당번을 섰다. 조선 전기에는 두 서운관에서 관측일지를 모두 보고하기도 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이 폐허가 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1609~1616년(광해 1~8)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을 사이로 하나의 궁역이 되어 동궐이라고 하고, 1623년에 경덕궁(경희궁)이 조성되어 서궐이라고 하였다. 동궐의 서문인 금호문 밖에 북부 광화방으로 관상감이 재건되고, 경희궁 남문인 개양문 밖인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에 관상감의 관해가 다시 들어셨다. 금호문 외관상감은 1688년(숙종 14)에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옛 소실된 관상감 터를 살펴 복구했다. 한편 개양문 외관상감은 숙종이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에 이국화(李國華), 송섬(宋暹) 등이 공사하여 건설하였다. 두 관상감이 새로 조성하면서 관해 내에 관천대를 보수하고나 신축하였다.
그림 1. 금호문 외관상감(1688)의 상상도와 관천대의 위치(출처: 민병희, 이기원, 안영숙, 이용삼, 2010, 조선시대 관상감과 관천대의 위치 변천에 대한 연구, 천문학논총 25권 4호, p.107)
1865년(고종 2)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건 공사는 1868년에 완공되었다. 이를 위해 경희궁 전각들을 경복궁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경희궁 개양문 외관상감도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밖인 북부 의통방(義通坊) 영추문계(迎秋門契)로 이전했다. 영추문 외관상감에도 관천대가 축조되었다.
조선은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양궐 체제가 붕괴된다. 관상감 제도는 명목상 1907년 초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는 시기인 1894년 7월에, 관상감이 학무아문(學務衙門) 소속의 관상국(觀象局)으로 축소되고, 1895년(고종 32) 3월에는 다시 학부소속의 관상소(觀象所)로 변경되었다. 1895년 9월에 영추문 외관상감 자리에 매동소학교가 설립되고, 1906년 5월에 금호문 외관상감에 휘문의숙(徽文義塾)이 들어서면서 관천대를 통한 천문관측이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1907년(순종 1)에는 관상소마저 폐지되고 학부 편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문업무인 역서(曆書) 발행만 수행하게 되었다.
표 1. 조선시대 관천대의 역사명칭축조훼철소속 관청비고
북부광화방관천대 (서울관상감관천대) | 1420 | 현존 | 외관상감 (1405~1592) 금호문 외관상감(1688~1906) | 1985년경 현대건설 본사건물을 신축할 때, 관천대의 위치를 이동 |
경복궁 소간의대 | 1434 | 1592 | 내관상감 (1433~1592) | - |
개양문 관천대 | 1702 | 1868 | 개양문 외관상감 (1702~1868) |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영추문 외관상감으로 이동 |
영추문 관천대 | 1868 | 1933 | 영추문 외관상감 (1868~1895) | 1934년 이후로 조사되지 않았음. |
그림 2. 1910년 이후에 촬영된 서울관상감관천대(출처: 조선총독부관측소, 1912, 『일용편람』 「조선측후사략」, 株式會社 東京國文社, pp.156-161)
그림 3. 1910년 이후에 촬영된 영추문 외관상감의 관천대(출처: 와타나베 덴가이(渡邊天倪), 니노미야 하테이쿄초(二宮琶汀), 1910, 『조선명승기(朝鮮名勝記』, 朝鮮名勝記編纂所(京城))
창경궁관천대
창경궁 내에 보물 제851호인 창경궁관천대(昌慶宮觀天臺)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는 와다유지(和田雄治)에 의해 금호문 외관상감에 있던 것이 옮겨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에 관천대로 명명되어 오고 있다. 1931년 5월에 남남서쪽 수 m의 지점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관측대는 일성정시의를 설치한 관측대라는 주장이 있다.
그림 4. 창경궁 관천대(출처: 민병희/한국천문학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천문학회(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는 한국의 천문우주과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술단체로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원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1965년 3월 21일(춘분)에 창립되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SCIE 전문학술지인 한국천문학회지(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JKAS)와 더불어 등재 학술지인 천문학논총(Publications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PKAS)을 발간 한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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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관천대 [觀天臺] (천문학백과)
관천대
[ 觀天臺 ]
관천대(觀天臺)는 조선시대 관상감 관해(官廨) 내에 설치한 천문관측을 위한 관측대이다.
목차
위치와 명칭
서울특별시 종로구(율곡로 75) 현대건설 본사 우측에 있었는데, 좌측으로 이동하여 보존하고 있다. 과거 북부광화방(北部廣化坊) 관천대 또는 관상감관천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고시로 서울 관상감(觀象監) 관천대(觀天臺)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같은해 12월 23일에 보물 제1740호로 지정되었다. 대략 290 cm x 260 cm x 458 cm의 크기를 가지고 있고, 9층의 축대에 난간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천대의 북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서운관지에서 이것을 관천대라고 명명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주로 첨성대(瞻星臺)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1433~1434년(세종 15~16)에 정초(鄭招, ?~1434)와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이천(李蕆, 1376~1451) 등에 의해 소간의(小簡儀)가 창제되었는데, 소간의를 이 천문대에 놓고 관측하였기 때문에 소간의대(小簡儀臺)라고 불렀고, 조선후기에는 줄여서 간의대(簡儀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축조 역사
1394년(태조 3)에 조선의 태조는 한양(한성부)으로 천도하여 1395년에 경복궁을 창건했고, 1405년(태종 5)에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당시 서운관의 관해는 이 시기에 창덕궁 서쪽 밖에 조성되었다.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표준시각을 관장하였다. 1417년(태종 17), 서운관에 관천대를 축조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1420년(세종 2)에 비로소 서운관에 관천대를 축조하였다.
