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트피낭스의 주체 JP 모건
모건은행의 모태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조지 피바디 주식회사다.
조지 피바디는 원래 미국 볼티모어에서 건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이었으나,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1835년 영국 런던으로 진출했다.
금융업이 유망하다고 판단한 피바디는 그곳에서 일부 상인들과 머천트뱅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업종은 당시 유행하던 ‘고급 금융’이었다. 고객은 주로 정부나 대기업과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제 무역 대출을 제공하고,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며, 대형 상품을 취급했다. 이것이 오늘날 투자은행의 전신이다.
머천트뱅크 즉, 어음 인수 또는 증권 발행을 주요 업무로 하는 은행이다.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 알렉산더 브라운이 설립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재벌로서, 미국 자본주의 초기 발달단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피바디는 볼티모어의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의 영국 지사를 통해 영국 금융계에 쉽게 진출했다. 얼마 후 그는 뜻밖에도 네이선 로스차일드 남작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세계 은행가를 좌우하는 네이선과의 만남을 마치 교황이라도 만나는 양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황송해했다.
피바디를 만난 네이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비밀홍보 대리인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재산가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미움과 조롱을 받고 있었다. 런던의 귀족 계급은 네이선을 업신여기면서 그의 초대를 번번이 거절했다.
비록 로스차일드가 영국에서 세력을 떨친다고는 하나 귀족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이선이 피바디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겸허함과 인덕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인인 피바디가 앞으로 쓸모가 많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피바디는 네이선의 제의를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홍보에 필요한 모든 지출은 네이선이 부담했다. 피바디의 회사는 순식간에 런던에서 유명한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매년 7월 4일에 피바디가 주최하는 독립 기념 파티는 런던의 귀족들 사이에 이미 큰 행사로 자리 잡았다. 손님들은 그토록 호화롭고 웅장한 파티 비용을 몇 년 전만 해도 무명의 보통 상인이던 피바디가 부담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1854년까지만 해도 조지 피바디는 100만 파운드급 은행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000만 파운드를 벌어들여 미국의 중량급 은행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사실 피바디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책동한 1857년의 경제위기 가운데 미국 철도 채권과 정부 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영국의 은행가들이 투매할 때 큰 손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잉글랜드은행이 파산 직전에 있는 그에게 80만 파운드의 신용대출을 긴급 제공해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피바디가 모든 재산을 털어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미국의 국채들을 사들였다.
1857년의 경제위기는 1837년 당시 10년을 끌던 불황과 달랐다. 미국 경제가 불과 1년 만에 불황의 늪을 빠져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피바디의 수중에 미국 채권들은 그를 슈퍼급 부호로 빠르게 변신시켜주었다.
이는 네이선이 영국 채권을 사들이던 1815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정확한 내부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파산의 악몽에서 막 깨어난 피바디가 미국의 채권을 그토록 과감하게 사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피바디는 방대한 사업을 물려줄 후계자 문제로 늘 고심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젊은 주니어스 모건을 영입했다.
피바디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주니어스 모건이 사업을 물려받았으며, 회사 이름도 주니어스 S. 모건 사로 바꾸었다.
회사는 여전히 런던에서 경영했다. 나중에 주니어스의 아들 J.P. 모건이 회사를 물려받은 후 미국 지사의 이름을 JP모건이라고 지었다. 186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런던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만났다. 모건 가는 조지 피바디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1880년, JP모건은 철도공사의 구조조정을 위한 비즈니스 활동에 대량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891년 2월 5일, 로스차일드 가문과 영국의 다른 은행가들이 모여 비밀 조직인 ‘원탁회의그룹’을 설립했다.
미국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때 앞장선 장본인이 모건가 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원탁회의그룹은 ‘외교협회’로 이름을 바꿨고, 영국의 원탁회의는 ‘왕립국제문제연구소’로 개명했다. 영, 미 양국 정부의 주요 관리들은 대부분 이 두 협회에서 배출되었다.
189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영국 런던으로 가서 국제 금융재벌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쪽 수석 대리인으로 선출되었다.
런던회의 결과 뉴욕의 모건, 필라델피아의 드렉셀, 런던의 모건 그렌펠, 파리의 모건아르제앤드컴퍼니, 독일과 미국의 와버그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완전히 연계를 맺게 되었다.
1901년, JP 모건이 5억 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시가 10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의 미국 철강회사가 세워졌다.
JP 모건은 당시 세계 최고의 갑부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시전국경제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자기 회사 주식 가운데 9%의 지분만 보유했다고 한다.
명성이 자자한 모건도 알고 보면 무대에 나선 광대에 불과했던 것이다.