한편 1433년(세종 15)년 안순(安純, 1371~1440) 등에 의해 경복궁 안 경회루 뒤 후원(後園)에 간의대를 축조하고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안 상의원(尙衣院) 남쪽에 서운관(書雲觀)을 또 만들었다. 소간의가 제작된 후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소간의대를 축조하였는데, 경복궁 내 관천대도 있었다. 결국 경복궁에는 내서운관이, 창덕궁에는 외서운관이 만들어졌고, 임금이 경복궁(법궁)과 창덕궁(이궁)을 오가며 생활하였는데, 그때마다 내서운관의 소간의대(관천대)와 외서운관의 관천대가 임금이 머무르는 궁궐에 맞게 행정적인 업무를 맡았던 것 같다. 즉 밤에는 상번, 중번, 하번으로, 낮에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관상감 천문학 관원이 간의대나 관천대에 올라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당번을 섰다. 조선 전기에는 두 서운관에서 관측일지를 모두 보고하기도 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이 폐허가 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1609~1616년(광해 1~8)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을 사이로 하나의 궁역이 되어 동궐이라고 하고, 1623년에 경덕궁(경희궁)이 조성되어 서궐이라고 하였다. 동궐의 서문인 금호문 밖에 북부 광화방으로 관상감이 재건되고, 경희궁 남문인 개양문 밖인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에 관상감의 관해가 다시 들어셨다. 금호문 외관상감은 1688년(숙종 14)에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옛 소실된 관상감 터를 살펴 복구했다. 한편 개양문 외관상감은 숙종이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에 이국화(李國華), 송섬(宋暹) 등이 공사하여 건설하였다. 두 관상감이 새로 조성하면서 관해 내에 관천대를 보수하고나 신축하였다.
그림 1. 금호문 외관상감(1688)의 상상도와 관천대의 위치(출처: 민병희, 이기원, 안영숙, 이용삼, 2010, 조선시대 관상감과 관천대의 위치 변천에 대한 연구, 천문학논총 25권 4호, p.107)
1865년(고종 2)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건 공사는 1868년에 완공되었다. 이를 위해 경희궁 전각들을 경복궁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경희궁 개양문 외관상감도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밖인 북부 의통방(義通坊) 영추문계(迎秋門契)로 이전했다. 영추문 외관상감에도 관천대가 축조되었다.
조선은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양궐 체제가 붕괴된다. 관상감 제도는 명목상 1907년 초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는 시기인 1894년 7월에, 관상감이 학무아문(學務衙門) 소속의 관상국(觀象局)으로 축소되고, 1895년(고종 32) 3월에는 다시 학부소속의 관상소(觀象所)로 변경되었다. 1895년 9월에 영추문 외관상감 자리에 매동소학교가 설립되고, 1906년 5월에 금호문 외관상감에 휘문의숙(徽文義塾)이 들어서면서 관천대를 통한 천문관측이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1907년(순종 1)에는 관상소마저 폐지되고 학부 편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문업무인 역서(曆書) 발행만 수행하게 되었다.
표 1. 조선시대 관천대의 역사명칭축조훼철소속 관청비고
북부광화방관천대 (서울관상감관천대) | 1420 | 현존 | 외관상감 (1405~1592) 금호문 외관상감(1688~1906) | 1985년경 현대건설 본사건물을 신축할 때, 관천대의 위치를 이동 |
경복궁 소간의대 | 1434 | 1592 | 내관상감 (1433~1592) | - |
개양문 관천대 | 1702 | 1868 | 개양문 외관상감 (1702~1868) |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영추문 외관상감으로 이동 |
영추문 관천대 | 1868 | 1933 | 영추문 외관상감 (1868~1895) | 1934년 이후로 조사되지 않았음. |
그림 2. 1910년 이후에 촬영된 서울관상감관천대(출처: 조선총독부관측소, 1912, 『일용편람』 「조선측후사략」, 株式會社 東京國文社, pp.156-161)
그림 3. 1910년 이후에 촬영된 영추문 외관상감의 관천대(출처: 와타나베 덴가이(渡邊天倪), 니노미야 하테이쿄초(二宮琶汀), 1910, 『조선명승기(朝鮮名勝記』, 朝鮮名勝記編纂所(京城))
창경궁관천대
창경궁 내에 보물 제851호인 창경궁관천대(昌慶宮觀天臺)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는 와다유지(和田雄治)에 의해 금호문 외관상감에 있던 것이 옮겨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에 관천대로 명명되어 오고 있다. 1931년 5월에 남남서쪽 수 m의 지점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관측대는 일성정시의를 설치한 관측대라는 주장이 있다.
그림 4. 창경궁 관천대(출처: 민병희/한국천문학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천문학회(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는 한국의 천문우주과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술단체로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원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1965년 3월 21일(춘분)에 창립되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SCIE 전문학술지인 한국천문학회지(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JKAS)와 더불어 등재 학술지인 천문학논총(Publications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PKAS)을 발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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